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부분적으로 출판된 후 거의 반세기가 흐른 지금, 새로이 수정판으로 출간되는 이 책이‘바오로가족의 카리스마 역사’라는 부제로 정의되고 높이 평가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사실 이 책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새로운 체험에 대한 가장 생생한 문헌으로, 이 체험은 진정한 카리스마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바로 ‘바오로가족’으로 알려진 다양한 형태의 수도회 안에 구체화되었다.
이 문헌은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가 시작했고 활성화시킨 활동 하나하나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또 창립자로서 그의 개인적인 모순까지도 조명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성인전과 교회 안의 어느 창립에 관한 교회법적·신학적 보고서의 중간 지점에 있는, 교회의 역사라는 강에 떠오른‘창세기’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이 책은 가장 많은 결실을 거둔 현대 창립자들 가운데 한 분의 삶과 활동을 이끈 동기를 참 빛으로 조명해 준다.
1. 원문의 기원과 변천
원문의 기원에 관해서는 조반니 로아타Giovanni Roatta 신부가 1982년에 한 증언에 잘 나타나 있다.1
“우리 창립자는 근간이 되는 당신 영감의 요약인 「당신 은총의 풍성한 부」를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집필하셨다.
수도회 창립 40주년(1914-1954)이 다가오자 우리 중 몇 사람 (발렌티노 감비Valentino Gambi 신부, 레나토 페리노D. Renato Perino 신부, 조반니 로아타D. Giovanni Roatta 신부)은 우리 바오로 성소와 창립자에 관해 더 깊이 알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는 회원들의 의식 고취를 위해서나,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어느 날 내(로아타 신부)가 이러한 생각을 창립자께 제시하자,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성령이 여러분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시는 대로 하십시오. 정말 우리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고, 출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이 우리 사이에서 행하신 일에 대해 무엇인가를 표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요청을 (아르헨티나에 있는 페티나티 귀도 신부와 다른 이들에게서) 이미 받았습니다. 바로 지금이 이를 실행할 순간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협조자들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시작했으며, 1954년 초까지 몇 달 동안 아주 열심히 일했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알베리오네 신부님은 나를 불러 간단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더 이상 나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오직 성 바오로에 대해서만 말하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창립자, 귀감, 아버지, 영감을 불어넣어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시작한 일에서 분명히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에 동의했고 우리는 작업을 계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를 부르셨는데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작은 필체로, 아주 자세하게 쓰신 조금 많은 분량의 원고뭉치를 내게 건네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쓸만한지 보십시오. ”이것이 나중에 「당신 은총의 풍성한 부」가 된 자필원고였다. 우리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그러나 우리 작업이 너무 많이 진전되어 여러 조항에 대해 더 이상 마음을 쓰지 못했고, 그분 회고록의 본질적 가치를 곧바로 포착하지도 못했다.
그 자필원고는 우리 작업이 끝나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Mi protendo in avanti」(1954년 여름)라는 두꺼운 책이 출판되어 나왔을 때까지 내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때까지 우리가 사용한 모든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진 작업에 잘 협력해 준 마조리노 포베로Maggiorino Povero 신부가 위의 자필원고를 잘 보존할 테니 자기에게 넘겨달라고 하여 기꺼이 그에게 넘겨주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1969년 특별 총회 때) 이 회고록이 다시 중요하게 부각됨을 보게 되었는데, 특히 총회에서 사용하기 위해 「나 너희와 함께 있노라Io sono con voi」라는 표제로 처음 출간되었을 때였다.
여러 번에 걸쳐 「당신 은총의 풍성한 부」라는 단순하고 소박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 역사와 카리스마를 위해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 수도가족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키신 영적 여정을 위해 이 회고록이 지닌 특별한 중요성을 한층 더 깨닫게 되었다.
1980년 1월 10일, 아리차, 스승 예수의 집에서
조반니 로아타”
원문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 그것은 무엇보다 여러 번 수정한‘메모’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것은 고정된 번호 없이 흩어진 종이로 된 자필원고(ms)로 되어 있고, 두 번째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원문과 동일하지 않지만 분명 알베리오네 신부 자신이 쓰고, 수정한 두 번째 편집본임을 나타내는 타자원고(ds)로 되어 있다.
자필원고는 39매枚로 되어 있다. 18매는 18×24 센티미터, 나머지 18매는 11.3×17 센티미터, 2매는 15×17.8 센티미터 그리고 1매는 9.3×14.5 센티미터 크기의 종이에 썼다. 이 종이 중 일부(4매)는 자른 두 매의 종이를 나란히 붙인 것이다. 이 밖에도 39매 중 29매는 한 면에만, 7매는 양면에, 1매는 1952년 11월의 회계소득 명세가 기록된 이면지를 사용했으며, 다른 2매는 문장이 지워져 있다.(아마도 초고인 듯함) 이렇게 해서 모두 46매에 이른다.(지워져 있는 2매를 포함) 그뿐 아니라 39매 중 31매는 상단에 번호가 이중으로 매겨져 있고, 8매는 서로 다른 세 가지 번호가 표시되어 있는데, 논리적인 순서나 역사적 발전을 페이지에 표기하려고 여러 사람이 기록한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자필원고를 처음 사용한 것은 성바오로수도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알베리오네 신부의 생각은 내부 소식지 「성 바오로San Paolo」2에 실린 것처럼, 그 시기에 쓴 또다른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필원고는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1954)의 편집에 부분적으로 사용했고, 전체를 손질하여, 「나 너희와 함께 있노라」3라는 표제로 1969년에 성바오로수도회와 성바오로딸수도회 특별총회에 참석한 이들이 사용하도록 출간되었다.
1971년, 주세페 바르베로Giuseppe Barbero 신부의 감수로 이 원문은 「당신 은총의 풍성한 부: 바오로가족의 카리스마 역사 Abundantes divitiæ gratiæ suæ: Storia carismatica della Famiglia Paolina」[머리글자 AD, 이하 AD로 표기함]라는 새로운 표제로 출판되었는데, 바르베로 신부가 해석적·역사적 특성을 띤 주석을 곁들여 초판을 발간했다.
이 작품의 재판(로마 1975, pp. 6-7)에서 같은 감수자는 원문의 두 편집본, 곧 자필원고와 타자원고를 대조하여 두 원문의 일치점을 찾거나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AD의 형성과정에 관한 또다른 정보를 첨부했다.
여러 편의 원문을 부록에 덧붙여 분량이 늘어난 새로운 ‘비평’ 출판본은 1985년에 에제키엘 파소티Ezechiele Pasotti와 루이지 조반니니Luigi Giovannini의 감수로 발간되었다. 이 출판본은 ‘알베리오네 전집Opera Omnia’의 새로운 시리즈에 삽입되었고, 자필원고를 토대로, 엄격한 본문비평 방법을 적용했다.
이 책을 재판하면서 자필원고가 아니라 알베리오네 신부가 교정·수정·승인한 타자원고를 채택했는데, 이 원고가 그의 결정적인 생각에 더 부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시에 각주 번호가 아닌 기호 표시들은 원문에서 제외시켜 본문비평을 간결하게 했다. 반면에 1985년 출판본에 실린 해석적·역사적인 각주의 풍부함은 그대로 두고 부록에 첨부한 원문도 그대로 두었으나 몇몇 원문의 상세한 입문 설명만은 배제했다.
2. 표제
‘당신 은총의 풍성한 부’라는 표현은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2,7)에서 발췌한 것으로, 타자원고의 첫 장 상단에 저자가 직접 쓴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영성의 핵심들 가운데 하나인 요한 14,6에 버금가는,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소중한 ‘바오로적’ 표현이다.
요한과 바오로는 초기부터 바오로가족의 핵심에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두 사도는 AD에 자주 인용되었고, 특히 에페 2,5-7의 구절 전체는 1800년 말부터 1954년까지 있었던 사건과 사상의 흐름에서 생겨난, 새로운 수도회의 부富와 창립자에게 아낌없이 주어진 부富를 나열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AD 4) 이러한 부富에 대해서는 앞으로 언급할 것이다. 먼저 AD라는 표제는 저자가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활동’으로 보고 느껴온 자신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내용에 하나의 성경적·바오로적 빛을 비추어주고 있음을 주목하자.
인용한 성경 구절은 신앙의 여정, 구약의 탈출기를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이는 분명 20세기를 위해 높은 곳에서 원하시어 이루어진 활동의 전개요, 그 활동이 무르익을 때까지 ‘섭리’(AD 43,45 참조)로 인도하신 일임을 명확히 밝힌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자신의 글에서 수도회가 가난하게 시작했음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인도받은 사람 (하느님의 인도를 받고 있는 반 장님이 있다. 그리고 그는 늘 앞으로 전진하도록 그때그때 빛이 주어졌으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AD 202 참조)으로 소개했다. 또 순명하는 ‘종’인 동시에 자신을 따르는 자기 사람들을 위한 ‘스승’, 영적 지도자임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 쓸데없이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는 사람인 동시에 자신이 받은 선물에 대해 자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3. 해석의 문제
AD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는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나온 저서임을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이 작품을 이미‘회고록’의 범주에 자리매김하게 하고, 그 가치와 이 글을 읽는 기준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ㄱ. 자서전인가?
「영성사전Dictionnaire de Spiritualité」4은 ‘자서전’을 정의하고 예를 들기 위해 저자, 표제, 해석의 관점에 대한 기준을 언급하면서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이 사전에서 예를 들고 있는 저명한 자서전으로는 4세기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의 자서전5과 아우구스티노의「고백록」, 16세기 (아빌라의) 「예수의 데레사 생애」와 이냐시오 데 로욜라6의 「성소와 사명에 대한 이야기」(또는 「한 순례자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에게 더욱 친근한 자서전은 그 유명한 (아기 예수의) 데레사 마르탱의 「한 영혼의 이야기」다. 자기 자서전에 포함된 영적 가르침 덕분에 자신의 위대한 수호성녀처럼, 성녀는 최근에 교회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예를 든 여러 인물보다 알베리오네 신부가 더 가까이에서 따른 귀감은 아마도 성 바오로로서, 삶의 방식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귀감으로 삼은 것 같다. 회심자의 겸손과 같은 겸손, 당신 빛의 도구로 삼기 위해 그를 어둠에서 구해내신 그리스도께 대해 그가 지녔던 것과 같은 감사, 하느님의 자비를 영광스럽게 하고 ‘복음화’를 위해 일한다는 같은 목적 의식을 지녔다. 또한 성 바오로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선포했다. 게다가 환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에는 3인칭을 사용했다.(2코린 12,3-4 참조) 주님의 ‘힘’은 ‘약한’데서 드러난다고(2코린 12,9 참조) 사도가 축소시켜 말한 ‘환시’는 분명 그러한 체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증언이다.
아마도 알베리오네 신부는 바오로 사도와 유사한 문제에 직면한 듯하다. 영적 선물에 대한 체험 그 자체는 되풀이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이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이 점이 개인의 비밀을 드러내기를 꺼린 이유임을 설명해준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 주제에 관해 쓰도록 알베리오네를 이끌어준 것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 곧 하느님이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해 이루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남기려는 원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바오로가족이 이런 유산의 상속자라면 AD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그 진가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ㄴ. 역사인가?
이 시점에서 AD를 읽기 위한 최상의 자세는 저자의 자세와 같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자문해 볼 수 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일련의 기억을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그 이야기 안에서 역사의 주요 요소, 방향 그리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자기 가족에게 남겨주려 한 것은 어떤 사상이나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역사다. 이는 위에서 인도하신 — ‘거룩한 역사’ — 것이라고 인식해야 할 역사요, 이를 따르는 이들의 노력으로 발전시켜야 할 역사다.
‘비평적’ 시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꿈’또는 1900년에서 1901년으로 넘어가는 그 유명한 밤(AD 13 참조)에 관한 여러 특별한 요소를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역사성에 관한 의문이다. 아무튼 어떤 강력한 체험은 삶 전체에 큰 흔적을 남긴다. 아마도 바오로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그의 삶의 방향을 변화시킨,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강력한 빛이 알베리오네 신부를 비추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성령의 체험’을 오늘날 신학에서는 ‘창립자의 카리스마’라고 부른다. 이는 창립자가 직접 체험한 빛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참여해야 할 빛이다. 역사적 차원에서도 이런 체험은 자기네 고유한 카리스마의 뿌리를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논거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7
이것이 사실이라면 AD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한 기준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간략한 답을 모색하기 전에 알베리오네 신부의 이야기 중 절제에 관한 생각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AD를 읽으면서 포착할 수 있는 근본 자세는 ‘거리 두기’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 같다. 사실 자체가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저자 자신과 거리 두기 또는 ‘이탈’,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거리 두기 그리고 당대의 사조와 관습이라는 큰 동향과 거리 두기다. 그는 하느님이 자기 자신과 자신이 창립한 가족에게 호의를 베푸신 ‘부富’를 더 잘 보고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하여 거리를 둔 것이다.
우리는 알베리오네 신부가 살아온 역사를 동일시하거나 ‘공감’ 하는 방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알베리오네 신부가 자긍심을 가지고 속했던(AD 125 참조) 바로 그 피에몬테의 농부들이 지닌 겸손, 곧 일상의 현실을 늘 직시하기에 즉시 감지하는 지칠 줄 모르는 단순한 사람들의 겸손 외에 그 어떤 가리움도 없이 그의 눈으로 현실을 ‘읽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면 AD는 영원의 전망 안에서, 인식의 한계를 넘어 기나긴 과거의 여정과 새로운 여정을 따라, 관조가 아니라 여행을 해야 하는 거대한 풍경으로 우리에게 드러난다.
영원! “영광의 빛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통찰력”(AD 194), 이는 가장 높고 가장 포괄적인 관점이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볼 때, “지상의 새로운 천사들인 수도자들을 통하여 다가올 세대에 드러나야 할 은총의 풍성한 부 …`”(AD 4)에 대한 이야기는 영감을 받은 글처럼 기도와 묵상을 위한 지침서의 특징을 띤다.
AD를 읽는 것은 어떤 면에서 성 바오로를 읽는 것과 같다. 스승에게서(AD 153) 발산되는 ‘더 밝은 빛’을 통해 하느님과 세상의 현실을 관상하게 한다. 이 빛은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는 빛,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회심의 여정에서 사울을 비춘 빛(AD 159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의 빛이다.
요약하면 AD를 읽는 우리의 접근방식은 역사적 관점뿐 아니라 성경적·카리스마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정도에 따라 객관적인 것이 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이 책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선물 또는 모든 ‘은총’이라는 ‘부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 바오로 가족의 ‘부富’
알베리오네 신부는 AD에서 자신의 체험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할 때 성 바오로가 그랬던 것처럼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 드러난다. 바오로 사도와 알베리오네 신부는 모두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도요 예언자가 되게 한, ‘봉헌’이라는 향기요 선물인 ‘은총’을 전한다.
알베리오네 신부를 가장 잘 묘사하는 칭호는 아마도 ‘예언자’일것이다. 이는 그 자신이 체험한 것이고 후에 ‘하느님의 손길 아래서 ’자신의 특별한 사명과 오늘의 세상 안에 존재하는 그의 수도가족의 사명을 회고할 때 이에 대해 명백하게 말할 것이다. 그의 ‘예언’은 많은 부에 관한 증언을 통해 이 책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우리가 이를 재발견하고 재평가하도록 도와준다.
ㄱ. 본성과 은총의 부富
알베리오네 신부는 타자원고에서 ‘은총’, ‘초자연성’, ‘성화’, ‘사명’이라는 어휘를 ‘본성’에서 ‘은총’으로, ‘이성’에서 ‘신앙’으로 넘어가는 변화, 곧 완성에의 전환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특별한 사명을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우리 자신이 ‘향상될’ 필요가 있다. 이는 모든 이와 모든 것을 ‘향상시키기’ 위함이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함이다.
‘진리’와 ‘은총’의 이 직무는 봉헌생활을 통한 개인적인 고양으로 강화된다. 이 봉헌생활은 “복음적 권고까지 실천하는 사람들의 덕인 최고의 덕과 사도적 삶으로 공덕을 얻도록 인도하고 … 사도직에 더 나은 일치, 더 나은 안정성, 더 나은 지속성, 더 나은 초자연성을 부여하기 [위해]”(AD 24) ‘남녀 수도자’가 되는 이들의 진정한 부요함인 것이다.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있어 모든 사도적 성소의 출발점은 신앙과 ‘열의’ 분위기 안에서 바오로가 지녔던 고뇌를 인식하는 것이다. 곧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고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눈과 마음을 열어준 ‘신심’은 그에게 — 성령강림의 동정녀, 사도의 모후의 경우처럼 —“세상은 길진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AD 182)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또한 우리의 고유한 사명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부富를 커뮤니케이션하는 ‘은총’ 다. 그리고 사도직과 양성의 규칙, 바오로가족 각 수도회의 회헌을 신학적 의미로 조명해 주는 것이 바로 ‘은총’이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최우선적으로 ‘은총’또는 같은 현실을 표현하는 다른 말인 ‘성성’을 첫 자리에 두고 자기 삶의 계획을 세우라는 부추김을 받았다. “꿈에서 대답을 얻은 것 같았다. 사실 스승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너희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말라. 나 여기서 비추리라. 너희 죄를 뉘우치라.’… 스승의 모습이 어떤 빛에 감싸여 있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영적 지도신부와 이 꿈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심하십시오. 꿈이든 다른 것이든 들은 말씀은 거룩합니다. 그 말씀을 당신과 모든 회원을 위한 빛과 삶의 실천 계획으로 삼으십시오.’”(AD 152-154)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더 큰 은총의 선물은 성 바오로를 발견한 것이었으니, 그는 보편적인 사도요, 성덕의 모범, 복음에 대한 헌신의 모범이신 성 바오로의 “인품, 성덕, 마음, 예수님과의 친밀함”(AD 64)에 감탄했다. 여기서 다음 규범이 나온다. “바오로가족이 지녀야 할 첫 번째 관심사는 삶의 성화요, 두 번째는 교의의 성스러움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AD 90) 바오로적 체험은 ‘외적 활동’이 ‘은총의 내적 활동’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언제나 확인시켜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 곧 본성, 은총, 성소는 사도직을 위한 것이다.”(AD 100) 사명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주님과의 친밀함 없이는 참으로 ‘사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특별히 어려운 때’에 하는 양심성찰은 ‘은총의 활동에 장애’가 되는 요소에 촛점을 맞추는데, 이는 집 안에 천상 스승의 현존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뿌리뽑아야 할 것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과 완전한 나이에 이르기까지, 또 그분과 같아지거나 ‘그리스도화’하기까지 지혜와 나이, 은총 안에서 성장하는 것은 그분과 함께할 때만 가능하다.
ㄴ. 역사적 전망의 부富
그의 이 회고록에서 언급한 은총의 사건과 더불어 또 다른 부富는 바로 ‘역사’그 자체와 역사의 거대한 전망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묵상과 기도 안에서 회고한 ‘이중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아름다운 대영광송을 노래하기 위한 하느님 자비의 역사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에 부합하지 못하는 면목 없는 역사다. 따라서 수많은 게으름과 죄, 마음 상해드린 것 때문에 새롭고 통회에 찬 ‘미세레레’를 작시할 필요가 있다.”(AD 1)
‘역사’는 창조주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그리고 역사는 항상 가르치는 ‘스승’, 다시 말해 천상 스승의 지속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젊은 알베리오네는 열정을 가지고 세계사, 교회사, 세계 문학사, 예술사, 전쟁사, 항해사, 음악사, 특히 법학사, 종교사, 철학사 등 다양한 차원에서 역사를 읽는다.
그는 역사에서 구원의 보편성과 사명의 보편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그는 세계적으로 ‘넓게 생각하는 것’을 터득했다. 그리고 그것에서 행동의 차원에 부합하는 과제를 도출해 냈다. 곧 일반 구성원이 아니라 지도자, 사도적 활동으로 모든 이에게 도달해야 하는 수도회의 창립자로서 삶의 고유한 영역에 효과적으로 참여한다는 결심이었다. 이것이 바로 AD를 이야기하면서 알베리오네 신부가 구원이라는 세계사에 자신의 작은 역사를 삽입한 이유다.
부르심을 받아 ‘공인’이 되었기에 그는 더 이상 사적 삶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세상의 구원을 위한 공동책임에 부르심을 받음으로써 유년시절부터 깨달은 사제성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자신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 “자기 구원을 위해 그리고 더 풍성한 사도직을 위해 전 인격, 곧 정신, 마음, 의지를 계발해야 할”필요성(AD 22)을 깨달았다.
주변 환경은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 더 효과적으로 성장하고 행동하도록 그를 도와주었다.
자기 시대의 교회와 함께 역사를 이루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문화의 다양한 조류 한가운데서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복음을 따르는 제자들과 신빙성없는 권위의 교사들 사이에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 알베리오네 신부는‘사목적으로 ’생각하고 일하는 법을 배웠다.
역사적 사건과 날짜들이 AD 전반에 걸쳐 언급되는데, 이 모든것은 알베리오네 신부가 자기 활동이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것임을 알려주는 중요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살았으며,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섭리가 자신에게 맡긴 과업에 충실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알베리오네 신부 개인 삶에는 생명이 위급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는 과도한 일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의 활동을 지속하기에는 회복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건강에 중대한 위기를 넘기면서 그는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삶은 신앙에 기초한다는 것을 체험했다.
바오로의 선교와 조직에 박차를 가하는 사도적 애덕에서 힘을 얻어 새로운 길을‘믿음으로 전진한다는 것’은 구원 역사의 새로운 표현이요, 우리에게 있어서는 바오로가족 전체를 위한 카리스마의 전형이다.
ㄷ. 영적 주제의 부富
‘정신, 의지, 마음’이라는 ‘세 명제’에 요약되는 인간학적 차원의 부富가 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 전 존재는 자기 구성 요소의 전체성 안에서 구원되는 것처럼 인간 재능의 모든 개인적 풍요로움도 사도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양성 또한 총체적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전 존재, 곧 지성, 의지, 마음, 육체적 힘은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한 것이다.”(AD 100) 그리고 신학적·수덕적 부富도 있는데 이는 통합된 방식으로 ‘길진리 생명’의 방법과 ‘신심’을 통해 ‘그리스도 전체’를 닮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오로가족은 … 성 바오로의 정신으로,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살 것을 열망한다.”(AD 93)
이와 같이 기도, 양성, 사도직과 공부가 “언제나 길 진리 생명이신 우리 천상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그리스도가 지성, 의지, 마음에 온전히 형성되도록 언제나 준비하고 전념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겸손하고 근면한 제자가 되어야 비로소 사람들의 유능한 스승이 될 것이다.”(AD 98)
‘하느님 전체, 곧 삼위일체.’ 알베리오네 신부는 성령보다는 ‘은총’에 대해 더 자주 언급한다. “주일에 모든 것은 삶의 계획과 사도직, 예수님의 구원 계획인 대영광송, 곧 천사들이 노래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Gloria in excelsis Deo et in terra pax hominibus’로 마무리지어야 한다. 이는 성삼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다. 바오로인은 그리스도안에 산다.”(AD 183)고 말한다.
총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하는 하느님 백성, 교계제도의 인도자인 ‘교회’는 마르지 않는 부富다. 곧 교회는 스승의 가르침, 그분의 표양, 그분의 삶 모두를 요약하기 때문에 하느님 부富의 정점이다. 그리스도교 중심지에 첫 설립을 결정한 그 시작부터 바오로가족은 교회에서 모든 것을 길어냈다. “바오로가족이 로마에 자리잡은 까닭은 성좌에 봉사하기 위함임을 더 잘 ‘느끼기’ 위한 것이요, 사도직 활동과 정신, 가르침을 원천인 교황의 가르침에서 직접 길어내기 위해서다. 로마는 세계의 스승일뿐 아니라, 인류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으며, ‘파견받은 이들’은 로마에서 세계 각처로 떠나기 때문이다.”(AD 115)
5. 역사와 현실 사이
AD는 1953년에 출간되었다. 그해 몇 달 간 알베리오네 신부의 그 유명한 활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의 주위에는 모든 면에서 큰 일들이 들끓었다. 그리고 사춘기부터 세상의 폭넓은 움직임에 깨어 있고, 보편교회가 주는 표지를 감지하는 데 익숙해 있던 그는 교황 비오 12세의 카리스마적 권위로 이루어졌고, 1945년에 맞은 평화에 이어 찾아 온 봄의 생명력이 다시 살아나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느꼈다.
여러 창안 ‘Mondo migliore’(MBW: Movement for a better world: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운동)와 ‘성모성지 순례Peregrinatio Mariæ’와 같이 민중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 지역 운동과 결합되었다. 이는 1950년 희년과 1954년 마리아의 해 기념으로 장려된 더욱 폭넓은 부흥의 표현이었다. 그 시기의 교회 여정을 말해주는 신학적 논쟁과 전례적·사목적 개혁의 미미한 표지는 익히 알려져 있다. 이에 알베리오네 신부는 「사목생활Vita Pastorale」, 「전망Orizzonti」, 「하느님의 어머니Madre di Dio」와 같은 정기간행물에 기고함으로써 참여했는데, 이는 사목 쇄신과 마리아의 보편중개의 교의적 정의에 대한 제안으로 마리아 신심을 북돋기 위함이었다. 가끔 고통이 따르는 논쟁, 반대 의견과 정치-사회적 긴장 등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위한 분위기를 준비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그 기간에 일어난 국내 및 국제 정치의 큰 사건을 모른 체하지 않았다.(‘냉전’과 1953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인해 발생한 일들을 생각해보라.) 그는 신문에서 그리고 때때로 공적으로 직접 책임을 맡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알베리오네 신부가 쉽게 이쪽 또는 저쪽으로 기울어 편드는 데 휩싸이지 않고 하느님의 시각으로, 높은 곳에서 사건을 주시하며, 먼저 복음에서 영감을 받고 교회의 지침을 따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틀 안에서 창립자 자신의 강력한 활동을 전개했고 동시에 당면한 문제로 고심했다. 마리아의 해에 낙성식을 하기 바란 사도의 모후 성당 마무리 공사와 내부 장식을 예로 들 수 있다. 공사 감독과 경비 조달을 위해 온 시간과 힘을 쏟았지만 그것은 그의 활동의 외적 측면 중 하나에 불과했다. 끈질기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2코린 11,28 참조), 곧 바오로가족의 영적·법적 구성에 마음을 쓰는 것이었다. 회원에 관한 문제도 완전하지 못했고, 아직 사도의모후수녀회와 모든 병설 수도회가 창립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자 수도회의 교회법 승인을 위한 과정은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의 존립을 위협했던 1946-1948년의 중대 위기 이후에 신속히 진척되었다. 성바오로딸수도회는 1953년 3월 15일에 교황청 승인이, 선한목자예수수녀회는 1953년 4월 22일에 교구 승인이 났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사도직에 어려움이 따르거나 일이 진척되지 않을 때 창립자가 그 여정에 박차를 가하고 직접 참여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동시에 알베리오네 신부는 로마 지역에 있는 여러 그룹, 특히 사도의 모후 성당의 지하경당에 모인 공동체에 거의 매일, 묵상과 강론을 통해 교리교육을 함으로써 공동체의 영적·사도적 양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행 기간을 제외하고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그와 같은 강론은 아리차에서 한 일련의 강론(「완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Ut perfectus sit homo Dei」, 1960 참조)보다 앞선 것으로‘양성 과정’을 이루고 우리 카리스마의 근본 가치에 대한 기초적인 해석을 제공한다.
그러는 동안 빛을 보게 되었고, 미래에 계속 발전할 예언적 안목을 지닌 창안으로 알베리오네 신부가 촉진시킨 사도직을 조직하는 일이 뒤따랐다. 이를테면 국내와 국제적 차원의 출판센터(이탈리아의 출판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을 위한 편집부`…) 건립, 보급센터 또는 ‘이성적인 프로파간다’, 교리에 관한 다큐멘터리, “하느님의 어머니Mater Dei”와 “사람의 아들Il Figlio dell’Uomo”등의 장편영화 제작이 그것이다.
끝으로, 세계를 순회하는 긴 여행을 통해 멀리 떨어진 공동체를 방문하여 고무하는 일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모든 활동 중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세계 대전 직후에 바로 시작한 첫 아메리카 여행(1946)이었고, 이어서 동양과 두 개의 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지구를 한 바퀴 돈 여행(1949) 그리고 1952-1953년에 다시 동양과 오세아니아, 두 개의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를 다시 방문한 것이었다. 그 여행 동안 — 창립자와 동행한 성바오로딸수도회 총원장 마에스트라 테클라Maestra Tecla와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 총원장 마드레 루치아 리치Madre Lucia Ricci 수녀가 증언한 바와 같이 — 알베리오네 신부는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건강상태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행과 방문 계획을 바꾸려 하지 않았고, 오로지 다음 도착지에서 그를 기다리는 공동체를 위한 업무에만 마음을 썼다. 이러한 여행을 하도록 이끈 정신이 담긴 자료는 비행기에서 작성한 메모로 엮어졌다. 곧 안데스 산맥 위를 비행하면서 쓴 ‘스승 예수께 드리는 기도’와 같은 기도의 초고, 또는 히말라야 산맥과 인도를 비행하는 동안 상공에서 관찰한 여러 민족의 종교 상황에 관한 메모와 같은 선교 성격을 띤 고찰 등이다.(「성 바오로」에 게재한 여행에 관한 이와 같은 글은 「성 바오로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Carissimi in San Paolo」,pp. 1007-1043 참조)
알베리오네 신부는 여행과 여행 사이에 AD를 썼다. 관광객이 아니라 사도요 예언자의 안목으로 주의 깊게 살핀 그의 사고에서 ‘오늘’과 ‘세상’을 배제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직접 체험했거나 신문에서 읽은 사건은 묵상 주제가 되었다. 그는 “참사위원 키에사에게서 흠숭하고, 감사하며, 통회하고, 청원하기 위해 천상 스승 곁에서 모든 것을 묵상과 기도의 주제로 변화시키는 것을 배웠다.”(AD 68)
세상에 관한 정보는 각 사도직을 열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이러한 앎은 세계를 감싸는 하나의 계획을 도출해 낸다.
6. 맺음말과 독서를 위한 제안
AD를 읽고 풍부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독서를 위해 그리고 우리 시대 상황에 맞는 방식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몇 가지 유익한 제안을 하면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시사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가) 발전 중에 있는 모든 현실이 그러한 것처럼 AD 안에 언급한 많은 사건, 또는 암시만 한 사건은 창립자의 후기 작품과 활동에서만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 따라서 AD를 이해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중요한 자료는 알베리오네 신부가 아리차에서 1960년에 한 대피정 강론을 수록한 50개의‘가르침’이다. 이것은 「완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Ut perfectus sit homo Dei」(Edizioni San Paolo 1998)라는 한 권의 책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은 어느
정도 AD를 보완해 주며, AD와 함께 그의 유산에 대한 진정한 해석을 위한 ‘창립자의 유언testamento del Fondatore’을 구성한다.
나) 창립자 신부가 시작한 카리스마 역사의 흐름에 효과적으로 들어가려면 바오로가족이 살고 활동하는 오늘 그리고 다양한 문화 속에서 창립자가 1953년에 쓴 내용을 문자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다) 본문의 부富를 지속시키려면 사고방식과 실천의 끊임없는 쇄신, 곧 각자의 상황에서 일하면서 시대와 함께 걷고 진보하며 조직하고 ‘생각으로 미래를 두루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라) 무미건조한 지성주의의 한계, 숨 막히는 율법주의 또는 ‘초자연적인 것’이나 ‘은총’을 배제시키는 과학주의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상상’, 영감 또는 ‘꿈’등도 유익하다.
마) 지속적인 식별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영적 지도, 충고, 세상의 필요에 대한 사목적 관점의 명료함과 개인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독서도 필요하다.
바) 우리의 사도적 성소를 완수하기 위해 매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듯이 진보와 현대화도 두려움 없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
사) 수도회 간의 협력과 평신도들과의 협력은 가족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 바오로가 오늘을 사신다.’는 영적·선교적 계획을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아) 천상 스승의 메시지를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양식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화’ 문학 장르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자) 마지막으로, 과거의 ‘기억’뿐 아니라 ‘삶의 스승’이라는 측면에서도 역사에 대한 연구를 재평가해야 한다. 이는 바오로인의 뿌리를 자기 것으로 하고, 그 뿌리와 조화롭게 성장시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다.
이런저런 가르침을 훨씬 더 단순한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수단보다 성령이, ‘본성’보다 ‘초자연적인 것’이, 제도보다 ‘은총’이 더 우위라는 것. 그리고 인간적인 결점이 있다 해도 신앙의 힘은 전능하기에 사도는 보잘것없고 연약하지만 하느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AD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의 ‘회고’로 풍요로워지는 동시에, ‘실현해야 할 것들’에 대한 새롭고 중요한 ‘계획’을 파악하게 된다. 이는 여전히 성취해야 할 ‘부富’의 여정이다. 따라서 AD는 우리에게 과거의 사건에 대한 ‘역사’일뿐 아니라 우리의 현재를 위한 ‘해석의 열쇠’와 바오로가족 전체의 미래를 위한 ‘예언’인 것이다.
1998년 4월 4일, 로마
콜라크라이A. Colacrai - 스가르보사E. Sgarbossa
1 이 증언은 안토니오 다 실바(Antonio da Silva) 신부가 정리하여 Conoscere Don Alberione, I(1982), 35 이하에 게재하였다.
2 「성 바오로San Paolo」(1954년 7-8월호). 1954년 8월-9월에 알바(Alba, Cuneo)에서 열린 바오로 전시회를 방문한 이들에게 한‘인사말’을 보라. 여기에는 1914년 8월 20일을 기억하기 위한 프리모 마에스트로의 설교도 있다.
3 출판 장소나 날짜 표시도 없는 11.5×17.7 센티미터 크기의 48쪽 분량의 소책자. 성바오로딸수도회에서도 1969년 10월 2일자로 56쪽 분량의 11×15 센티미터 크기로 출간했다.
4 F. Vernet, 「영성 자서전Autobiographie spirituelle」, in DS IV(1935) 1141-1159 참조.
5 라틴어 역본, 「세입소의 역사 시Poëmata Historica de Seipso」,특히 1949년 역본 XI.
6 이냐시오에 대해서는 「이냐시오 유고집과 담화 원천Monumenta Ignatiana e Fontes Narrativi」I, 323-507에 나오는 비평 텍스트를 보라. 이 저서는 저자가 자신에 대해 가졌던 영성적이고 심리적 차원의 ‘식별’에 특별한 관심을 끊임없이 갖게 하고, 알베리오네 신부가 AD에서 그랬듯이 3인칭을 사용한 것도 흥미롭다.
7 참조: 「복음의 증거Evangelica Testificatio」, 11; 교황 바오로 6세의 권고, in AAS (1971) 497-526; 그리고 「상호 관계Mutuæ Relationes」11-12, note direttive delle S. Congregazioni per i Religiosi e gli Istituti Secolari, e dei Vescovi, in AAS 70 (1978) 473-506. F. Ciardi, 「성령의 사람들인 설립자들I Fondatori uomini dello Spirito」, Città Nuova 1982. 이러한 책들이 알베리오네 신부를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