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네 정신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는 주제를 창립자는 「성바오로」지 1954년 9월호, 1954년 10월호, 1955년 1월호, 1955년 3월호, 1955년 5월호, 이렇게 5회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기고했다.
제목은 신명 6,5의 유명한 구절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는 말씀을 재인용하신 것이다.
이듬해(1956년)에 발간된 책자에서는 표제가 「지성의 성화」로 바뀌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있어 동일한 것이다. “지성의 성화는 지성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DF 65항 참조)
본문에 차례로 나오는 많은 소제목은 바오로 서간과 전례에서 따온 것이다. 알베리오네 신부가 생각하고 글은 쓴다는 것은 사도 바오로가 생각하는 주제와 전례를 상기시킨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본문은 기본원리를 기초로 하여 전개되었다. 그 첫 기준점은 언제나 스승이요 필수적인 진리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지성의 주재자, 복음의 주재자, 진리의 스승이요 교회의 주재자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인간학이다.
하느님의 모상이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존엄성을 형성하는 것은 지성이다. 인격 계발은 지성에 달려 있다. 가장 큰 공로와 가장 큰 죄도 “지성에서 이루어진다. 적어도 지성 없이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여기서 ‘구원하는 진리를 전하는’ 출판 사도직의 시급성이 대두된다. 진리를 준다는 것은 “하느님을 인간에게 주는 것이요 인간을 하느님께 인도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알베리오네 신부가 길어낸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창립자 신부는 부지런하고 주의 깊게 독서를 했고, 수많은 저서와 여러 저자에게서 자양분을 섭취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창립자가 영향을 받은 일부 저서의 특징을 구분해낼 수 있다.
저자에게 아주 강한 빛을 준 작품은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디비니 일리우스 마지스트리Divini illius Magistri」(1929.12.31)다. 교황은 이 회칙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스도교 교육의 직접적이고 고유한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참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교육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바오로의 생생한 표현에 따라, 세례성사를 통해 다시 태어남으로써 그리스도와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나는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갈라 4,19)”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저서는 교구 참사위원 프란치스코 키에사Francesco Chiesa 신부의 「생명의 열쇠」1a였다.
이 저서에 대해서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1932)에서 분명하게 설명한 적이 있는데, 여러 가지요소를 활용했다. 일부 내용은 (예를들면, 신앙의 불꽃을 키워야 할 필요에 관하여) 심지어 ‘글자 그대로ad litteram’ 본문을 옮겨 놓은 경우도 있다. 참사위원 키에사 신부의 「스승 예수」2a에 관한 내용도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제2부(참 스승이신 예수)와 제3부(우리의 의무)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여러 가지 숙고, 관련효과, 이익,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에 자주 영향을 준 것도 「깊이 생각하라」3a는 키에사 신부의 또 다른 저서였다. 더 나아가 알베리오네 신부는 ‘지성의 질병’과 치료를 위한 대책에 관해서는 자기 교수요 영적 지도신부인 키에사 신부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다.4a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의 몇몇 관점, 특히 길 진리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언급해야 할 필요성, 학생은 “교육을 받으면서 훈련된다.”는 것을 강조한 점, 훈련과 따라야 할 방법의 필요성, 확신과 실제적인 선택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 점 등은 헝가리의 저명한 교수 토트 티하머Toth Tihamer 박사의 많은 논문에서 차용했는데, 박사의 저서들은 40년대 이탈리아에 매우 널리 알려져 있었다.5a
또한 유명한 아돌포 탄퀘리Adolfo Tanquerey의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개론」6a의 영향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를 토대로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가 양성되었을 만큼 중요한 지침서였다.
알베리오네 신부가 위에 언급한 저자들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이 내용은 알베리오네 신부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아마 그 어떤 저자도 창립자만큼 지성의 능력에서 출발하여 천상 스승께 우리를 일치시켜야 할 필요성을 분명하고 힘있게 다룬 저자는 없을 것이다. 곧 복음적 사고방식으로 지성을 키워야 할 필요성, 일상의 선택 방향을 제시할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 그리스도가 생각하시는 방식으로 바뀔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할 의무….(DF 65쪽 참조)
끝으로 의미심장한 시대상황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주제는 스승 예수의 해(1955)를 준비하고 거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창립자는 바오로가족을 위해 그리고 교회 전체를 위해 풍성한 열매 맺기를 기대했다."
네 정신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신명 6,5)
[SP, 1954년 9월호, 1쪽]
“주님, 성령께서 저희 지성을 비추시어 성자의 언약대로 모든 진리에로 저희를 인도하여 주소서.”1
* * *
하나의 생각을 심으면 하나의 행동을 거둘 것이다.
하나의 행동을 심으면 하나의 습관을 거둘 것이다.
하나의 습관을 심으면 하나의 성격을 거둘 것이다.
하나의 성격을 심으면 하나의 운명을 거둘 것이다.2
1. 지혜의 찬사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하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있었다.
지혜가 이끌고 왔으므로 나는 그 모든 것을 즐겼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혜의 소산임을 몰랐다.
나는 욕심 없이 배웠으니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지혜가 지닌 많은 재산을 감추지 않는다.
지혜는 사람들에게 한량없는 보물,
지혜를 얻는 이들은 그 가르침이 주는 선물들의 추천으로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 7,7-14)
2. 원리
1)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 스승이요 유일한 스승이시다. 그분은 “나는 진리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신 대로 진리 자체요 본질이고 영원한 진리, 영원에서부터 성부께서 낳으신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최고로 그리고 초자연적 성장을 이룬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직관, 곧 직관 속에서 사랑과 기쁨을 지향하고 있다. 신앙을 통해 직관에 이른다. 보기 위해 믿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히브 11,6) 믿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단죄한다.
3) 인간은 특별히 지성 때문에 고귀하다. 이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요 하느님을 닮았다.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3, 곧 지성을 굴복시킴으로써 그리고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지성을 현명하게 사용함으로써 하느님께 첫째가는 흠숭을 드리게 된다.
4) 가장 큰 공로도, 가장 큰 죄도 지성에 의해 발생한다. 적어도 지성 없이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알고 믿는 것’에서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고, ‘알게 된 진리를 거역하는 것’에서 비로소 미움이 시작된다.4
5) 첫째가는 덕은 지성의 훈련, 곧‘신앙’이다. 성령의 은혜 중에 처음 네 가지, 곧 지혜(슬기), 통찰(깨달음), 지식(앎), 의견(일깨움)은 지성으로 방향지어져 있다. 씨앗처럼 신앙에서 갖가지 덕이 돋아난다. 신앙은 ‘모든 의화의 뿌리’5다.
6) 생각에서 말과 감정과 행동이 나온다.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하고 운전자가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지성은 사람을 이끌어간다.
7) 출판 사도는 구원하는 진리를 전해야 한다.“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41)라고하셨듯이 천상 | 스승의 후계자다. [SP, 1954년 9월호, 2쪽]
3. 나는 진리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스승으로 오셨으며, 스승으로 인정을 받으셨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2.14)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말씀하셨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면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8,46ㄴ-47)
교회가 천상 스승을 묘사하는 표현은 아름답다. ‘평화의 광채’, ‘영원한 광명’, ‘위대한 조언의 천사’, ‘참된 빛’, ‘영원한 지혜’, ‘사도의 스승’, ‘복음사가의 스승’,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지니신 분’, ‘증거자의 빛’….6 이 표현들은 복음서에서 30회 정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부르는 호칭의 또 다른 명칭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이 호칭을 승인하시는 말씀이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요한 13,13]
집회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1,5)
4. 하느님에게서 오신 당신이심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7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요한 11,28]
예: 알바에서 1909년부터 1917년까지 교구사제와 신학생에게 여러 번 다음과 같은 형태로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스승 예수를 방문하는 성체조배 시간을 갖게 했다.
흠숭
구원하는 지혜를 전하도록 성부께 파견된 천상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흠숭.
- 본질적이고 영원하신 진리시요, 성부의 광채이신 분께 드리는 흠숭.
- 우리 지성의 주재자요 우리의 동의를 받으실 권리를 충분히 지니신 분께 드리는 흠숭.
- 교리, 신학, 거룩한 설교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가르침의 주재자이신 분, 길 진리 생명이신 유일한 스승이요, 네 복음서의 저자께 드리는 흠숭.
- 스승, 그분의 신비체인 교회의 창시자께 드리는 흠숭.
- “세상의 빛”[요한 8,12]으로서 사람을 가르치고 비추고 격려하고 인도하고 위로하는 감실 안에 사시는 분께 드리는 흠숭.
감사
- 외적인 것을 깨달아 알고 인식하도록 주님이 감각, 특히 시각, 청각, 촉각, 후각을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감사.
-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계획을 실현시켜주신 것에 대한 감사: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다.”[요한 1,3]는 말씀은 하느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첫 계시다. 자연에 대한 온갖 교육과 연구는 창조주의 완전함을 우리에게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위대한 책을 읽는 것과 같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1,20]
- 우리에게 이성의 빛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 하느님이 지상낙원에서 성 요한 복음사가8에게 지극히 높은 진리를 계시하고자 계획하신 것에 대한 감사.
- 계시를 해석하고 보존하며 진리를 오류 없이 가르치는 스승인 교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감사.
- 세례성사 때 신앙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
보속
- 시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을 늘 선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속.
- 지성의 귀한 탈렌트를 자주 헛되게 또는 해로운 일에 낭비한 것에 대한 보속.
- 신앙정신을 지속적으로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보속.
- 거룩한 진리를 명확하게 설명하며 확실하게 선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속.
- 사람들과 사회에 진리의 빵을 제대로 주지 않았거나 부족한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 것에 대한 보속.
은혜를 얻기 위한 청원
- 신앙 체험의 은총으로 믿음을 살아가게 이끄는 신앙 성장의 은혜.
- 성령의 네 가지 은혜: 지혜(슬기), 통찰(깨달음), 지식(앎), 의견(일깨움).
- 사도직과 거룩한 직무에 필요한 거룩한 신학과 다른 학문 연구에 대한 사랑.
- 성경, 특히 복음서와 성 바오로 서간의 독서와 묵상에 우선권을 두는 은혜.
-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느님 백성 모두를 위해9 적합하게 이야기하고 쓸 줄 아는 은혜.
5. 오류에서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원조의 타락은 제일 먼저 일어난 가장 큰 오류였다. “하느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창세 3,5 참조]라고 거짓말의 마왕이 꾀었다. 그 후 인간은 오류에서 오류로 빠져들었다. 옛 철학자들도 인간을 위해 충분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원죄 때문에 빚어진 현실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류에게 종교에 관한 진리 전체를 오류 없이 확실하고 신속하게 알리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했다. 오류는 지금도 하느님의 계시를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어나고 있으며 | 계속 증가할 것이다. [SP, 1954년 9월호, 3쪽]
더 나아가 종교에 관한 초자연적 진리, 곧 계시는 초자연적 단계로 드높여져야 하는 인간에게 절대로 필요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원죄의 결과인 무수한 오류와 무지에서 인간을 구해내신 구원의 첫째부분이다.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 그의 노력과 업적, 직무, 사도직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사람은 거짓과 배반과 착각의 함정에 빠질 것이다.
풀다Fulda의 수도원에 있는 성 보니파시오에게 바친 동상 받침대에는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10라고 새겨져 있다. 복음위에, 복음을 위해 집을 짓는 사람은 폭풍우와 파도에도 무너지지 않을 집을 지을 것이다.
6. 스승인 교회
올바른 인간이 되고 세례에 이르도록 인도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로 세상의 회개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1코린 1,17]라고 말한 성 바오로는 무엇보다도 “이방인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사도 9,15] 하신 자신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획을 따랐다.
사도들, 위대한 선교사들, 교리교사들 모두가 이렇게 하지 않았는가? 교회도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가?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교회는 지적 존재인 인간 본성을 ‘존중한다’. 인간이 주님께 찬미와 순종의 예배를 드림은 합당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영적 예배입니다.”11
7.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12
“그대는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하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13
일반적으로 현재 우리의 모든 삶이 미래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듯, 지적인 삶은 미래의 우리 모든 행복을 비추는 중심이요, 원리가 될 ‘지복직관’을 위한 특별한 준비다.
지복직관은 어떤 피조물의 매개 없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직접 하느님을 뵙는 것이 특징이다. 그뿐 아니라 현재의 삶이 공통된 직관적 인식에서처럼, 그 어떠한 관념의 도움 없이 하느님의 본질 자체가 우리 지성에 직접 결합되어 관념의 역할을 한다. 직관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바라보시는 그 거룩한 광채인 영광의 빛을 통해 실현된다. 이 빛은 지복직관에 이른 복된 인간 지성에 덕성을 통해 침투하여 하느님 뵙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지복직관에서는 지성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뵙는다. 지성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피조물을 하느님이 되게 하고 행복하게 해준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요한 10,34)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직접적인 준비는 신앙생활뿐이다. 사실 준비는 반드시 지향하는 목표와 되도록 비슷한 형태를 띠어야 한다. 물론 지성은 하느님 안에서 사는 훈련을 신앙을 통해 하게 된다. 신적 진리란 믿어야 할 신앙의 진리가 아닌가? 지성이 전적으로 동의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 권위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신앙인이 믿는 것은 이성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믿고 있는 신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느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지성에 있어서 이러한 신앙은 하느님 안에서 살기 위해 단순히 인간적인 삶보다 뛰어난 새로운 삶, 지성의 희생과 극기,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8. 영광의 빛14
성부는 당신의 신적 본질을 영원에서부터 관조하시면서 말씀Verbo을 낳으시고, 이 신적 본질을 완전히 표현하는 한 말씀Parola을 하셨다. 이 말씀 Verbo와 Parola는 제2위격인 성자요, ‘성부의 말씀’15이시다. 더 나아가 성부와 성자는 서로 관조하시며, 실체적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신다. 이 사랑은 우리가 성령이라고 부르는 무한한 불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내적 생명은 성부 안에 그 원천이 있으며, 성자 안에서 빛나고, 성부와 성자 안에서 성령을 통해 무한하고 영원한 ‘신적 순환’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이면서 셋이요, 셋이면서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단테는 정확한 신학적 관점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드높은 빛의 깊고 해맑은 독립체 속에
빛깔은 셋, 부피는 하나인
세 개의 둘레가 나한테 보였으니
마치 이리스(무지개)에서 이리스처럼
나한테서 반사되는 듯 보이고
셋째는 둘에게서 똑같이
뿜어나오는 불같이 보이니라.16
복된 이는 하느님이 당신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빛을 통해 하느님의 본질을 함께 바라보기 위해 이 신적 생명의 순환 속으로들어간다.
이것은 철을 달구는 열이 철을 빨갛게 달구면서도 태워버리지않는 것과 같이 영혼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드높여준다. 이것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요, 천상 성부의 왕국에서 하늘나라의 식탁에 앉는 것이다.
9. 인류에게 선물을 주셨다17 [SP, 1954년 9월호, 4쪽]
사실 인간은 참 신앙을 통해 무한히 높은 단계로 드높여진다. 이 단계를 향해 초자연적으로 일하고, 초자연적으로 열매를 맺으며 초자연적 상급을 받게 된다. 마치 야생 올리브에 좋은 올리브 싹을 접목시키면 야생 올리브가 새로운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리스도께 접목되면 그 결실과 일이 인간의 것이면서도 그분의 것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드높여진다.
그러나 신앙의 꽃은 거룩한 태양 빛 아래서만, 곧 성령의 열기 아래서만 피어난다. 그래서 트리엔트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성령과 그의 도움이 선행되어 영감을 받지 않고도 신앙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파문을 당한다.”18
사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삼단논법의 결과는 두 가지 전제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듯이, 초자연적 공로는 그 뿌리 곧 원인이 초자연적 본성이라야만 검증될 수 있다. 신앙을 통해 행동하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히브 10,38) 수도생활은 ‘가장 활기찬’ 신앙생활이다. 만일 신앙이 바래면 수도생활을 포기할 것이다. 아직은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것이 부패하면 가장 나쁜 것이 되기”19 때문이다.
이성을 사용하게 된 인간은 의화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능력으로 하느님께 협력해야 한다. 인간의 으뜸가는 능력은 영혼의 능력이요, 그중에 지성이라는 능력이 있으며, 신앙행위는 이 지성에 속한다. 모든 인식이 감각에서 출발하듯이 모든 행위는 지성에서 출발한다.
10. 여러 단계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1요한 5,4]
신앙에는 선량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수도자의 신앙, 사도의 신앙, 사제의 신앙이 있다. 모두가 믿어야 할 신앙조항이 있고, 모든 사람의 구원에 필요한 신앙의 단계가 있다. 그러나 수도자는 자기 삶을 위해 어떤 고유한 진리에 의지하고 있듯이 사도의 삶과 사제의 삶은 이러한 면에 있어 더 풍부하다.
예를 들면 수도자는 결혼보다 동정성이 우월하고, 일반적인 청빈과 순명보다 복음적 청빈과 순명이 우월하다고 가르치는 신앙의 진리에 매료된다. 그리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과의 친밀함과 통교에 대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른 너희들은…”[마태 19,28 참조] 하신 말씀에 걸맞는 사람에게 주시는 지상에서의 백배와 천국을 보증하는 신앙의 진리를 더 깊이 느낀다. 이 신앙에 의해 더 넓게 성령의 은혜에 참여하고, 성령의 열매를 더 많이 맺으며, 참된 행복을 더 깊이 맛보게 된다. 수도생활을 통해 천국을 앞당겨 차지하게 될 것이다.
사도와 사제는 예수님이 특히 사도들에게 주신 아주 풍요로운 가르침과 진리를 믿어야 할 것이다.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6]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너희는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참조: 마르 16,15; 마태 28,19]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사제의 열의, 생명, 기쁨인 이 빛 속에서 즐기고 느끼며 일해야 한다.
11. 현세의 삶
“여러분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있다.”20 철학자와 영적 스승은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모든 일의 끝을 생각하라.”21 우리 삶은 이 지상 삶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를 영원으로 넘어가도록 재촉한다. 로마에 가고자 한다면 반대방향으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한 진리다.
인생은 짧지만 그 결과는 영원하다. 사실 이 인생에서 우리의 영원한 행복 또는 불행이 결정된다.
삶의 목적은 행복한 영원, 곧 지성, 의지, 마음, 육신이라는 인간 ‘전체’의 영원한 구원을 준비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지체가 온전해도 장애(정신장애)가 있거나, 심장 또는 혈액에 병이 있다면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지성, 의지, 마음이라는 인간 전체가 건강할 때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준비하는 것이다.
덧붙인다면, 이 지상 여정을 지나 이르게 될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참 생명은 하늘의 영광이라는 초자연적 생명이요, 우리는 거기서 하느님의 지복에 참여하여 참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식탁에 앉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식탁에 앉을 것이다. 천상 스승은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다.”(루카 22,29-30)
천국에서는 우리 안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천상 심판자가 오시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참된 행복은 존재의 완성이요, 우리 존재는 하느님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 쉬는 것,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요,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질서 안에서 그러하듯이 초자연적 질서 안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드높임을 통해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모든 피조물을 초월해,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알고 계시듯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안에서 일하고 하느님 안에서 즐기도록 정해졌다. 영원을 위한 준비란 지성, 의지, 마음, 육신, 우리의 온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확고하게 머무는 것이다. 현세의 삶은 자신 안에 영원한 행복을 참되게 | 준비하는 형태와 특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다.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하늘 가까이 초자연적 준비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늘에서 아주 멀어졌다. 만일 하느님이 당신의 무한한 자비를 통해 앞으로 다가올 구세주라는 하나의 길, 하나의 희망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결코 하늘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회복시킬 수 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지성을, 예수님의 귀감을 따름으로써 의지를, 예수님이 얻어주신 은총을 통해 마음을,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육신을 회복시킬 수 있다. 천상 스승께서 가르쳐주셨듯이 무엇보다 먼저 지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12. 잘못과 여러 가지 잘못
인간은 일치 또는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다시 말해 지성, 의지, 마음과 같은 인간의 능력이 통합되어야 했다. 이성은 선을 인식하고 있었다. 분명 엷고 차가운 빛이었지만 감정이 따스해지고 빛나며 활기가 있었기 때문에 진眞과 미美에서 선善에 이를 수 있었다. 이처럼 진, 선, 미는 세 가지 측면convertuntur22에서 유일한 하나를 이룰 뿐 아니라 인간 안에서도 세 가지 능력이 한데 어우러져 실제로 일치를 이루어야 했다.
죄는 이 일치를 파괴시켰고, 지금은 매우 혼란하다. 이성은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은 이성을 사랑의 빛으로 빛내고, 의지는 정욕情欲의 방해를 없애고 이성에 의해 강해져 선을 행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일치다.
하느님의 은총은 이 일치를 이루고 드높이기 위해 기묘하게 작용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이고 삼위인 하느님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창세 1,26 참조) 존재로서 그 능력(지성, 감성, 의지)은 셋이고, 내적 외적 활동은 하나였다.
일치가 깨어지면 이성과 마음은 의지를 반대방향으로 밀고 가게 되며, 이성은 제멋대로 활동하고 통제되지 않은 사랑이 감각에 불을 질러 육체를 파괴시킨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않은 의지는 감정에 의해 늪 속으로 빠져들어 육과 영의 두 가지 법이 생긴다.[참조: 갈라 5,16.19-24; 로마 8,2-13] 그래서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5.19]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다시 이루어야 한다.
13. 네 정신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
마르코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마르 12,28-34)
마태오복음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4-35)
루카복음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5-28)
이 세 복음서 모두 “네 정신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께 접목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길 진리 생명이시다. 지성은 그리스도의 지성에, 의지는 그리스도의 의지에,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목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심판 때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로마 8,29 참조]
그러므로 가장 필요한 것은 지성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14. 사랑이 충만한 지적 광채23
‘여러 가지 지적 능력’은 인간을 인간답게 형성시킨다.
우리의 지성은 분명 진리를 인식할 수 있으며, 인내롭게 노력한다면 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연계에 속하는 기초 진리의 많은 부분을 인식할 능력이 있다. 그러나 면목 없는 나약함이 얼마나 많은가!
[SP, 1954년 9월호, 6쪽] 하느님과 | 하느님의 일로 기꺼이 향하지 않고, 최초의 상태에서 그랬던 것처럼 피조물에서 창조주께로 거슬러 올라가려 하지 않으며, 자기네 근원으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고 피조물에 탐닉하고 있다.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일에 주의를 집중하고, 자신의 목적에 관한 것은 소홀히 한다. 현세의 일에 마음을 쓰느라 영원을 생각하는 일은 방해받기 일쑤다.
얼마나 쉽게 ‘오류에 빠지는가!’ 여러 가지 편견에 기울어 욕망이 영혼에 파문을 일으키고, 진리와 영혼 사이에 베일을 늘어뜨려 얼마나 많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가! 너무도 자주 도덕적 삶의 방향이 달려 있는 큰 문제 앞에서도 그렇다.
우리 의지도 하느님을 따르는 대신 멋대로 독립을 주장하며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 특히 하느님의 지상 대리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선을 행하고 싶어도 이를 가로막는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미약하고 항구하지 못하다는 것을 싫도록 체험하지 않는가! 그리고 감정이나 정욕에 끌려가는 때는 얼마나 많은가! 성 바오로는 이 서글픈 나약함을 잘 묘사하고 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19-25)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의 선언을 통해 알수 있듯이 이 비참한 상태에서의 구제책은 ‘구원 은총’에 있다.
15. 나쁜 생각은 마음에서 나온다24
가장 일반적인 것은 마음의 타락이다.
타락한 매체가 너무 많고 강력하여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는 국가당국의 법적 개입이 필요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거의 1세기 동안 자라온 진리에 대한 증오를 막아낼 만한 방파제를 한순간에 쌓아올릴 수는 없다. 타락은 신앙의 무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나쁜 습관에 물들고 덕을 멀리하고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자신 안에서 이러한 것은 하느님이 금하시는 일이요, 어느 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엄중히 심판하실 것이며, 영원한 불은 이 세상에서 금하던 쾌락을 즐긴 벌이라고 되풀이하는 소리에 과연 괴로워하겠는가? 처음에는 걱정스럽던 이 소리가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더 나아가 거절하고 경멸하다가 차츰 약해지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악습의 관심사는 눈앞에 있는 모든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이다. 실제로 어제까지 즐겨 성사에 맛들이던 젊은이들이 미사나 부활축제에 참여하지 않고, 종교를 반대하고 조소하는 사람들 편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사실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타락이 그들의 마음속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들은 신앙을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이 머리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반종교적인 책이나 잡지를 읽고, 좋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나쁜 표양을 볼 때 신앙의 불길이 얼마나 잦아드는지 아는 가? 그 밖에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이 합세하여 악을 키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안에 신앙이 자라게 하는 독서로 우선 지식을 쌓는 것이좋을 것이다.25 하지만 참으로 해로운 책이 사방에 널려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책이야말로 건강한 삶에 해를 끼치는 불신의 바이러스를 걷잡을 수 없이 퍼트린다.
16. 낭비한 탈렌트!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중대한 탈렌트를 활용하지 않음은 하느님의 선물을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마태 25,15 이하 참조]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저지르는 그 어떠한 죄도 지성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인식 없이는 안 된다. 예를 들면 꿈속에서는 그 어떤 죄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 어떠한 공로도 지성이나 인식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몽유병 환자가 성당에 가서 묵주기도를 바쳤다 해도 공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죄)도 선(공로)도 인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생각만으로는 악(죄)도 선(공로)도 행할 수 없다.
온갖 소식, 교훈, 농담, 다른 사람이 행한 많은 일과 다른 이들의 결점 등을 다 알고 있으며 누구에게나 충고하고 교정할 말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 어머니, 젊은이, 통치자, 성직자, 교황에게… 가능하다면 거의 하느님에게도 충고하고 교정하고 싶어할 정도다.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읽어댔으면 그렇겠는가!
이러한 사람은 흔히 자기 자신도 하느님도 모르는 사람이다.
- 신심, 면학, 사도직 의무를 수행할 때 늘 마음이 들떠있는 사람이다.
- 다른 사람이 구렁에 빠지지 않을까 늘 염려하다가 자신이 구렁에 빠지는 사람이다.
- “아들은 아버지를, 소는 자기 여물통을, 개는 제 주인의 목소리를 알고 있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천상 아버지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한다.”[이사 1,3 이하 참조]고 주님께서 한탄하시는 사람이다.
[SP, 1954년 9월호, 7쪽] - 이러한 사람은 기도하고 공부하고 귀로는 설교를 듣지만 머리는 아주 멀리 가 있는 사람이다.
이들 중에는 매우 똑똑한 사람도 있으나 [많은 경우] 때때로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고 매우 바삐 머리를 굴리면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 잎이 무성하고 꽃은 많으나 열매가 없다. 독이 깨져 맑고 좋은 물을 담아두지 못한다.[예레 2,13 참조]
17.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26
가장 큰 성과.
우리에게는 특별히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하신 명령과 말로 다할 수 없이 감미롭고 설득력 있는 초대가 주어졌다. 성덕은 특권이 아니며, 어느 한 사람을 위해 유보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사는 ‘선량한’ 젊은이도 ‘덕스러운 사람’이 되지않으면 서원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성덕은 고압선과도 같은 덕이다. 선을 향한 비약이요, 선을 노래하는 시詩다. 마지못해 한 알씩 굴리면서 억지로 행하는 선은… 성덕이 아니다.
성인은 쇠잔한 사람이 아니며 삶에서 자기 몫을 다할 줄 모르는 어정쩡한 양심의 소유자도 아니다. 성 바오로에게 있어 성덕은 충만한 인간 성숙이요 완전한 인간이다.27
성인은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발전한다. 멈추지 않고 “성장했고 진보했다”28는 문장紋章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있다. 성덕은 생명이요 운동이요 고결함이요29 활기다. 그 선善은 넘어지지 않고 더 높이 솟아오른다. 그렇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그리고 언제나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1코린 3,9 참조]라는 신앙정신과 우리 의지에 달려있다.
18. 하느님의 역설
하느님에 대한 지혜와 신심이 풍부한 사람은 많든 적든 가지고 있는 탈렌트를 쉽게 선용할 것이다. 신심 없는 지식, 사도직, 청빈만으로는 비추지도 못하고 데우지도 못한다. 그러나 신심은 ‘모든 사도직의 넋’30이다. 이는 깊이 숙고해야 할 진리다.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같지 않다.”[이사 55,8] 주님은 당신의 사랑과 마음을 드러내시기 전에 당신 생각을 드러내셨다.(산상설교와 참행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 이하; 참조: 루카 6,20-23]
19. 불꽃을 키워라31
신앙은 비추어주고 데워주는 참 불꽃이다.
신앙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지만 사람에게 맡겨진 것이기에 생생하게 보존하고 키울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
육신의 건강과도 비슷하다. 아무리 혈기왕성하고 튼튼해도 건강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내적 외적으로 여러 가지 원인이 이를 위협하고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신앙도 이와 같다.
신앙은 갖가지 모양으로 지성의 길을 통해 잃거나 매우 약해질 수 있다. 우선‘타성’이 있다. 어렸을 때 받은 교육이 부족하여 종교에 관한 공부는 매우 소홀히 하면서 일반교육을 받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신앙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더없이 불행한 일은 그들이 회의적인 교수에게서 배우게 될 때다. 회의적일 뿐 아니라 신앙을 정면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불신의 씨앗을 젊은이들의 지성에 주입시키기 위해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사상을 이용한다면 더더욱 불행한 일이다.
20.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32
그러나 언제든지 악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감탄할 만한 영웅적인 모범, 온갖 장애를 극복할 줄 알고 세상의 혼탁함에 물들지 않고 나아가는 관대하고 강인한 사람들의 영웅적인 모범은 늘 많이 있다.
이들은 누구인가?
신앙을 키울 줄 아는 사람들이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 예방이라는 것이 있듯이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다.
첫 번째 수단은 ‘종교교육’으로서, 계속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거나 좋은 독서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매주 설교나 특강을 통해 풍성하게 주어진다.
게다가 좋은 서적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두 번째 수단은 ‘기도’다. 기도는 영적 삶의 숨이다. 만일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하느님께 달려가야 한다면,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세 번째 수단은 ‘선행’으로서, 신앙을 단련하는 것이다. 단련은 몸에 밴 습성33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성장시킨다. 이것은 “실천 없는 믿음도 죽은 것”(야고 2,26)이라고 하듯이 행동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몸에 밴 신앙행위는 더욱 그렇다. 더 나아가 신앙 행위는 신앙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존할 뿐 아니라 신앙 대상인 진리를 더 잘 이해하고 체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준주성범」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기쁨을 맛보려는 | 사람은 자기 삶이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하도록 힘써야 한다.”(1권 1장) [SP, 1954년 9월호, 8쪽]
21. 우리의 길
이 지상에서 사물을 육안으로, 이성 또는 신앙으로 본다는 것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게 보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천국을 위해 창조되었다. “사실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습니다”.[히브 13,14]
그렇다면 하느님을 뵙기 위해 지성이 해야 할 ‘준비’는 무엇인가?
가) 이성과 지성의 올바른 사용.
나) 신앙의 덕信德.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지성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 거짓말, 잘못 그리고 의도적인 나쁜 생각.
나) 신앙을 거스르는 죄.
신학 원리는 다음과 같다. “도덕적 행위는 이성을 따르고 최종 목적과 일치하며, 부도덕한 행위는 이성을 따르지 않고 최종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다.” 양심은 확실하게 행동하기 위한 규범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명하든 금하든 결코 양심을 거슬러 행동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확실한 길이다.
22.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
지성의 올바른 사용은 다음과 같다. 곧 하느님을 생각하고 진리를 생각하는 것, 또는 진리를 따라 생각하며 교육, 면학,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것, 예를 들면 진보, 덕, 의무, 직무를 행하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모든 것에 마음 쓰는 것이다. 실제로 이성과 지성을 바르게 잘 사용하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진실을 구하되 팔아넘기지 마라. 지혜와 교훈과 예지도 그리하여라.”(잠언 23,23) 그러나 이성과 지성을 초자연적 차원에서 바르게 사용하기도 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시고 교회가 가르치는 진리를 믿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신앙이란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것”34이라고 했다. 이것은 곧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예전에 설교를 통해 말씀하셨고, 오늘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는 분은 같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신앙의 진리는 절대적이다.
신앙은 영성생활의 토대다. “모든 의화의 토대요 뿌리다.”(트리엔트공의회) “믿음이 없이 하느님 마음에 들고 그분의 영광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그분이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갚아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히브 11,6 참조]
23. 성령의 은사인 지혜 [SP, 1954년 10월호, 1쪽]
이 은사는 신앙을 완성시켜 준다.
‘지식, 지성, 지혜’라는 은사는 우리에게 체험에 입각한 인식을 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은사는 논리의 길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체험한 것처럼 파악하게 하는 드높은 빛의 길을 통해 신적인 것을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이 빛은 분명히 신앙의 빛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신앙의 빛과는 달리 더 활발하고 더 강하게 비추는 이 빛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첫째 원리와 비슷한, 일종의 깨달음과도 같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준다.
‘지식’의 은사는 피조물과 하느님 관계에서 생기는 사물을 바르게 판단하게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성령의 비추임 아래 피조물과 하느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을 인식하면서 신앙의 덕을 완성시키는 은사다.’
‘지성’의 은사는 우리에게 계시된 진리가 지닌 깊은 내면의 조화를 알려준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성령의 비추임 아래 신비를 명백히 밝히지는 못하지만 계시된 진리를 꿰뚫는 통찰력을 주는 은사다.’
‘지혜’의 은사는 성 토마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본성상 어떤 공통점에 따라”35 계시된 진리를 판단하고 평가하며 음미하게 하는 은사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애덕을 완성시키면서 하느님과 거룩한 것을 최고의 원리를 통해 식별하고 판단하며 음미하게 하는 은사다.’
이것은 가장 귀중한 은사 중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혜서를 통해 기도하듯이 이를 열심히 바라고, 찾고, 끊임없이 청해야 한다.
“조상들의 하느님, 자비의 주님!
당신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말씀으로 만드시고
또 인간을 당신의 지혜로 빚으시어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통치하게 하시고
세상을 거룩하고 의롭게 관리하며
올바른 영혼으로 판결을 내리도록 하셨습니다.
당신 어좌에 자리를 같이한 지혜를 저에게 주시고
당신의 자녀들 가운데에서 저를 내쫓지 말아주십시오.
정녕 저는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으로서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아는 지혜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만드실 적에도 지혜가 곁에 있었습니다.
지혜는 당신 눈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 계명에 따라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파견하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어좌에서 지혜를 보내시어
그가 제 곁에서 고생을 함께 나누게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깨닫게 해주십시오.
지혜는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기에
제가 일을 할 때에 저를 지혜롭게 이끌고
자기의 영광으로 저를 보호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하는 일이 당신께 받아들여지고
또 당신의 백성을 의롭게 재판하여
제 아버지의 왕좌에 맞갖은 자가 될 것입니다.(”지혜 9,1-12)
예지의 덕을 완성시키는 ‘의견’의 은사는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 일종의 초자연적 직관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재빨리, 확실히 판단하게 한다.’
이 은사가 지향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지식과 지성의 은사는 우리에게 일반‘원리’를 제시하고, 의견의 은사는 일상이 제시하는 | 많은 특별한 경우에 일반 원리를 적용하게 한다. 그래서 성령의 빛은 중요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영원한 구원 또는 자기 성화, 예를 들면 성소나 죄의 기회가 될 만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이 은사를 키워가기 위해 자신의 무력함을 깊이 느끼며 성령께 끊임없이 도움을 청해야 한다. [SP, 1954년 10월호, 2쪽]
24.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36
지성은 흡수하는 능력이다.
지성은 소화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지성은 밖으로 발산하는 능력이다.
지성에는 정신건강이 있다.
건설적인 정신 질서가 필요하다.
사회 발전은 지성의 발전에 달려 있다.
인격 발전은 지성에 달려 있다.
성바오로수도회는 지적으로 뛰어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수업, 설교, 사도직은 뛰어나고 건설적이며 지성의 계발과 교육을 위한 자연적, 초자연적 수단이 있다.
천사적 지성(성 알로이시오), 거룩한 지성(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경과 교회사를 읽을 것.
25. 착한 의견의 어머니, 상지의 옥좌이신 마리아
마리아는 착한 의견의 어머니요, 상지의 옥좌시다. 신학자들과 교회학자들은 신자들처럼 어려움과 오류와 이단이 널리 퍼질 때 늘 마리아께 의탁했다. 그리고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과 교회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고 명확히 해주고 보호해 주기 위해 개입하셨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비추고 인도해주셨는가! 얼마나 많은 젊은 이가 학문의 길에서 어려움과 의문에 직면했을 때마다 도움을 받았는가!
복음사가들, 사도들, 저술가들, 교황들도 펜과 혀를 마리아께 봉헌했고, 어떤 의미에서 마리아의 전구로 거룩한 성령강림이 되풀이되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알폰소 데 리구오리, 성 보나벤투라, 성 대 알베르토는 아직 탐구하지 못한 신학의 깊은 데까지 파고 들어 갔다.
복자 페리니Ferrini,37 만초니Manzoni,38 로즈미니Rosmini,39 본기Bonghi,40 레카미에르Récamier41와 같은 뛰어난 사회인과 학자들은 학문이나 사업을 결정할 때를 마리아께 의탁했다. 지식과 신앙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은 지식을 깊이도록 자주 인도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태양이 늘 비추고 있는 맑고 빛나는 하늘과 같다. 이 하늘은 늘 그 빛나는 광채를 받아들여 하느님과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의 지성에 빛을 전해주고자 준비되어 있다.
1a Can. F. Chiesa, 「생명의 열쇠La Chiave della vita」, Pia Società San Paolo, Alba-Roma 1927.
2a Can. F. Chiesa, 「스승 예수Gesù Maestro」, Pia Società San Paolo, Alba-Roma 1926.
3a Can. F. Chiesa, 「깊이 생각하라Pensarci su」, Pia Società San Paolo, Alba-Roma 1939.
4a Can. F. Chiesa, 「현대 정신과 필요성에 따른 교의신학 사전Letiones theologiae dogmaticae recentiori mentalitati et necessitati accomodatae」, vol. III, 성령에 관한 논고Tractatus de Deo Spiritu Sancto, Alba 1930.
5a 저서들 가운데 특히 다음 작품을 나열하고자 한다. 「젊은이 양성Formazione del giovane」, Venezia 1933; 「청년기의 특징Il carattere del giovane」, Venezia 1935; 「젊은이의 영적 교육자L’educatore spirituale del giovane」, Venezia 1938; 「그리스도와 젊은이Cristo e il giovane」, Venezia 1940.
6a A. Tanquerey,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개론Compendio di Teologia Ascetica e Mistica」, Roma- Tournai-Paris, 1927.
1 원문에는: “Mentes nostras quæsumus, Domine, Spiritus illuminet, et inducat in omnem, sicut tuus promisit Filius, veritatem.”(전례) 로마 미사경본, 성령강림 시기 4주간 수요일 본기도 참조.
2 위에 나오는 성령께 드리는 기도에 이어서 나오는 지혜의 찬사 사이에, 알베리오네 신부는 생각의 힘과 효과를 분명히 드러내는 이 유명한 격언을 삽입했다.
3 Francesco Petrarca, “Canzone alla Vergine.”
4 “impugnare”(반대하다. 공격하다)라는 고어古語는 “combattere”(싸우다), “oppugnare” (공격하다) 라는 의미다. ‘알게 된 진리를 기억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비오 10세의 교리서에서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5 “신앙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요, 모든 의화의 토대요 뿌리다Fides est humanæ salutis initium, fundamentum et radix totius justificationis.”(트리엔트공의회 6회기, 8장)
6 중세기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호칭 기도’에 포함된 호칭들(Litaniæ Sanctissimi Nominis Jesu).
7 “Scimus quia a Deo venisti magister.”(요한 3,2)
8 창세기의 저자와 묵시록의 저자를 비교·암시하고 있다.
9 원문에는 ‘그리스도의 백성plebs Christ’
10 “Veritas Domini manet in æternum.”(시편 117[116], 2)
11 로마 12,1:“rationabele obsequium.”
12 루카 21,28: “Levate capita vestra.”
13 라틴어 원문: “Prius te oportet credere, ut postea per fidem Deum merearis aspicere.”(S. Agostino,En. in Ps. 65)
14 “복된 빛Lumen gloria”: 성 토마스의 표현이다. “…Est etiam quaedam beatorum in patria ad quam elevatur intellectus per lumen gloriæ, videns Deum per essentiam, inquantum est objectum beatitudinis….”(S. Tommaso, Expositio super Isaiam…, cap. 1, 1. 1)
15 Verbum Patris.
16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천국」,XXXIII, 115 이하.
17 에페 4,8: “Dedit dona hominibus.”
18 트리엔트공의회 6회기, 의화에 관한 교회법 3.
19 “corruptio optimi pessima.”: 키케로의 표현을 대그레고리오 성인이 인용했다.
20 ‘두 가지 길’이라는 은유는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학에 자주 등장한다.(참조: 신명 30,19; 집회 15,17;「디다케」I,1-6 )
21 ‘in omnibus rebus respice finem’이라는 표현은 성 베네딕토의 「수도규칙」에서 다룬 내용으로, 「준주성범」1권 4장 1에서 인용한 것이다.
22 존재의 근본적인 범주 사이에 하나의 동등성 또는 가역성을 부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토마스적 형이상학의 원리를 암시한다. “존재와 진리는 서로 같고, 존재와 선은 서로 같으며, 존재와 아름다움은 서로 같을 수 있다Ens et Verum convertuntur; Ens et Bonum convertuntur; Ens et Pulchrum convertuntur.”
23 “Luce intellettual piena d’amore.” 단테 알레기에리,「신곡-천국」, XXX, 40.
24 “De corde exeunt cogitationes malæ.”[참조: 마태 15,19; 마르 7,21]
25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 학자의 저서를 읽어보라. Antonino Zichichi, 「왜 나는 세상을 창조하신 분을 믿는가. 신앙과 학문의 관계Perché io credo in colui che ha fatto il mondo. Tra fede e scienza」, Il Saggiatore, Milano 1999.
26 마태 11,12: “Regnum dei vim patitur.”
27 에페 4,13 참조: “성숙한 사람in virum perfectum.”
28 “proficiebat”, 소년 예수에 대해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라고 한 말씀은 어린 사무엘에 대해 언급한 표현과 같다.(1사무 2,28)
29 아마 더 정확한 표현은 ‘움직임mobilità’이 맞을 것이다.
30 트라피스트 수도회 아빠스인 조반니 바티스타 쇼타르(Giovanni Battista Chautard)의 유명한 저서 제목.
31 ‘Alere flammam’: 이상적인 의미에서 수많은 연맹이나 다양한 종류의 사업체의 표어가 되었다.
32 “Renovamini spiritu mentis vestræ.”(에페 4,23)
33 윤리철학과 수덕신학의 현대적 표현을 빌리면, ‘덕스러운 습관’Abitudini virtuose.
34 S. Agostino, Ep . 190.
35 “ Secundum quamdam connaturalitatem…”(S. Tommaso,「명제집 주해Super Sententiis 」, lib. III, d. 26. - 직접적인 원천자료Fonte immediata, A. Tanquerey, 「…신학개론Compendio di Teologia …」, cit., parte II, lib. III: 일치의 길).
36 1티모 4,13.16: “Attende tibi et lectioni.”
37 B. Contardo Ferrini(1859-1902), 로마법 관련 법률가요 역사가. “깊은 종교심을 지녔고 거룩하게 산 사람.”
38 Alessandro Manzoni(1785-1873), 문학가, 역사가, 정치가, 이탈리아 왕국 상원의원을 역임했다. 비신자 신분에서 개종하여 가톨릭 신앙의 호교론자가 되었다. 그의 작품 중 유명한 작품 몇 가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약혼자들I promessi sposi」,「아델키Adelchi」, 「거룩한 찬가Inni sacri」, 「가톨릭 윤리에 관한 고찰Osservazioni sulla Morale cattolica 」.
39 Antonio Rosmini(1797-1855), 트렌토 출신 사제요 철학가로서 가톨릭 문화 연맹의 주창자요 수도회 창설자다. 정치가들의 친구요 조언자 역할을 했으며, 만초니의 친구요 「성교회의 다섯 가지 재앙에 대하여Delle cinque piaghe della Santa Chiesa 」라는 교회 개혁에 관한 유명한 제안을 추진한 장본인으로 존경받았다.
40 Ruggero Bonghi(1821-1895), 문학가요 나폴리 출신 정치가. 로즈미니와 만초니의 친구로서 그들과 이상을 함께했고, 그 두 사람과 협력하여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청 사이의 화해를 모색했다. 「예수의 생애Vita di Gesù 」,( 1890) 저자요, 교황 비오 9세와 레오 13세에 대한 역사작가다.
41 Joseph Claude Récamier(1774년 Ain에서 출생, 1852년 파리에서 사망), 유명한 의사로서 부인과 창시자로 추앙받았다. 의료 협회Académie de Médecine(1820) 회원이요, 프랑스 콜리지 Collège de France Lennec의 후계자다(1826). 신앙에 적대적인 과학적 분위기에서 레카미에르는 강력하게 그리스도교를 증거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항상 기도해야 한다É necessario pregare sempre」(알바-로마 1940, pp.284-285)라는 책에서 묵주기도의 강력한 효력에 관한 저명한 의사의 설명을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