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오늘 우리는 천상 어머니의 복되신 눈길 아래 있습니다. 어머니한테 모든 것을 바라는 어린이의 자세로 머뭅시다. 그분은 당신 자녀들을 교육하고 당신의 은총으로 양육하며 당신 사랑으로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당신 힘으로 강건하게 해주십니다. 성모님은 사도들과 함께 성령께 첫 9일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9일기도는 진정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홀로 나자렛의 오두막에서 성부께 거룩한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도록 간청하셨으며, 또한 성령의 갖가지 선물을 내려주시길 간청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이미 성령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 안에 이미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예수님의 육화라는 업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얼마나 귀한 선물입니까! 성모님은 처음에 둘째 위격이신 분을 청하셨듯이 다락방에서 성삼의 셋째 위격이신 분을 청하셨습니다. |
[162] 그분은 성령의 은총으로 더욱 풍요로워지셨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지상이 아닌 천상의 피조물이 되셨으며,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부유하고 풍부해지셨습니다.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은총을 얻어주시길 바랍니다. 왜 우리는 모든 불완전함과 모든 악한 경향을 태워버리실 성령을 모셔들일 만한 믿음을 지니지 못한 겁입니까? 사랑으로 두려움과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을 밖으로 몰아내기를 바랍니다. 이 대피정을 마친 후 위로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정화시켜 주셔서 마침내 영혼이 자유롭게 되어 진실되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일치의 길은 생각과 덕과 마음에 단순함이 있을 때 들어서게 됩니다.
생각의 단순함으로 영혼은 이성에 따라 토론할 필요 없이 하나의 진리와 잠언으로 양육되기에 그 안에서 양식을 찾게 됩니다. 중요한 진리를 관상하게 되면 거기서 모든 비추임을 받게 됩니다. 마치 성 안토니오가 스승님의 초대인 “완전하게 되고 싶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1는 말씀을 깊이 새김으로써 빛을 받아 변화되고 성화되었으며 사도가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복자 조베날레 안치나2는 진노의 날Dies irae의 “내 가련함에서 무슨 말을 하리이까?”3라는 구절을 마음 깊이 새겼으므로 어둠을 흩어버리는 빛과 성화가 시작되었습니다. |
[163] 성 안드레아 코르시니4는 회심 초기에 어머니에게서 “하느님을 그 정도로 생각하느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 바오로는 일치의 길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한 마디 말로 충분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광범위한 가르침의 중심점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사랑’이라는 말을 관상할 때 황홀경에 빠졌으며, 성 도미니코는 ‘진리이신 하느님’ 묵상에 사로잡혔습니다.
결심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사랑인데 그것은 아주 다양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됩니다. 성모님은 사랑에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사랑의 충동으로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용해되었습니다.
아,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필립보 네리의 거룩한 탈혼이여! 사랑의 불을 밝힌 영혼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이 영혼이 온전히 사랑 때문에 움직이고 활동할 것입니다. 사랑은 일치를 추구하며 사랑하는 분의 현존을 즐깁니다. 때로는 희생으로 드러내고, 어떤 때는 성체께 대한 신심으로 드러냅니다. 성녀 데레사에게는 아기 예수께 대한 사랑을, 성녀 젬마는 십자가의 주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단순화하는 거룩한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사랑은 기도 안에서 (사람을) 단순하게 합니다(마음의 단순함). 성인들은 속일 줄 모르는 어린이의 순결함과 단순함을 다시 얻음으로써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그들의 단순함에서 기쁘게 성 안토니오와 성 스타니슬라오의 팔에 안겼습니다. 기도의 단순함은 하느님을 향하고,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께 흠숭을 드리게 합니다. |
[164] 성삼위와 천국에 대해 관상하게 합니다.
그로써 관상적 묵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평온하고 강렬하게 진리를 관상하는 가운데 사랑의 사고방식과 양분을 길어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찔린 예수님의 늑방에서 많은 교훈이 나오고, 영혼에 상흔을 입히는 불이 거기서 분출하는 것을 봅니다.) 오랜 기간의 묵상을 통해 이러한 관상에 이를 수 있는데 때로는 성령께서 영혼에게 은혜를 내려주심으로써 그러한 관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상은 아직 사람이 영적 작업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지만, 성령께서 은총을 부어주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성령의 직접적인 작용에 이끌려 영혼이 하느님의 평온함 안에 큰 평화를 누리며 휴식을 취합니다. 그리하여 지성은 주님 안에 정착합니다. 그는 진솔하게 “모든 것을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영혼 안에 작용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하게 닮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없듯이 모든 면에서 똑같은 영혼이란 없습니다. 천국에는 다양성 안에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다양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영혼이 똑같이 되지 않습니다. 성 요셉 코페르티노가 ‘사랑’이라는 말에서 묵상한 것처럼 성 토마스는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5라고 하면서 황홀경에 빠지곤 했습니다.
[165] 병자성사에 대한 대화식 묵상meditazione discorsiva을 예로 들자면 ‘방 안에 환자 한 명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문을 열고 사제가 들어갑니다. 이것이 장소 구성입니다. 그리고 오관에 기름을 바르는 다섯 가지 점에 대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눈에 기름을 바르면서 눈으로 지은 죄를 기억하게 하며, 입술에 기름을 바르면서 혀로 지은 죄를 기억하는 것 등입니다. 그리고 “나는 병자성사 때 그러한 죄로 인해 책망받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을 지으면서 성찰과 결심을 합니다. 그런 다음 나는 회심하는 것을 죽음의 순간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나의 모든 감각들을 경계하고 싶다.”는 원의와 결심을 잘 지킬 수 있는 은총을 얻기 위한 기도를 바칩니다.
같은 소재로 애정적인 묵상meditazione affettiva을 할 경우는 좀 다릅니다. “나는 하느님께 나의 모든 감각을 봉헌하였다. 나의 심장, 나의 혀, 나의 두 귀, 나 자신을 봉헌했다. 그 중에 뭔가 빠진 것이 있지 않을까?
신부는 온전히 신랑의 것이어야 한다.” 보십시오. 사랑은 예수님과 신부 사이의 연결이 새롭게 되기까지 그분의 사랑을 위해 몸과 마음을 순수하게 보존하도록 촉구합니다.
같은 소재로 하는 묵상이지만 관상은 위로부터 부어져서 얻게 되는 형식으로서 단순한 문장 하나를 깊이 새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병자성사에 관한 “지극히 자애로우신 자비심으로 인해…”라는 문구를 묵상한다고 합시다. 영혼은 이 말씀에 머물러 생각합니다. “나의 생애는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다.”라면서 열정을 느끼고 고양되며, 확장되고 점화되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 사랑으로 봉인됩니다.
[166] 예수님이 그곳에 들어가시고 예수님과 모든 자매, 모든 영혼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관상적 묵상meditazione contemplativa 입니다.
이 경지에 이른 많은 이에게는 관상을 위한 모든 규칙이 필요없습니다. 어떤 문구나 말씀이 몇 달 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지속되는 한 다른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이러한 관상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이나 영적 메마름의 시기를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제안들로 지침을 주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기도를 단순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늘 성인들의 생애를 읽고 독서에서 자기들이 필요한 것들을 이끌어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영혼이 행복할까? 6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행복을 느끼지만 적어도 감각의 밤(외적 시험)과 영의 밤(내적 시험)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넘어가야 합니다.
외적 시험이란 병고, 반대, 몰이해 같은 것들로서 가끔 악마의 소행이 덧붙여지는데 이들은 요란스럽게 소란을 피우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가끔 가정불화 같은 외적 시험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성녀 젬마의 경우처럼). 때로 오직 하느님만 아시는 눈에 띄지 않게 시련을 당하는 사람도 있지만 찌르듯이 아픈 고통으로 괴로워합니다.
영의 어둔 밤에는 종종 세심증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초보자와 진보자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행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릴까봐 고통스러워하며, 어떤 때는 정말 순교자와 같이 지냅니다. |
[167] 예수께 친밀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늘 기쁘게 해드리고 싶지만 다른 한편 그에 대해 역겨울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은 정화의 작용입니다.
사랑의 길에 있으면서도 자주 메마름과 지속되는 분심, 유혹, 악마의 책략으로 인해 고통을 당합니다. 어떤 영혼들은 갈바리아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봅니다. 영의 어둔 밤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때 영혼은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희생제물이 되어 끔찍하게도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짙은 어둠 속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60세, 70세가 되어 성소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고 신앙에 대한 심각한 유혹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영혼을 정화하는 성령의 시험입니다.
지도하는 사람은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똑같은 수준으로 잘라버리도록 강요해서도 안됩니다. 각 사람은 존중받고 이해받아야 합니다. 모든 이에게 똑같은 조언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해하지 못할 때는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지만, 잘못 권
고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빛을 주십니다. 이 어둔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올 것이며, 그때 영혼은 조명을 받고 하느님 안에 푹 잠기어 그분의 사랑에 사로잡혀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수도생활에 부르심 받은 것처럼 나는 성화에 부름받았다.”는 진리 안에 평온하게 쉬십시오. “내가 원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을 모두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수녀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성녀가 되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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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에는 여기서 ⅩⅩ 강의 “사랑의 학교”가 시작된다. 원본 167-175쪽이 생략되었다. 「이것을 묵상하라」 Ⅱ/2, ⅩⅣ , 80-87. 243-247쪽을 복사한 것이다.
1 루카 18,22.
2 Giovanni Giovenale Ancina(1545-1604): 오라토리오회 사제, 살루조의 주교.
3 ‘진노의 날’은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 부속가다.
4 Andrea Corsini(1302-1373)는 방탕한 젊은 시절을 지낸 후 가르멜 회원이 되었으며, 가난한 이들의 참된 아버지요, 평화의 일꾼이었다.
5 라틴어 원문: “Deus meus et omnia.”
6 여기서부터 이 강의 끝까지의 내용은 「이것을 묵상하라」 Ⅱ/ 2, 63-65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