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o Giacomo Alberi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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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들어가면서

「성 바오로」지 1954년 1월호에 “바오로가족 안에서의 노동Il lavoro nella Famiglie Paoline”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이 소책자는 아주 긴 시간을 두고 묵상한 것이다. 우리가 찾아낸 자필원고는 수정과 통합과정을 거쳤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일관성 있게 통일된 것은 아니지만, 거듭 다루어 여러 단계로 확장되었다.

그 다음에 모음집 「바오로가족에게Alle Famiglie Paoline 」(1954년 성요셉 축일)에 실린 글에는 “노동Il Lavoro”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데 이 책에도 그 제목을 그대로 싣는다.

내용의 요약은 노동의 원리, 노동의 존엄성, 노동에 대한 교육, 성 바오로 사도 안에서, 부지런함과 게으름, 자선, 수도적 청빈, 바오로인의 기본재산, 노동을 가르칠 것, 균형 잡힌 노동, 헌신과 항구함, 시간을 활용할 것, 잘 행할 것, 초자연성, 좋은 편집, 기술노동과 보급, 휴식의 본질, 스승과 마에스트로들, 모두가 노동을, 신앙 등의 소제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 다루는 다양한 주제, 예를 들면 청빈과 자선은 비록 우리가 후에 언급하지만 연대적으로는 앞서 발표한「섭리Provvidenza」라는 소책자에 나온다.
알베리오네 신부의 일부 사상은 완전히 선구자적인 것이다. 노동은 모든 인간 존재의 과제요 영광이다. 노동은 죄의 벌이 아니며, 열등함을 지칭하는 것도 않니다. “태만, 게으름, 무기력, 무관심, 미지근함, ‘무위도식nihil agentes’할 때 열등한 것이 된다.” 
노동의 존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귀감을 숙고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노동자-그리스도의 신비는 수난과 죽음의 신비보다 더 심오하게 여겨진다. 수십년을 목수일에 전념했던 것이다!”
바오로인에게 사도직인 노동은 아주 고귀한 것이다. 사도직은 우리를 길 진리 생명이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게 한다. 후배인 지원자들에게 노동을 가르친다는 것은 오직 기술적인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직의 발전과 조직을 함께 알게’ 한다는 의미다.

1987년에 성바오로수도회 안드레아 다미노 신부 엮음으로 역사적 입문과 각주를 곁들인 소책자 「노동과 섭리IL Lavoro e la Provvidenza」를 바오로가족 총원 역사 고문서 출판용으로 발간했는 데(13번), 아주 공들여 만든 개정판이다. 여기에 “알베리오네 신부는 직접 노동을 했고, 노동하게 했다.” 엮은이의 경험과 일화가 실린 매우 흥미롭게 부록(53-67쪽)으로 추가되어 있다.
우리는 별도의 소책자처럼 ‘섭리’에 대해서는 다음부분으로 넘기고자 한다. 그 대신 여기에 부록을 덧붙이고자 한다. 알베리오네 신부가 쓴 <노동의 여왕 마리아Maria Regina del Lavoro>에 관한 것으로 로사리오 에스포시토 신부가 「성 바오로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Carissimi in San Paolo」(1095-1096쪽)에 수록한 것으로그 내용은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보완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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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동

1. 원리

노동은 유익하고 분명한 목적을 지닌 의식 있는 활동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엿새 또는 여섯 시기에 걸쳐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은 “쉬셨다.”1 다시 말해 ‘외적으로ad extra’2 당신의 활동을 끝내셨다. 곧 모든 것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행하셨다.
노동은 활동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기능에 따라 다양하다. 지적 노동(면학, 상담), 내적 노동(기도, 정신활동), 영적 노동(설교, 성사집행), 윤리적 노동(통솔, 보좌), 육체적 노동(농부, 노동자), 온전히 자연적인 노동, 특히 초자연적인 노동 등이 있다. 그러나 항상 활동과 유익한 목적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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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죄의 벌이 아니며, 원죄는 노동에 고생만을 보탤 뿐이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9] 인간은 노동을 해왔고, 죄를 짓기 전에도 일했을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무릇 사람이란 재앙을 위해 태어나니 불꽃이 위로 치솟는 것과 같다네.”(욥 5,7)3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연계되어 있는 모든 노고는 개인과 사회 구원의 요소가 된다. 수난의 의미보다 더 넓은 ‘고생’은 예를 들면 나자렛의 거룩한 노동자의 노동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성요한 크리소스토모)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제대 위에서 희생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의 지향과 함께 저의 모든 활동, 기도, 고통을 당신께 봉헌하나이다.”4
인간은 천국에서 거룩한 활동에 참여하면서 활동의 극치에 이를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이 주신 탈렌트를 통해 변화된 육신과 하나된 영혼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다.
‘안식’5이라는 말은 ‘편안히 쉬어라’나 ‘잠을 잘 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직 우리는 어떤 종류의 활동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성 바오로도 우리가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설명을 해주지않은 것이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두셨다.”[1코린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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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노동이 아니다. 비록 활동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유익함을 가져오는 목적이 없기에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어린이가 불꽃을 보기 위해 천 원짜리 지폐를 찢어 태워버리는 것과 같다.
자유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허가증이 아니다. 교육자는 한 인격체가 책임과 존엄성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까지,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한 존재가 될 때까지 자유로울 수 없다. 교육제도나 시간표는 인간, 그리스도인, 수도자, 사제라는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발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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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12세는 교황령 「그리스도의 신부Sponsa Christi」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 손노동 또는 | 지적 노동은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자연법을 통해서뿐 아니라 보속과 속죄의 의무를 통해서도 관상생활에 헌신하는 남성과 여성도 노동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SP, 1954년 1월호, 2쪽] 그뿐 아니라 노동은 영혼을 위험에서 보호해 주고 더 높은 것을 향해 드높여주는 공동의 수단입니다. 이러한 수단을 통해 우리는 의무처럼 자연질서나 초자연 질서를 통해 우리의 모든 활동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이러한 수단을 통해 사랑의 활동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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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노동의 존엄성

노동은 비천한 것인가? 노동자의 노동이나 ‘좋은 몫을 선택한’ [루카 10,42] 수도자의 노동은 비천한 것이 아니다. 비록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 하더라도 게으르면 비천한 것이다. 안락, 게으름, 무기력, 무관심, 냉담, 미지근함, ‘무위도식’이 비천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드높여주는 종교다. 고대 일반개념에서 노동, 특히 손노동은 비천함의 표시처럼 경멸 대상으로 여겼다. 따라서 ‘자유인domini’과 ‘노예res o instrumenta’ 사이에 차별을 두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그리고 키케로6도 이러한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노동의 가치를 확고히 하여 당대의 사고방식에 변혁을 일으켰다. 복음서 전체가 노동의 세계에서 움직인다. 모두에게 노동의 의무가 있다. 비록 부자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노동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탈렌트의 비유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은 정당한 급료(마태 10,10)를 받는 생계수단이기도 하다. 노동은 인격 향상과 구원의 수단이다.요(한 6,27)
하늘에 계신 성부는 오류에 빠진 인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복원하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이를 가정에서 그리고 노동으로 시작하셨다.
노동자-그리스도의 신비는 수난과 죽음의 신비보다 더 심오한 것 같다. 오랫동안 목수일에 전념하셨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마르 6,3] 나자렛에서 그가 흘린 이마의 땀방울은 겟세마니에서 흘린 핏방울 보다 구원의 효과가 덜하다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그분이 설파하신 많은 말씀보다 더 분명한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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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존엄성의 근거

인간의 노동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될수록 더욱 고귀한 것이 된다.
1) 지성, 자유, 창의력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할 때 노동은 무한히 고귀하다. 그래서 수공예품은 공장제품보다 낫다. 작은 땅의 소유주라도 막노동자나 소작농보다 낫다. 스승의 직무는 교수의 직책보다 뛰어나다.7
2) 노동의 ‘목적에 따라’ 고귀함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영혼을 돌보는 사제의 노동은 육체를 돌보는 의사의 노동보다 뛰어나다. 사도의 노동은 재단사의 노동보다 뛰어나다. 교육자의 노동은 군인, 경찰의 직무보다 뛰어나다.
3) ‘이로울’수록 고귀하다. 수도자가 자기 영혼의 완덕을 위해 행하는 노동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화가나 조각가의 작업보다 뛰어난 것이다. 그리스도인 법률가와 사회학자의 노동은 세금 징수원의 노동보다 뛰어나다.
4) ‘진리와 평화와 선’을 가져다주는 우리 평수사들의 ‘사도적’ 노동은 (일반 기술자와 보급자) 외부 인쇄공, 서점 근무자, 기술자의 노동보다 뛰어나다. “기쁜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사도직은 현재의 삶을 위해 그리고 영원을 위해 최고의 선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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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동에 대한 교육

노동은 삶과 영원을 위해 무한한 효과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육체적 힘, 지적 힘, 도덕적 힘이 있고 그 힘을 소모하기 위해 일생을 살아간다. 하느님의 정신 안에서 그분을 알기 위해,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그 힘을 소모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되는 자격[갈라 4,5]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고 고귀하게 된 이러한 힘은 하늘에서 영원한 기쁨 중에 하느님을 알고 봉사하며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우리 머리로 삼으시고 우리를 그 지체로 모으시기 위해 파견하셨을 때 우리를 드높여주셨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힌두교도나 이슬람교도 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은 올곧은 사람들에 의해 고귀하게 쓰이든지, 하느님을 위해 쓰이지 않고 이기주의의 노예요 돈의 노예가 되기 위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육의 | 노예가 되기 위해 쓰인다. [SP, 1954년 1월호, 3쪽] 하느님에 대한 인식 안에서 그리고 그분 뜻에 속하는 일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라지고 마는 헛된 것에 쓰인다. 영혼은 영적인 것이고 불멸의 것인데도 말이다.
노동에 대해 가르칠 때 젊은이가 면학, 좋은 생각, 능력계발, 생산하는 일, 참된 인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익숙해지게 해야 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참된 수도자의 삶, 참된 사제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시신이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볼 때 항상 반성하고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소질, 탈렌트-힘을 잘 사용했는가.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요한 9,4] 그렇다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바쳐야 하는 가? 그리고 내일이면 무덤으로 옮겨질 나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영원을 준비하고 있는가?
노동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은 삶과 영원을 위해 젊은이의 운명, 최고의 사랑, 최고의 선을 개척하고 드높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규칙적인 삶을 살고, 가족의 친근함이나 사회 안에서 감각과 우연적 상황을 지배할 때 그는 존경받고 칭찬받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인류와 교회에 좋은 기여를 할 것이다.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여, 힘, 힘을 내자vir, vis, forza.”
이와 반대로8 게을러서 비참하게 시험에 ‘낙제’하는 상황은 자신의 의무에 대해 열등감을 갖게 되고 비겁함을 느끼게 된다. 졸업시험에서 낙제하는 최악의 위기와 더불어 사회 안에서 경시되고 거부되고 만다!
성인은 모두 노동자다. 살아온 세월에 비해 매우 많은 활동을 했고 얼마나 많은 방향을 제시했는지 모른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 베르나르도,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 주세페 코톨렌고, 성 요한 보스코,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 성 요한 드 라 살, 십자가의 성 요한, 성 대 알베르토, 성 가밀로 데 렐리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 도미니코, 성 알폰소, 모든 성인이 그렇다! 내적 노동에 첫 자리를 주었고, 그런 다음이 내적 노동은 모든 사람 안에 큰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놀랍고 풍요로우며 인도주의적 결실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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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 바오로 사도

성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0-12)“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1코린 4,12) 성 바오로는 위대한 노동자였다. 성 바오로는 자기 동료에 대해 설교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사도 20,34]라고 여러 번 강조했고, 젊어서부터 익힌 기술로 밤에도 일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2코린 6,5) 성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완전하게 본받고 살아간 행복한 분이다. 노동에 있어서도 그의 삶은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필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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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인(사제 또는 평수사)의 노동에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노동자-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일에도 종사하셨다. 성 바오로는 군용천막을 제작했다. 그 대신 바오로인은 진리를 전하고, 교회가 사명으로 인정한 설교의 직무를 통해 직접 사도직을 수행한다. 사실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칭찬한다. “지도자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는 원로들은 이중으로 존대를 받아 마땅합니다.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애쓰는 이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1티모 5,17)
노동은 형제들을 위해 구원의 효력을 지니지만, 노동자 자신도 구원한다. 감옥에서 어떤 죄수는 일하면서 구원을 받고, 다른 죄수는 태만에 빠져 다른 악행을 배우고 익힌다.
노동은 우리가 순수하고 무한하고 영원한 행위이신 하느님 가까이 가게 한다. 인간이 결심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만큼9, 그만큼 하느님을 더 닮는다. 그리고 잠재력을 올바르게 행동으로 옮기는 만큼 자신에게 능력을 주신 하느님 뜻에 더 잘 부합할 것이고, 주님을 더 잘 섬기게 될 것이다.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참조] 여기서의 힘은 육체적인 힘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동은 첫째요 기본적인 계명에 속한다.
신앙을 위한 순교가 있고 사랑을 위한 순교도 있다. 사도직의 노동은 고해사제의 노동처럼 사랑의 실천이다. “하느님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들도 순교자들이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해 소모한 동정의 힘은 동정의 화관, 순교의 화관을 받을 만하고, 교회학자의 영예를 누릴 만하다. 우리 육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성 바오로의 깨달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로마 12,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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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근면

한 세기 전부터 교황들은 이 분야, 곧 노동의 참된 개념,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제시하고 가르쳤다. 한편으로는 노동자가 점차 자신의 인격을 상실해가는 것을 비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주의적 물질적 이론이라고 치부했다.11 그러나 교황들은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때문에 토니올로12씨는 그리스도교-사회학 강좌를 마련했다. 이어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의 원리,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사십 주년Quadragesimo anno」의 원리와 교황 비오 12세의 담화가 나왔다. ‘가톨릭 사회 요약 또는 사회 법전의 구조’는 사회 회칙의 사상을 요약해준다.
게으른 성직자와 수도자는 현대 사회에서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다.
오늘날 가장 크게 대두되는 문제는 노동에 관한 것이다. 모두가 노동의 윤리적 경제적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있다.
여기서 수도자들이 열심히 노동하며 살아가기를 강조한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수도자는 노동을 거룩한 지향으로 하느님 앞에서 순명으로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의 자발적인 포기로 연관짓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노동을 완수한다면 모든 덕을 끊임없이 실행하는 힘을 갖게 될 것이고,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을 따라 관상생활을 활동생활에 일치시키는 감미롭고 효과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13
부지런함은 성소의 표지요, 태만은 성소가 없다는 표지다. 비록 똑똑하더라도 게으른 사람은 늘 경계할 필요가 있다. 부지런한 젊은이는 시험 때만 공부하지 않고, 착복식이나 다음 단계가 다가올 때만 삶의 변화를 꾀하지 않으며, 누가 보거나 제재를 가할 때만 사도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위해, 영원을 위해, 사도직을 위해 자신의 젊은 힘을 봉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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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게으름

어떤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서는 일곱 마귀가 필요하지만, 반면에 게으른 사람은 마귀 하나로 충분하다.”14
지나친 레크리에이션과 스포츠, 어떠한 형태로든 즐길거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방해받지 않고, 중압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고된 일을 회피하고, 영적 일이나 공부, 사도직, 기도의 의무에 대해 권태, 무위도식, 게으름, 미지근함, 냉정함,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들게 한다. 하느님의 일에 대한 싫증은 죄악이요, 의무를 소홀히 하고 비판하며 감각을 충족시키는 것을 즐김은 다른 죄의 뿌리다.
신학은 게으름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열성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을 증오하고 반대하며, 의무에 대해 가르치는 장상을 거부하고, 신심을 소홀히 하고 경시하며, 삶이나 직무, 덕의 실천에 실패할 때 좌절하고, 힘이 필요한 모든 일 앞에서 겁을 내고, 육체를 정신 아래 두게 하는 진정한 수양과 질서의식이 부족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는 식의 비이성적인 비판기준으로 판단하고, 착수한 일, 예를 들면 면학, 성소, 기획, 결심, 수도서원, 사제생활의 중요한 의무를 쉽게 저버린다.
모든 이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
“종이 게을러지지 않도록 그에게 일을 시켜라. 게으름은 온갖 나쁜 짓을 가르치기 때문이다.”(집회 33,28-29)
“헛것을 뒤쫓는 자는 지각이 없다.”(잠언 12,11)15
“헛것을 좇는 자는 가난으로 배부른다.”(잠언 28,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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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선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수도회 안에서 노동의 역할과 자선의 역할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자선은 보완의 역할을 한다. 제일 먼저 노동의 자연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넘치는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어라.”(루카 11,41 참조) 하는 말은 의무요, “부족한 것은 부자들에게 청하라”17는 말은 이에 부합하는 말이다. 유쾌한 소풍을 위해 기부를 청할 수는 없지만, 건강을 치료하기 위해 도움을 청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여분의 것을 주지 않는 사람을 저주하는 말이 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1] 그리고 여분의 것을 준 사람에 대한 구원의 말씀도 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4-35]
청하는 것은 덕행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기 위해 노력한 자캐오를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그의 행동은 겸손이고 신뢰였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선을 위한 일을 이루려는 열성이었다.
공동체는 자선의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 오늘날 이렇게 크고도 필요한 은총의 수단을 방문, 서신왕래, 출판물을 통해 관리하지않는 | 수도 단체는 없다. 그리고 자선은 이를 받는 사람보다 베푸는 사람이 더 많은 은총을 받는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자주 상을 받고 하늘에서도 분명히 상을 받는다. [SP, 1954년 1월호, 5쪽] 
협력자들은 성바오로수도회를 동반하고 있다. 협력자들에게 활동을, (예를 들면 저술 또는, 성소자를 보내주도록) 청하고, 그들의 기도서에 있는 기도문을 바치게 하고, 돈이나 물품의 기부를 요청한다. 협력자들은 우리 기도로 충분히 보답을 받고, 특히 매년 그들을 위해 거행하는 2400대 미사로 보답을 받는다.
특히 오늘날 무위도식하는 수도자나 그릇된 재무관리자가 어떻게 부드러운 손을 내밀면서 고생한 거친 손에서 무엇인가 받아내기 위해 기부를 요청할 수 있겠는가? 천상 예수 그리스도는 못이 관통했을 뿐 아니라 목수의 톱질, 망치질, 대패질로 거칠어진 손을 내밀어 성부께 영광을 드리고 탄원의 기도를 드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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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수도적 청빈

탁발 수도회, 관상 수도회, 활동 수도회가 있고, 관상과 활동을 같이 하는 수도회가 있다. 이 모든 수도회가 교회의 승인을 받았다면 칭송할 만한 것이다.
수도생활은 아무런 노고 없이 살기를 바라는 사람, 일하지 않는 사람, 사도직에서 자신이 싸워야 하는 역할을 피하기 위해 도피하고 수도원의 삶을 감수하는 사람의 열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수도생활을 가장 잘 이해하고 체득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 성 요셉이 살아가신 삶이다.
참 수도생활은 열심한 삶, 곧 성화작업, 기도, 열성, 교황이 권고하는 보편적 활동에 참여할 필요성을 수반한다. 이는 힘든 삶이요 끊임없는 자기희생과 구원을 가져오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천하고 가르치신 것처럼 청빈의 권고와 개념은 모든 계명처럼 소극적인 요소와 적극적인 요소, ‘부정하고 견디다abnega et sustine’18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 곧 사적 관리와 자율적 사용이 금지되고, 활동의 결실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도 금한다. 그리고 장엄서원을 한 수도자는 재물을 소유할 수 없다.19 한편, 수도회의 정신과 회헌에 따라 노동과 직무를 수행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수도회의 재산과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을 보급함으로써 거룩하게 변화되고 그 사용과 완벽함에 따라 훨씬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 줄”(회헌 237조)20 기술적인 수단을 관리해야 할 의무 또한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서적, 글을 쓰는 펜, 인쇄기, 기구 등에도 적용된다.“ 사도직을 위한 기술적 노동은 거룩하게 변화된다.”(회헌 239조) 하지만 인간의 노동은 자본과 도구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21
탁발과 자선은 고되게 일하는 의무를 다한 다음 행해야 하고 고유한 직무, 노고, 제대의 헌금으로 살아가기를 꾀해야 한다. 탁발과 자선은 새로운 공공 이익사업을 위해 사용해야 하고, 이러한 사업을 통해 대중, 곧 이웃은 이익을 얻기에 그와 같은 활동이 증가하도록 기여해야 할 의무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로써 교회건립, 성소자 공동체 건립, 자선활동, 사도직 수단을 이루게 될 것이다.
교황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동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좌우명에 따라 그 시초부터 수도생활의 근본규범이요 법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수도생활 규율에 대한 규범은 대부분 노동을 명하고 조정하고 실행하기 위해 확립되었다.” 22
예수 그리스도는 30세까지 ‘동네 목수’로 일하셨다. 그런 다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창설하고, 당신 사명을 계승할 제자들을 모으기 위해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기부를 받으셨다. 심사숙고 하면서! 그리고 예수님은 남아 있는 기적의 빵 조각을 모으라 하시고, 사도들이 안식일에도 추수하는 이들이 떨어뜨린 밀 이삭을 줍게 하셨다.
그릇된 사상에 빠지지 않은 백성은 그 필요성을 이해할 것이고, 올바른 자세와 지혜에 따라 슬기롭게 관리하고, 백성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보게 될 때 관대해질 것이다. 사회에 가장 좋은 법을 세우고 사회적 보장이 잘 되어있다 하더라도, 사랑을 위한 영역은 언제나 아주 방대하다는 것을 교황 레오 13세, 비오 11세,23 비오 12세는 강조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을 것”[마르 14,7]이고,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활동을 위해 교회 안에는 언제나 새로운 필요성이 생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사도들을 돈 없이, 여벌 옷도 없이, 비상식량도 없이 파견하셨으며,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사도들은 그들에게 질문하신 스승께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게으른 이들에게 수도생활은 어떤 면에서 크나큰 불행이다. 그들은 노동에 대한 초자연적 이해력이 없으며 식사시간에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힘든 노동을 회피하려 한다. (그런데 노동에서 | 면제되기 위한 구실을 찾지 못할 사람이 있겠는가?) 만일 그들이 세상에서 살았다면 필요의 법칙에 따라 일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결산은 덜 심각했을 것이고, 공동체 안에서 물의를 덜 일으켰을 것이며, 더 덕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SP, 1954년 1월호,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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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바오로인의 기본 재산24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아버지의 유산은 그리스도교적 교육과 기능직, 전문직 또는 손노동이다. 사람은 이 두 가지 수단을 통해 이 지상에서 잘 살고 영원에서 행복을 누린다.
성바오로수도회는 다음과 같은 것을 준다.
1) 공부와 사제서품: “제대에 봉사하는 사람은 제대의 것으로 살아가야 한다.”25
2) 잘 활용할 수 있는 편집능력을 제공한다.
3) 서점원, 인쇄기술, 편집자와 같은 고상한 전문직을 제공한다. 이 모든 일은 개개인의 삶과 성덕의 수단이다.
4) 무엇보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인간적이고 영적인 일반교육, 그리스도인 교육, 수도자 교육을 베푼다.
그러므로 수도회는 모든 면, 곧 다방면에 걸쳐 필요한, 완전한 양성을 하고 있다. 모든 바오로인은 그 소속 공동체와 나라를 떠나 어떤 소임지나 선교지에 머문다 해도 충분하고 넉넉하게 가지고 있다. 모든 ‘기본재산’, 곧 주거, 기기, 필기도구, 라디오, 성소자, 사도직의 놀라운 성공은 겸손과 지혜, 열성과 ‘현명하고’ 올바른 관리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어떤 수도회가 이와 같은 기본재산을 제공하는가?
프리모 마에스트로는 이 모든 혜택26에 대해 누군가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루카 15,11 이하)고 한 것처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함으로써 지나치게 일탈과 유혹의 문을 열어놓는 것은 아닌지 숙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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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노동을 가르칠 것

빵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젊은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일 경우 벌이를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두 배로 좋고, 두 배로 가치 있는 일이다.
교회에는 언제나 인간이 되신 하느님 아드님을 본받아 양성된 합당한 자녀들이 있다. 이를테면 성 바실리오, 성 베네딕토, 성요한 보스코, 성 요한 드 라 살. 
여러 가지 교육이 있다. 때로는 공부만 할 때가 있고, 때로는 일만 할 때가 있고, 때로는 공부와 일을 조금씩 할 때도 있다. 때때로 지나치게 많은 놀이, 스포츠, 체조를 하기도 한다.
비록 목적에 따라 어떤 것에 치중하더라도 교육은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참된 삶은 활동적이고 창의적이다. 그리고 생명력 있는 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참된 삶은 현명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어 준다. 힘써 수고하는 것은 하늘 나라를 위해 부를 쌓는 것이다.
참된 삶은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요, 검소하나 품위 있고 존경받을 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추고, 적어도 어떤 형태로든 받은 만큼 되돌려주고 이웃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을 주어야 한다!’ 신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업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보다 일자리를 마련해주거나 일거리를 주는 것이 더 유익하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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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균형 잡힌 노동

“모든 일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1코린 14,40)“ 질서를 존중하면 질서가 그대를 존중할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노)28
질서정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란스러운 사람도 있다. 명확하고 주도적이며 현실에 뿌리내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모든 힘을 모아 거의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안다. “모든 것을 하나로 본다.”29 이렇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은 이상적으로 작용한다. 첫째는 항상 해야 할 의무고, 그 다음은 자유로운 선택이나 들은 권고를 따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말을 듣고, 방법을 강구하며, 많은 것을 바라고,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며, 온갖 상황에 따라 방향이 바뀌고, 시작만 하고 마치지 못한 채 놓아버리고, 진정한 이유 없이 관계를 많이 맺고, 서신왕래를 거듭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하는 일 없이 매우 바쁜 사람’30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적으로 질서정연한 사람은 외적인 일에도 훨씬 쉽게 질서 있게 처신한다. 대피정으로 준비한 분명하고 가능한 프로그램을 통해 단순화된 내적 삶이 첫 걸음이다. 한 과정에서 다른 과정, 곧 양심성찰, 고해성사, 영적 독서, 영적 투쟁, 기도… 이 모든 것은 내적 삶을 전개하고 실현하기 위해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
[SP, 1954년 1월호, 7쪽] 학교와 면학은 목표를 위한 확고한 연중계획과 단순하고 명확한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매일 해야 할 일을 분담해 놓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고 항상 기초-개념을 강조하면서 매주 평가한다. 
무질서한 ‘홍보’31는 실패한다. 질서 잡힌 홍보는 쉽고 침투력있고, 힘을 집중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다.
편집: 책 선정, 합리적인 자료수집, 원고 검토지 작성 및 출간 검토와 교정의 명확한 결단이 필요하다. 이 매체를 읽을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초점을 맞추어 출간해야 한다. 작가인 성 바오로를 따르면서, 모든 것은 오로지 그리고 언제나 가톨릭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받고, 감실의 빛으로 행해야 한다.
기술: 대상과 주변상황을 위해 적합한 작업을 선택하고, 사용 가능한 매체를 선정하며, 작업의 모든 부분을 분명한 틀 안에서 질서 있게 정리하고, 수입과 지출을 예상하고, 인원과 특징과 기계 및 보급수단을 선별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짧은 시간으로 모두가 만족하고 적절한 수입을 얻는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완전하고 질서 있고 유능한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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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헌신과 항구함

헌신은 강력하거나 덜 강력한 모터에 비유할 수 있다. 관대한 사람은 지성, 의지, 마음, 육체적 힘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직무와 사명을 완수한다. 지성은 작업을 이해하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을 연구하기 위해, 의지는 모든 수단, 육체적 도덕적 힘을 사용하면서, 마음은 자기 사도직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고 보람있게 사도직을 한다.
어떤 사람은 마지못해 힘겹게 직무를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그 직무를 사랑으로, 또 어떤 사람은 열성을 갖고 헌신적으로 행한다.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관대하게 헌신하고 인내를 가지고 임할 때 좋은 결과를 낼 것이다. 이러한 요소가 부족하면 좋은 재능을 지녔다 해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성소자, 학교, 사도직, 설교, 경영관리, 편집에도 적용된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앞에서 타오르는 등불은 기름을 모두 태우며 환히 빛난다. 다섯 탈렌트가 되었든, 두 탈렌트가 되었든 주님을 위해 모든 재능을 발휘할 때 다음의 성경말씀이 확실하게 보장된다.“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마태 25,21.23]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일하는 사람은 (때때로) 실수하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은 계속 실수하며 살아간다. 영혼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건전한 낙관주의’를 지녀야 한다. 역사는 삶의 스승이다. 그리고 우리의 과거 경험은 우리 미래를 위한 배움터다. 한 번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면,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다른 싸움에서 승리할 시간이있다.
좋은 의지를 지녔을 때에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 참조] 좋은 결과를 낸 것에 대해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이고, 다시 더 잘 시작하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해 「잘못에서 발전을 자아내는 예술」32이라는 좋은 책이 있다. 가장 무서운 유혹은 절망이다. 그러나 더 공통적으로 만연된 유혹은 절반의 절망이다. 신앙은 첫번째 덕이고, 두 번째 덕은 희망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자주 경의를 표하며, 주님의 어지심에 대해 믿음을 드리자. 체사레 칸투Cesare Cantù에게 어떻게 그토록 많은 글을, 그렇게 잘 쓸 수 있었느냐고 경탄한 어느 친구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내하면서 썼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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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시간 활용

두 사람이 같은 해에 태어났고, 같은 해에 죽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망쳐놓았고, 다른 사람은 성인이 되었으며, 자기 뒤에 오래도록 선의 흔적을 남겼다.
“시간은 거침없이 빨리 지나간다.”(비르질리오Virgilio)33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34 “시간을 잘 사용하십시오.”35 “지나간 너울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고,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오비디오Ovidio)36
시간은 하느님의 위대한 선물이다. 인간은 도금한 상자를 선행인 보석으로 채우거나 죄라는 악행으로 채울 수 있다.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익한 일을 하면서, 죄를 지으면서, 성급하게 일하면서 잃을 수 있다. 그 대신 선행을 하면서, 먼저 자신의 의무를 행하면서, 항상 유익한 무엇인가를 하면서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 6,9) 
시간을 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중학교 때 학과목을 잘 배우면 기초를 잘 다질 것이고, 이어서 그 기초 위에 계획을 세워 많은 시간을 절약하게 될 것이다. 더 올바른 지향과 큰 사랑으로 일함으로써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금을 모으는 것과 같다. 성 바오로 사도가 설명했듯이 | 노동은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SP, 1954년 1월호, 8쪽] 이처럼 짧은 생애에서도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지혜 4,13) 학생도 학생 나름이듯이, 성체도 영하기 나름이다. 교회와 함께 기도하자.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의 행동을 당신 뜻에 따라 이끌어주시어, 저희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가운데 풍성한 공로를 쌓게 하소서.”37
어떤 기능과 일부 과목에서 ‘전문화될 것.’ 평수사들은 이미 사도직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었다. 사제들은 사회학, 신학, 교회법, 문학, 미술, 성음악 등 특정분야에서 상담할 수 있다. 그들을 지도하던 이의 허락하에 특별한 자질과 적성을 키웠다. 시간이 있을 때 읽고 듣고 묵상했고 연습했고 실습했다. 성직자, 수도자, 바오로인 사이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일분일초를 아낄 것.’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니지만 생각을 분명하게 해주는 표현이다.
“때를 잃는다는 것은 현자일수록 더욱 꺼리기 때문이다.”(단테, 「신곡-연옥편」, 3장, 78) 하루에 5분, 10분이 5배, 10배가 되면 30분과 몇 시간이 된다. 그리고 1년, 10년, 20년을 곱하면 얼마가 되나? 더 많은 세월이 흐르면?
무익한 대화와 시시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매일 10분 동안 수덕, 사회학, 역사, 문학 등의 서적을 읽는 신학생은 동료들보다 지식을 더 쌓게 되고, 가장 소중한 것을 얻는다.
사도직의 어떤 부서에서 진정한 자격을 갖추게 된 평수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할 것.’ 영적 지도자와 친구를 잘 선별할 것. 학교교재와 읽을 책을 잘 선택할 것.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할 것. 그것은 마치 가장 우수한 의사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고, 믿을 만한 은행과 거래를 하며, 가장 완전한 기술과 많은 경험을 몸에 익히고, 가장 좋은 기계를 도입하고, 가장 유능한 전문가를 따르며, 가장 유익한 일을 선택하고, 가장 뛰어난 저술가에게 의뢰하고, 훌륭한 설교가를 보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간을 많이 절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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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최선을 다할 것

우리 사도직은 한편으로는 산업에 가까운 것 같고(예를 들면 인쇄소), 다른 한편으로는 상업에 가까운 것 같다(서원). 그 대신 모든 것은 교회학자의 손에 들려 있는 펜과 같이 설교를 위한 수단이다. 외적으로도 일반상인이나 산업 기술자 같은 인상을 주지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도직을 시작할 때 바치는 봉헌기도, 저술가와 기술자와 보급자 사이의 일치감, 사도직과 결부된 대사大赦를 얻기 위해 필요한 묵주기도와 화살기도를 계속 바치는 것 등은 사람들에게 참된 사도직일 뿐 아니라 가장 현대적이고 신속한 수단을 통한 사도직,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실행하는 사도직, 우리를 위해 가장 풍요로운 공로를 가져다주는 사도직이라는 [확신을] 심어줄 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 이유 때문에도 이러한 영성의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 흔히 다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받는 위로와 호응이 우리 사도직에는 매우 부족하다.
“사도직은 사목적 특징을 띠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상업적이거나 산업적인 목적만을 위한 출판물은 금한다. 그 대신 인간계발에 유익한 출판물을 권장한다.”(회헌 227조)38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실행하는 우리는 모든 이에게, 특히 작은이들, 믿지 않는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빚진 자들이고,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지혜를 알려야 한다는 것을 수도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회헌 22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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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초자연성

진정한 바오로인은 사도직, 곧 노동을 초자연적 정신으로 수행해야 한다.

가) 순명: 내적 일이든, 외적 일이든 순명에 의해 행해야 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장상을 통해 명령하신 바를 책임지신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루카 10,16] 내적 일은 고해사제나 영적 지도신부에 의해 지도를 받거나 권고를 받는 것이다. 외적 일은 해당 장상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 수도생활의 큰 이점이 있다. 수도자는 자기 선택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중의 공로를 쌓는데, 하나는 좋은 업적을 통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순명을 통한 공로다. 그대신 만일 수도자가 고집이나 기만으로 자기 취향에 맞는 직무나 공동체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비록 현저한 업적을 남기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해도 실제로는 “빠르게 나아가겠지만 정도正道에서 벗어나”39 있을 것이다.
나) 은총의 상태: 마른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대죄 중에 있는 영혼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가지들처럼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해 있을 때 | 살게 된다.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SP, 1954년 1월호, 9쪽]
다) 올바른 지향: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 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40
우리의 일상과 여러 가지 노고에는 다음과 같은 지향이 포함되어 있다.
-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창조된’ 우리 전 존재를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내어놓으면서 흠숭의 예를 드린다는 지향. 이러한 정신으로 일하는 것은 흠숭이요, 이러한 봉사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처럼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는 규정을 완수한다.
-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길 생명을 전하는 스피커처럼 사도직을 행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고자 하는 지향.
- 제대 위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염원과 열망을 품는다는 지향.
- 노동자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우리 노동이 예수님의 노동처럼 모든 산 이와 모든 연옥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지향.
그러므로 경우에 맞게 편집, 기술 사도직, 보급 등을 위한 기도를 바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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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좋은 편집

면학은 사도적 직무를 향해 방향을 잡아간다. 이미 중학교 때, 아직 고등학교와 신학과정을 밟기 훨씬 이전에 방향을 잡아야 하며, 사목생활 중에도 그와 같은 방향제시가 분명하고 확고해야 한다. 실습, 소논문, 소책자 등을 써야 한다. 이것은 바오로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제적 열의를 시험해볼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제는 자기 직무에 크게 만족할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평화를 목표로 삼을 때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고 다가가고 비추기 위한 길과 수단을 찾는다. 최고의 사랑이란 곧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 편집은 대부분의 경우 단순하다. 그러나 어린이를 위한 교리서와 호교론적 강연 같은 것은 그 가운데 다양함이 있어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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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술적 노동

모든 학생이 편집뿐 아니라 기술, 보급, 경영관리를 배워야 한다. 평수사들은 잘 배워 부서 책임자로 양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작업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원고가 인쇄소에 들어와 보급되고 수익이 창출 될 때까지의 개별작업뿐 아니라 사도직의 과정과 조직 전체를 알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공동체가 영화, 라디오의 기술과 보급에 있어서 아는 바가 없고 실행하는 바도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일은 충분히 양성하기 위해 적어도 인원 교체로써 어느 정도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회헌의 몇 가지 조항을 기억해야 한다. “성바오로수도회의 특수목적에 따라 사도직은 적합한 기술수단을 요구하며, 이 수단은 복음과 교회 가르침을 전파할 때 거룩한 도구가 된다. 사도직 수단의 사용과 완덕에 따라 훨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회헌 237조) “기계와 사도직의 다른 수단은 이러한 분야에서 기술의 진보가 제공하는 가장 우수한 것이어야 한다.”(회헌 238조) “사도직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기술노동을 완수함에 있어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확고하게 지녀야 하고, 하느님 말씀이 영혼의 계발을 위해 잘 꾸민 겉표지와 합당한 표현으로 드러나야 한다.”(회헌 239조)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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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보급

하느님 말씀이 곳곳에 도달하기 위해, 앞서 이룬 모든 작업(역주: 편집과 기술 작업)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나아가 수도회가 안정되기 위해 보급은 중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보급을 위해서는 시작부터 사회의 필요성에 도움이 되고 사람들의 바람에 응답하는 출판을 선택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먼저 종교적인 것 그리고 인류발전을 위한 것, 독자, 청중, 관객의 모든 분야와 범주를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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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휴식의 본질

하느님의 질서를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휴식은 음식처럼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시에,‘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는 지향을 갖게 해준다.
레크리에이션은 바쁜 중에도 육체와 정신을 드높여주고 쉬게 한다. 밤은 하루를 위한 휴식을, 주일은 한 주간의 휴식을, 여름 휴가는 1년 간의 휴식을 선사한다.
[SP, 1954년1월호, 10쪽] 휴식은 그동안의 노고를 위한 참된 ‘쉼’이라야 하고, 미래를 위한 준비라야 한다. 그러므로 지치게 해서는 안 되고, 탕진해서도 안 된다. 그 대신 신체 회복에 도움이 되고 지성을 더 넓게 여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마음을 가다듬어 잔잔하고 편안하며 온화한 마음을 지니게 해야 한다. 가장 존경받는 교육자들의 좋은 규범을 따라야 한다.
밤을 낮으로 삼고 낮을 밤으로 삼거나, 쉬는 날을 몹시 지치게 하는 주말 스포츠로 힘겹게 보냄으로써 본질을 변질시키지 말고 휴식은 휴식답게 쉬어야 한다. 삶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양심을 어지럽히며, 정신을 혼란케 하는 논쟁, 청취, 경기, 대화, 독서, 영화관람, 격정을 불러일으켜 신경과 감정과 상상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휴식이나 레크리에이션 후에 면학, 신심, 덕행, 사도직… 등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정리하지 못한다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어릴 때는 더 민감한 문제가 된다. 휴가는 자주 악마의 수확기라고 성 요한 보스코는 말했다. 한편 레크리에이션은 활발해야 하고, 젊은이의 활기를 띠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하며, 건전하고 유쾌한 사회관계 속에서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아름다운 정원, 다양한 놀이, 재미있는 노래, 교육적인 연극, 즐거운 산책을 하면서 재미에 유익함도 겸비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빨리 잠자리에서 나오시오.” 특히 지도하는 직분을 맡은 이에게 필요한 말이다. 놀이와 스포츠는 직업이 되어서도, 거기에 열광해서도 안 된다. 항상 이성과 정신이 평온한 가운데 지도해야 한다.“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1코린 7,30)
주일이 더 이상 주님의 날, 기도의 날, 종교교육의 날, 휴식의 날이 아니라, 절제 없이 즐기는 날, 위험한 날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월요일에는 피곤과 무기력에 짓눌리고, 면학과 해야 할 의무에 생각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것을 힘겨워하게 되고, 금요일에는 정신과 생각이 이미 스포츠를 향해 방향지어져 있다. 이와 같은 젊은이를 언제, 누가 양성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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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스승 예수님과 마에스트로들

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 위격의 빛이시다. 곧 ‘빛에서 나신 빛,42 성부의 영광을 비추는 광채시다. 그분은 인간이 되시면서 “인간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하느님 위격의 빛이 되셨고, 말씀과 업적에 있어 그들을 위한 완전한 빛이시다. 강생, 탄생, 사생활과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 승천, 교회설립, 성사,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는 영광은 언제나 빛의 계시요, 당신의 완벽함과 그분 안에 사는 영혼의 가장 내밀한 경이로움을 계시하는 은총과 지혜의 업적이다. 이와 같이 당신의 행적은 당신 말씀처럼 하늘로 인도하는 길을 드러낸다.”
이제 바오로인은 빛을 받아 대중에게 빛의 반사경이 되어야 한다. 이 분야에서는 아주 많은 것이 필요하기에 빛을 받기 위해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때때로“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의식을 통해 빛을 받아들여야 하고, 의식을 통해 우리 안에 빛이 관통하도록 놓아두어야 하고, 의식을 통해 그 빛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반사경’이지만 인간 반사경이라야 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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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성소자

우리는 우리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렀다.43 어떤 사람은 신학교에 보내듯이 [젊은이들을 우리에게 보내고], 어떤 사람은 대학교에 보내듯이 보내고, 어떤 사람은 지방이나 가정에서 받는 교육보다 좀 더 많은 교육을 받게 하려고, 어떤 사람은 식구를 [줄이기] 위해 또는 집에서 달갑지 않은 자식을 보내고, 어떤 사람은 고아원에 보내듯이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그리고 항상 ‘바오로적 수도자’가 되도록 성소자를 잘 교육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써만 우리는 부모, 친지, 지망생을 잘 이끌어주고 방향을 잡아주고, 만족스럽고, 뼛속까지 바오로인이 되도록 이끌어줄 수 있다. 44
한편 훌륭한 스승은 기도하면서 그리고 모든 면에서 관찰하면서 부르심받은 이들과 부르심받지 않은 이들을 비교적 빠른 시일내에 식별해낼 수 있다.
음악선생은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는 동작을 보고 자기 학생의 재능을 식별한다. 미술선생은 화판 다루는 것을 보고 식별한다. 이와 같이 부서의 마에스트로45는 자신의 젊은이들이 수업, 사도직, 교리수업, 성당에서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면서 어떤 경향이 있는지, 온순한지, 지성, 사랑… 등이 어떤 상태인지, 모든 방면에서, 수도회 안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 ‘열정을 갖는지’를 식별한다.
젊은이에 대한 식별은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사도직에 열정적이라면 바오로인의 특별한 성소를 위해 분발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의 이상은 활기차고 열정적일 것이다. 레크리에이션보다 사도직을 더 좋아하고, 사도직을 제때에 완수하기 위해 예외도 자원自願하고, 수도회의 발전을 기뻐하고, 수도회의 모든 기쁘고 고통스러운 사건에 깊이 공감하며 동참하는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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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노동을 위해 [SP, 1954년 9월호, 11쪽]

예수께 부르심을 받은 첫 사도들처럼 관대한 이들을 모으는 하느님의 방법이 있고, 바로 이와 같이 관대한 이들이 응답하는 방법도 있다. 또 다른 공통된 방법은 어떤 경우든 다음과 같은 말에 있다. 그대 여정을 비추는 별처럼, 그대 사명을 항상 염두에 두어라. 이는 삶의 이상, 그대의 존재 이유, 사심판에서 셈하게 될 대상이다. 사명을 위해 살고, 생각하고, 일하라. 성공하도록 그대의 온 힘을 집중하라. 헛군데에 지성, 시간, 돈, 재능, 마음… 을 낭비하지 말며 장애, 희생, 오해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하라. 어느 날 그대가 기도, 숙고, 충고 후에 굳힌 결정을 상기하면, 그대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인내할 용기와 힘을 되찾게 될 것이다.
새로 건조한 배가 조선소를 떠나 천천히, 위엄 있게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가 먼 바다로 항해를 시작할 때 당국과 건설업자, 백성의 축제가 된다. 한 신학생이, 한 평수사가 태풍에 맞서기 위해 잘 준비하고 잘 단련되어 삶의 바다로 출항할 때 젊은이의 마음, 교육자의 마음, 사람들의 마음에 충만한 기쁨이 비록 확연히 드러나지 않더라도 아주 깊고 강하게 일어남을 느끼게 된다. 곧 가장 즐겁고 확실한 징조를 예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잔잔한 해면과 태풍, 암초 사이를 평온하고 강하게 헤쳐나갈 때 주님은 이를 기뻐하시고, 사람들은 감탄하며, 그는 분명 또 다른 위대하고 영원한 직무를 받기 위해 하늘의 문에 다가가게 된다.
신뢰와 경외심을 가져라!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소명과 선택이 굳건해지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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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신앙

신앙은 모든 성화, 모든 사도직, 모든 안정의 뿌리다.
성소는 활기찬 신앙에서 나오며, 그 성소는 한층 더 많은 빛을 받는다. 이를 느끼고 익힌다면 성소가 활력을 보존하고 적극성을 띨 것이다. 사도직은 그리스도와 진리, 그분이 가르쳐주신 신앙을 구체화시키는 윤리와 경신례를 비추어주는 빛이다.
사도직의 결실은 하느님께 달려 있다. 지식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이므로,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동의해야 하기에 사도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는 말씀에 힘입어 일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원천이요, 거룩하고 본보기가 되는 책은 복음서다. 그러므로 모든 분원에는 감실과 복음서라는 두 개의 중심축이 있어야 한다. 위에는 성체이신 예수님을, 아래에는 복음서를 모셔둔다. 이를 위해 장엄축복을 해야 하며, 사도직 터에 현시해 두어야 한다.
우리의 어지신 어머니,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의 축복과 자비가 넘치는 눈길 아래에서 우리는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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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노동의 여왕이신 마리아

로사리오 에스포시토 신부가 편집한 「성 바오로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1095쪽 이하)에 실린 알베리오네 신부의 자필원고를 ‘성 바오로’라는 명칭이 붙은 문서고 서랍에서 꺼내어 여기에 싣는다. 11cm×17cm 크기의 종이 4장으로, 1955년 8월 22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후반부에는 당시 통용되던 교리교육 형식인 질의응답이 나오는데,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들,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한 개인적인 시각을 폭넓게 예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후(1955년 12월 19일) 노동의 여왕이신 마리아라는 칭호로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의 대관식을 거행하게 될 것이다.46
노동자 세계는 이를 기뻐하며 반길 것이다. 그리고 노동을 하셨고 수고하고 땀 흘려 얻은 빵을 먹게 되는 자녀들을 이해하며 그들에게 마음 쓰시는 어머니를 모시게 될 것이다.
노동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모든 활동은 노동이다. 영적 노동이 있고, 지적 노동이 있으며, 육체 노동47이 있다. 각자는 자신이 행하는 노동의 힘듦을 받아들이고 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아무도 하느님보다 더 활동적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과 천상 성부를 위해 매우 가치 있는 높은 차원의 노동을 하셨다.
마리아의 노동은 완전한 영적 작업이었고 완덕을 향한 계속적인 상승이었으며, 주님이 맡기신 가장 고귀하고 힘든 사명 완수의 계속이었다. 당신의 고통을 통해 무서운 뱀의 머리를 밟으셨다.
마리아의 노동은 지적이었다. 그분은 성경을 열심히 묵상하셨고 공부하셨다. 그리고 성경에서 도출해낸 말씀과 문장을 엮어 당신 입술로 ‘마니피캇’을 자연스레 노래하셨다.
복음서에는 두 차례에 걸쳐 마리아가 예수님이 하신 거룩한 말씀을 듣고 곰곰이 묵상하셨음에 주목한다.
마리아의 노동은 육체적 노동이었다. 그분은 집과 가정을 돌보던 다른 히브리 여인들처럼 일하셨다.
마리아에게는 다른 모든 여인보다 더 훌륭한 찬사를 드려야 한다.(잠언 31,10-31 참조)
예수님이 당신의 공적 직무를 수행하셨을 때, 사도들이 오순절을 기다리며 이층 다락방에 모여 있었을 때48, 또는 설교하셨을 때, 요한의 집에 머무셨을 때(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49
마리아는 다른 경건한 여인들처럼 음식을 준비하고 청소하고 의복을 만드는 등 부지런한 여인으로서 당신의 일을 완수하신다.
노동자의 귀감이시다!
질문: 노동을 하셔야 했나?
답변: 물론이다. 하느님의 명령이고 삶의 필요성 때문이다. 근면한 삶은 위대한 공로다.
질문: 누구에게 노동자라는 칭호를 주어야 하는가?
답변: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또는 기도 안에서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이들에게, 선생, 의사, 판사처럼 지적 노동을 하는 이들에게, 사제, 선교사, 훌륭한 교육자처럼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공장, 밭, 광산, 정직한 상업 등에서 수고하는 이들에게 주어야 한다.
질문: 노동을 어떻게 성화시키는가?
답변: 노동을 통해 빵과 천국을 추구하면서 성화시킨다.
질문: 노동자는 왜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답변: 마리아는 영적 지적 육체적 노동의 귀감이시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인내와 초자연적 지향과 계속적으로 시간을 활용하여 당신의 일을 완수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하늘에서 자비로운 눈길로 노동자들을 굽어 살피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머니, 스승, 노동자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마리아께 드리는 것은 타당하고 옳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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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일’ 또는 ‘시기’에 대한 성서적 해석은 새로운 우주과학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며 우주의 변화 또는 ‘계속적인 창조’ 가설에 개방적인 현대 주석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명확히 언급할 필요가 없다.(A. Masani, “섭리와 우주 질서Provvidenza e ordine cosmico”, in 「신학 논평Rassegna di Teologia」, 4번 - 1999, 581-591쪽; - C. Taddei Ferretti, “계속적인 창조: 미래와 창조Creazone continua: il futuro e la creazione”, 같은 잡지, 2번 - 2000, 223-259쪽 참조).

2 하느님의 내적-삼위일체 생명으로 구별되는 하느님의 행위를 지칭하기 위한 스콜라 신학의 표현(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밖에 있는/외적인”

3 “인간은 노동을 위해 태어나고, 새는 날기 위해 태어난다Homo nascitur ad laborem et avis ad volatum.” 이는 인용한 성서를 문자 그대로 옮긴 것이다.(욥 5,7) 새로운 성서 번역에서는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CEI에 따르면, “불티가 높이 날듯이 인간은 재앙을 위해 태어난다.” 그리고 TOB(프랑스 공동번역)에 따르면, “인간에게서 악이 생기는 것은 마치 불에서 불꽃이 치솟는 것과 같다.”

4 ‘선종을 위한 기도’ 「바오로가족 기도서」(초판) 1957년 참조.

5 “Requiescant”.

6 이 항목에서 저자는 무신론에 대해 언급하며, 노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에 관해 다루고 있는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하느님의 구원Divini Redemptoris」(1937년 3월 19일)에서 영감을 받았다.

7 여기서는 학생들의 정신, 의지, 마음의 양성장인 ‘마에스트로’에 대한 알베리오네식 개념을 떠올린다.

8 ‘그 대신’은 ‘반대로, 역으로’라는 말 대신 사용한 것이다.

9 힘에서 행동으로 옮아간다는 것(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은 가능성(잠재력의 실재)에서 노동 또는 실제 존재로 옮아간다는 것과 같다.

10 CEI에는: “이것이 여러분의 영적 예배입니다.”

11 앞서 이루어진 두 개의 출판본에는 ‘계급주의적classista’이라는 단어가 ‘고전적classica’으로 되어 있었다.

12 주세페 토니올로Giuseppe Toniolo(1845년 트레비소 출생 - 1918년 피사에서 사망)는 그리스도교 사회사상과 경제학의 저명한 스승으로서, 특히 「노동」 (그의 「전집」, 27-54)에 관한 연구논문 때문에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중요했다.

13 교황 비오 12세의 교황령 「그리스도의 신부Sponsa Christi」 참조.

14 이 문장은 「성 바오로」지에는 없는데 「바오로가족에게」 재판에는 첨가되었다.

15 “Qui… sectatur otium stultissimus est.”

16 “Qui… sectatur otium replebitur egestate.”

17 원문에 나오는 두 문장: “Quod superest date pauperibus”와 “quod deest petite a divitibus”. ‘넘치는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해석은 라틴어역 성경의 ‘여분의 것quod superest’에서 온 것이다. 현대 주석은 “(그릇) 속에 있는 것”, 또는 “너희가 가진 것”이나 그와 유사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선호한다.

18 문자대로는 “자신을 부정하고 견디다.” 스토아 철학가인 에피테토가 말한 ‘절제와 인내abstine et sustine’라는 표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절제해야 하고”, “우리를 도와주는 것을 붙잡아야 한다.” (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23항 참조)

19 교회법적 의미에서 소유의 ‘자격 없음inabilitato’

20 이 회헌 조항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9년판 성바오로수도회의 회헌을 참조한 것이다.

21 ‘et pretio æstimabilis’.

22 교황령 「그리스도의 신부」.

23 다른 출판본에는 교황 비오 10세의 이름이 게재되었지만 오류다. 여기에 표현된 개념은 교황 비오1 1세의 회칙 「사십 주년」에서 다룬 것이다.

24 앞선 출판본에서는 다소 모호한 복수형으로 된 “Le doti dei Paolini”라는 제목을 발견하게 되지만, 원칙적으로 친족 유산이라는 의미에서 ‘dote’에 관해 다루고 있다. 좀 더 나아가서는 복수형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

25 “qui altari deservit de altari vivere debet.”는 “제단 일을 맡은 이들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라는 1코린 9,13의 의미를 인용한 것이다.

26 여기서 말하는 ‘유산doti’은 ‘능력’, ‘적절한 전문성’의 뜻도 포함된다.

27 원문에는: “quibus consultius est laborem procurare aut subministrare, quam elemosynam dare.”

28 원문에는: “Serva ordinem et ordo servabit te.” 

29 앞에서 인용한 “Omnia in unum videt”과 비슷하다. “모든 것을 하나로 향하게 한다.”

30 원문에는: “in nihilo agendo occupatissimi.”

31 바오로인의 사도직에서는 ‘보급’, 출판물 촉진을 의미한다. 

32 정확하게 말하면 주세페 티쏘Giuseppe Tissot의 「자기 허물을 활용하는 기술L’arte di utilizzare le proprie colpe」을 말한다. 앞에 나온 “네 정신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 각주 118을 보라.

33 “Fugit irreparabile tempus.”(‘Georgiche’, 1. III, 284)

34 원문에는: “venit nox quando nemo potest operari.”(요한 9,4)

35 원문에는: “Tempus redimentes.”(콜로 4,5)

36 원문에는: “Nec quæ præteriit iterum revertitur unda; nec quæ præteriit hora redire potest. ”(Ars amat. 3,63)

37 원문에는: “Omnipotens sempiterne Deus, dirige actus nostros in beneplacito tuo: ut in nomine dilecti Filii tui mereamur bonis operibus abundare.”(미사경본)

38 여기서 언급하는 회헌은 1949년판 성바오로수도회 회헌이다.

39 “magni passus sed extra viam”은 성 아우구스티노가 도나티즘 추종자들에게 한 말이다. 

40 원문에는: “Gloria in excelsis Deo; et in terra pax hominibus bone voluntatis.” ‘G.D.P.H.’라는 이니셜에 함축된 좌우명은 알베리오네 신부가 편지를 쓸 때 자주 표기했고, 일부 작품에서는 저자의 이름 대신 사용했다.

41 성바오로수도회 회헌(1949년판).

42 ‘Lumen de Lumine’: 니케아-콘스탄티노폴‘ 신경’에서 발췌.

43 다시 말해 수도회의 특수 목적과 고유한 모습을 잘 제시하지 못한 잘못.

44 이 점에 관해서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완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I, 84-126; 145-147; 215-225… 참조. 

45 부서의 마에스트로는 특정한 양성자 그룹의 양성장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곧 사춘기 소년소녀들, 수련자들, 유기 서원자 그룹 등의 책임자들을 가리킨다.

46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 1955년 12월 11일자에 멕시코에서 과달루페의 동정녀를‘ 노동의 여왕Regina del Lavoro’이라는 칭호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고 게재했다. 군중이 존경의 의식을 장엄하게 치르는 동안 동료들의 이름으로 한 노동자가 그 유명한 성모상 머리에 금관을 씌워드렸다.

47 ‘손노동manuale’에 해당하는 표현. 

48 ‘trovavansi’, (si trovavano)라는 표현 대신 사용한 고어古語.

49 “accepit eam discepulus in sua” 요한 19,2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