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o Giacomo Alberione

Opera Om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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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경험과 방향

청년기: 성소자

여름휴가 기간(1909-1918)에 어떤 수도회에서 대피정을 했다. 자유시간에는 각 수도회의 회원 모집과 양성 방법을 알기 위해 장상들에게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이미 다른 곳에서 그리고 다른 직무를 위해 양성을 받은 나이든 이들보다는 젊은이를 택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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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헌(제21조, 제178조)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 곧 일반적으로 젊은 지원자를 받아들인다. 관행은 참으로 소중한 자산이다1. 서원하기 전에 몇 년 동안 살아보는 삶의 체험은 충분한 의식을 가지고 결정하도록 젊은이를 준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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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적 삶에서 실제적인 외적 극기는 적지만 끊임없는 희생을 요구한다. 사실 사도직은 중노동이다. 관대한 헌신과 희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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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총애: 제자인 수사

그 무렵2 성 바실리오, 성 베네딕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요한 세례자 [드] 라 살3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는데 이들을 따르는 남자 수도회에는 수사 지망 성소자가 아주 많았다. 이렇게 주님은 관대한 많은 사람을 이 세상 곳곳에 있게 하시어 그들을 당신께, 완덕에, 사제직 가까이에 부르신다. 누가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어 그들을 특별한 성성으로 이끌어줄 애덕을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자녀인 이 젊은이들로 백합과 장미, 제비꽃 정원을 꾸밀 수 있을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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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라 그들이 아직 사도직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과거에 수도회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수도 사제들이 사람들을 돌보고 열성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듯이, 오늘날 수사에 게 사제적 열의에 참여하는 기회를 주고 사제직에 비길 만한 직무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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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제와 그 글을 증가시키고 보급하는 기술적인 일을 하는 수사가 있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여러분은 … 임금의 사제단 … 거룩한 민족”5이다! 사제와 수사는 천상 화관을 준비하기 위해 같은 사도직으로 하나되고 수도생활을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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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제자들Discepoli(수사들)6이다! 현대적 수단을 이용한 사제의 설교는 일반 직공들과 섞여 일하는 불편에서 벗어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진다. 수사의 일은 사제의 활동을 들어높이고 기쁨에 넘치게 하며 증대시킨다. 하느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복음은 선포되며 사람들은 빛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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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활동 방법

섭리는 하느님의 일반적인 방법에 따라 작용했다.“힘차게 그리고 감미롭게fortiter et suaviter”7, 곧 당신 목적에 따라 길을 준비하고 한데 모으며 비추어주고 필요한 도움으로 감싸주며 평화롭게 당신의 때를 기다리게 하고, 언제나 구유에서 시작하게 했다. 은총은 본성과 쉽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작용하지만 분명 두 가지 모두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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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손길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 다만 깨어있고 인도하시도록 내어맡기며 여러 가지 의무 수행에 있어 정신, 의지, 마음, 육체적 힘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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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나 자기 활동에 대해 많은 불완전함, 결점, 오류, 부족과 의심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을 하느님 자비의 손에 맡기고 인도하시도록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 그는 결코 섭리의 손길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의 표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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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선한목자예수수녀회를 위해 1908년부터 기도했지만 이 수도회는 30년 후에 시작되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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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기록을 남겨놓는 습관이 없었고 많은 것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싫기도 했는데 모든 면에서 면목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최후 심판 때 당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드러내시리라 생각하면서 그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더욱 기꺼이 맡기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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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그가 하려는 일에 대해 평온하고 침착하게 생각을 깊일 필요가 있었다. 주님은 그를 단기간 병상에 눕게 하셨다. 그는 하루나 이틀 방 안에 칩거한 다음 원기를 되찾고 나와서는 영적 지도신부에게 계획을 제시했다.(경우에 따라 수정하거나 보완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교회 권위기관에도 제출한 다음 일에 착수했다. 때가 항상 무르익지는 않았지만 주님은 당신 종에게 일을 맡기셨다. 실수도 … 허락하시면서 모든 것을 알게 해주셨으며, 후에 당신이 개입하시어 실수와 잘못을 고쳐주셨고, 또 그를 대신하여 일하셨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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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격변’과 로마 정신

본수도회는 1914년10 대격변 가운데 탄생했다. 7월 말경, [그가] 인쇄소 구입 계약을 마치자마자 첫 선전포고가 있었고, 곧 이어 세계대전이 발발했다.11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12는 비오 10세13의 평화를 위한 초대와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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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까지 성직자 사이에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14 한 편은 성좌의 지침에 충실한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편은 마치니Mazzini, 카부르Cavour, 밍게티Minghetti … 15 등의 자유주의에 물든 사람들이었다.
한 편은 옛 생활방식과 사목방법을 여전히 고수했고, 새로운 필요를 존중하는 태도가 없었으며, 다른 한 편은 사회주의의 발전을 염려하고 현대적 체계·조직·행동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프리메이슨의 멍에를 뒤흔들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다. 종종 그렇듯이 어떤 사람들은 활동을 과대평가하여 기도를 경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아메리카니즘은 단죄를 받았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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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사목활동’은 건설적인 길을 따르면서 비오 10세의 모범과 활동에 상응하는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비오 10세는 대중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처럼 매력적인 빛으로 나타났다.
한동안 프랑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면 그 어떤 지식도 호평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두가 독일 학자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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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교회 규율·저널리즘·신학·철학·역사·성경 등 모든 분야에 근대주의18가 급격히 확장되어 심각한 혼란과 무질서가 찾아왔다. 특히 젊은 성직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길을 잃었다. 비오 10세의 깨어 있고 결단력 있는 활동이 선의의 사람들을 비추어 주어 제 자리로 돌아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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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관점은 새로운 발견이 많은 것을 변혁시켰다는 것이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심각한 악이 부의 분배와 소비, 생산의 모든 체계를 위협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이어받은 자유주의 원리가 혼란을 가중시켰다.19 그 반동으로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사회주의가 폭넓게 확산되었다. 레오 13세는 여러 회칙에서 해결책을 제시하였으며,20 특히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를 강조했다.21 이 때문에도 성직자 사이에 새로운 분열이 일어났다.22 많은 사람이 경솔하게 물질적 행복으로 돌진했고, 성좌의 지침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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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정치적 측면에서 이 문제는 회칙 Non Expedit 24와 (후에 비오 10세가 언명한 바와 같이) 국민과 조국의 최고선을 보호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많은 사람의 신념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양심의 문제’25로 대두되었다. 이 점에서도 분열, 토론, 아주 다른 입장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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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을 전하는 새로운 수단이 이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출판은 차츰 강력해지는 조직에 의해 힘을 받았으며, 영화는 처음에는 불신을 받았지만 더욱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학교는 믿지 않은 이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인간의 정신 세계를 두고 논쟁하는 무대로 변했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이미 발전한 상태로, 곧 출현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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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성좌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새로운 임무에 임하도록 자신을 준비하라고 초대하는 문헌을 연이어 반포했다. 무감각하고 무분별한 사람들이 많았던 반면, 교황의 지침26에 따라 일하는 의식있는 가톨릭 신자들과 성직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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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 앞에서 묵상한 이러한 사건과 경험은 언제나, 오로지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로마 정신’이라는 확신이 무르익게 했다. 모든 것은 배움터가 되었고, 방향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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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정신을 벗어나서는 구원이 없다. 교황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모든 세기를 위해 밝히신 큰 등대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다른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 초창기 회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사도직에 관해서는 교황께 순명’이라는 제4 서원을 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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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신

섭리는 이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다(dispose).28 그것은 밀라노의 가톨릭 대학 창설을 위해 추진위원회가 기부금을 모으는 일(1905-1906)이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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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강연회, 신학과정 중에 그리고 그 후 사회학 연구, 장상의 배려로 참여한 사회문제에 관한 여러 집회, 사회활동과 조직을 위한 협력30, 가톨릭 액션 회원들 특히 마피 추기경,31 토니올로 교수, 파가누찌 백작, 레차라Rezzara 회계사 등과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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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힘들었던 시기는 Opera dei Congressi32가 해산된 직후였다. 비오 10세는 독일의 예를 따라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Unione Popolare33로 이를 대체했다. 그렇게 해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었지만 Unione Popolare 운동은 일반적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불신에 빠진 선의의 많은 사람 그리고 완고한 반대자들과 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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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관하여 「가제타 알바Gazzetta d’Alba」에 많은 글을 실었다.34 1911년부터 1914년에 걸쳐 Unione Popolare의 정착과 강연 그리고 난관을 타개하기 위하여 교구 대부분의 본당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해야 했다. 거의 혼자였다. 두 사람은 주교의 지시를 받았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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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민감하게 포착할 줄 알고 또 하느님의 인도를 받고 있던 비오 10세는 「적합하지 않음Non Expedit36을 완화시켰다. [그는] 특히 가톨릭 신자들이 지지하는 후보자의 당선을 위해 일했고, 여러 해 동안 일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 성과는 선거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이 선거에서 국민당Partito Popolare37이 대단한 지지를 얻었기에 의회에서 중심이 되어 파시즘38이 대두될 때까지 프리메이슨39과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요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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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과 기도는 정부·학교·법률·가정·계층 간의 관계 그리고 국제관계를 회복시키려는 그리스도교 사회활동으로 방향지어졌다. 길 진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세계를 통치하시기를! 바오로가족은 이에 대한 큰 직무와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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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성

보편성의 성인 ‘성 바오로’. 성 바오로에 대한 존경과 신심은 특히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대한 연구와 묵상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그분의 인품, 성덕, 마음, 예수님과의 친밀함, 교의와 윤리적 가르침에 관한 그분의 업적, 교회 조직에 남긴 흔적, 모든 민족에 대한 그분의 열성 등이 묵상 주제가 되었다. 그는 바오로가 참된 사도로 여겨졌다. 따라서 그분에게서 모든 사도와 모든 사도직을 길어낼 수 있었다.
성 바오로에게 가족40을 봉헌했다. P.M.41의 치유도 성 바오로의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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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가족은 공부·사도직·신심·활동·출판 등 모든 사도직을 통하여 전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출판은 모든 범주의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모든 문제와 사건은 복음의 빛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고 열망(바오로가족이 지녀야 할 열망-역주)은 미사에서 예수 성심이 바라시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고자 하는’[요한 17,3 참조] 유일한 사도직을 통해, 모든 사도직과 모든 선행을 비추고 지탱하며 모든 사람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공적·사적인 모든 필요를 위한 적응과 이해의 정신, 모든 경신례, 법, 정의와 사랑의 공존, 곧 모든 문제에서 교회의 현존을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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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동안 매일 두 번씩 로르박허Rohrbacher42의 세계 교회사를, 또 다시 5년 동안 헤르젠뤼더Hergenröther43의 교회사를 읽었으며,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8년에 걸쳐 칸투Cantù44의 세계사를 읽었고, 세계 문학사·예술사·전쟁사·항해사·음악사·특히 법학사·종교사·철학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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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도서관의 사서 역할도 큰 도움이 되었다. 도서관에 고서는 비교적 잘 구비되어 있었으나 신간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돈을 융통하여 많은 신간을 구입하는 데 성공하여 가장 좋은 잡지, 백과 사전과 가톨릭 학문에 관한 모든 사전을 구비할 수 있었다. 1960년 부터 오늘까지 계속 애독하고 있는 「가톨릭 문화Civiltà Cattolica」 그리고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 「사도좌 관보Atti della Santa Sede」, 레오 13세의 여러 가지 회칙은 끊임없는양식이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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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위원 키에사에게서 흠숭하고, 감사하며, 통회하고 청원하기 위해 천상 스승 곁에서 모든 것을 묵상과 기도의 주제로 변화시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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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첫째는 성직자, 어린이, 젊은이, 대중 그리고 교사처럼 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이들을 위한 봉사에 이어 선교, 사회문제, 지적 문제 등에 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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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정신을 지닌 출판은 성 바오로가 표현한 것과 같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2티모 3,12)이라는 본질적 특성을 언급한 다음, 필리피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 4,8-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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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정신

[그에게] 굴리엘모 두란도Guglielmo Durando, 가반티Gavanti, 바린Barin, 데스테파니Destefani, 게랑거Guéranger, 카론티Caronti, 슈스터 Schuster, 베네로니Veneroni, 에이센호퍼Eisenhofer, 르페브르Lefèbvre47 작품의 독서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정기간행물 Ephemerides Liturgicæ48Rivista liturgica(Finalpia)49도 도움이 되었다. 성가50, 성무일도서, 전례 교육에 관한 비오 10세의 작품에서 특별한 감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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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간 그는 전례를 가르쳐야 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전례 교수, 제의방 책임자, 주교 의식 담당자였고, 의식서를 준비하는 임무를 맡아 언제나 교회의 기도를 교회와 더불어 한층 더 깊이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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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임무는 아름다운 전례를 행하는 데 적합한 성당이 있어야겠다는 열망을 갖게 했다. 어느 날 주교가 심금을 털어놓았다. “나는 한때 즐겨 교의에 관해 설교했고, 그 다음에는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설교를 선호했습니다. 요즈음엔 교의와 윤리의 가르침과 함께 이를 통합한 전례를 설명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느낍니다. ” 이 말은 그에게 하나의 지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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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바오로가족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성음악을 매우 중요시하게 되었다. 일찍이 [인쇄] 학교에서 준비중이던 미사경본51 그리고 주보 La vita in Cristo e nella Chiesa52, 전례를 목적으로 창립된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53, 이 모든 것은 현실적인 그의 뛰어난 감각에서 전례를 고려하면서 착수했다. 성체 안에 계신 천상 스승은 바오로가족의 150개 성당54에 거처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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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주요 성당

천상 스승Divin Maestro55, 사도의 모후Regina Apostolorum56 그리고 성 바오로57께 봉헌된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세 가지 주된 신심58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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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종교예술을 가르친 적이 있다. 따라서 이 주제와 관련된 독서, 작품 관람, ‘생명·진리·선을 위한 예술’59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잡지의 논고를 [탐독했다.] 
일찍이 그는 ‘그리스도교 예술의 벗’60이라는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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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성당은 여러 해 전에 「사목신학 개요Appunti di Teologia pastorale」에 발표한 원칙에 따라 건립했다.61  
각 성당 건축은 모든 부분, 곧 건축·조각·그림·스탠드글라스·집기가 주제를 일관되게 전개하도록 설계도를 작성하여 건축가에게 주었다. 특별히 바오로인의 성당 건립 목적에 부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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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언제나 은총의 외적 활동과 내적 활동이 있었다. 신학생 시절 6년간을 주교좌 성당과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노 성당의 교리교사로 있었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교교육수도회(당시 그들은 알바에 있었다) 형제들에게서 교육학을 배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 후(1910-1914) 교리교수법, 본당 내의 교리교육 조직, 교리교사의 영적·지적 그리고 교육학적 양성에 대해 공부해야 했다. 남성 오라토리오(oratorio, 수도원에 속한 학교-역주)에서 3년 동안 교리교사를 했고, 공립 고등학교에서 종교수업을 했으며, 교리경시대회에 참여하는 일 등을 [했다.] 이 모든 걸음은 우리의 비참함과 부당한 응답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고 사랑에 찬 섭리가 마련한 것이었다. “세상 끝에서 끝까지 퍼져가며 권능과 자애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지혜 8,1 참조]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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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교육에 관한 사도좌 관보, 좋은 교리교재, 교리교사 양성을 위한 활동, 교리교수용 슬라이드, 괘도, 교리교수용 비품,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을 통해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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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주교에게서 교구 교리교육 ‘프로그램’과 ‘학년별 교재’를 고안하기 위해 세 명의 사제로 구성된 교구 교리위원회에 초대받아 그는 교리교육에 관한 연구와 특수 사도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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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쳐라.”는 말씀을 언제나 교리 교수 활동을 우선시키고 근본적인 일로 여겼다.63 현재 이탈리아와 해외에서 바오로가족의 교리교육 활동은 점점 활발하게 확대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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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정신

바오로가족에게 주어진 이러한 부富는 성체이신 예수님의 활동과 빛을 통하여 그리고 그에게 맡겨진 직무를 순명으로 완수함으로써 다른 부富처럼 다가 왔고 성숙되어 갔다. 그는 특히 세 본당에서 사목했으며,64 여러 본당에서 설교, 고해성사, 강연, 가톨릭 활동을 했다.65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 직무에 접하면서 사목 경험을 쌓았다.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66는 말씀을 그는 한층 더 생생하게 느꼈다. 사목자들을 위한 여성 협력자들, 곧 ‘선한목자예수수녀회 수녀들’(1908)67을 양성시키기로 생각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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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 12명의 사제들과 함께 매주 회의를 하며 사람들을 돌보는 쇄신되고도 좋은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이에 관하여 문의했고, 15명쯤 되는 교구 지구장에게서 서면으로 조언을 받았으며, (그는 이것을 신학생들과 젊은 사제들에게 전하곤 했다.) 이러한 것이 「사목신학 개요Appunti di Teologia pastorale68라는 책(1913)의 결실이다. 리셸미Richelmy 추기경은 서문69에서 이 책에는 현시대에 가장 적합한 수단이 제시되어 있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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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인 사도직의 사목적 특징으로 그는 두 분의 위대한 스승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다. 곧 스워보다Swoboda의 「대도시에서 사람들을 돌봄Cura d’anime nelle grandi città70 그리고 크리그Krieg의 「사목신학Teologia pastorale71 네 권을 2년에 걸쳐 읽고 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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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직무를 사도의 모후 마리아의 보호에 맡겼고, 신학생들과 젊은 사제들에게도 그와 같이 하라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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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생한 목소리로 교리교육과 설교를 하며, 기록된 하느님 말씀을 곁에 두라고 강조했다.(웅변학교: scuola di eloquenza, 1912-1915) 모든 범주의 사람, 특히 대중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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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빛, 도시: 문화에 그리스도교 생기를 불어넣음

세상에서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너희는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다 … .” 이는 천상 스승의 생각이다.[마태 5,13-14 참조].
구원하는 교의를 첫 자리에 둘 것. 복음이 사람의 모든 사상과 지식에 깊이 스며들게 할 것. 종교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지 말고 모든 것에 대해 그리스도인답게 말할 것. 신학·철학·문학·의학·정치 경제학·자연과학 등을 아우르는 가톨릭 종합대학과 같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교 방식으로 제시하고, 모든 것을 가톨릭 교회 관점으로 방향지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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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사회학·교육학·지질학·통계학·예술·위생·지리학·역사·인류의 온갖 진보 등을 신앙에 입각한 이성에 따라 제시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바오로가족이 주어야 할 것이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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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부터 1915년에 이르기까지 사회학·신학·수덕신학 분야에 많은 탈선73이 있었고, 이는 모든 진리와 교회의 토대를 뒤흔들어 놓을 만큼, 아니 교회를 파괴하려 했다. 특히 포가차로Fogazzaro의 「성인Il Santo74이 좋은 예로서, 많은 이가 그 작품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을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처럼 간주했지만 후에는 금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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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모든 것이 배움터였다. 바오로가족의 첫째 관심사는 삶의 성화요, 그 다음은 교의의 성스러움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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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는 4개월 동안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학회를 준비했다. 토론의 주제를 정하고, 이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신학생들을 지도했다. 전체적인 주제는 관념의 혼돈 한 가운데서 살펴보는 토마스의 근본 사상이었다.
그의 기념 강연은 25주년을 맞은 철학에 관한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Æterni Patris75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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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 그는 영적 유익과 인도를 받았다. 진리, 또는 적어도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떠한 성화도 없는데, 지성의 성화가 첫 걸음이다. 논리학 없이는 어떠한 방향감각도 지닐 수 없고, 형이상학 없이는 폭넓은 시야도 지닐 수 없으며, 교회 안이 아니면 그 어떤 길도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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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정신

바오로가족은 사도의 모후 눈길 아래 성 바오로의 정신으로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살 것을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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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가족에는 많은 특이한 점이나 별난 신심, 과도한 형식이 없다. 다만 스승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한다. 성 바오로의 정신은 그분의 삶, 그분의 서간, 그분의 사도직에서 드러난다. 그분은 언제나 교회의 교의, 윤리적 가르침, 경신례, 교회 조직76 안에 살아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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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함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하느님을 닮는 데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살고 일하고 자 하는 생각, 곧 생명의 올리브 나무에 접목된 야생 올리브 나무77처럼 성체이신 그리스도께 접목되어야 한다는 생각, 성 바오로의 정신에 따라 복음의 각 구절을 묵상하고 양분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명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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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회헌78의 기본 조항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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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조: “신심은 특별히 그리고 끊임없이 길 진리 생명이신 천상 스승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연구로써 키워가야 한다. 그리고 모든 회원은 하느님을 지성, 의지, 마음과 행위로 진실하게 사랑하고 영과 진리 안에서 깊은 신앙으로 하느님을 흠숭하며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지혜와 은총과 덕행에 있어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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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조: “갖가지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연구는 언제나 길 진리 생명이신 우리 천상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그리스도가 지성, 의지, 마음에 온전히 형성되도록 언제나 준비하고 전념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겸손하고 근면한 제자가 되어야 비로소 사람들의 유능한 스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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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조: “출판물을 통하여 전해야 할 가르침은 성경, 성전 및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순수한 원천에서 길어낸 신앙과 관습, 경신례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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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전 존재, 곧 지성, 의지, 마음, 육체적 힘은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것, 곧 본성, 은총, 성소는 사도직을 위한 것이다. 성덕, 면학, 사도직, 청빈이라는 네 개의 바퀴에 의지하여 달라는 마차.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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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바오로수도회 회헌」,Roma 1950.
제21조: “제178조에 규정되어 있듯이 미래의 성직자가 될 회원을 수도회에서 양성시킨다는 의향이므로 규칙상 이미 서품을 받은 지원자를 입회시키지 않는다. 물론 제18조 제8항과 제19조 제1항의 규정을 지킬 것이다.”
제178조: “수도회는 면학의 집에서 어려서부터 미래의 회원으로 준비시킨다. 이곳에서 지원자들은 그들의 성소를 위해 온갖 보살핌을 받으며 양성된다. 따라서 수도회에는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공부를 위해 적합한 집이 있어야 한다.”

2 이 기간을 정확하게 단언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저자가 1909년-1918년 사이에 어떤 수도회에서 대피정을 한 시기를 말하는 듯하다.(AD 36 참조) 그러나 사제생활 초기 몇 년(1907-1910), 또는 저자가 “교리교수법을 연구해야 했다.”(AD 78 참조)고 한 때인 1910년-1914년, 남성 오라토리오(수도원에 속한 학교-역주)에서 일한 시기도 배제할 수 없다.

3 아주 유명한 성인 창립자들 곧 S. Basilio(330-379년 경), S. Benedetto(480-547), S. Francesco d’Assisi(1181/2-1226), S. Ignazio di Loyola(1491-1556) 그리고 그리스도교 학교 형제회(Fratelli delle Scuole Cristiane)의 창립자인 S. Giovanni Battista de La Salle(1651-1719)이다.

4 ‘백합’, 장미’, ‘제비꽃’ … : 공동체 기도 중에 매일 기억하는 복음적 덕의 상징적인 꽃들이다. ‘청원기도’: “오 마리아, 이 집에 순결의 백합이 … , 사랑의 장미가 … , 겸손의 제비꽃이`… 피게 해주소서.”(「성바오로수도회 기도서 Preghiere della Pia Società San Paolo」,1922, p. 6 참조)

5 “Vos autem gens sancta, regale sacerdotium”. 성경 본문의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Vos autem genus electum, regale sacerdotium, gens sancta… .”(1베드 2,9)

6 “성바오로수도회는 성직자와 수도자로 구성되어 있다. 회원은 성소에 따른 구분은 있으나 같은 수도회의 일치 안에서 각자의 소명, 적성 및 각자의 조건에 따라 같은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 수도자는 제자(Discepoli)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린다” 「회헌」, 제6조 참조.

7 “힘차게 그리고 훌륭히”.(지혜 8,1 참조)

8 목자수녀회,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한목자예수수녀회(Suore di Gesù Buon Pastore)의 시작은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사실 1938년 10월 7일에 비로소 그들의 첫 공동체를 로마의 Genzano(Albano Laziale 교구)에 세웠다.

*   이 단락의 위치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이 자리에 삽입시키는 것이 타자원고 원본에 상응한다.

9 “또 그를 대신하여 일하셨다.”고 자필로 첨가했다.

10 알베리오네 신부는 7월 14일에 미래의 성바오로수도회에 대한 기초를 놓기 시작했다. 그는 주세페 프란치스코 레 주교에게 창립 기획안을 제출했다. 7월 20일 주교는 비공식적으로 구두 승인을 해주었다. 7월 24일 그는 알바의 케라스카 광장에 있는 Vittoria Degiacomi의 집 일부를 빌렸다. 7월 26일에 첫 인쇄기를 구입했다. 연이어 첫 젊은이들을 받아들였고, 간단한 예절과 함께 성 베르나르도의 축일이요, 교황 비오 10세 서거일인 1914년 8월 20일을 창립일로 봉헌했다.

11 사라예보 사건(합스부르크의 황태자 부부 암살)에 이어 오스트리아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곧바로 독일과 러시아가 분쟁에 개입했고, 두 반대 진영에 군대를 배치했는데, 잇달아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개입하게 되었다.

12 Franz Joseph, 오스트리아의 황제(1830-1916).

13 Giuseppe Melchiorre Sarto, 1835년 6월 2일 Riese(Treviso)에서 출생, 1903년 8월 4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10세라는 이름을 택함. 1914년 8월 20일에 서거, 1954년 5월 29일 시성.

14 AD 50-55 아래를 보라.

15 이탈리아 정치가들로서, 이탈리아 국가통일운동의 주역들. Giuseppe Mazzini(1805-1872), Cavour의 Camillo Benso 백작(1810-1861) 그리고 Marco Minghetti(1818-1886).

16 레오 13세가 1899년 1월 22일, Baltimore의 대주교에게 보낸 교서 Testem benevolentiœ 참조.

17 저자가 자필로 쓴 쪽지에서 다음과 같은 초안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48-62항의 초고인 듯하다. “위대한 기획가인 레오 13세에 이어 실천적인 교황이 계승했다 … .”(AD 50.60-62 참조)
“제작을 혁신시킨 발견들.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은 겨우 유아기 또는 출산 과정에 있었고, 한편 조직·인쇄·학교는 헌법에 도입되거나 삶의 관습안에 형성된 참된 힘을 지니고 있었다.”(AD 54 참조)
“풍요로움은 환경에서 기인한다 … .”(AD 48 참조)
“성좌의 지침에 충실한 성직자와 자유주의에 물든 적지 않은 사제들이 있었다 … . 성직자는 여전히 예전의 사목방법을 고수하며, 조직·연합·현대적인 활동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면, 사목은 아주 현저하게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겪고 있었으니, 그와 같은 경우에 발생하는 일로, 일부는 기도하지 않고 활동에 지나치게 열정적이어서 그 결과 아메리카니즘은 단죄를 받았고, 일부는 올바른 길에 충실했다.”(AD 49 참조)
“근대주의는 정신, 출판, 삶 그리고 [`…]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주 심각한 혼란을 일으켰으며, 특히 젊은 성직자와 신학생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렸다.”(AD 51 참조)

18 근대주의는 20세기 초의 광범위한 철학적-신학적 운동으로, 성좌의 1907년 7월 3일자 교령 Lamentabili와 비오 10세의 1907년 9월 8일자 회칙 Pascendi dominici gregis에 의해 단죄받았다. 알베리오네 신부가 1907년 6월 29일 사제수품된 것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단죄가 그에게 그리고 그의 사도직 계획에 끼친 영향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19 다음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유주의 원칙은 경제 체계를 혼란시키는 악을 가중시켰다. 경제 자유주의(또는 ‘자본주의’)가 그 반동으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촉발시켰던 것이다.

20 1891년의 사회문제에 관한 유명한 회칙 「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

21 레오 13세, 1901년 1월 18일자 회칙 Graves de Communi re 참조.

22 예를 들어 이러한 정치적 책임을 맡은 이로서 두 명의 사제를 들 수 있다. Romolo Murri(1870-1944)와 Luigi Sturzo(1871-1959)이다. 전자는 근대주의자로 단죄받았지만, 후자는 단죄받지는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도교 민주주의(Democrazia Cristiana)의 대부로 여긴다.

23 사회주의 성향의 극단주의파의 구성원은 Ernesto Buonaiuti(1881-1946)와 소위 ‘로마 근본주의 그룹’이라고 불리는 사제들이었다.

24 이 주제에 관해서는, Domenico Massè, Il caso di coscienza del Risorgimento italiano dalle origini alla Conciliazione, Società Apostolato Stampa, Alba 1946 참조.

25 회칙 Non expedit(= non è conveniente: 적합하지 않음)은 비오 9세가 반포한 금령으로 1874년 10월 13일 이후 이탈리아의 가톨릭 신자들은 선거권자로든 피선거권자로든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다. 이 금령은 이탈리아 정부가 로마를 점령함으로써(1870년 9월 20일) 교황령을 거슬러 행사한 권력남용의 결과다.

26 참조: 「출판에 관한 교황 문헌Documenti pontifici sulla stampa」(1878-1963), Tip. Poliglotta Vaticana, s.d.;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관한 교황 문헌Documenti pontifici sulla radio e sulla televisione」(1929-1962), Tip.Poliglotta Vaticana, s.d.; E. Baragli s.j.,「가톨릭 영화: 영화에 관한 성좌 문헌 Cinema cattolico: documenti della Santa Sede sul cinema」, Città Nuova, Roma 1965.

27 이 마지막 문장은 저자가 자필로 타자원고에 첨부했다.

28 자필원고에는 dispose로 되어 있다. 반면에 타자원고에는 동사가 현재형(dispone)으로 되어 있지만 오타로 생각된다.

29 Milano의 성심 가톨릭 대학은 공식적으로 1921년 12월 7일에 설립되었고, 이탈리아 정부의 법적 승인을 얻은 것은 1924년 10월 2일이다.

30 이러한 자료 전반에 대한 것은 다음을 참조하라. G. Barbero, cit, pp. 184-194.

31 Pietro Maffi 추기경(1858-1931)은 Pisa의 대주교로서 알베리오네 신부의 위대한 예찬자요, 충언자였다. Toniolo와 Paganuzzi에 대해서는 AD 14와 20을 참조하라. Niccolò Rezzara(1848-1915)는 유명한 가톨릭 조직가였다.

32 Opera dei Congressi e dei Comitati Cattolici in Italia는 사회문제에 노력을 기울이는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의  주요 조직이었다. 1874년에 설립되었으며, 1904년 7월 30일 비오 10세는 이 단체를 해산시켰다.

33 ‘국민 연합Unione Popolare’은 Opera dei Congressi의 해산 이후에 교의, 보급, 사회 조직의 유일한 센터로 모든 사회 계층의 가톨릭 신자들을 모으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형성된 연합체였다. 1905년 6월 11일자 비오 10세의 교서 Il fermo proposito 참조. Unione Popolare를 독일에서는 Volksverein 이라고 불렀다.(AD 17의 각주 13 참조)

34 A. Damino,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의 문헌 목록Bibliografia di Don Giacomo Alberione」, Edizioni dell’Archivio Storico Generale della Famiglia Paolina, Roma 19943, p. 187 참조. “사실 [1911년부터 시작하여] Unione Popolare에 관한 글이 무척 많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글쓴 이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기고하였다’라는 표현은 모호한 채 남아있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 글의 대부분은 Unione의 교구 분야 의장인 신학자 프란치스코 키에사 신부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 후 첫 재난 시기 동안 논쟁과 토론의 장이 된, Gazzetta는 종교적 가치를 수호하는 입장을 분명히 고수하였고 ‘국민당Partito Popolare’편을 들었다. 생기가 넘치는 서평 또는 짧은 기사와 다양한 짧은 논고들은 비록 서명은 하지 않았어도 편집자, 곧 알베리오네 신부의 것으로 보인다.”

35 두 사람은 참사위원 키에사와 알베리오네 신부였다. 키에사 신부는 “농부들에게 설명한 국민 연합(Unione Popolare spiegata ai contadini)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고, 이 글은 1908년에 알바 인쇄소(이미 Paganelli 인쇄소가 됨)에서 팸플릿으로 출판하였으며, 한 부에 10 centesimi로 보급했다. 이 소책자는 1912년에 재판되었다. Unione Popolare를 위해 알베리오네 신부가 교구에서 이룩한 활동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을 참조하라. 정기간행물 「시사 주간La Settimana Sociale」(1908년 1월 19일자로 피렌체에서 창간), 1911년 11월 25일자 p. 5에, 두 명의 신학자 키에사 신부와 알베리오네 신부가 Unione Popolare에 관한 순회 강연을 한 알바 지역 마을 이름들이 길게 나열되어 실려 있다. 이 강연의 본문은 없지만 앞서 인용한 참사위원 프란치스코 키에사의 팸플릿을 토대로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36  비오 10세는 위에서 인용한 1905년의 회칙 Il fermo proposito를 통해 정치 참여 금령인 Non expedit를 폐지하고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참여 허락에 관한 권한을 이탈리아 주교들에게 위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톨릭 신자 국회의원(cattolici deputati)이 처음 탄생했지만, 아직 가톨릭 신자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아니었다. 그 당시엔 아직 가톨릭 신자 정당을 원하지 않았기때문에 가톨릭 신자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아니었다.

37  이탈리아 국민당(Partito Popolare Italiano)은 앞서 인용한 Luigi Sturzo 신부(1871-1959)가 이끄는 그룹에 의해 1919년 1월 18일자로 작성한 “국가에 호소Appello al Paese”라는 선언을 통해 로마에서 창당되었다.

38 1919년 3월 Milano에서 Benito Mussolini(1883-1945)가 시작한 정치운동으로서 1922년에 파시스트 민족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이 됨.

39 신학생 그리고 사제로서 야고보 알베리오네의 프리메이슨(Massoneria)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1884년 4월 20일자 레오 13세의 회칙 Humanum genus와 1884년 5월 10일자 성좌의 훈령 Ad gravissima avertenda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R. F. Esposito, 「1800년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프리메이슨과 이탈리아La Massoneria e l’Italia dal 1800 ai nostri giorni」, Edizioni Paoline, Roma 1969 참조.

40 바오로가족의 두 수도회, 곧 성바오로수도회와 성바오로딸수도회의 특별한 주보는 성 바오로다. 그들의 영성도 성 바오로의 서간에 근간을 두고 있고 사도행전에서 도출된 사도적 삶에 토대를 둔다. 바오로가족의 다른 수도회나 재속회도 사도 바오로의 정신을 이어받았고 그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있다.

41 P.M. = Primo Maestro “수도자성(Sacra Congregazione dei Religiosi)의 총무(1918년부터) 아빠스 세라피니 마우로(Abate, Serafini Mauro o.s.b., 1859-1925)는 창립될 성바오로수도회의 총원장 직함으로 ‘마에스트로’라는 칭호를 제안했다. 사실 1927년 3월 12일자 주세페 프란치스코 레 몬시뇰의 교서에서 창립자를 가리키는 성바오로수도회의 ‘프리모 마에스트로’라는 칭호를 발견할 수 있다. ‘프리모 마에스트로’라는 이 칭호는 차차 친근하게 되어 ‘Signor Teologo’라는 칭호를 대신하게 되었다.”(G. Barbero, Nel XIX Centenario del martirio di S. Paolo: Il Sacerdote Giacomo Alberione e gli Istituti Paolini, in Palestra del Clero, 46 [1967] 246-261 참조) 연이어(1929년 7월 28일) 창립자 스스로 바오로가족 회원들에게 자신을 ‘프리모 마에스트로’라 부르라고 했고, 여기서 창립자가 암시하는 ‘치유’ 1923년의 일이다.

42 Rene-François Rohrbacher(1789-1856)는 1842-49년 Nancy에서 방대한 「가톨릭 교회사Histoire de l’Eglise catholique」를 29권으로 발간했는데, 이 저서는 후에 Chantrel과 Chamard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876년에 출간되었고 후에 P. Balan과 C. Bonacina에 의해 레오 13세까지포함한 내용으로 계승되었다.

43 Joseph Hergenröther(1824-1890)는 1879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 자신의 주요 저서 「세계 교회사 개요Handbuch der allgemeinen Kirchenges-chichte」를 Würzburg에서 1876-1880년에 출간했다. 이탈리아에서는 E. Rosa가 번역하여 Firenze에서 1907-1911년에 출간되었다.

44 Cesare Cantù(1804-1895)는 역사가, 문학가, 우국지사요 정치가로서 그의 저서 「세계사Storia universale」를 35권으로 1883-1998년에 출판했다.

45 Civiltà Cattolica는 이탈리아 예수회에서 발행하는 격주간지로, 1850년 4월 6일 창간되었다. L’Osservatore Romano는 1861년 7월 1일에 창간된 정치·종교 일간지로서 성좌의 공식 신문이다. Atti della S. Sede는 아마도 Acta Sanctœ Sedis를 가리키는 것으로, 1909년에 Acta Apostolicœ Sedis, Commentarium officiale가 이를 계승하게 되었고, 현재 성좌의 공식 관보로 출간되고 있다.

46 “De cetero, Fratres, quaecumque sunt vera, quaecumque pudica, quaecumque iusta, quaeecumque sancta, quaecumque amabilia, quaecumque bonae famoe, si qua virtus, si qua laus disciplinae, haec cogitate. Quoe didicistis et accepistis, et audistis et vidistis in me, haec cogitate: et Deus pacis erit vobiscum.”9절에서 알베리오네 신부는 아마도 기억에 의존하여 인용하면서, 표현을 약간 변형시킨 것 같다. 정확한 본문은 다음과 같다.“Quæ et didicistis et accepistis et audistis et vidistis in me, haec agite`…`.”

47  Guglielmo Durando(1230년경-1296년)는 Mende의 주교, 교회법 및 전례 학자. Bartolomeo Gavanti(1569-1638), Luigi Rodolfo Barin(1883-1933), Gaspare Destefani(1884-1952), Prospère Guéranger(1805-1875), Emanuele Caronti(1882-1966), Alfredo Ildefonso Schuster(1880-1954, 현재 복자), Pietro Veneroni(1862-1935), Ludwig Eisenhofer(1871-1941), Gaspare Lefèbvre(1880-1966)도 전례학자들이다.

48 Ephemerides Liturgicæ는 1887년 로마에서 Calcedonio Mancini에 의해 창간된 전례잡지였다.

49  Rivista Liturgica는 Praglia(comune di Teolo, Padova)의 베네딕토수도회와 Finalpia(comune di Finale Ligure, savona)의 베네딕토수도회 회원들이 감수하여 발행한 것으로, 1914년 Emanuele Caronti가 시작했다. 이 잡지는 전례를 확고하게 보급하기 위한 계획을 제안했으며, 후에 이탈리아에서 전례 운동의 공식 기관지가 되었다.

50 비오 10세의 1903년 11월 22일자 자의교서 Tra le sollecitudini 참조.

51 첫 미사경본은 라틴어 본문과 이탈리아어 번역문이 함께 수록된 것으로, 1935년 알바(cuneo)에서 출판했다. 바오로인 4명 곧 A.G. Colasanto, G.B. Chiesa, A.B. Nosetti 그리고 A.B. Segato가 편집하였다.

52 본당 주보는 1932년에 발간되기 시작했다.

53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Pie Discepole del Divin Maestro)는 알베리오네 신부가 창립한 두 번째 여자 수도회다. 전례를 살고, 살게 하는 것을 주된 사도직으로 삼고 있다. 1952년부터 사목자를 대상으로 한 월간 전례잡지 La vita in Cristo e nella Chiesa를 발간하고 있다.

54 이 통계는 당연히 1953년 말까지 집계한 것이다.

55  알베리오네 신부가 Giuseppe Rosa(1875-1929) 신부와 함께 1915년부터 구상한 이 성당은 20년이 지난 후에야 성바오로딸수도회 모원이 있는 알바 시 Borgo Piave에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1936년 10월 25일 Mons. Luigi Maria Grassi에 의해 봉헌되었고, 나중에 본당으로 바뀌었다. 스승 예수께 봉헌한 다른 대성당은 Roma Via Portuense에 건립했는데, 이 역시 알베리오네 신부의 창안으로 이루어졌다.

56 이 성당은 로마에 건립했는데, 현재 via Alessandro Severo에 있는 성바오로수도회의 건물과 via Antonino Pio에 있는 성바오로딸수도회 건물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1939-1945년 세계대전 중 성모 마리아께 어머니의 보호를 바라며 서약하고 지은 이 성당은 1945년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1954년 11월 30일에 봉헌했다. 이 성당은 바오로가족 회원의 영적 일치의 중심인 기념 성당(Santuario)이요 소바실리카(Basilica minore)다. Storia e arte del Santuario Regina Apostolorum, Umberto Muzzin ssp 신부와 동료 협력자들, Roma 1969 그리고 Il Santuario basilica Regina Apostolorum G.B. Perego ssp, Roma 1985 참조.

57 성 바오로 성당은 알바(Cuneo)에 있는 성바오로수도회의 모원을 구성하는 여러 건물 중앙에 세워졌다. 1928년 10월에 전례의식을 시작했다. Il tempio di San Paolo in Alba, Storia e arte, a cura di G. Cinaglia ed E. Fornasari ssp, Alba 1988 참조.

58 「완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Ut perfectus sit homo Dei」,II, 243-244 참조

59 후기 낭만주의 지식인들이 주창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노선에 관련된 논쟁 문제에 대한 암시적 언급.

60 1913년 Milano에서 ‘Amici dell’Arte Cristiana’ 협회의 활동을 통해 Arte Cristiana라는 표제의 잡지가 창간되었다. 이 잡지의 영감자요, 창간자는 후에 추기경이 된 Mons. Celso Costantini(1876-1958)다. 이 잡지는 종교 예술 전반에 관한 사랑, 특히 전례예술에 대한 사랑의 촉진을 목표로 삼았다.

61 「사목신학개요」참조. 초판은 타자 복사판, 알바 1912. pp. 469-481에 ‘Costruzione di chiese’(교회건축)에 할애한 장이 있다. (AD 83 참조)

62 “attingit a fine usque ad finem fortiter suaviterque disponens omnia.”(성무일도 12월 17일 저녁기도 성모의 노래 후렴 참조)

63 참조: G. Barbero, Don Giacomo Alberione catechista e compilatore di catechismi, in R.F. Esposito, La Teologia della pubblicistica secondo l’insegnamento di Don Giacomo Alberione, Edizioni Paoline, Roma 1970, pp. 203-207; in Sussidi per la Catechesi, 1972년 1-2월호; 마태 28,19; 마르 16,15.

64 여기서 말하는 본당은 아마 알베리오네 신부가 1908년에 보좌로 있던 Narzole의 S.Bernardo 성당, Benevello의 S.Pietro in Vincoli 성당, Alba의 Ss. Cosma와 Damiano 성당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교좌 성당(AD 104 이하 참조)이나 Guarene의 본당일 수도 있다.(M.L. Ricci, Madre M. Scolastica Rivata, Roma 1996, p. 28 참조)

65  G. Barbero, Storia della pastorale: pastorale pratica e pastorale teorica del sacerdote Giacomo Alberione(1884-1971), in Palestra del Clero 52 (1973) 311-317 참조.

66 참조: 마태 28,19; 마르 16,15.

67 이 수도회는 구체적으로 1936년에야 시작되었고, 1938년에 완성되었다.(AD 46과 해당 각주 참조)

68 타자 복사판으로 된 이 ‘개요’의 초판은 1912년 8월 1일로 명기되어 있다. 재판(첫판본)은 1915년 Torino에서 Pietro Marietti에 의해 발간되었다.(AD 77 참조)

69 1915년의 재판 p. VII에서, Torino의 대주교 Agostino Richelmy 추기경(1850-1923)의 칭찬과 격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추기경의 서문은 1913년 2월 2일자로 되어 있다.

70 Enrico Swoboda(1861-1923)는 신학자이다. 그의 저서 이탈리아어판 La Cura d’anime nelle grandi città는 1912년 Roma에서 출간되었다.

71 Cornelio Krieg (1838-1911).

72  이 방대한 프로그램을 실현하려는 첫 시도는 1930년대에 알베리오네 신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성바오로수도회 신학생들과 젊은 사제들로 구성된 한 그룹에 문학·과학·역사 등 학교 프로그램의 모든 과목에 관한 ginnasio 교재를 준비하는 임무를 맡겼다. 방법을 제시했고 실행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가장 큰 노력은 1950년대에 스승 예수에 관한 백과사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AD 185-200 그리고 CISP 1195 이하 참조.

73  AD 49 이하 참조.

74 Antonio Fogazzaro(1842-1911)의 소설 Il Santo는 1905년에 출판되었고, 1906년 4월 5일의 훈령으로 단죄받았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L. Caronti, Fogazzaro, Subiaco e‘Il Santo’,Edizioni Paoline, Alba 1989 참조.

75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에 관한 레오 13세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 Æ terni Patris」,1879년 8월 4일, in Acta I (1878-1879) 255 이하 참조.

76 AD 64 참조.

77 로마 11,24 참조.

78 「성바오로수도회 회헌」,ed. 1950.

79 J. M. Galaviz H., El carro paulino, Mexico 1992; 이탈리아어판 Il‘carro’ paolino, Ed. Archivio Storico Generale della F.P., Roma 199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