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미지근함으로 인해 큰 장애를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대한 배움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매우 창의적이어서 모든 것을 키워주고 더욱 불타오르게 합니다. 영적 게으름인 미지근함을 없애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악을 가벼이 여기거나 부주의에서 오는 소죄들과 작은 결점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분심속에서 살아갑니다.
게으른 사람은 쉽게 많은 결함에 빠집니다. 이런 사람은 동전이 훨씬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처럼 가사일이라든가 일상적인 일들에서 행하게 되는 작은 덕행들을 하찮게 여깁니다. 그리고 양심성찰, 묵상 등 내적 신심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일시에 전부 그만두지는 않지만, 눈에 뜨일 만큼 소홀히 행합니다. |
[81] 미지근한 사람은 신심생활 전반에 걸쳐 냉랭하여 영혼 구원에 관한 열정을 느낀다거나 통회의 마음에서 눈물을 흘린다거나 영적인 측면에서 열정이 일어나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너무 안일해서인지 아니면 어떤 감정에 지나치게 휩싸여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사랑은 무엇엔가 꽉 덮여 있는 상태가 됩니다. 마치 불덩이가 잿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불씨가 남아 있긴 하지만, 서서히 사그라져 가는 것과 같습니다.
미지근함이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역겹게 해드리며 공로를 잃게 하는지 모릅니다! 미지근한 사람은 선행을 소홀히 하며 행하는 것마저 품위 없이 합니다. 미지근함은 무한한 은총을 잃게 하여 영혼이 참된 영적 위안으로 즐기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지금 누군가가 메마름 상태에 있고 분심 중에 있기 때문에 동요케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메마름이란 잠이 오듯 때로 자연스럽게 오거나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지근함은 신심실천을 잘 하지 못하는 습관을 말합니다. 선행을 하는 데 더는 힘들지않다고 해서 미지근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덕이란 선행을 즉각적으로, 쉽고 즐거운 마음으로2 행할 준비태세를 갖추게 합니다. 게으름이나 또는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미지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마름은 미지근함이 아닙니다. 메마름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으로서, 이를 사랑으로 바친다면 언젠가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메마를 때와 위안 중일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합니까? 위안은 주님께서 영혼을 풍부하게 이끌어 주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82] 위안은 덕이나 신심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께 부르시는 수단일 뿐이며, 부드럽게 부르시든 책망하며 부르시든 우리는 하느님께 민감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하늘에서와 땅에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고통과 기쁨, 위안과 메마름 가운데 당신께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산과 바다, 자연과 우주 천체, 수많은 방법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저의 목은 잠기어 쉬고, 저의 입술은 말라버렸나이다. 당신은 언제 저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렵니까?”3
위안 자체는 공로가 되지 않으며, 열정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위안은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우리 자신을 움직이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메마름을 느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욱 순수한 사랑의 기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공로를 크게 만드는 기회입니다. 위안의 상태에 기대지 말고, 위안이 적더라도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약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우리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을 찾지 말고, 우리 영혼의 지극한 사랑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추구합시다.
주님께서 사랑의 배움터를 많이 세우셨으니 그곳에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 학교는 특별히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행하지 않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영원에서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
[83] 우리가 먹는 빵, 입는 옷들, 자연 전부를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면 감동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지 않으셨습니까? 산, 바다, 물, 물고기, 공기, 음식, 의복, 태양, 나무, 꽃, 건강 등 모두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다시 거두어들이신다면 우리는 무無로 떨어질 것입니다. 오, 하느님의 선하심은 얼마나 크십니까! 우리에게 물 한 잔, 사탕 한 개를 주는 사람에게 감사할 줄 안다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 때문에는 어떤 느낌을 간직해야 합니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4 는 모든 배움의 순간들을 창조주를 찬미하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사랑의 학교의 두 번째 특징은 구원입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작은 아기 예수님의 큰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지니지 못한 채 그분의 시선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토록 연약하신 아기 예수님이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며 당신 마음에 품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태어나자마자 십자가를 생각하며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게 될 아픔과 당신의 숭고한 고통의 때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서두르십니다. 학자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설교하시던 나자렛의 소년이며 청년인 예수님은 얼마나 사랑스런 분이십니까! 겟세마니의 예수님, 채찍질과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갈바리아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사제직,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교회와 성사들을 남겨 주셨으며, 희생과 실존적 현존으로 당신 자신을 음식으로 남겨 주셨고, 영원한 곳에서 상을 주실 것입니다. |
[84] “탄생 땐 우리처럼 인간이 되시고, 식사 땐 음식으로 당신 주시며, 죽을 땐 죗값으로 갚아주시고, 승리 후 상급으로 당신 주시네.”5 천국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상급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중에 그분을 관상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오, 주님, 당신의 영광중에 당신 얼굴을 뵈올 때 저는 흡족하리이다.” 6
사랑의 학교의 세 번째 특징은 성령을 부어주심입니다. 성삼의 셋째 위격이 인간 안에 오시어 인간은 두 번째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생명은 초자연적 생명, 은총의 삶, 영혼의 혼입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살고 있지만 이미 거룩한 생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총에 의해 천사들의 회원이 되며, 천사들의 본성과 같은 초자연적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천사적 본성이란 초자연적 반열로 고양된 본래의 천사적 본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하는 이 은총은 우리를 그분의 양자가 되게 합니다. 은총 안에 있는 영혼에 대해 관상할 수 있다면! 얼마나 경이로운 아름다움입니까! 성 레오니다S. Leonida는 성령께서 거처하신다는 생각에 경탄하는 마음으로 자기 아들 오리게네스의 가슴에 입을 맞추곤 했습니다. 하물며 수도자의 영혼에 대해서야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르심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수련자였을 때 강한 힘을 주셨고, 매일같이 힘을 주십니다. 이 힘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풍요로움이며, 열매로 가득한 정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에 머무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볼 수만 있다면! 그런데 바로 그 참된 아름다움을 우리 가슴에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에게 의미를 주고, 마음을 부유케 하며 사랑으로 불타게 하지 않습니까? |
[85] 성령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우리를 이 사랑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랑하도록 촉구받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바라보거나 과거, 현재, 미래를 볼 때 어디서나 거룩한 선과 자비가 드러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귀머거리이거나 사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사랑의 불을 지필 수 있겠습니까?
민감한 영혼에게 첫째가는 양식은 고통입니다.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는 마음의 용광로입니다. 성인들은 많은 역경을 통과하여 위대한 사랑에 도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영혼은 큰 고통을 당할수록 더욱 사랑합니다. 그들은 고통과 더불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맛봅니다.
아버지와 인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십자가에 눕혀져 못 박히도록 내어 놓으며, 고개를 숙여 숨을 거두실 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분 스스로 팔을 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누우셨습니다.
어떤 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거나 우리가 고통과 아픔을 느낄 때 이를 사랑을 위해 이용합시다. “주님 당신을 위해서, 당신과 함께 있도록, 당신을 위해 살도록 이를 받아들입니다!” 주님은 온유한 영혼들이 더욱 큰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을 무한히 준비해 주십니다. 죄를 짓기 전에 사랑을 해야 했지만, 죄를 지은 후에는 (뉘우치고 겸손해져서) 사랑에 대한 더 큰 동기를 갖게 됩니다. |
[86] 얼마나 많은 죄인이 자기들이 범한 죄 안에서 사랑이 흘러나옴을 발견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룹니다.”7라고 성 바오로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성경 주석에서는 ‘죄까지도!’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용광로에서는 생나무도 불타오르게 되는데 물을 살짝 뿌린 석탄은 더 튀어 오릅니다. 이 거룩한 용광로는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성심입니다. 그런데 영성체를 자주 하고 미사에 잘 참례하며 성체방문을 열심히 하는 이 거룩한 용광로로 인해 어떻게 뜨거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체를 사랑하는 영혼들 안에 사랑의 불이 지펴졌음을 느낀다 하여 그것이 놀랄 일입니까? 이 용광로에 모든 결함과 냉랭함을 던져 넣어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합시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더욱 강화되어야 하는 또 다른 동기는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를 향한 여정이 실제적이고, 참된 일치와 지복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천국에서 이루어질 일치는 마치 용광로의 석탄처럼 하느님 안에 잠기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랑을 즐거워하는 곳, 하느님 안에 잠기게 되는 곳,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 있는 천국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모든 발걸음, 천국을 향한 염원, 천국에 대한 갈망은 사랑입니다. 보상을 향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자신이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의 보호자이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으리라.”8 우리가 찬미가와 천사들의 영상, 성인들과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마리아와 담화를 통해 행복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우리의 즐거움이고 빛이십니다. |
[87]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보나이다.”9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랑의 배움터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높은 단계에 다다르지는 못하지만, 예수 성심의 불타는 용광로에서 사랑의 불꽃을 키울 수 있습니다. “사랑의 불꽃을 키웁시다!”
높은 단계,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마리아의 성심과 예수님의 성심과 함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지향합시다. 이 불꽃으로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의 관심으로 대치하고, 우리의 갈망을 예수님의 갈망으로 대치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과 교회를 들어 높이고, 죄인들의 회개와 수도자들의 성화와 순결을 보존하도록 합시다. 이로써 서서히 우리의 감정이 변화되고, 사랑이 모든 것을 흡수하여 변화시키고, 모든 것을 성장시키며 모든 것을 단순하게 하는 열정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열정을 지니게 된다면, 이 열정이 우리 영혼의 모든 힘을 흡수하여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을 위해 봉사하도록 투신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인도에서 당한 많은 역경을 사랑으로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열정이 타오를 때 다른 세력을 모두 흡수해 버리듯이 사랑은 모든 것을 점령하여 더욱 불타오르도록 부추깁니다. 이 대피정의 열매는 바로 사랑입니다! 항상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하고, 예수님의 성심으로 사랑합시다! 예수님처럼 사랑에 죽을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그런 삶과 열정은 사랑의 열매와 증거가 됩니다.
1 첫 출판본에서 이 강의는 1941년 10월 대피정 168-175쪽에 들어 있었다.(1941년 9월 대피정 195쪽 머리말 참조)
2 라틴어 원문: “prompte, faciliter et delectabiliter.”
3 시편 69,3 참조.
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 유쾌한 젊은 시절을 보낸 후 전면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난을 살았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립자.
5 성 토마스가 지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아침기도) 찬미가 라틴어 원문: “Se nascens dedit socium; convescens in edulium; se moriens in pretium!”
6 시편 17,15 참조.
7 로마 8,28 라틴어 원문: “Omnia cooperantur in bonum.”
8 참조: 창세 15,1 라틴어 원문: “Ego ero merces tua magna nimis.”
9 시편 36,9 라틴어 원문: “In lumine tuo videbimus lu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