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충실한 사람을 보고 수련자처럼 열심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잘 설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수련기 때 가졌던 열의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원으로 얻게 되는 새로운 은총으로 완덕의 길에서 진보해야 할 것입니다. 수련기는 열성이 시작되는 기간이어야 합니다. 수련기가 지나면서 결점에서 결점으로 떨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덕에서 덕으로 진보하는 날들이 이어져야 합니다. 가장 열심히 산 것이 생의 마지막 해, 마지막 날이어야 합니다.
수련기를 매우 겸손한 마음으로 지내야 합니다. 대개 큰 유혹이나 위험은 서원 후에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
완덕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들, 경계심, 끊임없는 기도, 이런 것들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과신과 교만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지 않도록 합시다. 성바오로딸들의 기도는 다음의 본기도와 같아야 합니다. “주여 우리가 우리 행실을 전혀 믿지 않음을 보시고 이방인의 박사인 성 바오로의 보호로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도록 허락해 주소서!Deus qui conspicis, quia ex nulla nostra actione confidimus: concede propitius; ut contra adversa omnia, Doctoris gentium protectione muniamur!”
진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수도자는 결점에서 더 큰 결점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더욱 인내심이 없고, 더 완고해지고, 더욱 요구가 많아지며 불평을 많이 하고, 산만해지고, 오만하고, 교만하며, 변덕스럽고 마음대로 하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종신서원을 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종신토록 지니는 결점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완덕으로 나아가야 할 영원한 의무가 있을 뿐인데, 어떤 사람은 늘 자기 뜻대로만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깊이 성찰합시다. 성찰합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완전히 행한 모범을 성 요셉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 요셉은 성모님 다음으로 위대한 성인입니다. 그의 성덕, 그의 높은 완덕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의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점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찾은 사람입니다. |
결혼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마리아와의 결혼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을 때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높은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온순히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순결한 백합 사이에서 피어난 또 하나의 백합이었습니다. 성 요셉에게 고통스러운 의문이 생긴 적도 있었습니다. 천사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라.”1고 이야기해줄 때까지 요셉은 현명함과 침묵으로 그 번민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어려움에 저항하고 유감스런 표현을 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천사의 말에서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성 요셉은 늘 그랬듯이 침묵 중에 하느님의 뜻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아우구스토 황제가 호구조사령을 내렸을 때에도 아무 불평없이 곧 어머니가 될 마리아와 함께 가난하고 초라한 베들레헴까지 갔습니다. 성요셉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요셉 자신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를 위한 피난처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외딴곳의 가난한 동굴을 찾아 마리아에게 최대한 적응하게 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것도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의무가 아니었으나 순종하며 율법을 지켰습니다.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이집트로 가게 되었을 때에도 요셉은 아무런 반문을 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타국에서 지내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천사의 알림이 있을 때까지 그곳에 평온히 머물렀습니다. 요셉은 이런 지시를 여러 번 받아야 했지만 언제나 침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집트에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다시 팔레스티나로 돌아올 때에도 하느님께서 지시해 주시는 지방으로 가기 위해 하느님께만 기도했습니다. 나자렛에서 사는 것이 주님 뜻임을 알게 해주셨을 때 요셉은 침묵 중에 순명하며 구세주에 관한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요셉은 하느님 수중에 있는 지극히 온순한 도구였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행한 성인이십니다!
요셉의 생애는 침묵과 노동과 기도로 일관되었습니다. 침묵 가운데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율법을 지켜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잃었다가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에도 마리아가 말했을 뿐 요셉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와서도 침묵 중에 하느님의 뜻만을 따라 근면한 생활을 하여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날 순간이 왔을 때 더 살고 싶다거나 빨리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원하셨을 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을 유일한 소망으로 사셨던 요셉은 그 뜻을 받아들여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성 요셉은 변명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기호나 더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느님의 법이라는 유일한 법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만큼 빨리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취향을 찾으며, 변덕을 부리고 큰 잘못을 저지르며 진보하지 못합니다. 결심을 세우는 데도 우리의 뜻이 들어가 우리 방식대로 세우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에 내맡겨 모양을 낼 수 있는 부드러운 밀초와 같다면 성덕에 오르고 사도직을 통해서도 얼마나 많은 선을 퍼뜨리게 해주시겠습니까! 공심판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우리 뜻만을 고집하여 하느님 뜻에 얼마나 큰 방해가 되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2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성 요셉께 내 뜻과 원의를 접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전구해 주시도록 청합시다. 우리가 주님의 뜻만을 행한다면, 그것이 단 하루뿐일지라도 100일이나 1,000일 동안 우리의 기호와 좋아하는 것, 우리의 계획대로만 했을 때보다 더 진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완덕은 모두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3라고 성 바오로가 말한 것에 달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타인의 권고나 의견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뜻만을 행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자기 구미에 맞도록 완전히 바꾸어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교만 위에 겸손의 옷을 입히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
양심을 속이거나 많은 계획을 세우지 맙시다.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는 단순함, 단순함이 필요합니다. 이외의 어려운 계획, 실현할 수 없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는 따위는 모두 악마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성 요셉이라고 하느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구실을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함은 우리의 원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만일 드러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드러내야 하겠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성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성 요셉께 은총을 전구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1 마태 1,20 라틴어 원문: “Joseph, fili David, noli timere.”
2 요한 8,29 라틴어 원문: “Quae placita sunt ei facio semper.”
3 1티모 1,5 라틴어 원문: “In corde puro, in conscientia bona et in fide non fic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