“네 빵을 물 위에다 놓아 보내라. 많은 날이 지난 뒤에도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일곱 또는 여덟 몫으로 나누어라. 땅 위에서 무슨 불행이 일어날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름이 가득 차면 땅 위로 비를 쏟는다.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나무가 쓰러지면 그 나무는 쓰러진 자리에 남아 있다. 바람만 살피는 이는 씨를 뿌리지 못하고, 구름만 바라보는 이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코헬 11,1-4)
1. “심판의 때가 이르면 주님께서는 오십니다. 병고와 노환으로 임종이 가까워지면 주님은 문을 두드리십니다. 사랑으로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곧바로 문을 엽니다. 세상을 떠나야 하는 두려움과 걱정에 빠져 있는 사람은 문을 두드리는 심판관에게 문을 열어드리지 않을 것이며, 생전에 하느님을 무시하며 살았으므로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한편 생전에 자신의 희망과 업적에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곧바로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며, 기쁜 마음으로 심판관 앞에 나섭니다. 죽음의 순간이 가까이 오더라도, 영원한 보상을 받을 생각에 기뻐합니다.”
2. 죽음이 갑작스럽게, 돌연히 다가오면 준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잠을 자는 중에, 또는 여행중에 사고로, 또는 치명적인 졸도 등으로 인하여 |
영원으로 건너간다면,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겠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무기력하게 지내던 때의 상태 그대로, 또는 여행할 때의 상태 그대로, 또는 갑작스레 졸도했을 때의 무방비 상태 그대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살아온 대로 죽을 것입니다. 공로를 풍성하게 쌓은 사람은 그것을 영원으로 가져갑니다. 죄 중에 있는 사람은 지은 죄를 하느님의 심판대에 가져갑니다. 병고나 (노환과 같은) 예비 보속을 먼저 겪은 후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쩌면 영혼은 하느님과 화해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화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심판 때 통회의 마음과 진실함을 찾아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 살아온 대로 죽을 것입니다.
3. 죄인이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공로를 쌓지 않았다면 과연 그것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한편 평소에 공로를 쌓은 사람은 공정하게 상급을 주시는 하느님께 기쁜 마음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Opera tua sumus, non te deseremus.”44 늘 미지근하게 살던 사람이 열심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겠습니까? 또는 열의를 가지고 살던 사람이 무덤덤하게 죽 을 수 있겠습니까? 생전에 절제하며 살던 사람이 죽을 때 피조물과 쾌락을 찾겠습니까?
성찰 – 나는 기회가 닿기만 하면 무엇이든 공로를 쌓고자 노력하는가? 나는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열의를 갖고자 노력하는가?
결심 – 나는 확실하게 경건하고 선하며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확실하며 참된 수단은 단 하나뿐이다. “경건하고 선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기도 – 주 예수님,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의지하여 비오니, 회심의 순결한 삶을 제게 허락하시어, 제가 당신 사랑 안에서 죽을 수 있게 해주소서.
“오 하느님, 우리를 죽음에 붙이시면서 당신은 그 때와 시간을 감추셨나이다. 제 삶의 모든 날을 정의와 성덕 안에 살게 하시어, 제가 이 세상을 떠나서 당신의 거룩한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소서. 성령 안에서 당신과 함께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44 성 베르나르도의 금언. 그런데 여기서 성인은 알베리오네 신부가 언급한 공로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죄를 가리키고 있다. 죄들이 임종자를 붙들고서 “우리는 당신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성 요한 베르크만에게서도 똑같은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