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해 그는 예언자들 가운데 첫 번째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관 시대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엘카나였고, 어머니는 한나인데 나이가 많았지만 주님에게서 아들을 얻어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봉헌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사무엘은 실제로 성전에 봉헌되어 주님을 경외하며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성장했습니다.
한편, 대사제 엘리의 아들들의 행실에 진노하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아들들을 전투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대사제 엘리는 그 불행한 소식을 듣고는 땅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사무엘이라는 다른 사제를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사제이자 판관 사무엘은 주님께 충실하여 지혜롭게 다스렸습니다. 그는 모든 우상과 이방신을 백성 가운데서 없애라고 명령하며 모든 이를 참회로 초대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용서하시어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하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 임금인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잘못에 대해 책망하는 거룩한 방법을 알고 있었으므로, 새임금 다윗을 세웠으나 다윗의 완전한 승리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판관기와 룻기는 사무엘이 쓴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왕기 1, 2권(70인역의 사무엘기 상 · 하권을 말함)도 그가 차지하는 큰 역할 때문에 그가 저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판관기는 여호수아(1442?)의 죽음에서 사울Saulle1(1075)을 선택하기 까지 하느님 백성을 다스린 지도자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지도자들은 한 지파, 또는 다른 지파에서, 심지어 여러 지파에서 동시에 나왔습니다.
첫 두 장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다시 말해 이웃 백성들에게서 끊임없이 비롯되는 위협, 당신 백성을 적의 억압에 맡긴 주님의 포기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 다음 오트니엘, 에훗, 드보라, 바락, 기드온, 입타, 삼손과 같은 몇몇 판관의 일화가 소개됩니다.
부록으로, 단 지파의 우상숭배 이야기와 벤야민 지파를 멸망시킨 기브아인들의 만행 이야기가 나옵니다.
룻기는 판관 시대의 가정생활 장면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린 작은 걸작입니다. 그 주제는 매우 간단합니다. 기근에 시달린 베들레헴 출신의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이주하여, 두 아들이 모압의 두 여인 룻과 오르파와 결혼하지만 죽게 됩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10년을 보낸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왔고, 시어머니와 헤어지지 못한 룻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룻은 보아즈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다가 그와 결혼하여 이사이의 아버지이자 다윗의 조상인 오벳을 낳습니다.
룻기에서 감동적인 것은 고통이나 불행을 영웅적으로 받아들이는 나오미의 강인한 자세, 룻의 신심과 겸손, 보아즈의 믿음과 관대함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세 사람은 국가적, 종교적 사랑의 감미로운 배경 아래 돋보이며 거룩한 선의를 드러냅니다.
열왕기 1, 2권 : 네 권의 열왕기2에는 필리스티아인들의 억압에서 벗어나(판관기가 끝날 무렵) 요아킴의 바빌론 유배에 이르기까지 선택된 백성이 걸어간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엘리와 사무엘의 판관 역할에 대해 언급한 다음, 나중에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책망을 받은 사울을 통해 이스라엘에서 왕권의 존엄성을 확립하게 된 것을 이야기합니다. 자기 대신 머지않아 다윗이 선택되어 그 역량을 드러내게 되리라는 이야기는|
사울의 시기심을 부추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사울은 다윗을 부당하게 핍박합니다. 한편 그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배당한 후 하루만에 비참하게 자기 아들들과 군대, 자기 생명과 나라를 잃었습니다.
두 번째 책은, 헤브론에서 사울의 아들과 전투를 벌인 다윗 왕국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후 예루살렘에서의 다윗의 통치, 그리고 다윗이 치명적인 죄를 지어 그의 영광이 끝나는 여러 종류의 단편적 문서로 마무리됩니다.
사무엘기라고 불리는 단일 작품을 구성하는 이 두 권의 책은 놀라운 통일성을 보여주는데, 아마도 사무엘과 갓, 그리고 예언자 나탄의 글을 통해 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시편 119,34)3
성 루카 복음서에서 우리는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4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의 눈을 열어 주시어 그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거룩한 스승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어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성경을 피상적으로 묵상하게 되면 성경을 일반 책들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책들에 비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문자와 종이의 껍질켜 아래 숭고하고 보편적이며 영원한 진리의 세상이 숨겨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소박한 겉옷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외형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사랑합니다. 성경에서 문자와 문자의 성령을 구별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성 바오로가 말하듯,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은 활력을 줍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 3,6)5
아, 그렇습니다! 잘못 해석된 문자는 목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히브리인이 구약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앞으로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세상에 오셨을 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6 그뿐 아니라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머리 위에 내렸습니다.
성경의 의미를 잘 이해하려면,7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를 진리의 길로 안전하게 이끄는, 오류가 없는 어머니이자 스승인 교회의 학교에 들어가야 합니다.
의미 없는 말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습니다. 곧 말의 시체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하길, 어떤 사람의 말이 보잘것없다는 것은 보통으로 그러한 말이 오직 하나의 의미, 곧 문자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편지이기에 음절과 그 음절을 구성하는 단어들이 결과적으로 거룩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이 빛을 비추는 기운에 둘러싸여|
인류가 소유하는 소중한 책으로 모든 이가 소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의미는 삼중적으로, 곧 문자적 의미, 신비적 의미, 수용적 의미를 지닙니다.
역사적 의미라고도 하는 문자적 의미는 단어의 일반적 사용법에 따라 그 단어가 지닌 자연적 의미에서 추론된 것이며, 이는 적절하거나 비유적일 수 있습니다.
적절하다는 것은 어떤 말을 들을 때 그 표현이 첫눈에 떠오르게 하는 것을 의미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마태 20,18)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실제로 팔레스티나의 수도로 가고 있었습니다.
비유적이라는 것은 단어가 문자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비유적으로 이해될 때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세례자 성 요한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하고 말할 때, 그는 “어린양”이라는 단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세례자의 말은 메시아가 작은 양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예수님의 온유함과 구원 활동을 암시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어린양 처럼 인간의 죄를 보속하며 속죄해야 했습니다.
영적 또는 전형적 의미라고도 불리는 신비로운 의미는 단어 자체에서 나오지 않고, 그 단어가 표현한 것들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성 토요일에 모든 애도를 끝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 너의 하느님께 돌아오라.” 하고 노래하게 합니다. 이러한 언급은 도시의 성벽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영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영혼, 교회, 천국을|
가리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사용합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모든 경우는 신비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이처럼 신비로운 의미는 또한 전형적 의미라고도 불립니다. 그 표현이 나타내는 것은 종종 또 다른 유형과 같기 때문입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른 유딧은 지옥의 뱀의 머리를 짓밟은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한 전형典型입니다.
모세가 만든 구리뱀은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표징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두었습니다.
수용적 의미는 실제로 성경에 담긴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성경 말씀과 구절에 부여하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는 올바른 지향과 그 지향을 세운 사람의 학문적 지식의 정도에 따라 다소 사실이거나 적절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18편 27절8은 이렇게 말합니다. “깨끗한 이에게는 깨끗하신 분으로 그를 대하시지만, 그릇된 자에게는 비뚤어지신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몇 번이나 사용하며 말합니다. “선한 사람과 함께하면 선하게 되고, 사악한 사람과 함께하면 사악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속담을 표현합니다. 이는 수용적 의미, 곧 적용된 의미가 됩니다.
시편 말씀은 오히려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며, 하느님이 악한 사람을 벌하고 선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실 때 선한 사람에게는 자비로우시지만 악한 사람들에게는 엄한 분이심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의미를 감지해야 할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독자는 단어 자체가 갖는 의미, 곧 문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스스로를 인도해야 합니다. 어느 시점에 선가 모호하거나 의심스러운 부분을 만나면|
본문을 설명하는 각주를 참고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교회가 신학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선택하듯이 문자적 의미를 가급적 고수해야 합니다. 이 의미는 성경의 진정한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의미의 중요성을 배제하거나 축소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비적 의미는 특히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주로 사도들, 사도 교부들에 의해 폭넓게 사용되었고, 훨씬 후대에는 오리게네스가 이끈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대 그레고리오처럼 최고 권위를 지닌 교부들에 의해 채택되었습니다.
수용적 의미 또한 진지하게 적절한 존경심을 갖고 사용한다면 가치롭습니다. 이는 성경 말씀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며, 때로는 진리를 더 잘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수용적 의미에는 교의적 가치가 없습니다. 먼저 문자적 의미가 있고, 그 다음에 신비적 의미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수용적 의미가 따릅니다.
어떤 경우이든 독자는 언제나 “신성한 성경 말씀은 거룩하며, 말씀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시거나, 우리 안에 매우 귀중한 영적 초자연적 선물을 자아내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도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지성을 여시어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귀감 – 성 사투르니누스와 동료 순교자들.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막시밀리아노 황제 치하에서 일어난 박해에서는 그리스도인은 물론 성지와 성경까지도 무척 잔인하게 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고통 아래 재관들에게 거룩한 책을 넘겨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 영사관 아비티나 시의 사제 사투르니누스는 이 박해 중에 체포되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5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그의 자녀들인 다티부스, 텔리쿠스, 사투르니누스, 힐라리우스가 있었습니다.
사슬에 묶인 그들은 총독 아눌리누스의 판결을 받기 위해 카르타고로 보내졌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인지, 단순한 모임에 참여했는지 묻자 그들은 공공연하게 그들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을 멈추지 않았고,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내려 도와 달라고 청했습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어서 오시어 저를 도와주소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 영혼을 지켜주소서. 저에게 인내의 은총을 내려주소서.” “오, 주님,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고통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
그 중에서도 놀라운 것은 순교자 에메리투스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갖고 있느냐는 총독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제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시오. 집에 성경이 있소, 없소?” 하고 총독이 소리쳐 묻자
“저는 제 마음에 성경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주님, 저는 당신 이름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며, 또 기꺼이 고통받고자 하오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해 주소서.”
영광스러운 그 모임에 함께하던 또 다른 참회자 펠릭스는 총독의 물음 앞에 솔직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희생을 큰 신심을 갖고 거행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경을 읽으려고 함께 모였습니다.”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면서도 사투르니누스는 “저는 제 마음에 성경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 참회자들이 보여준 불굴의 굳건함에 지친 총독은 그들 모두를 감옥에 가두고, 그곳에서 그들이 기진하여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경을 지키고 옹호함으로써 영광스러운 순교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작은 희생 : 오늘 나는 인간적 존경심을 넘어 거룩한 복음에 여러 번 입맞춤 하며 필요한 경우 복음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칠 만큼 사랑하리라고 선포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적은 다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이 노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 그들이 배불리 먹고 살찌게 되면,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그것들을 섬기고 나를 업신여기며 나의 계약을 깨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재앙과 고난이 그들을 덮칠 때에, 이 노래가 증인이 되어 그들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 그 후손들의 입에서 이 노래가 잊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기도 전에, 나는 오늘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이미 알고 있다.” 그날 모세는 이 노래를 적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다.
주님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갈 사람은 바로 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모세는 이 율법의 말씀들을 책에 끝까지 다 쓴 다음, 주님의 계약 궤를 나르는 레위인들에게 명령하였다. “이 율법서를 가져다가 주 너희 하느님의 계약 궤 곁에 두어라. 거기에서 이 책이 너희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하여라. (신명 31,19-26)
“주님,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칭송과 드높은 찬양을 영원히 받으실 분이십니다.
당신의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드높은 칭송과 드높은 찬양을
영원히 받으실 이름입니다.
당신의 거룩한 영광의 성전에서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드높은 찬송과 드높은 영광을
영원히 받으실 분이십니다.
당신의 왕좌에서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드높은 찬송과 드높은 찬양을
영원히 받으실 분이십니다.
커룹들 위에 좌정하시어 깊은 곳을 내려다보시는
당신께서는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칭송과 드높은 찬양을 영원히 받으실 분이십니다.
하늘의 궁창에서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찬송과 영광을 영원히 받으실 분이십니다.”
(다니 3,52-56)9
임금이신 주님, 당신께 감사를 드리고 저의 구세주 하느님이신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보호자요 협조자가 되시어 이 몸을 멸망에서 구해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중상하는 혀의 올가미와 거짓을 꾸며내는 자들의 입술에서 저를 건져 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주위 사람들 앞에서 협조자가 되시어 저를 구하셨습니다.
크신 자비와 당신의 이름으로 저를 삼키려는 자들의 올무에서, 제 영혼을 노리는 자들의 손아귀에서, 제게 닥친 수많은 환난에서 저를 구하셨습니다. 사방에서 타올라 저를 질식시키는 불길에서, 제가 지피지도 않은 불길 한가운데에서 저를 구하셨습니다.
저승의 깊은 구렁에서, 부정한 혀와 거짓된 말에서, 불의한 혀의 화살에서 저를 구하셨습니다. 제 영혼은 죽음에 이르렀고 제 생명은 저 아래 저승 가까이 갔었습니다. 곳곳에서 저를 에워쌌지만 아무도 저를 도와주는 이 없었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 그때 저는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고 영원으로부터 드러난 당신의 자애를 기억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출해 내시고 악인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해주십니다. 그리하여 저는 땅에서 당신께 간청을 올렸고 죽음에서 구출해 주십사고 기도드렸습니다. (집회 51,1-9)
1 Saulle는 이스라엘의 첫 임금인 사울의 또 다른 표기 방식이다.
2 열왕기 1,2권: 이는 그리스어로 된 칠십인역과 불가타 성경에 따른 것이며, 실제로는 사무엘 상·하권을 뜻한다. 열왕기 3,4권은 열왕기 상·하권에 해당한다. 두 권의 열왕기는 사무엘기 상·하권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후편이다. 사무엘기 상·하권에는 사무엘의 탄생에서 다윗의 죽음에 이르는 시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열왕기 상·하권은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 왕국의 출현,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과 파괴(975-586 BC)와 함께 일어난 유다 군주제의 몰락 가운데 일어난 사건들을 언급한다.
3 “따르고 지킨다”는 것은 율법을 깨닫고 마음을 다해 준수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책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신학적 연구(pp.50, 51, 69, 78, 92, 281, 392, 303), 영성(pp.227, 238, 247이하, 261, 302-303), 사목 전반(pp.69, 73s. 238, 247s, 274, 291, 317)의 기본으로 간주된다. 성경 공부를 통해 그런 경지에 이른 성인들의 예가 인용된다. 바오로 자신은 성경 전체를 모두 꿰뚫고 있었다.(p.230)
4 “Tunc aperuit illis sensum ut intelligerent Scripturas.”
5 “Littera enim occidit, spiritus autem vivificat.”
6 “Et sui eum non receperunt.”
7 현대의 과학적 요청을 숙고하지 못한 고대 주석은 성경의 모든 본문이 서로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가장 일반적인 구분은 알베리오네 신부 또한 사용한 것으로,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다. 중세 주석은 영적 의미에서 세 가지 다른 측면, 곧 계시된 진리, 따라야 할 행동, 최종 성취로 구분한다. 따라서 13세기 아고스티노 디 다시아의 유명한 이행 연구는 이렇게 말한다. “문자는 행동에 대해 말한다. 우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Littera gesta docet, quid credas allegoria,/ 당신이 행하는 도덕, 당신이 바라는 영적 해석. moralis quid agas, quid speres anagogia.”(p.293의 각주 11 참조) 현대의 역사 비평 주석이 기울인 모든 노력은 성경 본문이 작성된 상황에서 그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문제는 복합적이며 다른 문학 장르(역사 이야기, 연대기, 비유, 예언적 신탁, 입법 규범, 잠언과 속담, 기도, 찬가 등)와 동일한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 PCB는 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8 불가타 번역본의 시편 17편은 원본에서 번역된 성경에서는 18편에 해당된다.
9 이 책은 “다니 3,51-56”이라고 했지만 인용구는 52절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