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o Giacomo Alberione

Opera Om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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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상理想은 행동으로 향한다

자연법칙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는 상관없이 또는 우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작용한다. 이상은 온갖 내적 외적 행동의 원리다. 지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 지상 삶과 영원에서 성공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42 조건이다. 지성은 자신의 ‘길동무’인‘ 생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생각이다. 외적인 것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나 그 자체는 비윤리적인 것이다.43 인간의 삶은 무엇보다 지적인 것이다. 가장 친숙한 친구는 생각이다.
같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해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유혹, 고통, 가난이 그렇다. 이와 같은 것은 내면의 생각에 달려 있다. 같은 고통이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이 되는가 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회개와 기쁨의 기회가 된다. 
내가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칭찬이나 꾸지람, 성공이나 실패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그 결과는 그 사람의 생각, 확신, 이상에 따라 달라진다. 이상은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판단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은 외적 내적 행동을 결정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시요 그분의 가르침은 구원의 말씀이라는 신념이 성 바오로 안에서 어떤 작용을 했는가? “모든 환난에도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라고 성 바오로는 감옥에서 편지를 썼다.[2코린 7,4 참조]
많은 사람이 선한 ‘원칙’을 지니고 살았기 때문에 성덕에 도달했고, 또 많은 사람이 나쁜 생각 때문에 패륜의 길로 빠졌다. 성격은 생각에 달려 있다.
가장 큰 싸움은 지성의 싸움이다. 여기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문이란 문을 모두 닫아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나쁜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대체해야 한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예를 들면 쓸데없는 독서나 나쁜 독서 대신 건전한 독서를 해야 한다. 지성을 구원하면 그대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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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불타는 이상

이상은 분명하고 정확하고 투명한 도착점이요 완수해야 할 등반, 획득해야 할 승리다. 이상은 우리의 영적 초자연적 신체적 모든 기능을 조직할 힘이 있고, 고귀하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내적 외적 모든 수단을 조직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 이상은 개인을 드높여주고, 성소에 따라 그의 사회적 사명을 확고히 해준다. 이상은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관념이다. 예를 들면 「수도자의 이상인 그리스도」,44 「사목자의 이상인 그리스도」, 「성덕의 이상인 그리스도」, 「바오로를 살 것」, 「마리아와 | 일치하는 삶」,45 「모든 사도직의 넋」,46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47  「파괴된 것은 아니다」,48 「 내가 부서지고 깨져도 굴복하지 않는다」,49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등이다. [SP, 1954년 10월호, 3쪽]
이상은 특별히 목적을 위해 유익한 생각을 모으고,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반대되는 생각을 없애버린다. 이는 수천 개의 작은 샘이나 개울이 모여 전력을 일으키는 많은 물과도 같다.
영원은 진지한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용기 있는 사람은 “삶을 살고 싶다”고 하며 다짐한다. “인생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리고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이 집착하고 있는, 이 험난한 급류에서 길을 발견하는 사람은 행복하다.”50
이상은 현세에서도 영원에서도 가장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따라야 할 기본노선이요 계획이다. 이상은 지성을 통해 깨닫고 열렬히 사랑한다. “삶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산만하게 살지 마라. 오히려 의욕과 인내와 쾌활함과 재능을 발휘해 살아라 .” 드러나려 하지 말고 존재하라!
생생하고 활동적인 이상은 조금씩 하나의 사고방식이 되어간다. 그렇게 되면 많은 요소로 강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지배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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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지배적인 생각

활기찬 생각일수록 그 사람의 의지를 거슬러 물리적으로 작용할 정도로 막강한 힘이 있다. 넘어지거나 충돌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으면 정말 넘어지거나 충돌하게 된다. 성공한다는 신념은 힘과 정열, 결단과 희생을 자아내며, 힘을 두 배로 늘려준다.
이것은 자연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본성과 은총이 결합되어 형성된 지배적인 생각이 있다. 이러한 경우 본성 보다 은총이 더 강하다. 이렇게 되어 성 바오로, 성녀 테클라, 성녀 아녜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녀 [프란치스카 사베리오] 카브리니, 성 비오 10세, 성 요한 보스코 등 우리의 예측을 뛰어넘는 삶을 살아간 성인들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지상이 아니라 천국이 설명해 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감실의 빛과 좋은 지도자, 아니 좋은 스승의 인도에 의해 확립되면 지배적인 생각, 기쁨의 원천,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는 원천, 사고방식이 될 것이다. 초자연적으로 보면 ‘하느님의 권능’은 기도를 통해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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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사고방식

사고방식이란 ‘지성의 존재양식forma mentis’, 한 사람 또는 어떤 범주의 사람들이 지니는 독특한 생각의 방식이요, 결과적으로 는 행동방식이다. 예를 들면 군인의 사고방식, 예술가의 사고방식, 사제의 사고방식, 수도자의 사고방식,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 어린이의 사고방식, 어른의 사고방식, 노동자의 사고방식, 자본가의 사고방식 등이다. 사고방식은 인생의 여정을 결정한다.
교육한다는 것은 좋은 습관을 들인다는 것, 곧 제일 먼저 모든 기획과 판단, 계획과 결단, 삶과 활동을 비출 수 있을 만큼 분명하고 깊이 있고 확고하며 정해진 ‘원칙’에 따라 사물을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천상적 지혜가 필요하다! 아동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과정이 있고, 성년기로 넘어가는 과정이 있다. 그 밖에 유치원, 12세까지의 아동에게 가르치는 교리가 있고, 12세에서 25세까지의 사람을 위한 양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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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요소

하나의 사고방식은 내적 외적 요소, 자연적 초자연적 요소로 형성되어 있다. 이 요소는 때때로 겉으로 보기에는 소홀히 다루어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요소는 마치 갖가지 음식물이나 화학물질이 인체의 혈액, 뼈, 조직을 형성하는 것과 같이 인격을 형성한다. 모든 것이 잘 짜여져 하나의 성격과 하나의 사고방식을 구성한다. 인간은 단일한 존재다. 거기에는 배움의 장場과 삶의 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배움의 장은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첫째 요소는 유전적 작용의‘ 자연적 경향’과‘ 모범’ 그리고 어린이가 성장하는 ‘환경’, 주어지는 ‘교육’이다. 이상, 생각, 여러 다양한 요소를 포함한 (동료, 서적, 만화, 라디오, 대화, 영화, 텔레비전, 학교, 공장, 직장, 본당, 교육 등)에서 다가와 뇌의 주변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입구가 보이면 안으로 밀고 들어가 맞서다가 자리를 잡고 혼합되어 하나의 결과를 내게 된다. 마치 많은 포도 알에서 포도즙이 나와 큰 통 속에서 섞이고 발효되면서 포도주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사춘기에서 청년기로 옮아가는 시기에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예기치 않은 여러 가지 자연현상이 나타난다. 어린이는 인격을 갖추게 된다. 단순한 신앙과 순종하는 인격 대신에 논리와 독립을 꿈꾸는 인격으로 옮아가고, 자신을 지도하는 사람을 비판하며 허물을 찾아내려 애를 쓰기도 한다. 자신을 닫아버리기도 하고, 분별없이 대담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과묵해지거나 수다스러워지며 거침없이 비판하는 시기가 번갈아 다가온다.
‘젊은이를 억압하는 것’은 잘못이다. 억압하면 젊은이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다. 특히 사춘기나 위험한 시기에는 이상해지는 경우도 있다. 대신에 그들이 말을 하도록 도와주고, 설명해주고, 힘이 되어주고, 깨닫도록 도와주고 쉽게 자신을 열게 도와준 다음,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주고, 적합한 책을 읽게 하고, 이유를 설명하며 지혜와 선의를 다해야 한다.
고해소에서조차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지 않는 젊은이들은… ‘한낮의 악마’51가 풀려났을 때처럼 생각지도 않은 충격적인 일을 벌이거나 놀랍고 역겨운 과오를 저지르기도 한다. 젊은이가 자신을 열게 하고 신앙과 이성에 따라 지침을 주고 합당한 대우를 하며 | 그들을 존중하고 가끔 미심적을 때에도 믿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건전한 ‘원칙’, 신앙, 궁극적 목적을 상기시켜야 한다. 세상에는 뛰어난 자질을 갖춘 교육자들이 있다. “현명한 교육자에게는 자극하고, 행동하게 놓아두며, 인도하고 바로잡아준다는 법칙이 있다.”52  [SP, 1954년 10월호, 4쪽] 
비합리적인 부모, 교육자, 스승도 있다! 그들은 자녀나 (제자)를 언제까지고 갓난아기 상태에 놓아두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갑자기 그들이 완전한 어른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12세부터 21세까지 오랫동안 인내와 지혜로써 나이에 걸맞는 방법으로 그들이 겪게 되는 수천 가지 시련을 염두에 두면서 양성해야 한다. 사춘기 소년소녀는 틀림없이 서서히 변화한다는 확신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어떤 유혹에 빠지고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방황하는 경향, 그런 생각, 그들에게 수염이 나고 변성기가 오는 것을 보더라도 그리 놀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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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역효과를 내지 마라

예를 들어 수도서원이나 사제서품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결혼이나 세속적인 생활을 동경하게 하는 소설, 잡지, 텔레비전 프로려는 것과 같다.
젊은이의 손에 무신론, 이교도, 자유주의 등의 영향을 받은 교과서를 들려주고, 성경, 교부, 윤리적으로 건전한 서적을 거의 맛보지 못하게 하면서… 바오로인으로 양성하고자 한다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공부는 오히려 설교에 해가 되고사람을 망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더 잘 순종한다. 결정된 일의 내면에 있는 이유를 잘 알고, 순종하는 것이 위대한 공로임을 알며, 장상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특히 결정하는 사람의 생각을 잘 알고 도달해야 할 목표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학생은 스승을 온순히 따르고 모든 말을 소중히 여겨 활용하며 설명을 청하고 온 힘을 다해 시간을 이용하고 성공적으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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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감각적인 사고방식

감각적인 사고방식은 맛있는 음식을 찾고 화려한 옷을 입는 미식가의 사치스런 사고방식이다. 온갖 좋은 의미의 인간성을 한쪽으로 밀어놓았을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어주고자 라자로의 상처를 핥던 개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감각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한 동물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이다.
하느님과 미래의 삶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더 많은 만족을 얻으려 하고 고통이 될 만한 것은 모두 피하려 한다.
‘현세적 인간’53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삼는 자들이다.”[필리 3,19 참조] 육신에 빠져들수록 그 사람 안에서 인간다운 이성과양심의 빛은 꺼져간다.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의 빛을 비추소서.”(시편 4,7)라는 말씀이 그에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상에 지나지 않게 들린다. 육체는 그를 약하게 만들고 소진시키기도 한다. 태만, 탐식, 색욕은 이성과 생각에 흙탕물을 끼얹는다.
이러한 현상을 보쉬에Bossuet는 잘 묘사하였으며, 근대 작가들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인간의 온 존재가 고깃덩어리가 된 것이 아닌가하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교만으로 가득찬 이 고깃덩어리를 합리적으로 사용하려는 생각 자체를 포기하고 만다. 육신은 영혼을 부정한다. 감각은 정신을 뒤덮고 내적 빛은 잠시든 또는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꺼지고, 영원히 꺼져버리기도 한다! 도덕적 태양은 자신의 위성에 가려 일식이 생긴다. 곧 지성은 육신에 가려지고, 심리적 생명은 신체기관의 생명에 봉사하기 위해 가려진다. 아주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은 상황까지 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감각적 사고방식이 지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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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인간다운 사고방식

인간다운 사고방식은 진리, 도덕, 신심 면에 논리의 ‘원칙’으로 이루어진다.
‘진리’에 관해: 인간은 하느님과 그분의 몇 가지 속성, 특히 인간에 대한 정의正義를 인식할 수 있다. 창조, 인간 본래의 목적과 이에 관련된 다른 진리, 예를 들면 개인과 사회, 미래의 생명 등을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덕’에 관해: 인간은 십계명의 내용과 그에 관련된 의무와 금지사항을 대체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모와 장상에게 순종할 의무, 이웃사람의 재산, 명예와 인격 존중의 의무, 진리를 말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살 의무 등도 알 수 있다. 계시를 모르면서도 올바르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연적 양심이 있어서 해도 좋은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이성과 예지에 따라 올바로 판단한다.
‘신심’에 관해: 첫째 원리요 궁극목적인 하느님께 감사와 흠숭을 드려야 한다. 매일 하느님께 기도해야 하고, 일생의 어느 기간과 일 년 중 한 기간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며, 온 생애에 걸쳐 하느님의 섭리를 간구해야 한다. 합리적이고 올바른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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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

“나의 성姓은 그리스도인이고 나의 이름은 가톨릭이다.”54
자연질서의 진리, 도덕, 종교심에 관한 인간다운 올바른 사고방식에 그 토대를 둔다.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 신앙, 도덕, 신심이라는 초자연적인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SP, 1954년 10월호, 5쪽]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해: 내세의 상이나 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창조, 인간의 타락, 강생과 구원, 교회 등. ‘신경信經’ 외의 다른 진리와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진리다.
그리스도인 윤리에 관해: 신덕, 망덕, 애덕 그리고 정의, 용기, 절제, 현명에 대한 실천적 지식, 순명, 겸손, 인내, 정결과 같은 윤리덕에 대한 실천적 지식, 교회의 계명과 참된 행복과 성령의 은사에 관한 지식, 신분과 직무와 사회적으로 져야 할 의무에 대한 지식 등이 있다.
신심에 관해: 성사, 미사, 전례기도, 개인기도와 같은 은총의 수단을 알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과 마리아 신심 등 주요 신심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성인처럼 가장 높은 단계에 오를 수도 있고, 조금 알고 있던 것도 거의 잊어버린 사람처럼 가장 낮은 단계에 머물 수도 있다.
복음서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는 사람은 묵상을 사랑하며 영적 독서를 많이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러한 ‘원칙’을 기억하고 마음으로 느끼며 영혼의 넋이 되게 하여 거의 제1의 본성 위에 제2의 본성이 겹쳐져 침투하고 흡수된다. 이러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의 언어를 말한다. 세상은 이러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여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성인을 미쳤다고 단죄하며 하느님의 지혜이신 스승 예수를 두고도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교 원리가 몸에 배어 이론적 실천적 사고방식으로 완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여”,55 “그때 가련한 나, 무슨 말을 하오리까?”,56 “이 사람도 하고 저 사람도 했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57“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하느님은 나를 보고 계시다”, “이것은 영원을 위해 내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58
우리가 복음서를 지니고 다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사랑의 표시요, 특별한 천상의 빛을 받을 만한 행위다.59
“성자께서는 저희에게 거룩한 복음의 말씀을 가르쳐주소서.” “복음말씀으로 저희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복음 봉독이 구원과 보호가 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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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언제나 우리 자신을 다스릴 것

천상 도시 예루살렘을 지향하는 우리는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하늘에 이르는 길인 규칙을 지켜 탈선하는 일 없이 확고한 발걸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모든 것에는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교통규칙을 비롯하여 학교규율, 정치규율, 군대규율, 식이요법 규칙, 기억증진법 규칙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오늘은 유치원(예: 몬테소리 방법)에서부터 시작하여 교사, 의사, 사제, 사법연수까지 어느 부분에든 방법이 많이 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성 바오로의 개념에 따라 ‘하느님의 사람homo Dei’으로 양성되기 위해 전진하고 있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확실한 규범으로 하나의 답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위해 복음서, 사도행전, 성 바오로와 성 요한의 서간 등은 비록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지만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 참조] 라는 하나의 영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성에는‘ 죽음’이 지배적인 영성,‘ 생명’이 지배적인 영성, 신심이 거의 또는 전부인 영성, 의지가 거의 또는 전부인 영성 그리고‘ 신앙’이 3분의 1 또는 전부인 영성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훌륭한 성인들에 따르면 참된 성덕은 첫째 계명에 있다.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자연은 자연 위에 놓여 있고 자연을 드높여준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른 규율은 먼저 이러한 ‘사고방식’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 선을 알고, 선을 원하고 바란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신앙 행위를 하고 이어서 희망의 행위, 그 다음에 사랑의 행위를 한다.
지성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라틴어 공부가 유익하다. 이 공부는 이점이 많으나 그 중에서도 지성의 성찰과 분석능력을 키워주며 지성이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적용하도록 ‘교육한다.’ 여기서 재검토, 교정, 재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어원에 대한 연구, 화학에서 철학에까지 여러 부문으로 넓혀가는 연구는 교육적 효과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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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수도자의 사고방식

이 사고방식은 그리스도인 삶에 관한 교의, 도덕, 전례의 모든 ‘원리’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항상 불이 켜져 있는 초 한 자루를 받쳐주고 있는 멋진 촛대에 붙어있는 튼튼한 세 개의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부자청년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사고방식이 지닌 고유한 요소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것들은 제가 젊어서부터 |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SP, 1954년 10월호, 6쪽]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27-30; 마르 10,28-31; 루카 18,28-30)
1) 부자청년은 영원에 대해 걱정하며 물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젊은이는 특히 종말에 대해 숙고하며 양성되어 간다. 곧 죽음, 심판, 지옥, 천국, 마지막 부활, 최후심판, 영원에 대한 묵상이다. “모든 언행에서 너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여라. 그러면 결코 죄를 짓지 않으리라.”[집회 7,36]61
참된 행복을 찾아라.
목적은 이에 적합한 수단의 선택을 요구한다. 목적을 묵상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도시를 알고 있으며 그곳에 가고자 하는 바람을 지닌 사람과 같다. 떠날 결심을 하고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음에도 그 길을 선택하고 가장 확실하고 빠른 수단을 취한다. 사말四末에 대한 묵상은 본질적으로 한 곳으로 인도한다. 곧 목적을 생각하게 한다. 모든 것이 이렇게 확정되어 있고 사고방식의 구조와 조직이 형성되어 있을 때, 기도하면 근본적인 오류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며, 만일 빠진다 해도 다시 일어설 것이다.
2) 예수께 다가온 ‘젊은이’는 이미 유년기를 지낸 사람이다. 신분의 선택은 어느 정도 성숙한 시기에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젊은이는 의식적인 자세로 삶에 직면한다. 이 시기에 가장 좋은 부분을 선택하는 것은 가장 보람 있고 가장 시의적절한 것이며 더 확실한 성공을 약속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드리는 충만한 선물이 된다. 너무 오랫동안 망설이지 말고 서두르지도 마라.
3) 복음서에 나오는 젊은이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켜왔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이것은 기본이다. 먼저 하느님의 십계명, 그 다음에 복음적 권고가 따른다. 완전한 청빈을 지키려면 먼저 제7계명을 지켜야 한다. 완전한 정결을 지키려면 먼저 제6계명을 지켜야 한다. 완전한 순명을 지키려면 먼저 제4계명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공동생활을 하고 사도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5계명과 그 적극적인 면도 지켜야 한다.
4) 네가 원한다면: 수도생활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완전하고 계속되는 영원한 사랑의 행위다. 아무런 매개수단 없이 직접 하느님께 오르는 사랑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운 의지행위요 단순한 계명 이상의 무엇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제안하시는 첫걸음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편에서 특정한 사람을 위해 행하시는 사랑의 선택이다. ‘하느님의 뜻’,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성부, 성자, 성령의 개입을 통해 본성, 은총과 영광을 동시에 언급하는 복합적인 선물이다.
5) 완전한 사람: 늘 계명을 지켜왔다고 하는 젊은이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마르 10,21] 그 순간 은총에 은총이 더해졌다.
수도자의 첫째가는 주요한 활동은 진보하는 것, 곧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수도회의 첫 번째 의무다. 두 번째 의 무는 수도회의 회칙에 따라 각 수도회가 헌신하고 있는 특정한 임무와 사도직이다.
수도서원 후 이 활동의 의무는 서원이 지속되는 한 계속된다. 진보하지 않는 사람은 진료소62를 맡은 의사가 악단을 지휘하고 외국어를 가르치면서 의사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 진보해야 하는 것은 ‘신분상의 의무’63다. 신분상 주어지는 은총은 이를 위한 것이다. ‘회헌’, 통솔, 신심 등은 이를 지향하는 것이다. 결점이 | 많아지고 애덕, 겸손, 순명 등이 줄어든다면 성소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SP, 1954년 10월호, 7쪽]
6)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말해 청빈의 덕과 서원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고, 청빈의 스승, 귀감, 학자, 용기를 주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청빈을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청빈한 수도자의 부, 영원한 ‘최고의 선’이시다.
회헌에 따라 실천한 청빈은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에서 이탈하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고,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체에 필요한 것을 마련해주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청하며, 부유한 사람의 손에서 재물이 가난한 사람과 사도적 활동이 옮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상은 복음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곧 구유, 이집트 피난, 나자렛, 공생활, 수난, 십자가,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
7) 와서: 완전한 정결로 주님께 육신을 봉헌하기 위해, 모든 힘, 곧 육체적 지적 도덕적 영적 힘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 가족과 자기 가정을 이루려는 생각도 포기하는 것이다. 첫째가는 계명에 따라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람을 사랑하고 기도와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시간, 매 순간을 바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마태 19,11]
회칙 「거룩한 동정생활」64은 이 모든 가르침을 확인하고 트리엔트공의회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결혼에 대한 동정성과 독신생활의 우수성과 우월성은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신앙조항으로 장엄하게 결정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늘 그렇게 가르쳐왔다.
8) 나를 따라라: 다시 말해 순명을 요구한다. 나의 권고, 나의 모범, 나의 바람을 따라라. 이로써 수도자는 나무 열매만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자체를 바친다. 수도자가 실현해야 할 완덕은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그저 좋은 것 또는 방법 그 자체가 뛰어난 것이면 그만인 그런 성화가 아니라 정결, 청빈, 순명 서원, 공동생활과 수도회의 회헌을 더욱 잘 실천하는 완덕이다. 수도생활에서는 가장 완전한 것이라도 ‘선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일반 신자라면 새벽부터 오후 1시까지 계속 미사에 참례하기로 결심할 수도 있지만) 수도자는 규정에 따라 직무를 시간 내에 정한 대로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받아 들이고 수행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성, 의지, 마음, 온 힘을 다해 그 일을 제시한 사람의 지향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순명의 덕과 서원의 참 의미를 많이 상실하고 있다.
9)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수도생활을 통해 인간의 인격은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로 계발된다. 이에 비례하여 하늘의 영광스런 자리에 오를 것이다. 복음서에는 분명히 수도생활에 적용되는 두 가지 확실한 비유가 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수도자는 하늘의 위대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
10) 백배로 받을 것이다: 올바른 사람이 드높여지고 공경받는 최고의 삶의 상태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로의 샘이다. 교회와 인류에게 가장 귀중한 행위를 수행한다. 사람을 하느님 안에 안정시키고 하늘나라의 서곡인 평화 안에 머물게 한다. 현세 생활에서 겪게 되는 수없이 많은 고뇌와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다. 영혼의 성화를 위해 특별한 도움과 기회를 제공하고 공로를 더해준다.
그러므로 유혹은 적어지고, 넘어지는 일이 드물며, 더 빨리 일어서고, 더 평안히 죽음을 맞게 되며, 하늘에서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된다.
수도생활은 예수님이 택하신 삶이고, 마리아와 요셉이 온전히 살으신 삶이며, 사도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받아들인 삶이다. 이 수도생활은 신앙을 영웅적으로 수호한 사람들, 학문과 예술에 뛰어난 사람들, 사회 각 분야에 공헌한 사람들을 교회에 배출했다.
11)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수도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 이상으로 확실하고 영원한 구원의 표시와 보증은 없다. 수도자는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죄를 멀리하고 지옥을 면할뿐 아니라, 소죄를 피하고 끊임없는 극기의 삶을 살아가기에 연옥을 피하고 공로를 쌓는다. 지상에서는 하느님 가까이 머물며 충실했기에 하늘에서도 하느님 가까이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자는 이중의 공로를 쌓는 높은 신분에 속하게 되는데 모든 행위를 늘 수도적 덕행으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12) 부자청년은 재산에 대한 탐욕과 애착 때문에 자기 성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슬퍼하며 되돌아간 젊은이의 행동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어떤 욕정에든 지배를 받으면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다. 특히 가장 지배적인 욕정이라면 더욱 그렇다. 게으름, 교만, 시기 등이 그렇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늘 싸워야 한다. “승자 아니면 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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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바오로인의 사고방식 [SP, 1954년 10월호, 8쪽]

“하느님, 복된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니….”65 [이는] 바오로가족의 제2의 목적66에 부합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교의, 도덕, 전례에 대한 가르침 등을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인 현대적 수단을 통해 널리 알리는 것이다.
바오로가족은 오늘, 성 바오로가 살아 있다면 행했을 것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살며 기도하고 자신을 성화하면서, 오늘의 성바오로를 살고 재현할 것을 지향한다. 성 바오로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를 드러낼 만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 계명을 완전히 하나의 방법으로 살았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성 바오로는 성바오로수도회를 세운 창립자다.67 성바오로수도회가 그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택했다. 아니 오히려 그가 우리를 낳았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1코린 4,15]
성 바오로가 살아 있다면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열의와 여러 나라 사람에 대한 열의라는 두 개의 불꽃을 지닌 하나의 불길이 되어 계속 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리가 더 널리 퍼져나가도록 더 높은 단상에 올라갔을 것이고 출판,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 시대적 진보가 가져온 수단을 사용했을 것이다.68 그의 가르침은 무덤덤하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어느 곳에 도착하든 단 한 번 이야기를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한 이야기를 잘 알아듣고 납득하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향해 나아가기까지 계속 그곳에 “머물며 그들을 양성했다.” 자신이 가르친 사람들 안에 도덕성이 확고히 서지 않으면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일을 이어가도록 원로를 세우고 편지를 자주 보냈으며, 그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자 했고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성 바오로는 바오로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스승 예수를 알고 사랑하고 스승을 따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1,1] 이 초대는 신자들과 추종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그의 자녀이기에 특별한 것이다.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이어받았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 그 안에서, 그에게 서, 그를 통해 살아간다. 테살로니카에 있는 신자들에게 자신은 그들의 ‘귀감’임을 상기하라고 한 말은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꼭 맞는 말이다.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2테살 3,9]69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원형이시다. 바오로의 삶은 우리를 위해 귀감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재현되시도록 우리는 바오로를 본받아야 한다. 성 바오로를 귀감으로 삼는다는 표현은 외모를 닮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 덕, 열의, 신심… 모든 것, 곧 그의 인격을 최대한 닮는 것이다. 바오로가족은 많은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조직체로서 살아 있는 바오로라야 한다.
성 바오로의 생애, 업적, 서간을 통해 성 바오로를 알고 묵상해야 한다. 그래서 성 바오로처럼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야기하고 활동해야 하며, 아버지에게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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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사제의 사고방식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믿는 바를 사랑하고 가르친 바를 전하는 자가 되게 하여주소서.”라고 교회는 어느 사도의 기념 미사에서 기도한다.
사제의 사고방식 ‘원칙’은 복음서가 부여한 것이다. 바오로인 사제는 인간다운 사고방식,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 수도자의 사고방식, 바오로인의 사고방식에 사제의 사고방식을 하나 더 첨가한다.
이 사고방식은 세 가지 요소, 곧 진리와 도덕과 전례에 대한 깊은 확신과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강인하고 굳은 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바오로인 사제는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서 자신의 존재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곧 지식, 건강, 기도, 힘, 생명까지도 그들을 위해 사용하기를 바란다. 이는 삶으로 살아낸 가장 큰 사랑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지성과 마음이 충만하고 의지가 불타오르고 강해질 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강림 후 사도들은 최고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금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참조]
열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예수님은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알라코크에게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당신 성심을 보여주시며 강력한 사랑을 더 이상 감출 수도 억제할 수도 없어 모든 사람에게 계시했다고 말씀하셨다.
천상 스승은 사제의 사고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주셨다.
ㄱ)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ㄷ)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
ㄹ)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다시 말해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백성을 인도하고, 그들을 성화시키라는 것이다. 하느님과 사람들 관계에서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다.
너희는 내가 한 것처럼 하여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
너희는 박해를 받을 것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너희는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다.
사제는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과 관련된 일을 하도록 사람들 가운데서 뽑힌 사람이다.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 사도들에게 하신 이야기를 한데 모으면 사제의 사고방식이 모두 형성된다. [SP, 1954년 10월호,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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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모든 사고방식의 넋

“제 마음을 당신 법으로 기울게 하소서.” [시편 119(118),36]
이는 하느님이 겸허한 사람, ‘미소한’ 사람에게 주시는 지혜다.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똑똑하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0,21] “지혜의 근원은 주님을 경외함”[시편 111(110),10] 이다. 이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어린이는(역주: 한국어 성경에는‘ 어리석은 이’로 되어 있음)
누구나 나에게 와서 마셔라.”[잠언 9,4-5 참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마태 16,26] 그것은 참 하느님의 아들이요, 겸손과 신앙을 통해‘ 주님의 기도’ 정신을 지닌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 업적이다 .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린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바람, 천국에 대한 사랑, 천국을 얻고자 하는 굳은 의지, 복음서, 지극히 거룩한 성체, 우리 어머니 마리아, 모든 면에서 진보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온 존재에 스며들고 침투하고 지배하고 인도한다. “모든 것을 하나로 본다.”70 영혼 깊은 곳에 하나의 이상이 형성된다. 이 이상을 향해 모든 능력이 하나의 의욕으로 모아지고 통합되며, 매일 사고, 상상, 기억, 기도, 마음, 관계, 면학, 독서 등으로 강화시켜간다. 모든 것이 개인의 성덕과 사도직이라는 큰 건물을 짓는 건축 재료가 된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 계명을 완전히 실현하게 된다. 하느님의 진리 안에 있는 영혼이 이러한 정신적 평온에 이르렀을 때,“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내고 그의 혀는 올바른 것을 말한다. 자기 하느님의 가르침이 그의 마음에 있어 그 걸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시편 37(36),30-31]

* * *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발을 땅을 딛고 서 있지만 머리와 지성은 빛으로 충만한 높은 세계, 드높은 빛 속에서 그리고 정신적 평온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헛됨’은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평가하며, 갖가지 사건을 높은 관점에서 헤아린다. 모든 것은 자기 성화와 인간의 구원을 통해 증진시켜야 할 하느님의 영광, 곧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견고한 신앙, 어떠한 순간에도 흔들림 없는 소망, 하늘의 빛, 성령의 선물과 그 결실, 성소에 대한 기쁨, 천상적 재화를 미리 맛봄, 참된 행복에 대한 깨달음이 그 사람 안에서 서서히 일어나며… 모든 것이 영원히 하느님을 직관하고 소유하고 맛보고 즐기는 준비다. 그 사람이 추구해온 것을 얻기 위해 육신이라는 실체에서 떨어져야 할 일만 남게 된다.
“지혜는 지각의 빵으로 그를 먹이고, 이해의 물을 그에게 주리라.”(집회 15,3)
하느님을 따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 생각하는 것, 이것이 모든 사고방식의 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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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성경

성경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내신 편지다.” 곧 인류에게 보내신 하느님의 편지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은 하느님의 생각을 알기 위한 첫째가는 중요한 편지다. 71
참으로 신심 깊은 사람들에게 복음서는 그들의 기쁨이다. 복음서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발견하게 되기에 복음서 이상으로 신심생활을 견고히 해주고 또 효과적으로 천상 스승을 본받게 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덕에 관한 우리 주님의 귀감과 가르침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다면 겸손, 온유함, 인내, 무례함을 참음, 동정성, 자기 희생에 이르는 형제적 사랑이 무엇인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교도 철학자들, 특히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은 틀림없이 이러한 여러 가지 덕행 중 몇 가지에 대해 여러 편의 아름다운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인 습작과 설득력 있고 효력 있는 천상 스승의 말씀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철학자들과 문인들에게서는 자주“ 무지한 대중을 멸시하고 멀리하려는”,72 서민 위에 군림하려는 교만한 도덕주의자를 느끼게 된다. 그 대신 우리 주님에게서는 당신 백성의 지성에까지 당신 지성을 낮추시는 완전한 단순함이 눈에 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르치신 것을 실천하고, 당신 영광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분의 영광을 찾으신다.
더 나아가 신앙인은 스승의 모든 말씀과 모든 행동에는 그분의 이야기를 읽고 덕행을 실천하도록 도와주는 특별한 은총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문자라는 껍질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흠숭하고, 비추임을 받아서 그분의 가르침을 깨닫고 맛들이며 실천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이러한 성경봉독은 묵상과도 같고 예수님과의 경건한 대화와도 같아 사람은 이러한 대화를 통해 경탄하며, 사랑하는 분을 따르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사도행전’과 ‘서간’은 신심생활에 자양분을 제공한다. 이것은 제자들이 살아온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예수님이 당신의 일을 계속하라고 위탁하신 사람들이 신자들의 필요성에 알맞게 설명한 것이다. 복음서의 이 첫 주석서보다 더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것은 없다.
‘구약성경’, 특히 시편은 모든 사람의 수중에 있어야 하는 책이다. 라코르데르Lacordaire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시편은 우리 선조들의 신심생활 안내서였다. 가난한 사람의 식탁에서도 볼 수 있었고, 왕들의 | 장궤틀에도 얹혀 있었다. 오늘도 사제는 자신을 제단으로 인도하고 세상의 여러 가지 위험 사이를 지날 때 그를 동반해 주는 뜨거운 열망을 이 시편에서 길어낸다.”73 시편은 기도서다. 이 시편에는 생명과 신선함이 충만한 언어로 표현된 기도, 경탄과 흠숭, 자녀의 경외심, 감사와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느낌이 묘사되어 있으며, 참으로 다양하고 고뇌에 찬 상황에서 바치는 탄원, 박해받는 의인이 하느님의 정의에 호소하는 부르짖음, 죄를 뉘우치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죄인이 통회하는 울부짖음, 용서받는다는 희망과 삶을 개선하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시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을 시편에 일치시킴은 분명 성화를 이루는 일이다.
‘지혜문학’도 경건한 사람들이 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여기에는 생활을 개선하도록 간절히 권하는 하느님 지혜의 말씀이 있고, 분별 및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에 관해 실천해야 할 주요한 갖가지 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서와 예언서’를 유익하게 읽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을 우상숭배에서 보호하시고, 반복하는 탈선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참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참된 해방자를 고대하며, 정의와 평등과 특히 보잘것없는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에게 애덕을 실천하도록 계속 인도하신 하느님 섭리의 활동을 그 안에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준비를 갖추었을 때 아주 매혹적인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 종들의 선행과 나약함을 함께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떠올리며 뉘우치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찬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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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각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74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지혜롭고 총명합니까? 그러한 사람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 자기의 실천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속에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있거든, 자만하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야고 3,13-17)
인류는 다방면에 걸쳐 진보하였으나 지성, 과학, 경제, 정치, 사회, 학술, 교육,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편집 등의 세계를 지배하는 계층이 있다. 마치 파도가 몰아치는 대로 떠도는 배와도 같다. 그 결과 항해자들은 파도와 바람에 희생될 위험에 처하게된다.
아주 근사한 비행기지만 방향을 잃은 비행기, 핸들이 고장난자동차와 같다.
그리스도교 문명은 과학을 어머니로, 계시의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고 있다. 과학과 신앙이 이혼하면 그 결과 고통당하는 것은 인간이다. 부모가 이혼한 다음 그 결과를 감내하는 것은 자녀인 것과 흡사하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로마 1,21)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습니까? 율법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0-25)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17,3.8]  [SP, 1955년 1월호,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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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지성의 병

치유의 은총은 죄가 인간 안에서 일으키는 질병을 치유한다는 의미에서 성령의 역사다. 인간 지성에 관한 질병은 특히 다음과 같다.
- ‘무지’는 신앙의 진리에 대해서만 아니라 때로는 자연법에서 오는 중요한 의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 ‘경솔함’으로 인해 여러 번 듣고도 다시 생각하지 못하고 묵상도 하지 못하고 동화되지도 못한다.
- ‘망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들은 이야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멍청이 같으므로 하느님 말씀이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진다.
- ‘완고함’은 자연적인 진리와 초자연적인 진리를 이해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이 돌밭에 떨어지게 된다.
- ‘오류’는 갖가지 이유로 지성을 어둠에 가두기 때문에 진리의 빛이 아주 조금 밖에 침투하지 못하거나 아예 침투하지 못한다.
- ‘선입관’을 가지고 있으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우며, 자신의 입장을 지키거나 반대하기 위해 명백한 진리마저도 거부한다.
- ‘지성의 타락’은 지성을 혼란케 하는 그릇된 사상체계(자연주의, 과학만능주의, 기계론, 유물론, 비판주의, 주지주의 등)에서 나온다. 이러한 경우 지성은 한동안 매우 단순한 진리도 받아들일 능력을 잃어버린다.
진리에 대항하는 사람들, 정신이 썩고 믿음의 낙오자가 된 사람들이다.(2티모 3,8 참조)
인간 지성에 타격을 입히는 이 모든 질병을 생각할 때 인간의 마음, 정신, 의지 중 가장 치명적으로 허약해지는 것은 어떤 부분인지 묻게 된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이러한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허함과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신뢰심이 있는지 자문해보자. 육신의 질병 이상으로 이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같은 질병 (예를 들면 하느님 없이 살고 있는 현재의 무신론)의 | 진단은 때때로 복잡하고 거의 불가능할 때도 있다. 그리하여 자주 마음이 온갖 정욕을 동원하여 지성을 아프게 한다.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러워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그들은 정신도 양심도 다 더러워졌습니다.”(티토 1,15)라고 성바오로는 티토에게 써 보냈다. 그러나 때때로 이 질병의 치료와 그 과정은 단순하다. 어떤 상황에서는 겸손하고 신뢰하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의 기도로써 하느님의 전능을 자기 것으로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언제나 천상 의사에게 가기 위해 중개자이신 지극히 거룩한 마리아가 계시다. [SP, 1955년 1월호,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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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치료를 위한 대책

무지에는 ‘교육’으로 대처한다. 오늘날 신앙에 관한 무지가 가장 큰 악이라는 것이 최근에 나온 여러 교황 문헌들에서 확인되고 있다.(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비오 12세)
일반 교양과 일반 교육이 많아지고 있다!
지적 노동은 가장 고귀한 것, 가장 힘든 것, 바르게 행하면 공로가 가장 많은 것, 가장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비례하여 종교교육과 종교적 문화도 동등한 발전을 거듭하여 현세의 삶과 특히 영원을 위해 많은 선을 가져왔다.
학교수업을 조직적으로 더 잘 계획하는 동시에 교리교육의 계획도 세워야 한다.
바오로인의 삶에서 면학은 충분한 시간, 뛰어난 교사, 효과적인 방법을 갖추어야 하고, 자격시험을 치러야 한다. 신심과 덕과 더불어 성소를 위한 첫째 조건으로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먼저 종교과목을 즐기는 훌륭한 제자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스승이나 사도가 되겠는가?75 사도는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이를 간직하고 사랑해야 한다.
‘경솔함’에는 지성으로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트지 않는다. 땅 속에 깊이 묻혀야 한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고”[루카 2,19] 묵상하셨다. 좋은 이야기를 들은 후 묵상하지 않고 실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하지 않는 것은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 이 의미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야고 1,22-23 참조]이다. 그만큼 책임이 커진다.
설교를 들은 다음 반성하고 결심을 세워 적용하는 것은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 이렇게 하려면 지대한 노력이 필요한데, 성과는 확실하다.
지적‘ 태만’은 그 어떤 지적 활동도 하지 않는 것, 지적 관심의 부족은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든 이를 희생시키는 위험한 상태에 지성을 내버려두는 것이다.
지성의‘ 태만’에는 지속적이고 건전한‘ 활동’으로 대응해야 한다. 지성은 언제나 활동한다. 어떠한 음식이든 섭취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지성이 좋은 일에 전념하고 있다면 나쁜 일에 사용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은총에 의지할 필요가 있으나 하느님을 떠보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상식과 사려 깊게 처신해야 한다. 여러 가지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건전한 음식으로 자양분을 섭취하는 지성은 독毒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완고함’에는 ‘온유함’으로 대응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라는 관대한 자세를 지닌다면, 필요한 조건 하나를 갖추는 셈이다.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자세를 지니지 않았다. 따라서 분명한 것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다. 토마스 사도는 주님을 보았다고 분명히 말하는 다른 사도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마르 16,14]라고 할 만큼 사도들도 모두 예수님의 꾸지람을 들었다. 예수님을 여러 번 보았으면서도 그분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류’에는 ‘진리’로 대응해야 한다. 거짓말과 위선은 태초부터 악마의 속임수였다. 악마는 예수님까지도 속이려고 했다. 오류에 젖은 사람 안에는 진리가 침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슬람교, 유다교, 불교 신도의 개종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여러 세기에 걸쳐 사람들 안에 자리해온 오류는 복음의 빛이 스며드는 것을 방해한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그릇된 신념이 형성되고 나면 진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방어태세를 취한다.
오류와 악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어떤 조건에서는 그럴 수 있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먼저 지성이 올바른 비추임을 받아 진리 안에서 강해지고, 권고와 합당한 허락이 개입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겸손하게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도 우리를 중대한 위험에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선입관’에는 ‘올곧은 마음’으로 대응해야 한다. 예를 들면 지위를 잃을지도 모르는 상반된 이해관계가 얽혀 있거나 지배적인 욕망이나 교만이 꿈틀거리고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성숙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동의하고 받아들인다 해도 일시적인 것으로 마치 가시덤불이 덮인 땅에서 싹이 튼 씨앗과 같을 것이다. 마음이 곧은 사람에게는 설교하기 쉽고, 교정하기 쉬우며, 충고하기도 쉽고, 항구하기도 쉽다.
지성의 ‘타락’에는 건전한 ‘논리’로 대응해야 한다.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궤변주의, 배타주의, | 그릇된 사상체계가 만연해 있다. 오류는 자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세밀하고 설득력 있는 형태를 취한다. 원칙은 이것이다.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10] 그리스도와 교회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학설은 의심하는 것이 좋다. 의심은 뛰어난 신앙의 스승, 논리의 연구와 기도를 통해 정화된다. 생각이 올바르면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부족에 도움의 손길을 보낸다. [SP, 1955년 1월호, 3쪽]
지성과 마음이라는 두 개의 흐름이 나란히 흘러야 한다. 끊임없는 지도指導로 마음이 이성을 따르게 하면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진리를 알아야 하지만 진리를 사랑하도록 마음을 자극해야 한다. 참된 가톨릭 신자는 신앙 면에서 무지한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신앙에 관련한 지식을 습득하고 깊이며 주위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달하는 사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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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지성의 타락을 방치하지 마라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 거짓 예언자는 독서, 친구, 라디오 청취, 영화, 여러 종류의 연극 등 사방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복음서와 성인들의 전기에 대한 독서로 생각과 열망과 삶이 얼마나 현격하게 변화되었던가! 돈키호테는 다른 의미에서 사상과 독서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는 어린 시절에 좋은 독서를 한 다음 관대한 선교 열의에 불타올랐다.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작은 실개천이 천 가닥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흐른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나 백 가닥이 큰 수로로 흘러들어 한 곳에 모이면 빛과 열을 내는 발전용 자원이 된다. 이와 같이 평범한 지성을 가지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힘을 모으면 여러 가지 것에 생각과 시간과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거둘 것이다. 많은 일에 아주 분주한 사람은 미미한 결과를 낼 뿐이다.
좋은 일을 잘 하는 데에도, 아무렇게나 하는 데에도 같은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으로 한 학년 진급하는 데에도, 적당히 해서 ‘낙제’하는 데에도 걸리는 시간은 같다. 이와 같이 [성체]조배, 신심실천, 사도직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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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사상

오늘의 세계가 종교, 사회, 정치, 철학, 도덕,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사상으로 갈라져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76
일본 사상과 스페인 사상, 중국 사상과 영국 사상, 인도의 영성과 이슬람의 영성, 개신교의 영성과 가톨릭의 영성은 서로 얼마나 거리가 먼가! 사회학이나 종교에 한정시켜 보더라도 자유주의, 그리스도교 민주주의, 공산주의 등은 서로 반대되는 이론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개인, 가정, 사회, 정치, 종교, 도덕 생활에서 반대되는 실천적 결론에 이른다.
가족을 위해 사제직을 지망하는 신학생은 사제가 되면 힘, 금전, 영향력을 친인척을 위해 쓰고 소비한다. 주변에 친인척을 두고 이들의 영향을 받는다. 이 신학생은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복음서와 성인들의 정신, 곧 사제직을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한 봉헌이라고 생각하는 신학생은 사제가 되면 온전히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신학생은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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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위험한 경향

지성은 진리, 특히 하느님과 거룩한 것을 알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은 지성의 참 태양이요‘ 이성’과‘ 신앙’이라는 이중의 빛으로 사람들을 비추신다. 현 상태에서 이 두 빛의 협력 없이는 진리 자체에 이를 수 없다. 둘 중 어느 것이든 하나를 거부하는 사람은 눈이 멀게 된다.
지성은 의지를 비추어 선을 향하게 할 수 있으므로 지성의 훈련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지성이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한, 이것은 도덕적 삶과 초자연적 삶의 규범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호기심, 성급함, 교만, 완고함 같은 나쁜경향을 억제해야 한다.
1)‘ 호기심’은 무지를 조장하는 지성의 질병이다. 실제로 유익한 일에 귀중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에만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알고자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호기심을 부추기는 공부에 덤벼들어‘ 덤벙대고’, ‘성급하게’ 구는 바람에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다른 공부를 희생시키게 된다.
호기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가장77 도움이 되는 필요한 공부를 해야 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제일 먼저, 더 필요한 것에 집중하라id prius quod est magis necessarium.” 고 말했다. 그 밖의 것에는 다만 쉬기 위한 방법으로 마음을 써야 한다. 대부분의 소설이 그런 것처럼 지성보다 상상을 키워주는 것, 또는 신문이나 잡지처럼 세상의 소식과 헛소문에 관한 것은 ‘신중하게’ 읽지 말아야 한다.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도 마찬가지로 대해야 한다.
2) 독서를 할 때에는 짧은 시간 내에 한 권의 책을 허겁지겁 ‘삼키듯’ 읽어서는 안 되며, 지나치게 빨리 읽는 것도 피해야 한다. 좋은 책을 읽을 때에도 읽는 것을 더 잘 이해하고 맛들이기 위해서는 천천히 읽는 것이 좋다. 이러한 독서방법은 호기심 때문에 공부하는 것, 자신의 지식을 |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초자연적 동기로, 자신과 이웃의 선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에게 훨씬 더 쉽게 성공을 거두게 한다. “다른 사람의 발전을 위해 할 때 이는 애덕이요, 자기 계발을 위해 할 때 이는 현명한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78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한 것처럼, 지식은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애덕이라는 건물을 세우기 위한 도구[기계]로 사용해야 한다.”79 이 말은 영성의 주제를 다루는 학문에도 적용된다. 실제로 이같은 학문을 하면서도 마음을 정화하고 극기하며, 영적 집을 짓기보다는 호기심과 교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 [SP, 1955년 1월호, 4쪽]
3)‘ 지성의 교만’은 가장 위험하고 치료하기가 가장 어렵다.
이 교만은 신앙과 장상에 대한 순종을 어렵게 한다. 자기 이성을 신뢰하는 나머지 자신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여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거나 신앙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이성으로만 해석하려 한다. 또한 자기 판단을 너무 신뢰하는 나머지 다른 사람, 특히 장상의 권고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현명치 못한 행동을 하게 되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며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자기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의견을 단호히 부인한다. 이것이야말로 불화를 초래하는 가장 잦은 원인 중 하나로서, 때로는 가톨릭 저자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같은 불행한 분열이 평화와 일치와 애덕을 파괴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지성의 교만을 고치려면 어린이와 같이 온순하게 신앙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인내와 힘든 연구를 통해 얻은 교의의 설명을 구하는 것은 분명히 옳은 일이요, 이를 위해서는 성 아우구스티노, 성 토마스를 중심으로 한 여러 교부와 교회학자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가르치듯이 이같은 연구는 경건한 마음과 절제가 필요하다. “지성을 찾는 신앙”80이라는 성 안셀모의 금언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교의를 설명하려는 일념에서 이를 희석시키거나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는 ‘극단적인 비판정신’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신앙의 진리뿐 아니라 교황의 지침도 따라야 한다. 자유로이 토론할 수 있는 문제 안에서는 자유롭게 토론하며 타인의 의견을 경시하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4) ‘완고함’, 토론을 할 때에는 교만을 만족시키려 하지 말고 자기 생각의 승리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야 한다. 반대자들의 의견이라 해도 진리가 완전히 배제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다만 우리가 그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반대자들의 논리를 주의 깊고 공정하게 들으며 그들의 관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진리에 다가가고 겸손과 애덕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이다.
지성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 정신으로 가장 필요한 것을 올바른 방법으로 항구하게, 진리를 알고 사랑하고 실천하려는 의지로 연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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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지성의 죄

“너희가 가난한 동족을 괄시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신명 15,9) 몇 달, 몇 년 동안 성소와 서원에 어긋나는 생각을 지성에 담고 있는 수도자들은 나쁜 생각과 결정적인 영적 파멸의 기회에 몸을 맡기는 이중의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따라서 정결에 어긋나는 생각과 상상보다 더 중대한 것이다.
순명이나 청빈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나 의견을 지니고 있으면 실제로 독립된 생활을 하게 되며, 계속 순명이나 청빈을 남용하며 서원과 덕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미련한 자는 죄악만 꾸며 낸다.”(잠언 24,9)81
이 사람 또는 저 사람과 반대되는 생각을 지니기 때문에 판단, 의심, 어긋난 해석, 애덕을 거스르는 말과 행동이 나온다.
성당, 공부방, 학교, 사도직 터 등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다스리는 온갖 노력을 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산만하게 사는 사람은 분명 모든 것에서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참된 결실을 내지 못하며, 머리는 비어 있다.
야심에 찬 꿈은 스포츠, 비행술飛行術, 웅변, 학문, 음악 등 여러 부문에서 유명해지고 싶은 갈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그때부터 더는 절제할 줄 모른다! 종교, 도덕, 어느 사회 분야에서 활동을 하든, 경제나 운동 방면으로 나아가든 각자는 자기 관심 분야를 향해 나아간다. 현실적 감각으로 매일 조금씩82 단순하게, 곧 꿈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덕이 있는 사람의 걸음처럼 숙고하고, 바라고, 권고할 만한 최종목적을 향해 밑바닥83에서부터 천천히 확실하게 나아가야 한다.
100세의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지적 발육상태는 14-18세 정도에 머물고 있다. 그들의 몸이 자라는 동안 교육은 지속되었으나 위선적이고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는 어린이 같은 생각과 사고를 가진 미숙한 사람들이다. 연령으로 보아서는 어른이 되었으나 아직 미숙한 상태다.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들로서, 다른 사람의 의견의 노예요, 분명한 원칙과 방향도 | 없고 나침판도 닻도 없이 높은 파도에 떠밀리고 있는 배와도 같고, 조종사가 없는 비행기와도 같다. 인생의 기점을 찾지 못한 사람으로서 이들에게는 경험도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22-24세가 되어서도 삶에서 무엇을 바라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아직 모른다.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여러분이 결정해 주십시오.” 하며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충분한 논리도 사용하고 다 큰 사람 같아 보일 때에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SP, 1955년 1월호, 5쪽]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모르는 교만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그때그때 느끼는 기분으로 살면서, 칭찬을 들으면 마냥 좋아하고, 주의를 들으면 있는 대로 기가 꺾인다. 자신만만하여 타인의 권고를 무시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하느님께 다가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다.”[루카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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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성령을 거슬러

‘회개하십시오.’ 성령을 거스르는 죄 중에는 ‘진리를 알고도 이에 대적하는’84 죄가 있다. 이는 실제로 하느님께 다가가고, 하느님을 신뢰하기 위한 첫째가는 중요한 수단을 거부하면서 진리의 선물과 정면으로 맞서는, 구원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하느님도 구원하시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알면서도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암시적으로 진리와 하느님의 진실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진리를 거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진리를 미워하고, 진리가 주는 유익한 빛과 그 덕이 백성에게 도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성 대 그레고리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바리사이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쳐준 베드로와 요한을 대적하는 바리사이들이 그 좋은 예다.“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
이것은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죄, 가장 많이 퍼져 있는 죄, 중대한 죄다. 그릇된 사상, 그리스도와 그 대리자인 교황과 맞서는 싸움, 정부, 정당, 신문, 영화, 라디오, 교사, 연사, 텔레비전 등도 진리이신 하느님과 맞서기 위해 일치하여 힘을 모으는 것같다.
이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처럼,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한다. 통회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알고도 이를 거부하는 죄인인 한, 용서받기 위한 자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죄를 통회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진리 안에 머물 것을 진정으로 약속해야 한다. 진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하
느님 편에 있지도, 하느님과 함께 있지도 않으며 하느님과 함께 가지도, 하늘에서 하느님을 뵙지도 못할 것이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입니다.” [사도 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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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양심의 소리

‘회개하십시오.’ 가장 어려운 양심성찰은 내면에 관한 것, 특히 지성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양심성찰은 첫째가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공부하나? 거룩한 지식을 어떻게 심화하고 있나? 지성을 위한 양식은 어떻게 섭취하고 있나?
지성의 여덟 가지 질병85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우리 안에 자연적 초자연적으로 건전한 사고방식을 형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을 검토해야 하며, 초자연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들여 신앙생활에 익숙해지기까지 이러한 성찰을 계속해야 한다.
성찰은 지성과 생각에 있는 모든 죄의 근원, 원인과 구성요소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
가장 귀중한 지성이지만 지성만큼 낭비되는 하느님의 은총은 없다. 특히 오늘날 독서,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을 통해 독이 든양식이 얼마나 많이 퍼지고 있는가! 신앙과 덕에 어긋나는 생각이 얼마나 많은가! 지성은 아주 많은 경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고, 매우 이상한 것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두 내면에서 저질러지는 나쁜 행동이 있다. 나쁜 행동임에도 이에 동의하고 한 번 더 해보고 싶어 한다. 말과 행동으로 저지르는 나쁜 행동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에는 언제나 지성의 역할이 있다.
외적으로는 매우 결백해보이고, 정중하게 대하며 친절하게 말하고 행동하지만, 불순하고 바람처럼 가볍고 모든 덕에 반대되는 판단과 생각으로 가득 찬 지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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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깨어있음!

신앙, 윤리, 전례, 교회, 사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등에 반대되는 모든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죄가 된다.
이러한 죄는 소죄일수도 있고 대죄일수도 있다. 신앙, 애덕, 제4계명, 제6계명, 제9계명, 제10계명에 반대되는 생각에 대해서는 언제나 성찰이 필요하다.
외적 고요와 내적 갈등 사이에 어떤 대립이 있는가! 반항심, 허영심, 육욕, 광적인 망상, 비이성적인 속된 생각… 등은 독서, 수다스러움, 영화관람, 야심… 등에서 생긴다. 같은 공동체 안에도 단순한 사람, 온전히 하느님의 것인 사람, 평화로운 승리에 가득찬 사람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성 바오로는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이렇게 썼다. “나는 위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우리의 그 모든 환난에도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2코린 7,4) 다른 사람 같으면 절망하고 하느님과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저주할 것이다.
돈 많은 미식가는 배가 부르면서도 불행했고, 라자로는 상처가 온몸을 덮고 있는 허기진 상태에서도 큰 평화를 누렸다.
[SP, 1955년 1월호, 6쪽] 우리 성격은 대부분 생각을 다스리도록 우리를 이끄는 내적 훈련에 달려 있다.
‘신경과민’은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못하고 결코 이겨본 적이 없는 교만, 야심, 저속한 질투심… 등에서 유발한 씁쓸한 생각이 질풍노도와 같이 난무한 다음에 오는 결말이 아닌가? 그리고 참으로 부드럽고, 한결 같은 태도, 이해심, 새롭고 거룩한 집을 짓기 위해 잡동사니를 이용하는 것, 선으로 악을 이기고자 늘 탐구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다스리는 습관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만초니는 페데리코 추기경의 침착함을 뛰어난 솜씨로 묘사하고 있다. “페데리코의 빼어난 모습은 그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페데리코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자신도 모르게 당당했고, 세월이 지나도 전혀 손상되거나 나태해지지 않았다. 근엄하고 활기찬 눈과 깨끗하고 사색적인 이마는 창백한 얼굴과 맞닿은 백발과 함께, 금욕과 명상과 고된 노력의 흔적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일종의 순수한 활력이 돋보였다. 이목구비는 좀 더 젊었다면 말 그대로 아름답다고 할 만큼 잘생겼다.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엄숙하고 자비로운 생각, 오랜 삶에서 거듭된 마음의 평화, 사람에 대한 사랑, 형언할 수 없는 희망으로 가득 찬 기쁨은 노년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고, 화려한 붉은 복장과 순수한 정신 속에서 더욱 두드러졌다.”(A. Manzoni, 「약혼자들Promessi Sposi 」, cap. XIII)
내적 수양 없이는 어느 누구도 그 삶이 평온하지 못하다. 감각의 절제나 수도회의 봉쇄, 도움 등과 같은 외적인 절제는 어느 순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나쁜 생각의 압력에 굴복될 수 있으며, 사람을 망치거나 걸림돌이 되는 행동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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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sine qua non’.

43 ‘윤리성의 결여’를 말하는 퇴폐적 의미가 아니라 윤리적으로 냉담한 상태를 말한다.

44 콜룸바 마르미온Columba Marmion 아빠스의 유명한 저서 제목. 

45 노이베르트E. Neubert, 「샤미나드의 마리아 영성 개론」의 다른 제목.

46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쇼타르 아빠스의 저서.

47 이미 인용한 바 있는 복음 구절.

48 “Non excidet” [하느님의 말씀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닙니다(로마 9,6).

49 “Frangar non flectar”: 영웅주의의 로마식 수사학적 표현으로 많은 인물이 공명정대한 정치 표어로 내세웠다.

50 F. Petrarca 시집 「승리I Trionfi : 영원한 승리Triumphus æternitatis」, 45-48.

51 ‘한낮의 악마’라는 표현은 시편 91(90)에서 추론한 것이다. 현대적 표현으로는“ 너는 무서워하지 않으리라.한낮에 창궐하는 괴질도”라고 한다. 이와같은 표현은 일반적으로 40대에 겪게 되는 혹독한 신앙의 시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했는데, 이러한 시련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확고하게 선택하라고 초대한다.

52  카노니코 F. 키에사 신부가 자주 인용하여 설명했고, 알베리오네 신부가 애용한 유명한 교육학적 표현.(「스승 예수Gesù Maestro」, 알바 1926, pp. 214-215 참조) 

53 “동물적인 사람Animalis homo”.(1코린 2,14) CEI의 번역: “본성적인 사람uomo naturale은 [하느님의 영에서 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54 바르셀로나의 주교, 성 파치아노(Paciano, 320-390)가 한 말이다.

55 “Deus meus et omnia”는 성 프란치스코가 한 말이다.

56 “Quid sum miser tunc dicturus?”는 토마스 다 첼라노Tommaso da Celano 수사의 <격노의 날Dies iræ>이라는 성가에 나온다

57 “Si isti et illi [illæ], cur non ego?”라는 표현은 성 아우구스티노가 한 물음이다.

58 “Quid hoc ad æternitatem?”는 성 베르나르도의 좌우명이다.

59 알베리오네 신부의 자전적 증언. “32년간 몸에 지니고 다닌 복음서는 참으로 효력 있는 기도였다.”( 「당신 은총의 풍성한 부」, 145항)

60 성경봉독 시작이나 끝에 바치도록 제시한 로마전례 기도문. 하나씩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Verba sancti Evangelii doceat nos Filius Dei”, “Per evangelica dicta deleantur nostra delicta”, “Evangelica lectio sit nobis salus et protectio.”

61 원문에는: “In omnibus operibus tuis memorare novissima tua et in æternum non peccabis.”

62 ‘진료소’: 특정 지역에서 건강 증진을 도와주는 곳.

63 ‘신분상의 의무’: 삶의 조건과 연관된 도덕적 의무로서, 구체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서원의’ 의무다.

64 S acra Virginitàs : 봉헌된 동정생활에 관해 1954년 3월 25일에 반포한 비오 12세의 회칙.

65 원문에는: “Deus qui multitudinem gentium Beati Pauli Apostoli prædicatione docuisti….”(「로마 미사경본」,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본기도)

66 ‘둘째 목적 또는 특수 목적’을 언급. 이에 비해 첫째 목적(일반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회원들의 성화’에 있다.(SSP 회헌, 1949,1-2조)

67 참조: 「당신 은총의 풍성한 부」, 2; 「완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Ut perfectus sit homo Dei 」 I, 11.43. 

68 바오로가족의 초기 10년 동안 자주 인용하던 마곤차Magonza의 주교 빌헬름 폰 케틀러Wilhelm von Ketteler의 가설을 암시적으로 언급하였다. “성 바오로께서 오늘 살아 계셨다면 저널리스트가 되셨을 것입니다.

69 라틴어역 성경에서 인용한 본문은: “ut nosmet ipsos formam daremus vobis….”

70 「준주성범」 1권 3장 3: “모든 것을 통합된 것으로 보고”, 또는 “모든 것을 하나로 향하게 한다.”

71 원문에는 ‘편지lettera’라고 되어 있지만, 아마도 ‘작품lettura’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72 Orazio, Carmina , III, 1: “Odi profanum vulgus et arceo.”

73 잔 바티스타 도미니코 라코르데르Gian-Battista Domenico Lacordaire (1802-1861), 도미니코회 회원으로서 당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가 중 한 사람.

74 “Probet seipsum homo.”[1코린 11,28]

75 「당신 은총의 풍성한 부」 98항에 나오는 내용에서 볼 수 있다.(성바오로수도회 회헌, 1949판, 면학에 관한 조항에서 발췌함)

76 여기서 저자가 사용한 ‘사상ideologia’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문화, 종교적 전통, 사고방식’을 지칭함을 알아야 한다.

77 라틴어 ‘maxime’: ‘최고로, 대단히’라는 뜻.

78 원문에는: “Ut ædificent, et caritas est…; ut ædificentur, et prudentia est.”

79 원문에는: “Sic adhibeatur scientia tanquam machina qædam per quam structura caritatis assurgat.” [Ep. 55,39]

80 문자대로는: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ærens intellectum”. 다시 말해 계시의 내용을 지적으로 깨닫기 위해 지성과 학문에 호소하는 것이다.

81 원문에는:“ Cogitatio stulti peccatum est.”

82 알베리오네 신부의 교육학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으로서, 그가 제시한 제안이었고, 마조리노 비고룽고가 실행했다. “매일 조금씩 진보할 것.”

83 ‘반합Gavetta’: 군인들이 음식을 담아 먹는 알루미늄 용기. “반합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는 특권을 누리지 않고 평범한 조건하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84 동사 고어古語 impugnare(라틴어 pugna: 주먹, 싸움에서 파생됨)는 확실하게 ‘싸우다’라는 의미다.

85 42번 소제목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