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풍부한 영성, 지성과 통찰력을 겸비한 본당신부6는 그가 제대에 오르기까지 늘 그를 도와주었고 동반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바오로가족을 위한 첫 계획을 축복해 주기도 했다.
8*
그는 1890-18912 학년도의 어느 날을 기억하고 있다. 교사의 본분을 실행함에 있어 아주 섬세하고 매우 선한 하느님의 참된 장미 카르도나Cardona 선생3이 80여 명 중 몇 명의 학생에게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두 번째로 질문을 받았는데 잠시 생각한 다음, 빛을 받았음을 느끼고는 단호하게 대답하여 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저는 사제가 되겠습니다.” 그녀는 그를 격려해 주었고 많이 도와주었다. 이것은 분명 최초의 빛이었다. 그전까지는 영혼 깊숙이에서 그러한 약간의 경향을 느꼈지만, 이렇다 할 실천이 따른 결과는 없었다. 그날부터 친구들과 때로는 형제들까지도 그를 ‘사제’라는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때로는 그를 놀리기 위해, 때로는 의무를 일깨워주기 위해 … . 이 일은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공부, 신심, 생각, 태도, 심지어 놀이까지도 그런 방향으로 향했다.
가정에서도 그를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 목표를 향해 그와 관련된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위험에서 그를 구해주었다.
그날부터 모든 것은 그에게 이러한 결심을 굳혀 가게 했다.
그것은 늘 특별한 방식으로 그를 지켜주던 어머니4의 기도와 자기 제자 중에 누군가가 사제가 되게 해주시기를 늘 주님께 청하던, 매우 신심 깊은 여선생의 기도의 결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당시의 관행을 거슬러 친구들보다 빨리 첫영성체를 했다.5
그리고 풍부한 영성, 지성과 통찰력을 겸비한 본당신부6는 그가 제대에 오르기까지 늘 그를 도와주었고 동반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바오로가족을 위한 첫 계획을 축복해 주기도 했다.
빛의 밤: 특별한 사명
전 세기와 금 세기를 가르는 밤7은 앞으로 그의 사도직을 탄생시키고 살아가게 할 특수 사명과 특별한 정신을 위한 결정적인 밤이었다. 자정 장엄미사 후 (알바) 주교좌 성당에서는 현시된 예수님 앞에서 장엄한 성체조배8가 계속되었다. 철학과 신학 과정 중에 있는 신학생들은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머물러 기도할 수 있었다.
이보다 조금 앞서 (그가 난생 처음으로 참석한) 한 강연회가 있었는데, 그는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고 사람들을 사로잡는 토니올로9 씨의 연설을 잘 알아들었다. 그는 지금 시작하려는 세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한 교황 레오 13세10의 권고문을 이미 읽었다. 레오 13세도, 토니올로씨도 모두 교회의 필요, 악의 새로운 수단, 인쇄에는 인쇄로, 조직에는 조직으로 대항할 의무, 대중 속에 복음을 침투시켜야 할 필요성, 사회문제 …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체로부터 특별한 빛이 왔고,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11 하는 예수님의 초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위대한 교황의 마음, 교회의 초대, 사제의 진정한 사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대자들이 이용하는 수단을 사용하면서 오늘의 사도가 되어야 할 의무에 대해 토니올로씨가 역설한 내용이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주님을 위해 그리고 자기와 함께 살아야 할 새로운 세기의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의무를 깊이 느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더욱 분명하게 자각하였고, 동시에 성체 안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12 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며, 성체이신 예수님 안에서 빛, 양식, 위로, 악에 대한 승리를 얻을 수 있음도 깨달았다.
생각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동안 그는 새 세기에 관대한 사람들이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을 느끼리라는 것과, 조직에 가담함으로써 토니올로씨가 수없이 되풀이한 것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결하시오. 적이 우리가 제각기 따로 있는 것을 발견하면 한 번에 한 명씩 우리를 넘어 뜨릴 것입니다.”13
그는 이미 동료 신학생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는 그들과 더불어, 그들은 그와 더불어 모두 감실에서 길어내고 있었다.
장엄미사 후 4시간 동안 계속 기도했다. 이 세기가 성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탄생하기를, 새로운 사도들이 법, 학교, 문학, 출판물, 관습을 쇄신하기를, 교회가 선교에 새로운 비약을 하기를, 사도직의 새로운 수단이 선용되기를, 참사위원 키에사Chiesa 신부14가 신학생들에게 해설한 레오 13세의 회칙에 담긴 위대한 가르침, 특히 사회문제와 교회의 자유에 관한 가르침을 사회가 받아들이도록 기도했다.
성체, 복음, 교황, 새로운 세기, 새로운 수단, 교회에 관한 파가누치 백작15의 가르침, 새로운 사도들의 필요성 등이 지성과 마음에 확고히 뿌리 내리게 되었고, 그 후 이 모든 것이 언제나 그의 생각, 기도, 내적 활동, 열망을 지배하게 되었다. 교회와 새로운 세기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조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일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아침 10시경 한 신학생(나중에 참사위원이 된 루이지 죠르다노)16이 그와 마주치면서 놀랐으니 그의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나오도록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이러한 생각이 독서, 공부, 기도, 양성 전체에 영감을 주었다. 생각이 처음에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차츰 분명해졌고, 해가 갈수록 구체화되어 갔다.
자기 구원을 위해 그리고 더 풍성한 사도직을 위해 전 인격, 곧 정신, 마음, 의지를 계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계속 남아 있었다. 마치 그가 친구 보렐로Borello(1904)17의 묘비에 기록하고 싶어한 것처럼.
창립 계획: 조직에서 수도 공동체 삶으로
처음에 그는 가톨릭 저술가, 기술자, 서점원, 판매원으로 구성된 하나의 가톨릭 조직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18 방침, 일, 사도직 정신 … 을 주려했다.
1910년경 결정적인 첫 발을 내디뎠다. 한층 더 밝은 빛 속에서 저술가, 기술자, 프로파간다스타이되 ‘남녀 수도자’여야 함을 보았다. 이는 한편으로는 사람을 최고의 완덕, 곧 복음적 권고까지 실천하는 사람들의 덕인 최고의 덕과 사도적 삶으로 공덕을 얻도록 인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직에 더 나은 일치, 더 나은 안정성, 더 나은 지속성, 더 나은 초자연성을 부여한다. 하나의 조직을 형성하되 수도생활 조직일 것. 이 조직에서는 힘이 결집되고, 헌신은 전면적인 것이 되며, 가르침은 더 순수해질 것이다. 정신, 힘, 마음19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20라는 하느님의 상급으로 만족하며, 교회를 위한 일에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들의 단체. 그는 이러한 사람들의 일부는 순례하는 지상교회에 속하고, 일부는 승리한 천상교회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매우 기뻐했다.
매일 아침 주님께 성작을 들어 올려 바치는 기도 중에 첫 번째 생각은, 지금(1953년 12월)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한 협력자들에 관한 것으로 그들의 지적, 영적, 경제적 협력에 대한 것이었고, 두 번째 생각은 바오로가족이었다. 이는 스승 예수님이 매일 기꺼이 들어주시는 지향이었다.
1922년경, 최초로 지은 집에 입주하자마자21, 몹시 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다.22 200이라는 숫자가 써 있는 것을 보았으나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모두를 사랑하라. 관대한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탈선하는 사람들과 퇴회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인내하라. 더 훌륭한 사람들을 얻게 될 것이다.” 200이라는 숫자는 그가 들은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고통은 마음속에 박혀 있는 가시처럼 언제까지고 그에게 남아 있었다.23
하느님의 활동과 ‘이중의 순명’
하느님은 바오로가족 안에 많은 부富, 곧 ‘풍성한 은총divitias gratiae24’을 드러내셨다. 어떤 부富는 사건의 자연적 결과처럼, 다른 부富는 바오로가족의 준비기, 곧 탄생과 유년기를 동반해 준 빛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의 가르침, 또 다른 부富는 하느님의 활동으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났다.
주님은 가끔 그가 본능적으로 반감을 느끼는 선물을 받아들이라고 아버지처럼 강요하셨다. 이와 비슷하게 그가 앞으로 나아가게하는 일종의 자극제가 되어주셨다. 일반적으로 본성과 은총은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결합되어 작용했다. 항상 같은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더욱 큰 평온과 확신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 바오로가족의 시작처럼 계속적인 걸음도 언제나 이중의 순명을 통해 진행되었다. 곧 영적 지도신부25가 확증해 준 성체이신 예수님 발치에서 길어낸 영감 그리고 교회 장상들이 명시한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시작할 때가 되자 주교26는 그에게 교구 출판에 종사하도록 책임을 맡기면서 하느님의 때를 알렸다. (그27는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교구 출판28은 사도직의 길을 열어주었고, 발전하게 해주었다. 주교는 일의 경과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교구에 봉사하는 직무를 그만두겠다는 그의 요청에 동의했다. “신부님을 자유롭게 해드리겠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시작하신 일에 전념하십시오.”
그는 교구에 상당한 애정을 느끼고 있었기에 괴로워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1년 전부터 이를 요청했고, 영적 지도신부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단언했다.
2) 그는 묵주기도 없이는 단 한마디의 격려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좀 더 덕이 있고 덜 심약했다면29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3) 수도회30 회원들과 외부인들이 그의 헤아릴 수 없는 부족을 보충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한 가지 비밀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바오로가족은 주님이 원하셨고 당신의 지혜와 선이 초자연적으로 개입했다는 분명하고도 수많은 표지를 지니고 있다.
첫 평가: 바오로가족 간의 관계 31
주님은 우리 수도회가 넷이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한데 모으니 … 우리 모두 함께 모여 하나 되니 우리 마음 갈라질까 조심하세.”32
바오로가족은 모두 감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밀접한 친족관계로 결속되어 있다. 정신은 하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살고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모두를 대신하여 감실 앞에서 전구하고, 어떤 사람은 마치 높은 단상에서 가르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며, 또 어떤 사람은 각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들 사이에는 영적·지적·윤리적·경제적으로 긴밀한 협력이 있다.
통솔과 경영관리는 분리되어 있으나 성바오로수도회는 다른 세 수도회의 ‘양육자altrice’33다.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혈연의 유대보다 더 고귀한 사랑의 밀접한 유대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독립되어 있으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도와 도움을 주고받는다. 활동은 분리되어 있지만 기쁨과 고통 그리고 영원한 상급에34 동참할 것이다.
6 본당신부는 Giovanni Battista Montersino(1842-1912)였는데, 그는 1874년 부터 Cherasco의 San Martino 성당 주임사제였다.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1884년 4월 4일 San Lorenzo di Fossano(Cuneo)에서 출생했고 그 다음날 유아세례를 받았다. 얼마 후 그의 가족은 Cherasco(Alba 교구) 지역으로 이사했다. Cherasco에서 Giacomo는 Ginnasio(1895-1896) 1학년 과정을 이수했다. 그 후 Bra 대교구(Torino 교구) 신학교로 전학했고, 거기서 Ginnasio 2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과정을 이수했다(1896-1900). 1900년 가을에 Alba의 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했다. 1902년 12월 8일에 착복을 했다. 1907년 6월 29일 Alba 주교좌 성당에서 Mons. Giuseppe Francesco Re 주교에게서 사제수품을 받았다.
* 1971년 출판본에 8번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주세페 바르베로(Giuseppe Barbero) 신부가 이 위치에 삽입한 단락을 다시 그 본래 위치인 46번으로 옮겼다.
2 6세인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1890-1891년에 Cherasco(Cuneo)에서 초등학교 하급반인 1학년에 다녔다.
3 Rosina Cardona는 Torino에서 출생했으며, 젊은 시절에 Cherasco로 부임하여 이 도시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자기 생애를 보냈고, 그곳에서 1917년 3월, 60세에 선종했다.(Gazzetta d’Alba, 1917년 3월 24일 참조) 1891-1892학년도에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초등학교 상급반인 1학년에 다녔다. 등록된 학생 수는 88명이었다. 알파벳순으로 알베리오네는 세 번째였다.
4. 어머니의 이름은 Teresa Rosa Allocco(Alocco-Olocco)였다. 1850년 6월 7일 Bra에서 출생, 1873년 2월 11일에 Michele Alberione(Albrione)와 결혼했다. 1904년 11월 26일 남편의 사망으로 미망인이 되었다. 1923년 6월 13일 Bra에서 선종했다.
5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아마 1892년 부활 전에(그 해는 부활절이 4월 17일이었다) Cherasco 성 안에 있는 본당인 San Martino 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했다. 견진성사는 Alba의 주교 Mons. Giuseppe Francesco Re (1848-1933)의 집전으로 1893년 11월 15일에 받았다.
6. 본당신부는 Giovanni Battista Montersino(1842-1912)였는데, 그는 1874년 부터 Cherasco의 San Martino 성당 주임사제였다.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1884년 4월 4일 San Lorenzo di Fossano(Cuneo)에서 출생했고 그 다음날 유아세례를 받았다. 얼마 후 그의 가족은 Cherasco(Alba 교구) 지역으로 이사했다. Cherasco에서 Giacomo는 Ginnasio(1895-1896) 1학년 과정을 이수했다. 그 후 Bra 대교구(Torino 교구) 신학교로 전학했고, 거기서 Ginnasio 2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과정을 이수했다(1896-1900). 1900년 가을에 Alba의 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했다. 1902년 12월 8일에 착복을 했다. 1907년 6월 29일 Alba 주교좌 성당에서 Mons. Giuseppe Francesco Re 주교에게서 사제수품을 받았다.
7. 1900년 12월 31일과 1901년 1월 1일 사이의 밤이다.
8. 성체조배는 철야 성체흠숭회(Opera dell’Adorazione Notturna)가 후원했는 데, 이 단체는 이러한 목적으로 교황의 개입을 촉구한 바 있다. 참조: A.F. da Silva, 「알베리오네 신부 사상 안에서의 영신수련 여정 Il cammino degli Esercizi Spirituali nel pensiero di Don G. Alberione」, 바오로 영성센터, Ariccia 1981, p. 42s; 그리고 R.F. Esposito, 1900-1901의 세기적인 희년과 회칙 ‘Tametsi futura’: Il Giubileo secolare del 1900-1901 e l’enciclica Tametsi futura, in Palestra del Clero, 1996년 3-4월호, 169-196, 그밖에 폭 넓은 문헌이 수록되어 있다.
9. Giuseppe Toniolo는 가톨릭 사회학자요, 경제학자(1845년 3월 7일 Treviso 에서 출생, 1918년 10월 7일 Pisa에서 선종)로서, 그리스도교 사회사상의 대가 중 한 사람으로, Opera dei Congressi의 고무자요‘국민 연합 Unione Popolare`’의 국내 초대회장이다.(AD 60 이하 참조)
(Opera dei Congressi는 1874년에 창립된 이탈리아 가톨릭 조직의 하나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사회에 전파하여 그리스도인의 애덕과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촉진하는 가톨릭 활동 단체이다. -역주)
10. Leone XIII(Gioacchino Vincenzo Pecci, 1810-1903)는 1878년 2월 20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회칙 Tametsi futura prospicientibus(in Acta‘사도좌 관보’20, 294-314)는 이 기념비적인‘밤’이 있기 2개월 전인 1900년 11월 1일에 반포되었다.(R.F. Esposito, art. cit. 참조)
11. “venite ad me omnes.”
12. “vobiscum sum usque ad consummationem sæculi.” 완전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Et ecce ego vobiscum sum omnibus diebus usque ad consum-mationem sæculi.”
13. 노동자들을 계급투쟁으로 선동한 Karl Marx(1818-1883)의 외침을 기억하라.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공산주의 선언문Manifesto del Comunismo」, 1848). 베를린 국회에서 Marx의 동료의원이자 반대자였던 사람은 유명한 Magonza(곧 Mainz)의 주교, Wilhelm von Ketteler(1811-1877)로서 그리스도교 사회 센터(Centro cristiano sociale)의 대표위원이었다.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은 가톨릭 신자의 일치에 대한 그의 호소를 받아들였다. 그는 ‘Volksverein: 국민 연맹’과 Unione di Friburgo의 리더가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토니올로씨도 있었다. Ketteler 주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초기 바오로인들에게 친숙한 분이다. “성 바오로께서 오늘 살아계셨다면 저널리스트가 되셨을 것입니다.”
14. Francesco Chiesa(1874-1946)는 사제요, 알바 신학교 교수이며, 성 다미아노 성당 주임신부. 1987년 12월 11일에 가경자로 선포됨. A. VIGOLUNGO, Nova et vetera, Can. Francesco Chiesa, Edizioni Paoline, Alba 1961; L.M. ROLFO, Il buon Soldato di Cristo..., Edizioni Paoline, Alba 1978; E. FORNASARI, Ho dato tutto … , Edizioni San Paolo, Cinisello B. 1993.
15. Giovanni Battista Paganuzzi(Venezia, 1841-1923)는 백작, 변호사, Opera dei Congressi의 회장.
16. Luigi Giordano는 1878년 Cortemilia(Cuneo)에서 출생, 1903년 6월 28일 사제로 수품되었으며, 1939년 12월 30일에 선종.
17. 이 단락은 타자원고에 자필로 첨가되었다. Agostino Borello는 1883년 10월 20일 Govone의 Canove에서 출생, 신학생으로서 1902년 6월 2일에 선종.
알베리오네는 장례미사에서 그를 기리는 감동적인 추모사를 바쳤다.「나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Sono creato per amare Dio」(젊은 시절의 일기와 글들: Diario e scritti giovanili) G. Barbero 감수, pp. 73-85 참조.
18. 여기서 접속사 ‘그리고’는 관계대명사 ‘그들에게’(ai quali) 대신 사용했다.
19. 마르 12,30 참조. 저자는 ‘정신 의지 마음’이라는 도식에 상응하도록 마르코복음의 인용을 수정했는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를 첫 번째에서 세번째 위치로 옮겼다.
20. 마태 19,29 참조.
21 via Vernazza에 세 들어 있던 집에서 성 바오로 집(Casa San Paolo)의 첫 건물로 본거지를 옮긴 것은 1921년 8월 10일이었다.
22 AD 151 이하 참조.
23 ‘마음속에 박혀 있는 가시 같은’(2코린 12,7 참조) 이 ‘고통’은 병행되는 1938년의 이야기에 비추어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땅을 구입해야 했을 때, 젊은이들이 이곳에 놀러 왔다. 나는 위 아래를 바라보았다 … . 그리고 이러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인지 헤아려 보았다 … 그러다가 한순간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집이 건축될 때까지 태양이 빛났다. 그런 다음 태양이 가리워졌는데,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께 부르심 받았다가 나중에 성소를 포기하는 사람들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 .” (MV 138) 여기서 저자가 첨가한 자필원고에는 ‘200’이라는 숫자에 대한 모든 언급이 배제되어 있다.
24 에페 2,7: 앞에 나온 AD 4와 해당 각주 참조.
25 프란치스코 키에사.
26 당시 주교는 이미 여러 번 각주에서 인용한 주세페 프란치스코 레 주교였다. 1848년 12월 2일 출생, 1889년 12월 30일에 알바의 주교로 선임, 1933년 1월 17일 선종.
27 괄호 안에 삽입된 주어는 분명히 알베리오네 신부다.
28 ‘교구 출판’, 다시 말해서 저자가 암시한 신문은 「가제타 알바」로서, 1879년 부터 1889년까지 알바의 주교였던 Mons. Lorenzo Pampirio가 1882년에 창간한 주간지다.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이 정기간행물의 편집을 맡긴 것은
1913년 9월 8일 저녁이었다.
29 ‘Minor pusillanimità: 덜 심약함’. 저자는 타자원고에 덜 심약함이라는 표현을 첨가했다.
30 여기서 말하는 ‘수도회’ 그가 점차적으로 창립한 모든 수도단체를 의미한다.
31 ‘바오로가족’(복수 표현이지만 곧 단수로 바뀌면서 수도회 모두를 지칭한다)이라는 표현은 즉시 ‘수도회들’이라는 용어로 명확하게 된다. 1953년 말경 이미 열거한 네 개의 수도회가 있었다. 사도의모후수녀회와 병설 단체들은 아직 없었다.
32 “Congregavit nos in unum Christi amor … Simul ergo cum in unum congregamur, ne nos mente dividamur, caveamus.”(Messale Romano, 주님 만찬 성목요일 봉헌송)
33 Altrice‘( àlere’=‘양육하다’에서 유래). 곧 영양분을 주는 자. F. Pierini, “알베리오네 신부에 따른 바오로가족의 ‘altrice’인 성바오로수도회의 역할:
Ruolo della Società San Paolo‘altrice’della Famiglia Paolina secondo Don Alberione”, in「바오로 가족 안에서 일치의 직무 Il ministero dell’unità nella F.P.」, Ed. Archivio Storico Generale della F.P., Roma 1987, pp. 135 참조.
34 ‘그리고 영원한 상급에’라는 표현이 자필원고에 첨가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