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집을 지으려면 우선 토지를 준비하고, 그곳이 언덕이라면 평평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성화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악과 결점, 불완전함을 제거하고 나서 기초를 튼튼하게 세웁니다.
우리 성화의 작업에서 보았지만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1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은총을 모아들여 천국에서 영광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골짜기 같아 그곳으로 물을 모아들입니다. 작은 골짜기도 있고 좀 더 깊은 골짜기도 있지만, 은총에 온전히 응답한다면 모든 골짜기가 가득 찰 것입니다. 결코 은총을 반대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38] 동정 성모님은 무한히 깊은 골짜기이셨습니다. 그분은 어느 은총에도 저항하지 않으신 “은총이 가득하신 분”2이셨습니다.
완전한 영혼이 되려면 은총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내맡겨야 합니다.
컵이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을 때 가득 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채워지도록 맡겨드려야 합니다.
은총으로 우리 영혼을 채울 수 있는 네 번째 수단은 매일의 의무를 바르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하느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한 하느님의 뜻은 매일의 구체적인 의무들에서 드러납니다. 각 사람에게 구체적인 상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더운 곳에 있는 사람은 더위를 참아야 하며, 추운 곳에서 지내는 사람은 추위를 견뎌야 합니다. 빨래방에서 일하거나 책 표지를 입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18년간 일한 사람과 40년간 일한 사람의 성격과 성향은 다를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주 미세한 차이들입니다.
이러한 미세한 점들에 방심한다면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매일의 의무들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루의 매 순간, 시작부터 마치는 순간까지입니다. 예수께서 ‘이 상황이 공로를 얻고 은총과 약속된 상을 얻는 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에게 희생, 은총, 상급이라는 세 가지 점을 제시하십니다. |
[39] 이렇게 생각한다면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서 모든 활동을 기쁘게 행할 것입니다. 모든 행동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성에 빛을 주시고 의지에 자극을 주시며 마음에 위안을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며, 하루 내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위대하고 저 일은 하잘 것 없다고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활동에 가치를 주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만 들으시는 단순한 호칭기도가 얼마나 큰 공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성화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있습니다. 이 일치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입니까? 한 가정의 어머니가 행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매일의 규칙을 지키고 매 시간 주어지는 순명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바오로딸로서 이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완덕이란 매일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입니다. 좋고 싫음의 구별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의무의 충실한 이행은 영혼을 정화하고 재형성하며,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세 가지 효과를 가져옵니다.
‘정화’, 일반 신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수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의 어머니라면 자녀들을 잘 교육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저것을 할 수 있는 많은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생활에는 그런 자유가 없습니다. |
[40] 규율에 수도복이 정해졌고 시간표도 정해졌습니다. 사도직, 음식, 모두가 정해졌습니다. 영성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을 세울 때에도 길 진리 생명의 방법을 따르며, 모든 신심 실천이 그러합니다.)
세속 사람들이 가진 어떤 자유에는 의문점과 불완전함이 많지만, 수도생활에서는 모든 면에서 좀 더 완전합니다. 아주 큰 보속 행위라도 자기 마음대로 택해서 하는 것보다는 작은 보속이라도 장상이나 고해사제가 명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더 큰 공로가 됩니다.
세속적인 삶과 수도생활은 대단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상의 의무를 이행하면서 매우 큰 공로를 얻게 됩니다. 진보하고자 하는 사람은 좋고 싫음의 구별 없이 하느님께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공동체에는 자기 뜻대로 행하며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하느님의 일을 하지만 자기 뜻대로 행하는 방법을 찾곤 합니다.
성화는 거룩한 무관심으로 공동생활을 잘 하는 데 있습니다.
수도서원을 하게 되면 행위가 바뀝니다. 좋은 신자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수도자의 행위가 됩니다. 이처럼 어린 지원자들과 서원자들의 활동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활동할 때는 종교적 공로를 갖기 때문에 성당에서 미사 때 성가를 부르듯이 항상 종교적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
[41] 모든 식물은 고유한 본성에 비례한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의 공로는 매우 특별합니다. 마치 끊임없이 미사에 참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의하십시오! 미사참례할 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되는 겁니까? 서간을 낭독할 때 종을 쳐도 됩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과 하느님의 뜻, 공동생활에서 주어지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더 큰 공로가 될 수 있는 명분은 종교의식에서 예수께서 하시던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종교의식에는 가장 올바르고 정확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3입니다.
여러분은 이에 부응해야 합니다.
진정한 바올리네가 되어야 합니다. 바올리네로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다른 어떤 원의도 표현하지 않고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30년간 모범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30년간 모범을 보여주시고 3년간 사도직을 완전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사도직을 수행합니다. 예수께서 고통을 당하셨으니 여러분도 그분께서 주시는 고통을 견뎌야 합니다.
최대의 결실을 내기 위해 먼저 모든 것에서 이탈해야 합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빗자루질하듯이 하고, 공부하는 것을 일하듯이 하여 이탈의 정신을 지니십시오. 아무것도 거절하지 말고,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호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종하고 낮추는 것이어야 하며, 윗자리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겸손한 일과, 가장 검소한 옷을 입으면서 항상 즐거워하십시오. |
[42] 예수님은 십자가와 고통을 택하셨으며, 가장 명예롭지 못한 고통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강도 사이에 계셨습니다. 가장 나쁜 부분을 택하셨습니다. 성인들은 가장 겸손한 자리를 택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라고 여겼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직무를 수행할 때 올바른 지향과 큰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누가 더 큰 공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 많은 사랑을 지닌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진보한다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우리의 활동은 보다 큰 공로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40년간 사도직을 하면서 겨우 18년간에 얻은 공로밖에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사랑 안에 성장해야 하고 은총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활동을 넓혀가면서 사랑도 증가시키고 공로도 얻게 됩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두 배의 사랑을 투입한다면 겨우 넷을 얻지만, 두 가지 일에 네 배의 사랑을 투입하면 여덟을 얻게 됩니다. 만일 다섯이나 여섯 배의 사랑을 투입한다면 열이나 열둘을 얻을 것입니다.
아무 걱정 없이 그런대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꾀가 많아 가능한 모든 공로를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골짜기를 온통 하느님의 뜻으로 채우게 됩니다.
1 1코린 3,16 참조.
2 루카 1,28 라틴어 원문: “Ave, gratia plena.”
3 루카 2,14 참조. 알베리오네 신부는 천사들의 노래를 바오로가족의 “삶의 계획이 며 사도직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받아들였다.(AD 18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