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예레니모가 증명하듯 성 루카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문체는 그가 높은 교양1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가 질병과 치유에 대해 말할 때 정확하게 사용한 전문적 용어는 그 자신이 의학을 제대로 알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성 바오로는 그를 “사랑하는 의사”라고 부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화가이기도 하여, “성 루카의 마돈나”라고 불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의 모습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는 성 바오로의 활동 덕분에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여 트로아스에서 성 바오로를 만난 다음 거의 모든 선교 여행에 동행하였으며, 성 바오로가 카이사리아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는 매우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내 복음에 따라”라는 성 바오로의 표현이 루카 복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대부분은 성 바오로의 선교 사명을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은 성 바오로의 첫 투옥에 대한 체험을 설명합니다. 성 바오로가 참수된 다음 루카는 그리스에서 설교했으며, 그도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 루카는 세 번째 복음서 저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의 이유와 목적을 제시합니다. 모든 교부는 성 루카가 신약성경 저자 가운데 가장 우아한 작가이며, 성 바오로의 생각과 말씀을 반향한 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 바오로는 물론 다른 사도들에게서도 이방인들을 향해 선포된 복음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사가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진리, 곧 테오필로스가 이미 배운 교리를 널리 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루카는 일차적 가르침을 주지 않고,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서술된 역사적 사건, 곧 신앙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테오필로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세 번째 복음서의 구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성 마르코와 성 루카 사이에 자료와 배열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성 루카가 성 마르코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데 동의합니다. 두 번째 복음사가는 루카보다 일찍 저술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루카는 그리스인들을 위해 글을 썼습니다. 사실 그는 이방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 없는 많은 것을 생략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칭찬할 수 있는 내용을 부지런히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 복음서는 우아한 문체로 쓰인 것만 아니라 잘 정리된 문헌과 서문, 개념으로 그 시대를 이해하는 진정한 역사적 작품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유년기를 좀더 자세하게 다룸으로써 첫 두 복음서를 완성합니다.
성 루카 자신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사도행전은 단일한 작품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세 번째 복음서의 끝과 사도행전의 시작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저자가 그렇게 되길 바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가 자기 복음을 마무리하면서 쓴 내용은 이미 두 번째 작품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사도행전은 그가 성 바오로의 제자임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책의 대부분이 성 바오로의 사도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목적은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2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 루카는|
성령의 힘으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의 연속이고 완성이며 화관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교회의 삶, 은총의 승리, 그리스도교적 덕목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복음의 개론이요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 바오로 서간과 다른 사도들의 서간에 필요한 입문이기도 합니다.
“영원토록 당신 규정을 잊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그것으로 저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93)
이 세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성경이 어떻게 우리 영혼을 위한 생명의 샘이 되는지, 다시 말해 성경을 읽는 것이 어떻게 영혼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굳건하게 하며 유혹에서 보호해 주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어떻게 연옥의 고통을 면하게 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향상시키며, 묵상, 성체방문, 양심성찰 등 모든 신심 행위에 도움이 되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매월 세 번째 열흘이 시작되는 첫 날(21일), 우리는 성경을 읽는 것이 어떻게 영혼을 죄에서 정화시키는지, 영혼으로 하여금 지상의 것에서 이탈하여 하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끄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 * *
거룩한 미사 때 사제는 (복음 봉독 후에) “이 복음 말씀으로 저희 죄를 씻어 주소서Per evangelica dicta, deleantur nostra delicta.”라는, 매우 짧지만 의미 있고 놀라운 효력이 있는 |
기도를 바칩니다.
복음의 거룩한 말씀은 세 가지 방법으로 우리 죄를 사해줍니다.
ㄱ) 성경을 읽는 것은 성사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수를 찍어 십자성호를 그으면 소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처럼 성경을 읽는 사람도 누구나 자신이 지은 소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올바른 지향과 자기 죄를 슬퍼하는 마음으로 복음서의 한 페이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많은 불완전함에서 해방되고 정화되기에 충분합니다.
ㄴ) 성경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북돋아줍니다. 성경을 읽고 하느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이를 즐거워하며, 72번(72권의 성경 저술을 의미함—편집자 주)이나 펜을 잡고 글을 쓰기로 하신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서 성경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영혼은, 사랑하는 아들이 멀리 떨어져 계신 아버지의 편지를 읽듯 성경을 읽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발치에 엎드려 겸손하고 신뢰에 찬 소년 사무엘처럼 거듭 말합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Loquere, Domine, quia servus tuus audit te.”3
이것이 바로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실 교회는 모든 사제가 미사 때 거룩한 복음을 봉독한 다음 입맞춤을 하게 합니다. 복자 코톨렌고4는 참으로 커다란 애정과 사랑을 다해 복음을 읽고 입맞춤하는 것을 지나가던 행인들마저 알아차렸으며, 미사 후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통한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거룩한 사제가 복음을 읽은 다음 사랑으로 불타올라 |
홍조를 띤 얼굴로 미사경본에 입맞추는 모습은 마치 미사 경본이 간직하고 있는 숭고한 진리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오! 참으로 하느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하며 그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그려볼raffigurare5 수 있습니다.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 말씀을 들었다.”6
여기에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의 감탄할 만한 예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잠심과 감미로운 침묵 속에서 당신 아들 예수님의 거룩한 입에서 흘러나온 모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묵상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간직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했다.”7
성경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 죄를 용서받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무척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많은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8
주님이 바라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일상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서서히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 만을 바라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원할 만큼 자신의 원의가 거룩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ㄷ) 셋째로, 성경은 영혼에게 용서를 베풉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여전히 죄 속에 있다 해도 조만간 변화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 자체가 매우 효과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모든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을 아는데, 으뜸가는 은총은 영혼이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회심한 죄인들의 수많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1장을 읽다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성 힐라리오, |
시편을 읽다가 회심한 철학자 성 유스티노, 복음을 읽고 회심한 안티오키아의 성 테오필로와 아테나고라,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Laudate pueri Dominum”9이라는 시편 노래를 듣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빛을 받은 성공회 사제 프레데릭 윌리엄 파버를 비롯한 수많은 예가 있습니다.
복음 봉독은 영혼에게서 죄를 없애줄 뿐 아니라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영혼을 변화시켜 성덕에 이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죄인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십시오. 그러면 그는 죄를 계속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침상에 누워 있던 청년 기사 이냐시오를 보십시오. 그는 지루한 시간을 때우려고 영웅들의 화려한 행적이 담긴 소설을 부탁했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거룩한 서적을 가져다 주게 했고, 그 가운데 거룩한 복음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읽고 그는 눈이 열렸고, 강한 은총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이냐시오는 로욜라 가문 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웅적 기사로 변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악마는 성경이 영혼에 미치는 힘을 잘 알고 있기에 성경이 신자들의 손에 닿지 않도록 온갖 술수를 다 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성경을 몸에 지니고 다닙시다. 이는 악마의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강력한 힘이 될 것입니다.
귀감 – 실비오 펠리코.10 정치적 음모로 베네치아 ‘피옴비 교도소’에 들어가 고독과 엄격한 수감생활을 하며 쇠약해진 젊은 애국자 실비오 펠리코는 자기 영혼의 선익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체험을 했습니다.
펠리코는 교도소에서 독서를 할 수 있었는데, 여러 책 가운데 그는 성경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암울함에 빠진|
그가 한쪽에 제쳐 둔 성경에는 먼지가 얇게 덮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교도관 아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무례한 표현에 용기 있게 나서서 성경을 옹호했고, 그때부터 성경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펠리코는 그 당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도관의 자녀들 가운데 한 소년이 나를 찾아와 다정하게 안기면서 말했다. “당신이 더는 저런 책(libraccio: 나쁜 책 - 옮긴이)을 읽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이 우울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성경을 집어 들었다.
손수건으로 먼지를 닦아내고 아무데나 펼쳤는데 이러한 말씀이 눈에 띄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11
나는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그 소년은 성경 위의 먼지를 보고 내가 더는 성경을 읽지 않으며, 이처럼 하느님을 소홀히 한 내가 더 사랑스러워졌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는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잘못을 아파하며 말했다. “얘야 그게 아니란다!” 나는 다정한 어조로 소년의 말을 부정하였다. “이 책은 나쁜 책이 아니란다. 실은 내가 성경을 얼마 동안 읽지 않았기 때문에 내 상태가 엄청 더 나빠진 거지 …”
소년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성경을 다시 집어 들은 것에 대해, 그리고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아 내 상태가 더 빠졌다고 고백한 것에 대해 기쁨을 느꼈다. 나는 다소 언짢아진 착한 그 친구를 달래주었고, 또 그와 화해를 한 것 같았다. …
나는 성경을 의자 위에 올려 놓고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읽어내려 갔는데,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던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12
작은 희생 : 오늘 성경의 참된 의미가 더 잘, 더 효과적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세 가지 절제를 할 것.
아, 구원을 베푸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정녕 당신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부끄러워하며 수치를 당하리라.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치욕 속에 물러가리라.
이스라엘은 주님께 구원을 받았으니
이는 영원한 구원이어라.
영원무궁토록 너희는 부끄러움도 수치도 당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는 숨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어두운 땅 어느 구석에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야곱의 후손들에게
“너희는 나를 혼돈 속에서 찾아라.” 하고 말하지 않았다.
나 주님은 의로운 것을 말하고 바른 것을 알린다.
민족들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자들아
모여 오너라. 다 함께 가까이 오너라.
나무 우상을 떠받들고 다니는 자들과
구원을 베풀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지각없는 자들이다.
말해 보아라. 설명해 보아라. 함께 의논해 보아라.
누가 이것을 옛날에 들려주었느냐?
누가 이것을 예전에 알려 주었느냐?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 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내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
그분께 격분하는 자들은 모두
그분 앞에 와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은
주님 안에서 승리와 영예를 얻으리라.”(이사 45,15-25)13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1-47)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 저희 조상 때부터 이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죄악 때문에 오늘 이처럼, 임금들과 사제들과 더불어 저희가 여러 나라 임금들과 칼에 넘겨지고, 포로살이와 약탈과 부끄러운 일을 당하도록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주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지금, 하느님께 저희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당신의 계명들을 저버렸습니다. 이 계명들은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은 그 지방 백성들의 더러운 짓과 역겨운 짓으로 더럽혀진 곳이다. 그들은 부정한 상태에서 그 땅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역겨운 짓으로 가득 채웠다. 그러니 너희는 이제 너희 딸을 그들에게 시집보내지 말고, 그들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지마라. 결코 그들이 누리는 평화와 안녕을 좇아서는 안 된다. 그래야 너희가 강해지고 그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으며, 너희 자손들에게 그 땅을 영원히 물려주게 될 것이다.’
저희가 겪은 것은 모두 저희의 악한 행실과 저희의 큰 잘못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희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희 죄악에 비하여 가벼운 벌을 내리셔서,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기셨습니다. 그런데도 저희가 당신의 계명들을 어기고, 역겨운 짓을 저지르는 이런 백성들과 통혼하였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당신께서 남은 자도 생존자도 하나 없이 저희를 몰살시켜 버리실 정도로 저희에게 진노하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주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희 가운데에서 오늘도 이처럼 생존자가 남게 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잘못한 채 당신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만, 이제 저희는 저희 잘못을 지닌 채 당신 앞에 있습니다.”(에즈 9,6-15)
1 p.257과 p.218 참조. 지식에 관련된 교양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언급하고 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교양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므로 수단으로서의 면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후로도 자주 주장한다. “우리는 면학을 너무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모든 좋은 결과가 마치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공부하되 반드시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참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강론대에서 설교하는 사제처럼 우리도 적절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세상에 우리의 몫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글을 잘 쓰십시오. 언어를 배우고 문장기술을 잘 익히십시오. 무엇보다 사고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 우리 출판물을 통해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출판물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 안에서 길 진리 생명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ER 1, 1935, pp.107-108)
2 사도 1,8.
3 1사무 3,10.
4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의 예는 더욱 생생하다.(p.204의 각주 11 참조)
5 raffigurare(그리다, 상상하다)는 paragonare(비교하다)에 맞지 않는 동사다.
6 루카 5,1:“turbae irruerunt in eum ut audirent verbum Dei.” 불가타는 “Cum turbae irruerent in eum ut audirent verbum Dei…”라고 번역한다. 이탈리아주교위원회는 2절을 “군중이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라고 번역한다.
7 루카 2,51: “Maria autem conservabat omnia verba haec, conferens in corde suo.”
8 루카 7,47: “Remittuntur ei peccata multa, quoniam dilexit multum.”
9 시편 113,1.
10 p.78의 각주 1 참조.
11 루카 17,1-2: Et ait ad discipulos suos: Impossibile est ut non veniant scandala: vae autem illi per quem veniunt! Utilius est illi si lapis molaris imponatur circa collum eius et proiciatur in mare, quam ut scandalizet unum de pusillis istis. 마태 18,7 참조.
12 실비오 펠리코, 「나의 옥중기Le mie prigioni」(1832), 24-25장에서 발췌. 실비오 펠리코(1789-1854)는 이탈리아 19세기 낭만주의 산문작가, 시인, 극작가, 애국자. 「나의 옥중기」는 1820년 혁명파에 가입한 혐의로 오스트리아 경찰에게 체포되어 석방되던 1830년까지 지낸 슈필베르크 요새 감옥생활을 묘사한 것이다. (옮긴이가 덧붙임)
13 이 책은 이사 45,15-26을 가리킨다. 불가타 번역본의 이사야 45장은 26절까지 있는데 새 번역본에는 25절까지 있다. 23절과 24절이 23절 하나로 합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