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는 유다 문학의 황금기, 아마도 솔로몬 시대에 쓰인 놀라운 시詩입니다.
이 책은 가장 끔찍한 불행에 시달린 욥을 보고 당황하여 할 말을 잃은 세 친구의 방문을 받은 매우 경건한 욥을 소개합니다. 고통스러운 침묵은 고뇌에 찬 욥의 외침, 그의 친구들이 신성모독으로 이해한 외침, 고통에 대한 가장 어려운 물음을 던짐으로써 깨집니다. 그의 친구들은 욥에게 그 자신의 죄로 인한 불행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이 결백하다고 선언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이를 믿지 않고 모욕하자 욥은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그의 친구들은 언제나 같은 순서로 세 차례씩 말을 하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두 번째는 말을 더듬고, 세 번째는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친구들이 침묵에 빠지자 욥은 자신이 결백하다고 선언하며 이러한 형벌이 자기 죄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 새로운 인물인 엘리후가 개입하여 고통의 목적을 드러내며 하느님의 지혜를 찬양합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하느님의 계획을 살피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담함을 드러냅니다.
알다시피 이 책은 가장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를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합니다. 그것은 의로운 사람이 왜 때때로 악에 의해 억압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가르침은, 고통이란 인간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정화하며 덕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섭리의 길을 호기심을 갖고 의아해하기보다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정의와 선의로 모든 것을 섭리하심을 생각하며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시편 119,97)
교의신학, 윤리신학, 수덕신학, 사목신학과 같이 신비신학 또한 성경에서 비롯됩니다.
신비신학이란 무엇인가? 신비신학은 특별한 여정을 통해 얻은 하느님과 영혼의 일치에 대한 것으로 거룩한 신학에 속하는데, 그 목적은 사람들의 영혼을 가장 높은 완덕으로 이끌며 가르치는 것입니다.1
신비신학은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실천하는 숭고하고 어려운 학문입니다. 그럼에도 신비신학은 안전하고 오류가 없는 성경과 전승을 바탕으로 하는 한 그 자체의 기원과 명확하고 확실한 원칙
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아경, 발현, 계시, 오상, 변모, 동시다발적 출현을 비롯한 여러 신비 현상처럼 특정 성인들의 삶에서 읽을 수 있는 특별한 모든 것이 신비 차원에 해당됩니다.
복자 젬마 갈가니2의 삶은 신적 차원을 띱니다. 루카 출신의 이 젊은 동정녀는 신비주의의 최고 단계인 영적 배우자가 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젬마 갈가니는 숨겨진 일들과|
미래에 대해 알고 있었고, 두 손과 발에 거룩한 오상을 받았으며, 자신의 수호천사가 자주 나타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초자연적인 은사를 즐기는 영혼들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1코린 12,7) 하고 말씀하신 성 바오로의 교의에 따라, 주님께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의 교화를 위해 허락하시는 온전한 무상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은사를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 12,11)라는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주님에게서 거저 받은 것이므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신비신학과 성경의 관계는 매우 가깝습니다. 사실 성령의 영감과 도움으로 글을 쓰는 성인 전기 작가들의 활동은 신비주의에 속합니다.
이사야가 그랬던 것처럼 몇 백 년 전, 선천적으로 비추임을 받아구세주의 생애 가운데 가장 소소한 특수 사항들을 예견할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복음과 성 요한의 묵시록을 읽을 때 그러한 책들이 신적 개입 없이 단순히 인간에 의해 쓰였다고 확신에 차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분명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그 안에 담긴 가장 숭고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는 신비로운 은사3를 통해 나왔습니다. 그 안에 담긴 많은 진리가 성인전을 통해|
기적적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성 요한이 환시를 보았던 것처럼 비전을 보거나, 모세처럼 하느님에게서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신비신학은 불확실하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확실한 학문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증거는 전적으로 거룩한 영감을 받아 기록된 성경입니다.
신비신학과 성경 사이에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 또 다른 이유는 신비신학 전체가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혼이 하느님께 이르기까지 들어 높여 주고,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와 가장 친밀한 소통으로 이끄는 숭고한 기도가 담긴 다윗 시편과 예언서와 같은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짧은 시를 모아 놓은 아가雅歌는 신비가들의 찬가라고 불립니다. 아가는 사랑에 빠진 영혼과 천상 배우자가 나누는 친밀한 대화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영혼의 혼인 상태인 가장 높은 신비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혼을 들어 높이려는 목표를 지닙니다.
이 책은 모든 신비 차원의 영혼이 좋아한 책이었는데, 그 가운데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은 사람은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였습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얼마나 큰 기쁨으로 깨닫게 되는지요!
이는 또한 아가에 나오는 매우 심오한 교의를 내면화하여 열네편의 서간을 집필함으로써 신비신학에 대해 다루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모든 영혼이 의탁할 수 있는 무한한 원천을 집대성한 성 바오로가 좋아한 책이었습니다.
성 바오로는 신비신학의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서간이라는 소중한 보물을 남겼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느님과 이룬 매우 높은 단계의 일치를 귀감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비학은 인간이 단순히 이성의 빛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학문이 아니라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학문입니다. 신비 신학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므로 그 기원은 물론 본질에 있어 모든 인간적 학문보다 뛰어납니다.
거룩한 교부들과 신비주의 박사들이 성경에서가 아니라면 그 어디에서 자신의 교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겠습니까?
거룩한 사랑을 목말라하는 영혼들인 여러분에게 저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 알폰소, 성 베르나르도, 신비주의의 박사라 불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쓴 책들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관련된 이 책들은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요? 그 책들은 성경에서 흘러나오는 잔물결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들고 읽으십시오. 바로 거기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타는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생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에 앞서 여러분의 천상 배우자를 사랑하는 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여러분은 그분과 함께 대화를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러분의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을 온전히 만족시키는 법을 찾을 것입니다.4*
예수회의 비티 신부는 사람들을 신비주의의 진정한 샘인 성경으로 이끌고, 바오로 안에서 신비 차원의 일치를 드러내는 가장 아름다운 귀감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3년째「치빌타 카톨리카」에 성 바오로의 신비신학에 대한 글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박학한 예수회 회원은 1931년 10월 17일자 발행호에 이 렇게 썼습니다. “성 바오로를 즐겨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과 친밀한 일치 안에서, 거룩한 사랑의 열정 안에서 성 바오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의 더는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인성이 신성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날 때까지 퍼져가는 일치를 깨달으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사도의 교의가 가르치는 개념들의 깊은 의미에 이르러 그 심연을 파헤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신학 분야에서 자신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신비신학의 예가 되는 귀감을 묵상하고, 모든 신비가의 영혼이 그랬던 것처럼 무한한 샘, 곧 성경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천사와 같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아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생애 마지막 밤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열렬하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느끼며「아가」전체를 주석했습니다. 이 뛰어난 박사의 죽음은 비참한 이 땅에서 천국으로 가는 통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따라서「아가」는 습관적으로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을 열렬히 읽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그가 맞이하게 되는 죽음은 본질적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진 천국으로 가는 결정적 통로가 될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영혼은 분명 배우자이신 예수님과 친밀한 일치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귀감 – 성 보나벤투라. 교회의 수많은 박사 가운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절친이자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성 보나벤투라는 특별한 빛으로 빛납니다.
완덕을 갈망한 그는 아주 어렸을 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고, 거기서 그는 아버지 프란치스코에게서 성체성사와 복되신 동정마리아께 대한 사랑은 물론|
면학과 영적 완덕에 이르게 하는 기초가 된 성경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선행의 여정에서 게으르지 않고 용감하고 관대하게 임하며, 자기 자신과 투쟁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이름으로 가장 큰 작업을 벌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에 대적하여 승리한 청년 다윗의 예, 유딧과 다른 여러 사람들의 예는 보나벤투라에게 모든 원수에 맞서 자신을 던져 싸우게 한 매우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정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드높은 성덕에 올라 마치 새로운 세라핌처럼 보여져 세라핌 박사라고 불립니다. 이처럼 가장 합당한 성 프란치스코의 자녀로서 그의 마음은 이제 갖가지 덕으로 넘쳐흘렀고, 마침내 자신을 표현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보나벤투라 성인은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모습으로 설교대에 올라가 몇 시간 동안 줄곧 말해도 듣는 이들이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보나벤투라의 열정에 비해 너무 적은 수 였기에 그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했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랐습니다. 복음서에서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거룩한 말씀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나벤투라는 무엇을 했을까요? 그는 펜을 잡고 글을 썼습니다. 그의 저술은 그야말로 세라핌 천사 같았습니다.
그는 코헬렛, 지혜서, 성 루카 복음, 성 요한 복음에 대한 해설과 수많은 주석 작업을 했을 뿐 아니라 복음에 대한 79차례의 강의를 집필했습니다. 그 가운데 주요 작품은「하느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Itinerarium mentis ad Deum」였습니다. 그 책에서 성인은 자신이 신비신학의 매우 높은 단계에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사실 그는 유명한 신비신학 박사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가 어디에서 그러한 지혜를 얻었는지를 우리는 그에게서 직접 들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책상 위에 계속 놓아 두었던 유일한 물품들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성경입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우리가 이끌어내야 할 가르침을 직접 우리에게 제시했습니다. “성경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참된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은 희생 :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살아가도록 묵주기도 신비 한 단을 바친다.
“저는 제비처럼 두루미처럼 울고 비둘기처럼 탄식합니다.
위를 보느라 제 눈은 지쳤습니다.
주님, 곤경에 빠진 이 몸, 저를 돌보아 주소서.
나 무어라 말하리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고
그분께서 행하셨는데!
내 영혼의 쓰라림 때문에
내 잠이 모두 달아나 버렸다네.
주님, 사람들은 그것들로 해서 살아가고
제 목숨은 그러한 모든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저를 낫게 해 주소서. 저를 살려 주소서.
보소서, 저의 쓰디쓴 쓰라림은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제 목숨을 지켜 주셨습니다.
정녕 저의 모든 죄악을
당신의 등 뒤로 던져 버리셨습니다.
저승은 당신을 찬송할 수 없고
죽음은 당신을 찬양할 수 없으며
구렁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당신의 성실하심에 희망을 두지 못합니다.
오늘 제가 하듯이
산 사람, 살아 있는 사람만이
당신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당신의 성실하심을 알립니다.
주님은 나를 구하시는 분.
우리 한평생 모든 날에
주님의 집에서 현악기 타며 노래 부르세.” (이사 38,14-20)
이로울 것이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예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시와 계시까지 말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열네 해 전에 셋째 하늘까지 들어 올려진 일이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 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몸을 떠나 그리 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낙원까지 들어 올려진 그는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떠한 인간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라면 내가 자랑하겠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 내가 설사 자랑하고 싶어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터이므로 어리석은 꼴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그만두겠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보고 듣는 것 이상으로 나를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2코린 12,1-10)
“나는 내 하느님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리라. 주님, 당신은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분, 힘이 놀라우신 분,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시자 생겨났으니 모든 조물은 당신을 섬겨야 합니다.
당신께서 영을 보내시니 그것들이 지어졌습니다. 당신의 목소리에 거역할 자 하나도 없습니다. 산들이 그 밑바닥부터 바다와 함께 뒤흔들리고 바위들이 당신 앞에서 밀초처럼 녹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그들을 당신께서는
가엾이 여기십니다. 향기로 바치는 희생 제물도 모두 별 것 아니고 당신께 번제물로 바치는 굳기름도 모두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언제나 위대합니다.
불행하여라, 내 겨레를 치러 일어나는 민족들! 전능하신 주님께서 심판 날에 그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다. 그들의 몸속으로 불과 벌레를 보내시면 그들은 고통 속에서 영원히 통곡할 것이다.” (유딧 16,13-17)5
1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은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이고 바오로적인 영성의 표현이기에 사도직의 본질적 원천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헌신과 결합은 초자연적 삶의 시작이요 끝이며 본질 그 자체입니다. 바로 여기에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이 있습니다.”(「성 바오로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p.1379; 참조:「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95)
2 젬마 갈가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임금님의 희생자요 배우자”로서 확실한 인상을 지닌 20세기 최초의 신비가요 오상을 받은 여성이다. 1878년 3월 12일 루카에서 태어나 1903년 4월 11일 같은 곳에서 선종한 젬마는 1940년 5월 2일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 책이 출판될 당시(1933)는 ‘복자’였다.
3 성경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 인간은 성경을 신비로운 선물로 받는다.
4* “완덕에 대한 느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느낌은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도덕적 선의 이상에 이르기까지 가장 순수한 영혼의 갈망이 개인적 욕망을 넘어서게 하십시오. 그 갈망들은 복음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을 것입니다.”(알렉산드로 만초니)
[외적으로 알려진 사건이 충분하지 않은 알렉산드로 만초니의 생애는(1785년 밀라노에서 태어나 1873년 선종함) 내적 추구와 면학, 깊은 종교성에 대한 내면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교양이 풍부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1810년 신앙으로 귀의했다. 안토니오 로스미니와 형제적 우애를 나눈 벗이었던 그는 자신의 영성과 정치·사회적 비전을 함께 나누었다.「약혼자Promessi sposi」(1821-1873)와「가톨릭 윤리에 대한 관찰Osservazioni sulla Morale Cattolica」의 저자인 그는 전례력에 나오는 주요 축일에서 영감을 받은 “거룩한 찬가”를 주기적으로 바치는 것을 고안해 냈다.]
5 이 책은 불가타 번역을 언급하며 “유딧 16,16-21”을 제시하지만, 현재 번역본은 16,13-17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