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o Giacomo Alberione

Opera Om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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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성장의 문제와 전망

첫 수도원 개설은 아직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는 많은 업무를 맡고 있었다. 180여 명의 신학생과 젊은이의 영적 지도, 교구 주보의 편집과 경영관리, 매주 13시간의 수업1, 교구의 다양한 임무와 책임, 임박한 1914년의 재난 예고와 어두워지는 시대적 상황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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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를 살릴 길이 없습니다. 폐결핵(TB)2이 그를 위협하고 있습니다.”라고 사람들이 주교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도에 방치할 위험을 안고 하나의 사명을 위해 사람들을 모집하는 일이 너무 무분별한 행위인 것 같아 두렵습니다.”3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주님께서 생각하시고 당신보다 더 잘 배려해 주십니다. 신앙으로 전진하십시오.”4 그때부터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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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환상이 아닐까? 이는 몇 년 동안 [지속된] 영적 번민이었다.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한 빛을 받았다. “너는 그르칠 수 있으나 나는 그르치지 않는다. 성소는 너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나에게서 온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오로가족과 함께 있다는 외적 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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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향하여 로마로

먼저 로마에 양성소를 열었고5, 10년 후에는 그도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6 알바에서는 이탈리아를, 로마에서는 특별히 외국을 목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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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동기는 명백하다. 바오로가족이 로마에 자리 잡은 까닭은 성좌에 봉사하기 위함임을 더 잘 ‘느끼기’위한 것이요, 사도직 활동과 정신, 가르침을 원천인 교황의 가르침에서 직접 길어내기 위해서다. 로마는 세계의 스승일뿐 아니라, 인류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으며, ‘파견받은 이들’은 로마에서 세계 각처로 떠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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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은 국민 연합 대회Congresso dell’Unione Popolare7에 교구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가서 성 바오로의 무덤 곁에 머물러 기도하면서부터 그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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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

가톨릭 정신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참조] 하신 하느님의 파견에서 나온 것으로 견진성사를 통해 부어졌고 사제수품으로 성장한다. 성 바오로는 위대한 여행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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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때, 매년 주님 공현 대축일에 어린이들 사이에 모금과 기도를 하던 어린이 전교회8를 알게 되었고, 이에 마음이 끌렸다.
열두 살 때부터 열여섯 살까지 거의 매일 전교회 연보와 어린이 전교회 연보9를 읽었다. 그 후에는 살레시오회, 백의의 사제회10, 위의 수도회11와 밀라노 해외 선교회12의 선교용 출판물을 애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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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지움ginnasio 2학년 때13 전교회14와 어린이 전교회에 회비를 내고 가입했다. 위대한 선교사들의 전기를 많이 읽었으며, 그들의 생애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15
사제가 된 다음 선교기금을 모으고, 선교사 성소를 위해 협력하며, 특별한 기회가 있을 때 선교에 대하여 설교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복음화라는 위대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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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와 아프리카가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이탈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천상 선물을 소유하지 못하는 가엾은 이들의 필요를 깊고 넓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주님과 친밀해질 때 더욱 생생해진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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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자라는 선물과 부

도미니코 제3회원이던 알바의 주교17는 그를 교구의 도미니코 제3회원의 지도신부로 임명했다. 그 기회를 통해 도미니코수도회 신부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고, 그 수도회의 책과 정기간행물을 읽었다. 1년에 12회 그들에게 강연을 하며, 제3회원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개인생활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반면에 성 도미니코의 특징인 다른 사람을 위해 방향지어진 사도직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으므로 그 점을 보충해서 시도해 보았더니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실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좋은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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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수도회가 창립된 다음, 1916년과 그 후에 제3회, 곧 바오로인의 정신으로 기도, 활동, 헌금으로써 그들과 일치하여 사도직을 실천하고,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삶을 더욱 개선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인 출판사도직협력자회Unione Cooperatori apostolato edizioni18와 같은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관대하게 이에 응했다. 성좌는 이 회를 여러 대사로 풍요롭게 해주었다.
성바오로수도회는 매년 감사의 표시로, 모든 협력자를 위해 2400대의 미사를 거행한다. 오늘날 (전 세계에) 등록된 회원은 백만 명을 넘어선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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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다음과 같은 지향으로 기도했다. 기도, 활동, 헌금, 성소자를 보내주는 등 바오로가족에게 도움을 주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고, 죽은 후 곧바로 또는 가능한 한 빨리 하느님을 뵙고 영원히 그분을 소유하며 사랑하고 즐기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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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그는 농촌 출신으로서 아주 근면하고 투철한 그리스도인 가족의 일원임을 주님께 감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가정은 지인들과 이웃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경외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모두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병아리를 돌보는 일에서 밭일이라는 중노동에 이르기까지20 허드렛일이나 힘든 일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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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부터 많은 희생을 치르며 공부했다.21 여름방학도, 겨울철 휴식도 없었다.
그 후에도 계속 (열한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휴식은 대부분 일을 바꾸는 것이었다. 신학교에서 목초지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미 건초를 긁어모으기 위한 갈퀴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윗옷과 구두를 벗고는 식사시간까지 형제들과 함께 일했다는 작은 일화가 있다. 이와 같이 방학 기간을 신심, 공부, 노동에 전념했는데 그 기간에는 학기 중에 하던 것보다 공부와 독서를 더 많이 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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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는23 청결 면에서 많이 미흡했으므로 신학생들과 젊은이들 사이에‘소년 예수의 서클Circolo del Fanciullo Gesù’을 결성했다. 가입한 회원들은 성당·복도·공부방·침실·계단 등을 한 곳씩 맡아 휴식시간과 수업이 없을 때 청소를 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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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신학생 시절에 그리고 특히 그 후 나자렛 예수님의 근면한 삶의 위대한 신비를 묵상했다. 그분은 30세에 이르기까지 집안 일을 돕는 덕과 중노동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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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활동, 사도직 활동, 힘겨운 노동. 하느님을 적극적으로 섬기기 위해 모든 힘, 육체적 힘까지도 내어놓는 것, 이것이 바로 완덕의 길이 아닌가? 하느님은 가장 순수한 행위를 하지 않으셨던가? 이것이 바로 참된 수도적 가난, 곧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 아닌가? 이것이 노동자-예수께 노동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닌가? 수도자들도 양식을 얻기 위해 벌어야 하는 의무를 완수해야 하지 않겠는나? 이것은 성 바오로가 자신에게 부과한 규칙이 아니던가? 이는 하나의 사회적 의무이고, 오직 ‘이를 수행함으로써’사도는 비로소 설교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지 않는가? 바오로가족에게 있어 펜을 들고 일하는 것도, 기계를 사용하여 일하는 것도 사도직의 본질이 아닌가? 노동은 건강에 좋지 않은가? 태만과 많은 유혹에서 지켜주지 않는가? 기부와 모금은 새로운 사업(예를 들면 성전 건립, 사도직 수단, 또는 가난한 이들이나 성소자를 위한 경비에 충당하기 위해)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적합한 것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길을 택하셨다는 것이야말로 최우선적으로 복원해야 할 요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 아닐까? 노동은 공로의 수단이 아닌가? 바오로가족이 노동을 한다면 이는 본질적인 면에서 그리스도 안에 삶을 정착시키려는 것 아닌가?25
이러한 생각과 원칙은 브뤼셀을 방문한 이후 그리고 특히 가톨릭 노동청년회(J.O.C.)26를 방문한 후에 더욱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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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까닭에 바오로가족 수도회 안에 많은 노동이 도입되었다. 일을 바꾸는 것, 이것이 곧 휴식이다. 모두가 일할 것! 윤리적·지적·사도적·영적 일에 종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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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헌’에 바오로가족은 늙어버리거나 사회에서 무익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다. 이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실천하면 충분할 것이다. 언제나 고유한 사도직을 지향하고 그 위에 뿌리 내리면 새로운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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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
 
1914년부터 1944년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언제나 한 가지 내적 고민이 있었다. 이것은 네 개의 바오로가족 수도회 사이에 정신의 일치와 함께 관리와 경영의 독립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27 1916년에 한 유능한 사제 로시Rossi28가 그에게 질문으로 제기한 성 요한 보스코와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토렌고가 각기 창립한 수도회의 통솔과 조직에 관련하여 몹시 망설였다.29 결국 두 성인에게서 좋은 점을 취하는 것으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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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부터 유효한 현행 교회법30을 따르면서 천상 스승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일치를 추구할 것. 고통이 따르는 시험과 동요의 기간이 제법 오래 지속되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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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가족에게 경제적 기초를 마련해 주기 위해 경영관리와 생계수단에 관해서도 같은 고민을 해야 했다. 성 코토렌고, 성 요한 보스코 그리고 성 요셉 카파소32의 정신은 이 점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여기서도 그는 중도, 곧 노동을 교육 수단, 사도직, 생계 유지를 위한 자연적인 수단으로 택했다. 그리고 기부금은 새로운 사업과 수도원 건립, 특히 건축 중에 있는 성당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시대의 동향을 따르면서 ‘작은 신용금고`Piccolo Credito’33도 만들었는데, 이는 더 큰 지출을 위해 숨을 돌리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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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대한 신뢰, 근면한 노동, 짜임새 있고 균형 잡힌 경영관리는 하느님 섭리에 이르는 길을 보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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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가족 수도회는 구별되는 사도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도직은 각 수도회의 삶과 발전 그리고 사업의 성장을 위해 충분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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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그가 주님이 바오로가족에게 주고자 하신 위대한 부富, 곧 복음서의 보급에 대하여 한층 더 밝은 빛을 받은 시기(1906-1907학년도)가 있었다. 이 복음서의 보급은 오늘날 20여 개 나라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확장되었고, 특히 복음서의 날이라는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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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0세는 신학생들에게 성경 공부를 의무화했다.35

137

1907년 8월, 그는 세 번에 걸쳐 성경 주일을 편성하여 성경을 교리교육 방식으로 적용하여 설명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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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는 소수의 신자만이 영성체를 한 것처럼, 몇몇 신자만이 가끔 복음서를 읽었다. 대중에게는 성경은 물론 복음서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특별한 신념도 있었다. 복음서를 읽는 것은 거의 비가톨릭인들이 독점했고, 그들은 복음서를 저마다 자기 생각대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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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 가지가 필요했다.
가) 교리서와 함께 모든 가정에 복음서가 들어가도록 할 것. 복음서는 교회의 정신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신앙, 윤리, 경신례에 관한 완전한 교리해설을 곁들여야 한다. 사람들이 주일 저녁기도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매 주일 미사 중에 복음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사제가 되자마자 알바 주교좌 성당에서 그렇게 했다. 그 후 이 방법이 여러 본당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하여 교리교육 방식의 주석이 달린 복음서가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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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복음서가 가톨릭의 모든 출판물에 영감을 주고 모델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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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복음서를 중히 여길 것. 복음서를 흠숭하는 마음으로 간직할 것. 설교할 때는 복음서를 아주 많이 언급해야 하고, 복음서를 따라야 한다. 무엇보다 지성, 마음, 행위를 통해 복음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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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성 바오로 성전37에서 30회에 걸쳐 흠숭기도가 있었는데 이때 성경을 통틀어, 특히 복음서38에 관해 설교하고 글을 썼다.(나중에 출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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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성녀 체칠리아 축일에 [그는] “복된 체칠리아는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었다.”39라는 말씀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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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간 몸에 지니고 다닌 복음서는40 참으로 효력 있는 기도였다. 1903년에는 알바의 신학생들이 (당시 우수한 성경 출판본 가운데 Mondovì 출판사의 성경) 보급 활동을 시작했고, 복음서(바티칸 출판사) 보급이 아주 폭넓게 이루어졌다.41 신학생들 사이에 큰 열의가 생겼고, 첫 복음서의 날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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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 개발 
 
자연적·초자연적·사도적 인성 개발.
바오로가족은 잘 정의한 목표와 적절하고 풍부한 수단을 지니고 있다. 특히 성체조배 시간에는 하느님과의 통교에 들어가고, 여기서 배운 것을 깊이고 흡수하고 삶에 적용한다. 이러한 자유와 창안 정신이 잘 조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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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이를 활용한 사람은 정신, 경영관리 분야, 공부, 사도직, 양성 전반에 걸쳐 많이 진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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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지나치게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어떤 이는 이를 남용하여 그에 따른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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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방법은 깊은 신념, 곧 가르침과 깊은 확신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 여러 성사의 활용, 영적 지도, 사말에 대한 생각 등은 사람을 올바른 길에 머물게 하고, 탈선했다면 되돌아오게 한다. 이는 매우 어렵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매우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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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목적은 현세와 영원을 위해 자기 자유를 선용하도록 인간을 양성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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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주.  13시간의 수업’ 대신 ‘varie scuole’(여러 가지 수업)을 자필로 첨가함.

2 Tubercolosi(폐결핵), 당시에는 불치병으로 여겼다.

3 자필원고에서 이 질문은 ‘마지막으로 한 이의제기로서 영적 지도자에게’(이 문장은 나중에 삭제됨) 한 것으로 분명히 밝혔다.

4 자필원고에는 답변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주님께서 당신보다 더 그들을 생각하실 것이니, 이 일[`…`]을 마무리짓도록 오래 사실 것입니다.”

5 이 양성소는 G. Timoteo Giaccardo 신부와 Amalia Peyrolo 수녀(1899-1980)가 1926년 1월, Via Ostiense 75/E.에서 시작했다. 그후 다른 적합한 장소로 이전했다가 다시 Via Grottaperfetta로 이전했는데, 현재는 Alessandro Severo에 있다.

6 알베리오네 신부는 1936년 여름에 Roma로 거처를 옮겼다.

7 이 상황은 아직 규명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이 여행은 1911년에 했을 것이다. 그러나 U.P.가 로마에서 세 개의 교구 연합(Giunte Diocesane) 국내 대회를 개최한 1918년과 1920년 사이에 했으리라는 가정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8 1843년에 Mons. Forbin-Janson(1785-1844)이 설립하여 1846년 7월 18일에 성좌의 승인을 받았다.

9  Annali dell’associazione della Propagazione della Fede는 1828년부터 프랑스 리옹에서 발간되었다. Annali dell’Opera della Santa Infanzia의 이탈리아어판은 1853년 Genova에서 시작되었다. 1924년부터는 Santa Infanzia라는 제목으로 계속 발간되었다.

10 그들의 수도복 색깔 때문에 Padri Bianchi라고 불리던 아프리카 선교사회는, Algeri의 대주교 Charles Martial Lavigerie(1825-1892)가 설립했다.
그는 1882년에 추기경이 되었고, 1884년에는 아프리카의 총대주교와 Carthage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ginnasio 4학년 때 야고보 알베리오네와 Bra 신학교 동료로서 나중에 사제가 된 Pietro Valetti(1970년 2월 18일 선종)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몰랐기 때문에 라틴어로 Carthage Padri Bianchi의 신학교 학장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1899년 Montecapriolo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알베리오네에게 답장이 왔다. Carthage에서 온 답장은 두 명의 선교 지원자들에게 로마의 Padri Bianchi를 찾아가보라는 내용이었지만, 지금까지 아는 바로는 두 사람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11 Giuseppe Allamano(1851-1926)가 Torino에서 창립한 Istituto della Consolata per le Missioni Estere. 1902년 6월 오늘날의 케냐로, 당시 영국령이던 동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2 Milano에서 1850년 7월 31일에 Angelo Ramazzotti(1800-1861)가 창립한 Istituto Pontificio dei Ss. Apostoli Pietro e Paolo e dei Ss. Ambrogio e Carlo per le Missioni Estere.

 

13 ginnasio 2학년은 Bra의 신학교 1학년임. 1896-1897.

14 Opera della Propagazione della Fede는 Pauline-Marie Jaricot(1799-1862)가 프랑스 리옹에서 1820년에 구상함. 1922년 5월 3일에 Roma로 본부를 옮겼다.

15 ‘선교사들’에 관한 독서에서 영향을 받은 알베리오네 신부의 이러한 관심은 1982년 4월 19일 Roatta 신부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어느 날, 특히 여름휴가 기간 동안, 젊은 시절부터 놀랄 만큼 소설과 갖가지 서적을 탐독했다는 말씀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 그분께 여쭈었다. 그분은 내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래요, 나는 아주 많이 읽었어요. 하지만 소설류나 이것저것 마구 읽은 것이 아니라 그 몇 년 동안 출판된 선교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긴 연속 기획물을 통독했어요.’”(「알베리오네 신부님을 알기 위하여Conoscere Don Alberione」,I [1982] 41)

16 알베리오네 신부의 선교 열의는 나중에 선교지에 많은 바오로 수도원을 설립한 데서 분명하게 드러났고, 영적 차원에 관해서는 수많은 저서와 기도에 서 드러나는데 그 가운데 사도의 모후께 바치는 주간기도가 있다.(Le preghiere mariane di Don Alberione, Storia e commento, Ed. Archivio Storico Generale della F.P., Roma 1988)

17 당시 주교는 Mons. Giuseppe Francesco Re였다.

18 이 협력자회는 ‘Unione Cooperatori Buona Stampa’(선한출판협력자회)라 불렸고, 1917년 6월 30일 Alba의 주교가 승인했다. 1937년 3월 22일 교황대리 Francesco Marchetti Selvaggiani(1871-1951) 추기경의 결정으로 협력자회의 본부를 Roma로 옮겼다. 이 교령에서 명칭이 ‘Pia Unione Cooperatori Apostolato Stampa’(출판사도직협력자회)로 수정되어 나타났다. 그 당시에는 아직 ‘Apostolato Edizioni’(출판 사도직)라는 용어를 사용하지않았다. 1988년부터 성좌가 인준한 새로운 규정이 생겼고, 협력자회는 ‘Associazione dei Cooperatori Paolini’(바오로 협력자회)라는 명칭을 채택했다.

19 1953년의 통계를 언급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20 알베리오네 신부 가족은 1886년부터 1910년까지, Montecapriolo라고 불리는 지역인 Cherasco 평야에 있는 Via Fraschette 25번지 농장(Cascina Agricola)에서 일했다.

21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1890년부터 1895년까지 Cherasco의 공립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후 ginnasio 1학년 과정도 Cherasco에서 다녔다. 그후 Bra의 대주교 직속 소신학교에 입학했고, 거기서 1896년부터 1900년 4월까지 ginnasio의 나머지 과정을 마쳤다.

22 1897-1907년에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앞서 말한 농장(Cascina Agricola)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그는 사제수품(1907) 이후 진정한 의미의 휴가는 더 이상 하지 않은 것 같다.

23 이 신학교는 Alba의 신학교다.

24 이 점에 대해서는 A. Vigolungo, ‘Nova et vetera’, Can. Francesco Chiesa, Edizioni Paoline, Alba 1961, p. 173 참조.

25 알베리오네 신부는 한 소책자에서 이러한 모든 주제를 다루었다. “노동과 섭리(Il lavoro nelle famiglie paoline)”, 1954년 1월(CISP 1075-1096; Il lavoro e la Prorridenza, a cura di A. Damino, Roma 1987-발췌 참조).

26 J.O.C의 정식 명칭은 Jeunesse Ouvrière Chrétienne로서, 1925년에 설립된 청년 노동자들의 운동이다.

27 AD 33-35 참조.

28 아마도 Pocapaglia(Cuneo)의 Macellai의 주임사제인 Don Giuseppe Rossi(1878-1941)일 것이다.

29 두 분 모두 남성-여성이라는 두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수도 ‘가족’을 창립한 성인들이다. 가족수도회 관계에서 Don Bosco는 분리를 강조했고, 반면에 Cottolengo는 남자 수도회 총원장에게 여자 수도회가 종속되게 함으로써 통솔의 일치까지 강조했다.

30 1917년 성령강림대축일에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반포됐고, 이듬 해성령강림대축일부터 효력이 발생된 「교회법전Codex Juris Canonici」은 어떤 여자 수도회도 남자 수도회 장상에게 속하는 것을 배제했다.

31 Mi protendo in avanti, Edizioni Paoline, Roma 1954, pp. 493-566에 나오는 Federico Muzzarelli의 연구 “Ad pedes Petri”; Giancarlo Rocca, La formazione della Pia Società San Paolo(1914-1927), Roma 1982도 보라.

32 San Giuseppe Cafasso(1811-1860)는 거의 20년을 Torino의 Collegio Ecclesiastico의 책임자로 있었다.

33 이 사업에는 티모테오 자카르도 신부가 기여했고, 그에 대해서 알베리오네 신부는 의미심장한 증언을 남겼다. “…그 당시 수도회가 특별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Piccolo Credito라는 협동 조합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받았다. 그[자카르도]는 그 신용금고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고, 수도회는 곧바로 발전을 위한 폭넓은 재원을 가지게 되었다. 모두는 그가 지출할 때에는 아주 정확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를 신뢰할 수 있었으며, 또 그를 신임했다. 그래서 Piccolo Credito는 필요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가 자신의 소임을 완수했을 때, 그는 채권자들의 필요와 이익에 충분히 응했고, 수많은 훌륭한 협력자들의 도움에 대한 섭리에 감사미사를 드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Maestro Giaccardo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며, 애정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Prediche del Primo Maestro, Roma, 1953년 1월 24일, p. 64)

34 이 논점에 관해서는 1954년 5월 23일자로 명기되었고, Carissimi in San Paolo(CISP) 137 이하 그리고 Ut perfectus sit homo Dei(UPS) I, 371-382; III, 182-191; IV, 212-221에 실린 알베리오네 신부의 자필원본 참조.

35 1906년 3월 27일자 비오 10세의 교서 Quoniam in re biblica 참조.

36 저자가 타자원고에 자필로 첨가한 설명.

37 Alba에 있는 ‘성 바오로 성당’.

38 다루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을 읽으시오.”(요한 5,39 참조) 「마에스트로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가 행한 성경에 관한 10시간 흠숭기도Dieci ore di adorazione sulla S. Bibbia, tenute dal M. G. Alberione」, SSP, Alba-Roma, Pia Società Figlie di San Paolo[1933]; 이 작품에 관해서는, A. Damino, Bibliografia di Don Giacomo Alberione, cit., pp. 36-38:  “10시간의 흠숭기도”는 각기 세 부분으로, 이어서 다시 세 장으로 나누어지고 있음에 유의하라.

39  전례 본문은 다음과 같다. “Virgo gloriosa semper Evangelium Christi gerebat in pectore suo…`.”(Breviarium Romanum, 11월 22일, 성녀 체칠리아 기념 저녁기도, 성모의 노래 후렴) 아마도 알베리오네 신부는 이 구절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육체적 행위의 의미로도 이해한 것 같다.

40 저자는 이 문장을 1953년에 썼지만, 복음서를 몸에 지니고 다닌 습관은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1 여기서 인용한 복음서의 두 가지 출판본은 다음과 같다. La Sacra Bibbia secondo la Volgata, tradotta in lingua italiana ed annotata da Mons. A. Martini, Arc. di Firenze, Mondovì 1897; Il Santo Vangelo di N.S. Gesù Cristo e gli Atti degli Apostoli, Pia Società di San Girolamo per la diffusione dei Santi Vangeli, Tipografia Poliglotta Vaticana, Roma; 이 출판본은 1926년에 50쇄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