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한 자기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선택된 민족의 세 번째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스무 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자신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임금으로 선출되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젊은 임금은 선과 악의 길을 분별하고 정의롭게 통치하기 위해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청했습니다. 솔로몬이 부나 지상의 재화를 청하지 않아 매우 기뻐하신 주님께서는 그가 청한 선물 외에 부와 영광 또한 덤으로 주셨습니다. 실제로 솔로몬은 하느님 백성의 임금들 가운데 가장 지혜롭고 부유한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4년차에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이 이미 계획했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6만 명의 일꾼들이 그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금과 은, 가장 귀중한 보석들이 매우 풍성하게 성전에 장식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웅장한 건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흡족한 마음을 표현하시기 위해 봉헌절 동안 주님의 집을 가득 채운 구름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신비로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희생 제물을 불살랐습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가장 먼 나라에까지 퍼졌지만 그는 너무 유명해져서 안타깝게도 주님과 그분의 법을 잊고 말았습니다. 외국인 여성들이 그를 우상숭배에 빠뜨렸으므로, 그는 끔찍한 불경스러움에 물들어 구원이 불확실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거룩한 지혜로 가득한 네 권의 성경, 곧 잠언, 코헬렛, 아가, 지혜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인들 가운데 대중적인 격언 외에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기술, 하느님에 따라 잘 살아가는 기술을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현자들이 공들여 전하는 말씀을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언은 솔로몬이 주로 언급한 격언 모음으로 몇 차례에 걸쳐 수집되었습니다. 이는 지혜가 가르쳐 주는 내용에 따라 이상적인 삶과 대조되는 실제 삶을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코헬렛은 산문과 시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표현한 철학적 사고의 모음집입니다.
코헬렛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됨을 주제로 삼고, 주어진 문제의 시험에 합격할 때처럼 한 과목에서 다른 과목으로 글을 쓰면서 갑자기 지나가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 헛됨을 살펴봅니다. 학문, 쾌락, 재물의 우상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비참한 삶을 살펴보며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르기에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불행을 살펴보면서 행복에 대한 실제적 규칙을 제시하며, 먹고 마시며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지니고, 종교적 의무를 완수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삶의 철학을 제시합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에 이르고, 삶의 질서를 가져오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코헬렛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 율법을 지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결론 짓습니다.
이 책은 제목만 보아도 가장 아름다운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참으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어려운 노래입니다. 그안에서 인간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 곧 선택된 민족과 교회와 영혼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모습으로 기념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아가를 왕궁의 유혹과 대조되는 주인공들이 있는 짧막한 드라마로 여깁니다. 이는 신부가 사랑하는 배우자와 함께 들판에서의 삶을 위해 화려함을 포기하는 것을 노래합니다. 이처럼 이질적인 사랑은 호화로운 이교도 문명에 의해 위협받는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대다수의 교부들에 따르면, 이는 하느님과 교회, 영혼, 인류와 함께하는 말씀Logos이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매우 아름다운 비유2입니다. 하느님은 신랑이시므로 임금이라 불리며, 영혼과 교회와 인류는 신부입니다.
지혜서라는 이름을 채택한 것은 지혜서가 종교와 미덕에 대해 사람들과 나누는 거룩한 지혜를 숭고하게 찬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란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보고, 평생 동안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하느님을 경외하기 위해 하느님의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변적이고 실용적인 이 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느님에게서 오며, 이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창조되지 않은 지혜의 참여입니다.
거룩한 작가는 두 가지 큰 그림을 그리는데 처음에는 지적, 도덕적 측면에서 지혜를 제시하고, 두 번째는 역사적 측면에서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이 책은 정의와 종교, 행복과 불멸의 원천을 실천하도록 촉구하고, 이승과 다음 생에서 의인과 악인의 다른 운명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부분은 다양한 측면에서 우상숭배의 기원과 부도덕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특히 이집트의 재앙에서 대조적인 유다인과 이집트인을 살펴보며 의인과 악인을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두루마리를 받아 삼켜라.”(묵시 10,8)3
이 마지막 성체조배 시간에 우리는 성경보다 인간적인 책을 더 좋아하는 많은 사람과 그리스도인이 스승 예수님께 드린 슬픔에 대해 보속하고자 합니다.
이 거룩한 책이 아닌 다른 책만 많이 읽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은 세상 땅끝 어느 구석에나 박혀 있을 아주 작은 금 조각을 찾아다니면서도 금덩어리로 된 산과 같은 성경은 보지 못합니다!
돌팔이 말은 뭐라 해도 귀 기울이며 다 믿습니다. 만병통치라도 되는 양 그가 권하는 특효약을 삽니다. 특효약이라 해봤자 물과 벽돌을 섞어 뭉쳐놓았을 테지요. 그러고는 무척 비싸고 귀하게 팔립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하기는커녕 자기 이익 챙기는 데에만 급급한 사람한테서 건강을 사려 합니다.
또 소설은 찾기도 많이 찾고 값도 비싸게 팔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별로 찾지 않습니다!
어느 서점을 가든 여러분이 찾는 책이 있고, 여러분이 찾는 소설이 있을 테지만, 책의 으뜸이 되는 책은 찾기 어렵습니다. 설령 있다 해도 다른 책 아래 깔려|
구석진 곳에나 있을 테지요! 모든 것이 각기 자리가 있으나, 하느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아! 바로 여기서 악마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현상을 달리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함께 보속합시다! 우리가 먼저 자주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경을 읽도록 권합시다. 지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나쁜 책이나 덜 진지한 책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면, 그러한 책은 태워버리고 그 대신 성경을 구입하라고 권고합시다.
* * *
이제 성경을 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첫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성경을 읽기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깊게 살펴보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성경에서 200번이나 읽게 됩니다.
하느님 몸소 거룩한 저자들을 움직여 성경을 쓰도록 하셨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를 그분께서 바라셨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성사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성사를 받아들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시겠습니까?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성경을 쓰게 하셨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기 바라신다는 것 또한 명백합니다.
둘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성경을 읽기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성경을 읽는 귀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셔서 성경을 읽고 경청하며 묵상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4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라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의 권고가 아직 귀에 쟁쟁하던 초대교회 신자들은 날마다, 심지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성경을 읽었습니다. 위험과 박해의 순간이 와도 성경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그들은 언제나 성경을, 적어도 거룩한 복음서를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앙을 통해 역경을 이겨낼 힘을 얻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신앙을 위해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힘을 얻은 것입니다.
셋째 이유는 우리가 성경 읽기를 교회가 바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분류하여 쉽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최고기관인 교황청은 성경 읽기를 얼마나 많이 권고했는지요!5
성경 연구에 관한 레오 13세의 회칙「지극히 섭리하시는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 근대주의자들의 학설에 관한 비오 10세의 회칙「주님 양떼의 사목Pascendi Dominici gregis」, 성 예로니모에 관한 베네딕토 15세의 회칙「보호자 성령Spiritus Paraclitus」은 모두 성경에 대한 것으로, 성경이 읽히기를 바라는 교회의 간절한 소망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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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며, 또 성경을 읽는 데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개신교 신자들은 자기들만의 고유한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참된 성경에서 모든 주석을 없애고, 어떤 면에서 는 그들 자신의 열정을 다그치는 내용만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절단된 성경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으로 인해 직접 깨달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이해하는 만큼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교회의 손에서 성경을 받아들여 교회의 방침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오로지 교회에만 당신 책을 맡기셨기 때문이며, 오로지 교회만이 성경을 오류 없이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처럼6 개인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각자가 이해한 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성령은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교회만이 성경을 완전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리엔트 공의회가 주석이 없는 성경을 읽는 것을 금지한 까닭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참된 길에서 일탈하는 심각한 위험에 처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배우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만 성경을 읽습니다. 반면에 가톨릭 신자들은 자신이 비추임 받기 위해서만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 계명, 가르침 등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알기 위해서 읽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경에서 진리, 길, 생명을 찾습니다만, 개신교 신자들은 오로지 진리만을 찾습니다.7 따라서 그들의 모토는 “죄를 많이 짓고 더 굳게 믿으라 pecca fortiter et crede forties.”8는 것이라고 그들은 설명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똑같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
자선 활동과 미덕과 도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 자체에서 뽑은 몇몇 구절을 통해 바라보았습니다.9 그들은 선행을 부인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선행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며, 성경을 해석하는데 신뢰할 수 있는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해석만 믿는 사람은 거룩한 종교가 지닌 가장 명료하고 본질적인 진리들을 부인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가톨릭 방식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본질적인 진리들을 배우고 나서 교회의 손을 통해 성경을 받아들인 다음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결과 유다인들이 어떻게 처벌받았는지 성아우구스티노가 잘 설명합니다. 유다인들은 자기 방식대로 성경을 해석하길 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성론과 물질주의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에게 “저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친 유다인들이 되게 한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새롭게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예수님의 대리자인 교황,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의 신성한 모성애, 성사생활 대부분을 부인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가톨릭 정신으로 성경을 읽읍시다. 다시 말해, 가톨릭적 도덕을 이해하고 하늘나라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을 배우기 위해 성경을 읽읍시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읽었고, 성녀 안나에게서 성경 읽는 법을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천상 스승 예수님께 성경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거룩한 표양이 되는 분들을 통해 배우도록 합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의 사목자들에게서 성경을 받아들여, 교회가 보여주는 대로 무한한 사랑과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도록 합시다.
성경은 평범한 책이 아닙니다.|
호기심으로 새로움을 갈망하는 이들을 위한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무엇보다 성성에 이르는 책이며, 하느님의 책입니다.10*
교회가 비추어 주는, 오류가 없는 안내에 따라 “보라, 내가 세상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시며 세기가 다 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모든 이가 하느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귀감 –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잘 살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요한 5,31-47)
작은 희생 :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시다. 오늘, 예수님을 흠숭하기 위해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예언 말씀을 읽도록 합시다.
“나는 내 하느님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리라.
주님, 당신은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신 분,
힘이 놀라우신 분,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시자 생겨났으니
모든 조물은 당신을 섬겨야 합니다.
당신께서 영을 보내시니 그것들이 지어졌습니다.
당신의 목소리에 거역할 자 하나도 없습니다.
산들이 그 밑바닥부터 바다와 함께 뒤흔들리고
바위들이 당신 앞에서 밀초처럼 녹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그들을 당신께서는 가엾이 여기십니다.
향기로 바치는 희생 제물도 모두 별 것 아니고
당신께 번제물로 바치는 굳기름도 모두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언제나 위대합니다.
불행하여라, 내 겨레를 치러 일어나는 민족들!
전능하신 주님께서 심판 날에 그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다.
그들의 몸속으로 불과 벌레를 보내시면
그들은 고통 속에서 영원히 통곡할 것이다.”(유딧 16,13-17)11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때에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러하였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 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내시가 필리포스에게 물었다. “청컨대 대답해 주십시오. 이것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수레를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필피포스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26-40)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루카 1,46-55)
1 알베리오네 신부님은 집회서 또는 시라와 달리 코헬렛은 좀처럼 인용하지 않는다.
2 이 책이 성경 해석 방법으로 “비유”에 대해 언급하는 곳은 이곳뿐이다.(교황청 성경위원회,「교회 안에서의 성경 해석L’interpretazione della Bibbia nella Chiesa」, 31c 참조)
3 “Accipe librum et devora illum”: “가서 … 두루마리를 받고… 받아 삼켜라.”(묵시 10,8-9)
4 요한 5,39. 이 구절이 성경을 읽으라는 초대로 인용되었으나 원래 의미는 아닌 것 같다.
5 17p.과 p.30 참조.
6 이 책(LS)에서 알베리오네 신부는 성경을 읽는 것은 물론, 성경 해석 방법을 잘 아는 교회처럼 성경을 “완전하게” 또는 그리스도교적으로 잘 해석할 것을 권고한다.(pp.9, 17, 111, 285, 310) 성경은 일부 유다인들과(pp.40, 111) 그리스도교 이단자들에(p.260) 의해 잘못 해석될 수 있다. 독자들을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열정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알베리오네 신부에 따르면 우리는 스승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것처럼(p.319), 그리고 교회가 하듯이 성경을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해석의 규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12항 참조)에 제시된 것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 “겸손한” 사람들은 성경의 참된 의미를 꿰뚫어 올바르게 해석한다.(LS, p. 200)
7 이 일반화는 올바르지 않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몰몬교 저자인 영국인 브리검 헨리 로버츠(1857년에 태어남)는 요한 복음 14장 6절에 나오는 세 가지 기본 단어에 따라「진리, 길, 생명: 신학에 대한 기초 논문」에서 자기 생각을 설명하면서 처음 두 가지의 순서를 뒤바꾸었다. 로버츠는 자기 삶의 말기(1933년)에 이 논문을 출간하면서 자신의 자료를 세 부분으로 나눔으로써 학문과 성경을 하나로 묶는 복합성에 대한 성찰을 통합하고자 했다. (ㄱ) 땅에 관한 진리와 계시 진리, (ㄴ) 구원의 길, (ㄷ) 예수님의 지상 생활. 이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인의 전 존재를 형성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8 “실천 없는 믿음”은 개신교의 신앙고백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다. 루터의 정확한 진술은 “[Esto peccator, pecca fortiter :sed fortius fide] 죄인이 되십시오. 죄를 많이 지으면 신앙이 더 굳건해집니다.”였다. 1517년, (마르틴 루터를 소환해 루터의 견해를 심의한) 보름스 의회는 구원에 있어 실천은 필수적이라고 믿은 사람들을 비난함으로써 이를 확인했다. 이러한 입장과 이 책에 대해 더 정확한 평가를 위해 필요한 성경 구절은 성 바오로의 가르침(갈라 2,16; 3,2; 5.6, 티모 3,8)과 야고보의 가르침(야고 2:14,17,18,20,22,24,26)이다.
9 아마도 알베리오네 신부는 성 바오로의 서간 구절의 해석을 뜻하는 것 같다.(로마 3,27-28; 9,32; 갈라 2,16; 3,2) 바오로의 잘못된 해석은 그가 자선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율법의 행위”가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다.(갈라 5,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참조: 1코린 8,1; 12,31–13,13)
10* “성경은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의 영적 이미지를 볼 수 있도록 거울처럼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신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죄의 추악함과 우리 선행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며,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선에서 얼마나 많이 진보하는지, 완덕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볼 수 있다.”(성 대 그레고리오)
11 이 책은 불가타 번역본을 따라 “유딧 16, 15-21”이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