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분원에 있는 여러분을 만나러 가고 싶은 큰 소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분원에서 지내는 것이 더 낫습니까? 혹시 지내기가 더 나은 분원이 있고, 지내기가 더 나쁜 분원이 있습니까? 안 됩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제 저녁에 저는 자매들 사이의 사랑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자, 이제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봅시다. 성바오로수도회와 성바오로딸수도회 모두가 큰 방 안에 함께 들어갈 수 있을 때는 애덕을 행하기가 더 쉽고, 일치를 이루기도 더 쉽습니다! 방문선교에 갔던 우리 형제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우리처럼 남자수도회와 여자수도회로 가족수도회가 이루어진 수도단체를 방문한 이야기입니다. 남자수도회 측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이 바로 수녀들이라고 했습니다. 남자수도회에서 서적을 출판하면, 수녀들은 그 서적을 사러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성바오로수도회와 성바오로딸수도회는 서로 일치해야 합니다. 바오로딸들과 스승예수의제자들도 일치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분원들은 같은 시간표, 같은 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여러 분원 사이에 있어야 하지만, 서로 간에 약간의 경쟁은 있어도 괜찮습니다.
인간들의 일입니다! 물론, 일부 서원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작품 옆에 피노키오1에 대한 책이 꽂혀있는 것은 잘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모두 좋은 내용이지만 책을 진열하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열심을 식게 만드는 잡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자매가 어떤 분원으로 가게 되었을 때, ‘거기에 가게 되었군. 거기에는 그 마에스트라가 있고, 그런 음식이 있고, 그런 시간표가 있고 등등’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대화를 하다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여러분은 유일한 같은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젊은 자매들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선입견을 갖는다면 어떻게 잘 지낼 수 있겠습니까? 거의 모든 분원에 청원자들이 있습니다. 수련기를 위해 가게 될 모원보다 그들을 더 잘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분원에서는 서원한 수녀의 위치가 아주 조심스럽습니다. 그 수녀의 귀감이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 수녀가 “바스티안 쿤트라리Bastian cuntrari”2(역주-비뚤어진 사람, 다시 말해 콘트라contra, 곧 무엇이든 반대하는 사람을 이탈리아어로 bastiano라 한다.)가 된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누군가 자기 의견을 반대하면 큰일이 납니다. 예를 들어, 제대를 안치하려 할 때도 반대쪽에 놓자며 고집하고, 강론대를 안치할 때도 반대를 합니다.
멀리 있는 분원의 자매들을 어떻게 서로 연결시키고, 영적으로 양성할 수 있겠습니까? 지도자, 거의 책임자로 파견된 서원자들에게 많이 달려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기쁘게 분원에 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든 평화, 일, 기도의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보내는 주간의 유일한 날인 주일도 모두가 함께 고해성사를 보러 가고, 미사에 참례하고, 교리수업을 도와주고, 어려움도 마에스트라에게 털어놓으면서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모두가 똑같은 보조를 유지하게 됩니다. (윤리적인 보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분원 사이에 애덕이 있기를! 각자 서로에게 배워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어떤 분원은 서원에 질서가 잘 잡혀 있음을 봅니다.│
아주 좋습니다. 다른 분원에서는 윤리적인 부분이 더 두드러집니다. 아주 좋습니다. 또 다른 분원에서는 건강을 더 챙깁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성 요한 베르크만스는 어떤 형제에게서는 겸손을 배웠고, 어떤 형제에게서는 열의를, 어떤 형제에게서는 기도의 정신을, 어떤 형제에게서는 애덕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어떤 분원에서는 바오로딸들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고, 다른 분원에서는 면학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어떤 분원에서는 자선을, 어떤 분원에서는 부지런한 신심실천을 배우는 등, 모든 분원에서 모든 것을 익히십시오. ‘공동선’3을 이루는 것은 애덕인데 저는 여기에 침묵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언제나 말을 한다면 안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바오로딸들은 경건한 제자들(스승예수회수녀들)의 침묵을 존중하도록 해야 하고, 제자들은 침묵을 잘 지켜야 합니다. 침묵에는 대침묵, 소침묵 그리고 공동 침묵이 있습니다. ‘대침묵’은 성당에서 지켜야 하고, 공부할 때와 성찰할 때에도 지켜야 합니다. ‘소침묵’은 사도직할 때 지켜야 하는 침묵입니다. 사도직터에서는 “이 종이 좀 가져다주세요. 저 위치로 가주세요. 이 길로 갑시다 등”의 말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 침묵’은 휴식을 위한 침묵입니다. 휴식을 할 때에도 적절하지 못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늘 즐거운 것은 좋지만, 다른 사람들도 말하게 해야 합니다.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내부 회람지) 「모원의 메아리Eco di Casa Madre」4를 통해 여러분에게 이에 대해 당부한 적이 있습니다.
「메아리Eco」는 수녀인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친근하게 지나간 일들도 말하곤 합니다. 모든 분원이 이 회람지를 모아두어야 합니다. 「메아리Eco」를 일반 16절지 인쇄물처럼, 유리가 깨진 창문을 가리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지침을 여러 번 상기하고, 교정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이십시오. 주님은 지도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지만, 무엇보다 은총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성령은 교황님만 비추어주시지 않고, 신자들도 비추어주십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것은 신적 영감을 통해 교황님에게서 주어지지만, 어떤 것은 신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신자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신자들이 어떤 인물의 덕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성인이라 선언하고, 교황청은 신자들의 목소리, 곧 “백성의 목소리를 하느님의 목소리”5로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시복절차를 시작합니다.
성품을 수여하기 전에 교회는, 사제가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존경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먼저 발표를 합니다. 보십시오, 단순한 신자들의 목소리를 교회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도 분원에 대해 좋게 이야기해야 하고, 각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를 받아들이고, 아무도 내치지 말아야 합니다. 왜 회의를 합니까? 모든 이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어린이도 우리에게 하느님의 목소리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분원과 분원 사이에, 가족 공동체 안에 언제나 서로 사랑하도록, 수도회 전체를 사랑하도록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제야 해외에 몇 군데 분원을 개설하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립니다.6 모원과 결속되어 있을 때 서로 다른 상황, 서로 다른 기준을 잘 구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빵을 먹습니다. 다만 빵을 이런 식 또는 저런 식으로 먹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덕은 중국의 덕도 아니고, 알바의 덕도 아니고, 영국의 덕도 아닙니다. 수도자의 덕이요, 그리스도인의 덕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 에콰도르에 가장 가까운 나라들 ―│
“여기는 늘 덥습니다.”라고 말할 때, 북극에 가까운 나라들은 “여기는 늘 춥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인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어느 지역에서든 본질적인 것은 사랑이요 희생정신입니다. 계명은 프랑스인들의 것도 아니요, 중국인들의 것도 아니요, 인도인들의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젊어서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잘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주의한다면, 다른 이들의 교정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수도자 신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고해성사에까지 왔습니다.
“고해성사는 무엇입니까?”
“고해성사는 세례성사 이후에 범한 죄의 용서를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입니다.”
성사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고, 어떤 아버지가 딸에게, 또는 두 자매가 서로 간에 줄 수 있는 단순한 용서도 아닙니다.
전대사를 동반하는 사죄경은 성사의 효과가 없습니다. 성사가 아니라, 준성사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차이점은 작용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곧 성사는 “사효적事效的(ex opere operato:성사 자체의 힘으로 효과를 내는 것)”7이고, 준성사는 “인효적人效的(ex opere operantis:성사나 준성사를 이용하는 이의 마음 자세에 따라 효과를 내는 것)”8입니다. 고해성사에서 주어지는 사죄경은 죄를 없애주는데, 이는 부적합한 사제에 의해서도 주어질 수 있는 반면, 준성사는 오직 개인이 마음 준비를 갖추었을 때에만 소죄를 없애줍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성사를 통해 죄를 없애주는 데에 있습니다. 죄를 없애준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해성사는 죄를 없애주기 위해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사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100리라의 빚을 졌는데, (사실 저는 빚이 많습니다!) 나의 채권자가 “당신 빚을 탕감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채무가 없어집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해성사에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갚아주셨기 때문에 빚이 탕감되는 것입니다.
다른 경우를 봅시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100리라의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제 삼자가 대신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채무가 청산된 것입니다. 아직도 빚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제 삼의 인물이 보상해 주었기 때문에 청산되었습니다. 자, 이러한 일은 고해성사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상처를 입혀 드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당신 성혈로 그 상처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죄의 용서로써 지옥 판결이 철회된 것입니다. 통회의 정도에 따라 연옥 판결을 받기도 합니다.
“고해성사는 일시적인 형벌을 없애줍니다.” 젊은 시절에 범한 어떤 죄는 나이가 들어서 그 죄의 결과를 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나는 무한한 은총을 잃었습니다. 주님은 일시적인 형벌을 없애주는 고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에 대해서, 우리의 완고함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의 바르지 못한 지향, 진심어린 통회를 하지 못한 부족을 두려워합시다. 하느님을 경외합시다. 하느님을 언짢게 해드리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의 정의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언짢게 해드리는 것을 참으로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자비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계승하여 교회를 다스려야 할 베드로는, 자기 스승을 부인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죄를 뉘우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도 그를 그 직위에서 물리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에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9 하셨습니다. 곧 내가 너를 임명한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들(주교들)과 신자들로 구성된 갓 태어난 교회의 수장 자리에 머물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신앙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신앙을 고백했지만 여전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류의 신앙입니까!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이 부족하고, 완고한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모든 희망이 그쳐버리는데 이는 정의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비의 나라에서 아주 밑바닥에 있습니다. 기회를 잘 활용하고 두려워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 결코 실망의 길이 아니라, 겸손의 길을 걸어갑시다! 용서를 신뢰하지 못하는 영혼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를 고백할 용기가 없다고 한다면, 혹시 예수님이 용서에 대해 아주 어려운 조건을 내세우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소심한 자매들은 희망을 크게 갖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자매들을 많이 사랑하지 않습니다. 소심할 것이 아니라, 세심해야 합니다!
“소심과 우울한 마음은 멀리 내다버리십시오!”
“고해성사는 죄를 피하는 은총을 줍니다.” 고해성사는 두 가지 종류의 효과를 낳습니다. 과거에 대해서는 죄를 없애주고, 미래에 대해서는 죄를 피할 은총을 줍니다.
고해성사는 우리를 선행을 할 수 있는 조건에 놓아줍니다. 죄의 상태11에서 행한 선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용서를 얻기 위해 유익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용서를 받으면, 죄를 짓기 전에 얻은 선은 앞으로 얻게 되는 선 못지않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고해사제의 선택에 관해: “일반적으로 고해성사와 영적 지도는 언제나 구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분에게 다른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잘 살피십시오. 여러분은 최근 넉 달 동안 늘 해가 났으므로 내가 우산 없이 외출하라고 말할 때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두고 가십시오.”라고 했다면, 옳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 지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규칙에 예외를 두어야 할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영적 지도자는 수도회에서 정해 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드립니다.
“고해성사는 주교가 승인한 고해사제를 모셔야 하는데,12 언제나 가장 좋은 고해사제를 찾으십시오.”
여러분이 집을 사야 한다면, 공간이 넓고 통풍이 잘 되고, 모든 것이 튼튼해야 합니다. 영적 일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하십시오. 그리고 주교들의 지시에 따르십시오.
“수녀들을 위한 고해성사는 성당이나 공공 기도실이나 반공개적인 장소에서 여성을 위해 허락된 고해사제에게 했을 때 유효하고 합법적입니다. 사적인 장소에서 행한 고해성사는 무효입니다.” 공공 기도실이나 반공개적인 장소는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곳입니다. 병자에게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허용된 경당, 개인 집에 딸린 성당은 사적인 기도실13이라고 하겠습니다.
청원자들은 세속인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수련자들과 서원자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서원을 하지 않았거나 수련기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교회가 허락한 고해사제이면 됩니다.
“수도자는 통상적으로 8일마다 지정된 고해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마에스트라가 택한 사제로서, 교구 권위기관에서 허락한 고해사제라야 합니다.
어떤 수녀가 특별한 고해사제를 택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지혜로운 규범을 확대하지도 축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원장이 ‘그 고해사제에게 가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합법적입니다.
교회가 주는 자유는 선을 위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남용한다면, 그것을 교정하는 것은 마에스트라의 몫입니다. 어떤 수녀가 매일 고해성사를 보러 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안 됩니다! 인간적인 약함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런 요구에 응하지 마십시오!
어떤 수녀가 아파서 침대에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주교가 승인하지 않은 사제가 그녀를 찾아왔을 때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 수녀가 고해성사를 보기 원했다면, 사죄경은 합법적이고 유효합니까? 아닙니다. 공공 기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가 유효하고 합법적이기 위해서는 병자가 공동체의 고해사제를 요청했어도(특별 고해사제라도)”, 병석에서 일어나 성당으로 가야 합니다. 분명한 사항입니다. 그 사람이 죽음에 임박했다면? 그럴 때에는 모든 것이 합법적이 됩니다. 죽음에 임박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해성사를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사제에게 고해성사보기를 꺼린다면 승인받지 않은 사제한테도 고해성사를 볼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유효하기 위한 조건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곧 양심성찰, 통회, 결심, 죄의 고백과 사죄경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가 더 풍성한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다시 말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월중 고해성사와 연례 고해성사 이전과 이후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양심성찰은 특별 의무와 주요한 결심에 관해 성찰해야 합니다.”
“죄의 고백”은 분명해야 하고, 민감한 사항을 다루는 것이라면 “저는 수도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서원을 거스르는 죄는 곱절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고해성사는 특별한 경우에 해야 합니다. 통상적인 경우에는 필요 없습니다. 죄의 고백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주어진 보속을 수행했고, 매일 영성체를 했습니다. 저는 수도자입니다.”
“통회”, 통회에 관해서는 상등통회일 때 고해성사 이전에도 용서를 받습니다.
완전한 통회 이후에도 고해성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죄는 완전히 속죄를 했다 해도 영성체를 할 수 없습니다!
대죄 상태에 있던 영혼이 저녁 때 완전히 속죄한 후 잠이 든 채 죽는다면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대피정은, 용서받고 고해성사를 잘 볼 수 있는 은총을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바오로딸들의 고해성사는 언제나 거룩하게 실행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대사를 얻기 위한 강력한 원의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대사는 우리의 죄로 인해 받아야 할 벌을 없애줍니다.
우리는 열의가 있어야 하고, 아침에는 더 열심한 마음 자세를 갖추어야 하며, ‘저 여기 있습니다, 오 사랑하는 좋으신 예수님’이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에이, 연옥에서 아직도 나오지 못했습니까!”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 만일 한 순간이라도 우리가 연옥이 무엇인지 겪어 보았다면! 하느님이 우리를 수많은 형벌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풍부한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빚을 갚아주시기 때문에 고해성사는 죄를 없애줍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습니까? 공덕과 수많은 은총과 각 영혼이 쌓은 덕이 남습니다.
1 가롤로 로렌치니(Carlo Lorenzini, 1826-1890)의 가명, 콜로디(Collodi)의 아동 문학 작품 「피노키오의 모험Le avventure di Pinocchio」의 주인공을 말한다.
2 늘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방언.
3 “bonum sociale”, benessere….
4 성바오로딸수도회의 내부 회람지.
5 “Vox populi vox Dei”.
6 Martini C. A., 「성바오로딸수도회 역사Figlie di San Paolo…」(서울 - fsp) 692쪽 참조.
7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8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따라”.
9 요한 21,15-16.
10 마태 18,22 참조.
11 원문에는 istato로 되어있다.
12 수도자들의 고해성사에 관한 규범은, 1917년의 CDC, 교회법 595조와 1932년판 FSP 회헌 103조를 보라.
13 원문에는 oratorii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