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o Giacomo Alberione

Opera Om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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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죽음*

1) 죄의 결과인 죽음

오늘 아침에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의 큰 특권, 곧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관해 묵상했습니다. 성모님은 원죄에 예속되지 않으셨고, 특별한 보호를 받아 본죄에도 예속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원죄의 바다에 잠겼습니다. 마리아는 침몰되지 않고 대홍수의 물 위로 떠오른 노아의 방주와 같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사람들은 황무지의 땅을 가득 채우며 번성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으며, 예수님은 선택된 민족, 새 세대의 원형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지만, 욕정과 악을 제외한 죄의 모든 결과의 영향을 받으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는 죽음을 겪으시고, 예수님처럼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습니다.1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오늘 저녁에 시작하고 있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피정을 성모님의 보호 아래 맡깁시다.

~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어 그들을 아름다운 낙원에서 살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희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2 그러나 그들은 금한 나무 열매를 따 먹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3 그리고 아담만 단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까지 단죄하셨습니다. 하느님이 그와 함께 약 100명 정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벌하시도록, 그 죄는 대단히 큰 악이었습니다!
어떤 왕이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열 명이나 스무 명을 죽음에 처했을 때, 그 사건은 대단히 큰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100명, 또는 한 지역의 모든 백성을 뿌리 뽑아버리려 했다면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하느님은 한 지역이나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125아메리카, 오세아니아까지 모든 대륙을 벌하셨으니 그 죄악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의 지성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벌을 받고 살아가는 아담과 하와는 어느 날, 해가 저문 저녁이 되어도 아벨이 집에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밤이 깊어가자 아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의 움막을 나와 나무와 목초 사이를 헤치며 가던 중에 땅바닥에 누워 있는 아벨을 발견하여 그 몸을 흔들어보았지만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슬펐겠습니까! 나뭇잎들로 덮인 아벨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부패되고 벌레들로 뒤덮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가 무엇인지, 또 사랑하는 아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상실의 괴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아, 가여운 하와는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우리는 죄야말로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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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지은 영혼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시체보다 더 소름끼치는 모습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혹시 큰 죄를 지었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은, 죽기 전에 아주 짧은 순간 “제 병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낫고 있는 중입니다!”라며 좋아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가엾은 사람, 그는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 죄가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한다면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하고, 계속 의심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며, 천천히 걸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잘 묵상한다면 우리는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모든 언행에서 너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여라. 그러면 결코 죄를 짓지 않으리라Meditare novissima tua et in aeternum non peccabis.”4 죽음을 묵상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죽음은 영혼과 육신의 분리입니다. 영혼이 육신과 결합될 때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순식간에 분리된 영혼과 육신은 최후심판의 때를 맞아 다시 영원히 일치된 상태를 이룰 것입니다. 영혼이 육신과 일치될 때 사람은 눈으로 모든 사물을 볼 수 있고, 귀를 통해 들을 수 있고, 가슴이 뛰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곧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육신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육신이 건강하고 온전해야 합니다. 좋은 술이 깨진 병에 남아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있는 육신의 어떤 부분, 곧 (심장, 폐, 정맥)이 파괴될 때 영혼은 곧바로 떠나고 육신은 죽습니다.
주검을 볼 때 어떤 모습입니까? 창백하고 굳게 다문 차가운 입술, 야윈 얼굴, 보랏빛으로 변한 손과 발, 유리알 같은 눈동자, 그래서 그 사람은 이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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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나면 몸서리쳐질 정도의 악취 때문에 곁에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시신은 빨리 집에서 떠나게 됩니다.
자, 우리는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영원히 살 것처럼 건강을 유지하고, 감각을 만족시키고, 고통을 줄이려고 지나칠 정도로 애를 쓰는 겁니까? 우리는 아침식사를 위해서는 그리 재빠르면서 왜 영성체를 위해서는 그렇지 못합니까? 목마르지 않도록 마실 것을 늘 곁에 두고 신경을 쓰는 우리는 영혼의 참된 음료인 묵상에 대해서도 그렇게 염려합니까? 우리가 기도를 아주 짧게 하고, 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덜 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많은 영광을 낭비하는 무분별한 사람들이 됩니다! 육신이 더 많은 선을 행하도록 움직입시다.
죽음은 모든 사물을, 모든 사람을 분리시킵니다. 아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려 하는데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몇몇은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슬픈 순간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고 떠나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주변에 남아 있긴 하지만 자기들의 일로 여념이 없습니다. …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도움과 잠심이 필요한데 …) 다음과 같은 구절을 들어보십시오! “아, 불쌍한 사람, 하느님이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희망합시다!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잘난 성격 때문에 …” 이렇게 끝나버리는 상태에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우리 죽음의 침상 주변에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만 머물도록 합시다. 우리는 모두 다 죽을 것이고, 묘지로 가고 나면 우리 주변의 모두는 각자의 일터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우리에 대해서는 잊어버릴 것입니다! 누구나 다 똑같을 것입니다!
혹시 죽은 이들을 많이 생각합니까?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까? 죽은 우리를 위해 다른 이들이 기도하더라도 우리의 공덕은 전혀5 증가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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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행하는 선행은 삼중의 가치를 지닙 니다.
ㄱ) “절대적인” 가치. 이는 ‘보속’이 될 수 있지만, 죽은 이들을 위해서는 단지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지는 ‘대리기도’에 의한 보속이 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열쇠로 문을 열어줄 수 있지만, 죽은 이들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 엄마에게 과자를 달라고 졸라대다가도 금세 잊어버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엄마가 여러분에게 믿음의 열쇠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ㄴ) “탄원”의 가치. 살아있을 때 행한 선행은 은총을 받지만, 죽은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칠 때 그들에게 보속의 상대적인 가치를 가져다줄 뿐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친 공덕 자체가 그들에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ㄷ) “진정시키는” 가치. 생전에 선행을 베푼 사람은 공덕을 쌓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채워드립니다. 다시 말해 자기 죄에 대한 참회행위에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이 행복하도록 선을 행합시다. 육신이 편치 못하더라도 인내하면서 공덕을 쌓도록 합시다.
죽음은 우리를 육신에서 분리시키고 사물에서도 분리시킵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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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영원으로 건너간 우리의 소중한 이들을 생각합시다. 우리는 그들에게 크나큰 사랑을 전하도록 하면서, 그들이 파멸의 장소에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맙시다. 그들은 영원의 세상에 있고, 그들의 육신은 묘지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먼지가 되어갈 것입니다.
왜 우리 감각을 늘 하느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습니까? 제대와 우리의 일상적 노동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 눈을 사용하고, 매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자매들 가운데서 거룩한 말, 언제나 평화를 가져다주는 감미롭고 조용한 말을 통해 우리 혀를 성화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마음을 거룩하게 합시다. 지성을 잘 사용합시다! 우리는 가장 좋은 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헛된 후회로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 지금이 그 때입니다. 에너지와 활기로 가득 찬 여러분입니다. 성모님께서 72세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까! 은총이 가득하셨기에 늘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사랑하셨고, 취침중에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얼마나 많은 공덕이 있었습니까! 믿음은 얼마나 깊고, 그 희망의 빛은 얼마나 밝으며, 사랑의 열기는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 사람들은 죽음의 시간에 “우리에게 한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그러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시간을 활용합시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곧바로 하루의 모든 시간을 잘 사용하려는 거룩한 지향을 가집시다. 그리고 우리 의무를 잘 수행한다면 틀림없이 시간을 잘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에게 5분의 시간이 주어질 때, 그들은 울고 후회하는 데에 그 시간을 써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수다를 떨며 시간을 허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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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우리의 의무수행을 소홀히하는데 제발,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주님을 사랑하고, 한층 더 그분을 사랑합시다. 시간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로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휴식을 취하면서, 무익한 일에 전념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일을 즐기면서, 자신의 행동에 올바른 지향을 두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이제부터는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 우리가 자고 있을 때에도, 죽음을 생각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죽음의 때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는 은총을 오늘 저녁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청합시다. 그렇게 할 때 공덕을 쌓는 데 더 주력하게 될 것입니다!

2) 잘 죽을 수 있도록 준비할 것

월피정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하게 됩니다. 첫째, 지난 한 달 동안 잘못한 것에 대한 고백과 잘 행한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리기 위한 성찰. 둘째, 새로운 달을 위한 결심 세우기. 셋째, 주님께 끊임없이 선종의 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금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은 1934년을 다시 되돌아보며, 잘못을 보속하고, 주님에게서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피정은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모든 빚을 갚기 위해, 성탄을 거룩하게 준비하기 위해, 그리고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새해를 더욱 거룩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죽음은 좋은 조언자입니다. 첫 번째로 죽음은 확실한 충고자로서 우리에게 ‘너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라.’라고 말해줍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은 불확실합니다. 죽음 다음에 천국이 오지만, 천국은 획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만이 모든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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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으로, 아무도 면제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고, 일반 역사와 교회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곧 모두가 죽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이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세례명부에 등록되는 것처럼, 어느 날 죽은 이들의 명부에도 등록될 것입니다.
우리의 묘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끝을 볼 수 없는 어느 날이 올 것이고, 우리가 결말을 보지 못할 어느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도 종이 울릴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 살지 또는 짧게 살지, 건강할지 또는 병이 들지, 세상에서 존경을 받을지 또는 무시를 당할지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만, 죽음만은 확실합니다.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Nihil est morte certius.”7 
그러나 마귀는 우리에게 죽음이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노인들도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공덕을 쌓기 위해 좋은 것이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성인이 되도록 선을 행하고, 그것도 빨리 행하라.’고 충고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의 자리는 유한하며, 하느님과 천사들이 저 높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살아 있을 때 명예와 만족만을 찾은 이들은 실망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우리 앞에는 오로지 무덤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지나갈 텐데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여행을 하는 사람은 지금 머무는 곳이 산악지대의 어디쯤인지, 숙소가 편안한지 아닌지, 함께 머무는 사람에게 호감이 느껴지는지 아닌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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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생각하지 않고,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모든 불편한 과정이 지나갈 것이고, 여행이 끝나면 그토록 열망하던 자기 집에서 편하게 휴식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자 카파소8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합시다. 일합시다. 우리는 천국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갑시다. 참된 우리 집에 머물게 될 때 안식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인정받거나, 멸시받거나, 칭찬받거나 시험에 드는 게 왜 그리 중요합니까? 
보십시오, 죽어가는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외적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사건이 없어도 죽을 수 있습니다. 영혼은 육신에게서 조용히 떠납니다. 손수건 하나조차 갖지 못하고 긴 여행을 위한 가방도 없이, 저녁만찬에 초대받은 것도 아닌데 그냥 홀연히, 아무것도 없이 떠납니다. 유일한 짐인 자기 공덕만 가지고 떠납니다. 그 공덕은 혼인잔치를 꾸며줄 보석이 될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의 모습을 흉악하게 망칠 악이 내게 남아 있다는 뼈아픈 후회만 가지고 떠납니다. 지난주에 저는 영원으로 떠난 한 부인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부인이 떠나기 전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는 가정에서 아주 인내롭게 살아야 했으면서도 언제나 침착했고,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언제나 활동적인 모습을 보이던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자주 해주었습니다.
모두 작은 일이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 가치를 지닙니다. 그가 많은 재능을 받았는지, 지성이 부족한지, 할 줄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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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은지 적은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외적인 치장은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본질적인 것이 부족할 때 말을 잘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준비합시다. 우리가 오래 살지 짧게 살지, 노인성 치매에 걸리게 될지, 마지막 순간까지 이성을 유지할지는 불확실합니다. 죽음이 불시에 침상에서 덮칠지 또는 길에서 덮칠지, 사도직 중에 덮칠지, 복도에서 덮칠지 또는 학교에서 덮칠지 불확실합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죽어갑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고해성사를 본 다음 곧바로 성당에서 죽거나 여행중에 죽고, 두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죽는 것도 보았습니다. 얼마 전 어떤 소년에게도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악은 갑작스럽고 냉혹합니다. 우리가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결코 하느님의 법정에 서기를 바라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를 거두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어느 날 아침 작은 침실에서 일어났던 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기상起床 시간에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당에 갔다가 청소를 하고 아침식사를 마치기까지 동료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지만, 무심하게 지나갔습니다. 보조 책임자도 지금까지 침대에 있을 정도로 피곤한가 하고 생각하다가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제는 게으름을 그만 부리도록 하자!” 하며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이미 모든 것은 끝이 났습니다. 이름을 부르면서 흔들어댔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의 이마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죽은 것입니다. 죽음은 그처럼 조용하게, 겨우 50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함께 자고 있던 동료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다가온 것입니다.
죽음이 갑자기 다가왔다고 해도 자기 의무를 다 이행했다면 갑자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갑자기 다가온 것이지만 갑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우리는 잘 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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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죄를 짓지 말고, 벌 받을 일 없이 잘 살아야 합니다. 희년을 잘 맞이하십시오. 많은 공덕, 곧 영원한 삶을 위해 많은 공덕을 쌓으십시오! 어느 날이든 준비를 잘 갖추도록 합시다.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충고입니다. 의인의 죽음이 있고, 악인의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삶을 [살았습니까?] 고해성사를 늘 냉담하게 보았던 사람은 마지막 순간도 냉담하게 맞이할 것입니다. 늘 냉담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노자성체도 냉담한 마음으로 모실 것이고, 병자성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생각, 어떤 말이 옳다고 여기고 있지만, 죽음의 순간에는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그러므로 위대한 근면, 겸손, 사랑이 필요합니다. 악한 자의 죽음을 맞게 될 사람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불행으로 죽고, 의인을 미워하는 자들은 죗값을 받으리라mors peccatorum pexima.”9 태만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남용하는 사람입니다. 성인들의 거룩한 죽음을 닮는 사람은 복됩니다. “당신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의 눈에는 소중하네Preziosa in cospectu Domini mors santorum eius.”10 성 이냐시오11의 죽음, 성 알로이시오(루이지)의 죽음, 복자 카파소의 죽음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들은 그럴 만한 공덕을 쌓았습니다. 과연 성인의 죽음은 어떤 것입니까? 마침내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그가 늘 열망하던 분이십니다. 그 영혼은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12 마침내 그런 일치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비록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 이전에도 일치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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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민감하게 느끼는 일치가 될 것이고, 그를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두 가지 수단이 있습니다. 첫째, 잘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잘 산 사람에게 거룩한 죽음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이러한 은총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 적절한 기도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기도”입니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기도를 통해 죽음의 순간에 전대사를 받게 됩니다.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지 않게 되도록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더 자주 바칩시다. 또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며 끝나는 호칭기도와 “영혼을 맡기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적어도 월피정 때마다 바칩시다.13 
죽음은 확실하다고 우리는 말했습니다. 이제 죽음은 우리에게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확실하게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늘 ‘조심하라!’고 알려줍니다. 악인들의 죽음은 전율할 정도로 무섭지만, 성인들의 죽음은 보물처럼 귀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거품만 가득한 애매한 신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것은 소홀히 다루면서, 수천 가지나 되는 부차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그 대신 성인들은 단순하게 천국에 대해, 하느님에 대해, 죽음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주님은 당신 성자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 은총을 주십니다. 아, 우리 가운데 아무도 지옥 형벌을 받지 않도록! 두려워하는 사람은 안전하지만, 과신過信하는 사람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거룩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넓은 마음과 겸손으로 우리 성화에 전념합시다. 삶은 지나가고 인생은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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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화를 위한 의무

[가해 대림 2주] 주일 복음: 마태 11,2-10이 복음 말씀은 여러분의 월피정을 정말 아름답게 마무리지어줍니다! 피정이 무엇입니까? 피정은 믿음을 통해 우리를 비추어주고, 우리가 절뚝거리며 걷고 있을 때 제대로 걷게 해주며, 하느님 말씀을 잘 따르게 해주고, 필요하다면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부활하게 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14
예수님은 누구에게 아부하거나 속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누구이던 내면과 외면을 다 아시고 분별할 줄도 아십니다. 성 요한을 솔직하다고 칭찬하신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늘 솔직하게 그분이 누구신지 고백했고, 항구함과 보속의 정신으로 은총에 대한 응답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성 요한을 본받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결하게 하고, 우리의 불완전함을 정화하여, 그분의 충만한 은총 안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곧 거룩한 성탄에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도록 우리의 영혼을 맡겨드립시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권능을 깨우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Excita, Domine, potentiam tuam et veni!”15 이번 주일 화답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주님 백성의 마음을 밝히시어 순수한 믿음과 거룩한 삶으로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그날을 향하여 걸어가게 하소서Excita, Domine, corda nostra ad preparandas Unigeniti tui vias.”16 대림 첫 주일에는 주님이 당신 권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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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떨치시기를 청하고, 둘째 주일에는 우리의 나태함을 일깨워주시기를 청합니다. 이 ‘두 기도’는 상통하는 데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우리의 협력을 맡겨드리면서 주님이 오시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133
예수님이 요한을 칭찬하신 내용을 우리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보아라,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고, 수많은 대피정에서, 많은 피정에서, 수년간 많은 은총을 받았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변하는 이들처럼 항구하지 못한 변덕스러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이들은 늘 과장된 감상이나 감동을 따라가기 때문에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거나, 피상적인 것에 머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피상적인 변화가 아닌 인내, 항구함, 겸손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맙시다! 성화를 위한 작업은 길고, 신중하고,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얼마나 많은 세상 사람들이 주위환경에 따라 선하게 또는 악하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계속 좋은 결심을 세우고, 인내합시다. 하루 만에 모든 것을 이루려 하지 맙시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Gutta cavat lapidem.”17고 했습니다. 환경은 변하겠지만 결심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성 요한의 극기를 칭찬하십니다. 그는 유복한 가정의 안락함을 벗어나 낙타 털옷을 입었으며, 세상 극변인 광야에서 극한의 극기를 하며 살았습니다. 고향에서 살면서 얼마든지 주님을 섬길 수 있었지만, 메시아를 향한 그의 사랑은 그를 방해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완전히 끊게 했습니다.
극기는 영적 성장을 위해 필요불가결합니다. 음식의 극기에서 시작하여 욕망18의 극기, 마음의 극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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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처럼 여분의 것을 끊어버립시다. 적어도 마음에서 떼어냅시다. 우리 아버지 성 바오로의 권고처럼,19 풍요로움 속에서 남용하지 말고, 궁핍함 속에서 불평하지 않고 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지상의 재물에 대해서는 모두20 희생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 언제나 더 낫습니다. 가진 것이 적을 때21 우리는 더 쉽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꼭 필요한 것으로 만족하고, 주님이 좋아하신다면 그것조차 포기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2 사실 성 요한은 광야에서 자신을 정화하고 성화하는 길을 걸음으로써,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들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혹시 그가 메시아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메시아임이 알려졌을 때에도 그들은 요한의 위대한 고행을 높이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더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고행을 덜 했고, 따르는 제자들도 요한의 제자들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성 요한에 우리를 비추어보며 그를 본받읍시다. 오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무거운 짐이 있다면, 그런 것을 우리에게서 치울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고행과 설교를 한 성 요한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자, 그는 자신의 과업이 끝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제자들을 보내 그분을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만 그 많은 활동을 펼쳤던 성 요한이 외딴 곳으로 물러가는 모습이 얼마나 감탄스럽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행하고 있는 선善에서 얼마나 이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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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까? 주님의 더 큰 영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절호의 기회로 보여도 뒤로 미룰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 요한은 많은 고행과 많은 수고 끝에 순교까지 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께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에 대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우리도 그처럼 극기하고, 그처럼 겸손하고, 그처럼 적극적이고, 그처럼 자신을 숨기기를 좋아하고, 그처럼 우리가 행하는 선과 세상에서 이탈해 있습니까? 아기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도록, 그리고 하느님이 확실하게23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든 진보를 그분과 함께 이루시도록, 대림시기의 보호자이신 이 위대한 성인을 본받읍시다. 성 바오로도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24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합시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임을 늘 인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춥시다.
천상 스승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Sine me nihil potestis facere.”25 자신에 대해 자랑하려는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본기도로 끝맺읍시다. “오 주님, 당신께 청하오니, 당신 외아드님의 길을 준비하도록 저희 마음을 일깨워주시어, 그분 오심을 통해 정화된 영혼으로 당신께 봉사할 수 있는 공덕을 쌓게 해주소서.”
원하는 것velle과 완전하게 되는 것perficere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분께로 향하게 하고, 그분의 전능한 은총에 온전히 신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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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장(23.3x35)으로 된 월피정 등사본. 세 차례의 강의가 들어 있다. 두 차례의 강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토요일 오후에 한 것으로, 잡지에 실린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EC, 12[1934] 1) “오후에 시뇨르 프리모 마에스트로께서 하신 두 차례의 강의로 피정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 강의는 대림 2주일인 이튿날 아침에 했다. 날짜는 알바, 1934년 12월 8-9일로 나와 있다. 등사본에서는 제목이 “월피정”이라고 되어있고, “1), 2), 3) 강의”로 세분되어 있다.

1 알베리오네 신부는 성모 승천 대축일에 관한 전통을 설명하고 있다. 이 교의는 비오 12세가 정의내린 것이다. 1950년 11월 1일에 반포된 교황령 Munificen-tissimus Deus 참조. 교황령은 마리아의 승천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 지상의 삶이 끝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에 싸여 하늘로 오르셨다.”

2 창세 2,17.

3 창세 3,19.

4 집회 7,36.

5 un ette는 아무것도 아닌 것, 곧 최소한의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다.

6 루카 6,38.

7 시편 89,49 참조.

8 San Giuseppe Cafasso(1811-1860)는 피에몬테 출신의 사제이다. 토리노 콘솔라타 기숙학교(Convitto Consolata)에서 사제들의 양성과 고해성사 직무, 수감자들과 사형수들에 대한 교정사목을 보조했으며, 알폰소 성인의 윤리신학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알베리오네 신부가 많이 읽고 추종하던 저술가들 중 한 사람이다.(AD 133 참조)(역주-1947년에 시성되었으므로 본문에서는 복자로 명기됨)

9 시편 34,22.

10 시편 116,15.

11 Ignazio di Loyola(1491-1556)는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며, 1540년에 “예수회(Compagnia di Gesù o Gesuiti)”를 창설했다. 그의 대표작은 「영신수련」이다.

12 바오로 가족이 바치는 화살기도.

13 이 기도들은 「영원한 격언Massime eterne」, 「행복의 비결Un segreto di felicità」 등 당대의 신심서적에 들어 있다.

14 루카 7,24-25.

15 대림 1주일 미사; 시편 80,3 참조.

16 대림 2주일 미사 본기도 참조.

17 오비디우스(Ovidio)가 인용한 유명한 라틴어 속담. “끝까지 견디는 자가 승리한다.”는 의미.

18 감각적인 욕망(desideri sensibili)에 해당하는 표현.

19 필리 4,12 참조.

20 원문에는 affatto로 되어있다.

21 원문에는 più로 되어있다.

22 루카 14,33.

23 immancabilmente.

24  1테살 4,3.

25  요한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