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주요 악습이란 외적으로 드러내고 우리의 욕정을 실제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거슬러 싸워야 합니다. 견진성사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적이며 건강한 우리 영혼의 원수를 거슬러 투쟁하는 군사가 되었습니다.
보통 주요 악습 중에는 지배적인 욕정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 투쟁해야 합니다.
이제 교만에서 유래하는 자만심, 분노, 탐욕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 보도록 합시다. 교만함에서 자연히 다른 이가 존경해 주기를 바라고,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며 때로는 화를 냅니다.
[12] 교만(우리 자신을 향한 과도한 존경) 때문에 주님께 마땅한 감사를 드리기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또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해합니다. 교만 때문에 모두가 우리를 존경하고 배려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로 높이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종1이라고 하신 겸손을 생각하고, 누추한 외양간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생각합시다. 예수님은 아주 단순하고 검소한 옷을 입으셨는데 우리는 때로 우리가 원하는 옷이 아니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의 가장 가난한 사람처럼 음식을 드셨고, 이름 없는 고을 나자렛을 선택하셨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2 그분은 아주 초라한 오막에서 사셨고, 늘 가난하고 평범하게 사셨습니다. 그분의 겸손하심을 보십시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얼마나 소박하게 대했습니까! 어떤 겉치레나 뛰어난 언변, 무례한 태도, 다른 이를 충고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나자렛을 지나면서 초라한 오두막을 눈여겨보기나 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모두가 봐주기를 요구합니다. 자기가 첫째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둘째 자리를 내어준다면 큰일 납니다!
교만! 교만은 우리와 함께 태어나서 우리와 함께 죽습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존경받고 싶은 마음은 올바른 지향을 없애고 공로를 잃게 합니다. 교만은 기도를 중단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결심이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확신합니다. |
[13] 교만은 우리를 위험에 빠지게 합니다. 자기를 이겨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더는 많은 경계를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보려 하고, 모든 것을 느끼려 하며, 함께 가지 않아야 할 사람과 함께 가는 등. 교만은 다른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지켜야 할 것을 소홀히 하며 반항하게 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하는 대신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 상태를 찍은 사진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의무를 다 이행한 후에도 권고나 교정을 청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3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수만명의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 후에 무릎을 꿇고 장상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애덕을 깨뜨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복잡하고 숨기며 악을 덮어 놓는 재주를 부리지 않습니다. 고해성사 때 분명하고 투명합니다. 어디를 가든 사랑, 기도, 좋은 표양, 가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4를 가져갑니다.
성모님이 유다 산골을 넘어 엘리사벳의 집에 가실 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겸손하심을 보십시오!
죄인으로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마리아보다 훨씬 더 낮추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약간의 교만은 있습니다. 교만은 시기심을 가져오는데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
[14] 우리보다 다른 이들이 월등한 선물을 가진 것을 슬퍼하거나, 다른 이들을 능가하지 못해 낙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낮추면서 위대한 사람이 된다고 믿습니까? 그렇게 하면 죄에 빠지고 카인처럼 더욱 아래로 추락할 것입니다.
시기하는 사람은 죄를 범하여 추락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잃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덕을 질투할 것이 아니라, 본받고 덕이 증가하도록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이에게 배우고, 다른 사람의 덕을 마음에 쌓으며 하느님 앞에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교만한 사람의 또 다른 결과는 극도의 화에 이르는 분노입니다.
정당한 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분노하신 것처럼5 합당하며 정당한 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중대한 악습은 자애심에 상처를 입기 때문에 심하게 징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자주 자애심을 위해 열정을 불사르는지 모릅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아름다운 미소로써 분노를 이겨낼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 이유로 거부하고 싶을 때가 자주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이겨낸다면 큰 공로가 될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우리 자신을 거슬러 화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결점을 보고 분노하는 것인데, 이는 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죄로써 이미 범한 죄를 없애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경우에는 실망하지 말고 “이것은 내 밭에서 나오는 농작물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해야 합니다. |
1 루카 1,38 참조.
2 참조: 요한 1,46 라틴어 원문: “Quid boni a Nazareth?”
3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에스파냐 태생, 예수회원, 성 이냐시오의 동료, 아시아 선교사.
4 2코린 2,15 참조.
5 마태 21,12-1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