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인내에 대하여 묵상합시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있습니다. 내적 고통은 낙담, 실망, 무미건조함, 세심증 등입니다.
예수께서도 당신 수난을 시작하실 때 이 내적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1 “그분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2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성자와 닮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니신 고통의 흔적을 우리도 지니도록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감사를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이들에게 선을 베풀었으나 바로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3고 외쳐댔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특별히 사랑하셨으나 그는 마음속에 탐욕을 숨긴 채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이 배반이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해드렸을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할 고통스러운 수난을 예견하시는 동시에 당신이 그렇듯 고통을 당해도 많은 이들이 그 고통마저 무익하게 하리라는 것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사랑을 받는 그만큼 예수님을 닮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성덕의 높은 단계에 부르심 받은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인내롭게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내적 고통을 넘어 외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질병을 허락하실 때 우리는 병고를 겪어야 합니다. 또 이웃을 통해서 받는 모욕, 비방,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서 계속 고통을 받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 잘못으로 인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고통을 보속의 정신으로 인내롭게 받아들일 때 공로가 됩니다.
우리는 인내를 통해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감사합니다.” 4라고 말하는 것은 위안 중에 있을 때 감사드리는 것보다 몇 배로 귀중한 것입니다. 고통과 눈물을 흘리면서 바쳐드리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야말로 공로를 배가시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곤경과 반대에 부딪치는 일을 허락하실 때 불행하고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바로 그때야말로 주님이 당신 사랑을 보여주시는 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다면! 그러나 우리가 약하고 덕이 부족하므로 주님은 작은 십자가만을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힘은 기도에서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지금까지 고통과 십자가가 없다면 주님이 함께 계시는지 의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고 있다면 주님이 함께 계시면서 사랑해 주신다는 표시입니다. |
이것은 개인이나 수도회에 모두 적용되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5 이것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확실한 길이며, 확실한 왕도입니다. 모든 성인의 모후이신 마리아는 순교자의 모후이시기도 합니다. 성인들은 얼마나 큰 십자가를 주시는가에 따라 그만큼 주님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성인들은 주님께서 질병을 허락하셨을 때 절대 불평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가 좀 아플 때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참을 수 있는지요!)
십자가를 잘 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합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셨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십자가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로 가기를 싫어하지만 갈바리아의 길, 예수께서 가신 길만이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매일 아침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질 십자가를 인내로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한다면 필요한 힘을 주실 것이며, 그 힘으로 우리가 더욱 강해지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을 수 있도록 더욱 큰 십자가를 주실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하느님을 모독하는 두 사람의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 형을 받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본다면 불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 번째 수단은 천국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는 무거움, 피로를 느낍니다. 그러나 매일 그렇게 지내다 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공로입니다. 모든 작은 희생으로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6 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책에서도 성인들이 당한 고통이나 십자가에 대해 충분히 드러내고 있지 못하지만 모든 성인은 많은 고통과 유혹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항상 많은 유혹을 당하는데 어떻게 하면 해방될 수 있을 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고통이고 공로입니다.
성 바오로가 당한 고통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 대해 “나는 그가 내 사랑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흔을 받은 사람은 높은 성덕으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멀리하고 성덕이 없는 곳에서 성덕을 찾고 있기 때문에 성덕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내 몸이 아픈 것을 불평하는 게 아니라 일을 하지 못하고, 이웃에게 폐를 끼치며, 성당에 가지못해 매일 영성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견뎌야 합니다.
내가 무익한 존재임을 느낄 때, 공동체에 폐를 끼친다고 느낄 때 바로 그 상황을 견뎌야 합니다. |
우리의 모든 변명은 고통에 대해 인내가 없음을 드러내는 얘기들입니다. 성화는 자기를 버리는 데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성화는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는 것에 있음을 깨달을 때 까지는 우리가 수도생활을 한 지 20년이 지났다 해도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고, 많은 영성 서적을 읽는다 하더라도 성인들의 지혜를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1 마르 14,33 라틴어 원문: “Coepit taedere et pavere.”
2 마태 26,37 (불가타) 라틴어 원문: “Coepit contristari et moestus esse.”
3 마태 27,22 라틴어 원문: “Crucifige.”
4 라틴어 원문: “Deo gratias.”
5 참조: G. 알베리오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Donec formetur Christus in vobis」, PSSP, 알바 1932, 54쪽; 「준주성범」 2편 12장.
6 1코린 4,17 라틴어 원문: “Aeternum pondus gloriae.”
7 사도 9,1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