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은1 고해성사에 대해 꼭 필요한 (양심성찰, 통회, 결심 등)을 설명하면서 자주 반복하여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백할 때 하느님을 거역한 잘못이 있어야 그 성사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고백사제가 과거의 나의 삶을 잘 알고 있다면 “저의 과거의 모든 잘못도 고백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과거의 부족함을 말하면 됩니다. 그러나 나를 잘 모르는 사제일 때는 좀 더 자세하게 어떤 덕을 거스른 점, 예를 들어 “이웃에게 애덕이 부족했던 모든 것 등을 고백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성사 때 ‘고백해야 할 죄’는 대죄입니다. |
유효하게 고백하지 못한 것들이나 다른 방법으로 이미 용서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예를 들어 완전한 통회를 한 것이나 지난 고백 때 잊어버린 대죄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소죄들과 이미 고백을 한 대죄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고해성사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을 참으로 거역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묵상합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지성, 의지, 마음을 주님께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바라고 그분의 거룩함을 주님과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은총 지위에 머물러 있을 때 누리게 됩니다. 물론 이 사랑에도 많은 단계가 있으나 대죄를 짓지 않으면 늘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대죄는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우리의 온 생애 동안 주님만 바라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언제나 천국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 또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유일하게 대죄는 이 원의를 제거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완덕이 있습니다. 다른 결심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도록 방해물을 없애주고 차츰 진보하는 단계가 되어 줍니다. |
다른 덕들, 곧 믿음과 희망도 이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2 “덕행은 중 용에 있다.”는 말을 하지만 “사랑은 중용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 과도하다는 말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할 때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사랑에는 여러 단계가 있지만 초기 단계라 해도 지상의 그 어떤 가치보다 높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측정할 수 있습니까? 그 어떤 피조물보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느끼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잃지 않기 위해 희생을 치르더라도 내 모든 것, 생명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감각적인 사랑을 획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연약한 우리를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주어진다면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도와주시는 것이기에 우리 편에 불꽃을 잦아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인내하면 더욱 환히 타오르게 할것입니다.
모든 계명과 수도서원의 목적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불을 더욱 밝히기 위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우리 삶이 끝나 죽음을 받아들일 때 영원히 남겨질 이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끝내게 될 것입니다.
1 ‘교리 공부’에 대해 언급한다. 회헌에 따르면 모든 수녀가 매주 의무적으로 교리공부를 해야 했다.(회헌 150조 참조)
2 성 아우구스티노, 「서한」 CIX, 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