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새로운 형태를 취하긴 하지만 출판 사도직은 그 본질이 하느님의 말씀을 인쇄하는 것인 한 하느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며, 교회가 받아들여 보편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에 말씀의 사도직처럼 오래된 것 이다.
인쇄 사도직의 참된 창시자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분이 사도직을 명하셨고, 그분 몸소 영감을 주셨으며, 언제나 이를 보호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
자주 성경 저자들에게 명하셨다. “너는 커다란 서판을 갖다가, 거기에 보통 글씨로 써라.”1 “이 일을 기념하여 책에 기록해 두어라.”2
그분 몸소 성경 저자들을 통해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셨다. 사실 신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에게서 빛을 받아 성령이 원하시는 것 모두를 그대로 쓰도록 그분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입니다.”3
하느님은 당신의 책이 세세대대로 완전히 보존되도록 그리고 그 내용이 왜곡되지 않도록 회당에 그리고 나중에는 교회에 아낌없는 도움으로 인쇄 사도직을 보호하셨다.
교회는 언제나 인쇄 사도직을 알고 있었으며, 형태면에서, 시대와 상황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인쇄 사도직을 했다는 것을 역사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증명한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
서간이 교회의 첫 교리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성 베드로의 모범을 따라 교황들은 사목적 교도권을 행사하면서 말과 글을 똑같이 그리고 풍성하게 사용했다. 초세기 교회의 성 클레멘스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편지를 썼고, 성 마르첼로는 감옥에서 편지로 로마의 여러 본당을 지도했으며, 성 소테로, 성빅토르, 성 스테파노는 가톨릭 교의를 알리고 보호하기 위해 글을 썼다.
그 후 성 대 레오, 성 대 그레고리오와 다른 교황은 그와 같은 수단으로 교황령, 회신, 칙서, 소칙서 그리고 특히 교황 교서로써 교회를 풍요롭게 했다.
신앙, 관습, 규율을 정하기 위해 모이는 교회 사목자들의 회의인 세계 공의회는 그들의 정의定義와 행적을 문서로 우리에게 남겼고, 이를 더 많이 보급하고 대중화하고 적용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교회는 비록 세속 인쇄물은 차치하고라도 출판 사도직에 관해서는말씀의 사도직과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통제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점은 출판에 관한 다양한 교회법 조항이 증명해 준다.(1395, 1396, 1397, 1398, 1399, 1400, 1401, 1402, 1403, 1404, 1405)4
교회법 1385항은 일반적으로 신앙과 관습과 경신례에 관한 내용, 특히 성경, 신학, 교회 학문들의 출판을 규제한다.
교회법 1386항은 거의 서적, 정기간행물, 팸플릿 출판에 관련된 것으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위한 특별 규정이다.
특별 조항은 성인의 시성과 관련된 저술, 전례서적, 교황청의 교령전집, 성경 번역본, 주교회의의 도서 출판인가 등이다. 교회는 저술가 성인에게 학자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고유 축일로 그들을 공경하며, 그들 중 많은 이의 글을 성무일도서에 포함시켰다.
출판 사도직은 말씀의 사도직처럼 언제나 사용했다.
사도들에 의해 복음서, 사도행전, 서간, 묵시록 등 성인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은 다양하고 아주 심오한 저술로써 유다이즘, 이교, 이단과 맞서 그리스도교 사상을 입증했고,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교 사상을 변호했으며, 우리에게 성경을 정확하게 번역해주었다.
미녜Migne는 그들의 작품을 수집하여 387권이라는 방대한 선집을 소개했으니 그야말로 거대한 작품이다. 이 선집은 인쇄 사도직의 기념비요, 호교론이다.5
일반적으로 성인들은 저술을 이용했는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영혼의 이 성인들은 필요할 때 또는 그들에게 요청이 있을 때 말을 통한 것 못지 않게 펜을 이용했다.
인쇄는 모든 사도직이 사용한 수단이다. 말과 펜을 통해 확산되지 않은 학문이 없듯이 모든 사도직과 신심도 그러하다. 가톨릭 액션, 선교단체, 교황청 단체, 자선단체, 기도의 사도직과 온갖 좋은 기획은 출판 사도직의 지지, 협력, 삶의 자극을 받는다. 언제 어디서나 그 사상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한다면 출판물에 의지하게 된다.
성좌는 그에 속한 신문과 인쇄소가 있다. 모든 주교도 인쇄소를 가지고 있으며, 고유한 정기간행물을 발간하고 있다. 본당신부는 주보를 발간하거나 공동 인쇄물을 보급함으로써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 수도자들은 이 수단을 이용한다. 거의 모든 성직 수도회들과, 수도회, 수도가족은 그들 고유의 간행물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출판을 이용했다. 지구상 어디에든 |
가톨릭 단체가 있고, 거기에는 반드시 인쇄소, 정기간행물, 출판을 위한 교구 협의회, 가톨릭 도서관, 서점이 있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
게다가 반대자들은 출판을 기술적으로 더욱 능숙하게 사용한다. 그들의 전략을 배우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대부분의 출판은 유다인, 개신교도, 무신론자, 프리메이슨, 소련 사회주의자, 이슬람교도와 믿지 않는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6
그러므로 저작물의 이용은 참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출판 사도직은 편집, 기술, 보급 세 부분으로 나뉜다.
편집은 대량으로 인쇄하여 출판해야 할 저작물의 준비단계다.
편집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편집자 사도의 고유한 자질(성소, 적합한 준비와 초자연적 정신) 외에도 세 가지로 요약할 수있는 다른 자질, 곧 교의에 담긴 진리, 윤리적인 선, 형태 안의 아름다움이 필요하다.7
하느님은 진리를 위해 인간의 지성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진리를 자신의 본질적인 목적으로 지향하며 오직 진리를 소유하는 데서 자신의 만족을 찾는다. 그러므로 만일 편집이 진리를 가로막고 방해한다면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며, 무엇보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하는 과제인 사도직에 역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직 활동은 진리에 관한 이중의 직무를 지닌다.
1. 가톨릭 진리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하고 빈정대며 공개적으로 비종교적이고 불경한 출판물이 퍼뜨리는 오류와 베일에 싸인 예술, 세련되게 꾸며진 궤변, 적대적인 판단으로 가톨릭의 진리에 대항하는 출판물의 오류를 폭로할 것.
2. 세상 안에서 신앙의 스승이요 유일하게 거룩한 진리를 수호할 과제를 지닌 교회로부터 받은 구원의 진리를 제시하고 보급하며 퍼뜨릴 것.
선은 우리 의지의 목적이요, 의지는 본성적으로 선을 지향한다. 그리고 우리의 타고난 욕망은 창조되고 제한되며 일시적인 선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오로지 최고 |
선이신 하느님을 절대적이고 확실하게 소유하는 데서만 완전하게 충족될 수 있다.
의지의 이러한 본래적인 경향을 고양시키고 도와주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길이신 천상 스승의 사명을 계속하기 위한 사도직 활동은 다음과 같은 것을 지향해야 한다.
1. 특히 공개적으로 비윤리성을 표방하거나 너무 노골적이고 부적합하며, 추잡하고 저속한 비윤리적인 출판물을 통해 유포된 악을 우선적으로 없앤다.
2. 우리의 완전한 귀감이요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과 표양에 따라 무한하고 창조되지 않은 선과 하느님의 투영이며 하느님께 인도해 주는 창조된 선을 열망하는 원의, 의향, 결심을 고양시킨다.
아름다움은 진리의 광채요 선의 요청이며, 미적 감각과 우리 마음이 추구하는 바다. 우리 마음은 최고요 본질적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누릴 준비를 하며, 아름다움을 따르고 아름다움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그러므로 진리와 선은 매혹적이고 우아한 형태로 |
그리고 고상하고 고양된 열망을 커뮤니케이션하며 강한 인상을 주는 형태로 드러내야 한다.
사도 저술가가 지켜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아름다움은 진리와 선과는 달리 독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이론과 활동에 맞서 싸울 것. 수려한 언어 구사와 우아한 문체로 표현하는 불경하고 비윤리적인 출판물은 사람을 매료시키고 얽어매기 때문에 아주 해롭다.
2. 진리와 선을 잘 받아들이도록 예술적인 형태로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작품의 아름다움을 커뮤니케이션하는 새로운 힘을 통해 우리 생명이신 예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
모든 저술가가 언제나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하느님 말씀을 언급하고 해설할 때에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사실 하느님 말씀이 동정녀들 중에 가장 거룩하신 분의 가장 순결한 태내에 강생하신 것처럼, 그리고 성체를 귀중한 성합에 모시는 것처럼 하느님 말씀에 가장 고귀한 형태의 옷을 입히는 것은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만일 사도의 작품이 교회의 인도하에 교의에 담긴 진리, 윤리적인 선, 형태의 아름다움을 제시함 으로써 인간 본성에 도움을 준다면 잘 받아들여지기 위한 |
근본 조건을 갖춘 셈이다.
이러한 자질에 하느님의 은총이 더해지면 틀림없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의 단언은 언제나 참되기 때문이다 .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8
사도에게 필요한 지적 · 윤리적 · 영적 준비를 갖춘다면 하느님의 은총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글을 쓴다면, 더 나아가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불타는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 작품을 기도와 희생으로 봉헌한다면 하느님의 은총은 차고 넘칠 것이다.
‘참된 교의’로 구성되어 있는 주요한 진리는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으로서 사도가 반드시 설명하고 수호하며 보급해야 할 건전한 철학과 신학의 본질적인 주요 내용을 내포한다.
그 내용은 세상과 인간의 기원, 세계를 지배하고 특별히 인간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섭리, 세상과 인간의 종말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 신적 진리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모든 것은 하느님이 다스리시고,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끝난다는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작품들을 통해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 곧 하늘 · 공간 · 바다 · 식물 |
동물, 모든 창조물은 창조주의 존재를 확증하고 그분의 속성을 폭넓게 계시한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9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 창조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자연과 인간 역사의 과정 또한 하느님의 작품이다. 사실 감각할 수 있는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이 당신의 존재를 알게 하신다면, 그분은 역사 안에서도 당신의 섭리를 계시하시고, 모든 사물이 힘차고 우아하게 고유한 목적을 향해 가게 하신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10
하느님은 자연을 통해 스스로 창조주임을 드러내시고, 역사 안에서 통치자임을 밝히시며 종말에 사랑으로 드러내실 것이다. 오늘 예시하시는 것은 언젠가 관상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자연 질서와 초자연 질서 두 가지 모두를 당신의 지고한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당신 섭리로 바르게 확립하셨다.
하느님의 섭리는 자연 질서 안에서 점진적으로 지리적 형성과 동물, 식물, 광물 분포를 통해 지질학 시대가 잇따라 완만히 일어난다는 것이 눈에 띄게 드런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일한 조상에게서 |
많은 민족이 이어져 내려오는 민족학적 발전과 인간의 지적 · 윤리적 · 물질적 진보를 통해 지구상의 여러 제국의 흥망성쇠의 과정을 보며 감탄하게 된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연섭리와 더불어 세상의 첫 순간부터 “새 하늘과 새 땅”11이 될 때까지 세상을 동반하시고, 지상낙원에서 마지막 심판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인류와 함께하신다.
하느님의 섭리는 초자연적 질서 안에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최대한 분출되고, 그분의 손에서 초자연적 선물이 풍부하게 만들어지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친구인 인간이 지복직관을 누리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어 하느님의 창조 계획을 깨뜨렸다. 그러자 하느님의 섭리는 처음보다 더 경이롭고 새로운 계획 곧 구원계획을 세우셨다. 그분은 구약의 전 과정을 통해 이를 준비하셨고, 때가 이르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실현하셨으며, 인류 안에서 이 구원계획을 교회를 통해 완성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놓아두셨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의 영광을 바라셨고, 인간이 당신과 함께 역사를 이룩하는 데 참여하며, 은총의 질서를 통해 협력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하느님은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을 함께 살게 하셨지만, 각자에게 정당한 갚음을 주실 것이다. 의인은 끝없는 상급을 받을 것이고, 영원히 하느님의 자비를 누릴 것이며, |
악인은 모든 피조물 앞에서 벌을 받을 것이며, 하느님 정의의 엄격함에 영원히 굴복할 것이다.
우주의 심판은 역사의 마침표가 될 것인데, 하느님의 섭리도 그러하고, 인류의 협력도 역사의 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관점도 두 가지 요소, 곧 자연적 요소와 초자연적 요소로 나뉜다. 자연적 요소는 국가가 교회에, 육신이 영혼에, 일시적인 것이 영원한 것에 도움을 주듯 초자연적 요소에 도움을 준다. 이 두 요소는 후에 하느님의 영광에 도움을 주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주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흐름에서도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될 뿐 아니라 그분이 통치하고 결정하고 보존하며 유지하신다. 따라서 역사는 자연과 더불어 삶의 스승, 곧 진리와 정의, 경신례의 스승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교의, 하느님이 우리 원조에게 주신 최초의 계시, 모세에게 내리신 계시, 성경, 성전, 가톨릭교회의 모든 가르침은 역사의 흐름을 통해 하느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윤리의 최대 표현인 이웃 |
사랑을 설파하면서 이교 문화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그리스도교의 신적 초월성에 의해 윤리법에 새로운 기반이 주어졌다. 인간 행위는 이성뿐 아니라 신앙을 통해 영감을 받음으로써 초자연적 가치에 이르고, 그리스도인은 노력뿐 아니라 은총의 힘을 통해서도 선을 행할 수 있다.
선과 악의 숨은 심판관인 양심을 의식하면서 그리스도교 윤리는 육체와 정신, 시간과 영원, 세상과 하느님을 대비시켰는데, 이 대비는 고대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자연법의 규정은 그 자체로 (그 가치가) 재확인되었다. 성화된 가정, (안정된 사회), 인간과 국가의 관계는 “하느님에게서 오지않는 권위란 없다.”[1]라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개인관계에 있어 첫째가는 근본 규정은 하느님과 이웃을 포용하고, 모든 윤리를 포함하는 사랑의 두 가지 계명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은 인간과 사회와 국제관계 안에서 개개인의 평화라는 일시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복직관, 하느님의 나라, 인류의 구원이라는 초자연적 목적을 지향한다.
인간, 활동, 제도, 온 인류는 영원을 향해, 그리스도를 향해, 하느님을 향해있다. 하느님은 또한 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끄셨다. 그분의 탁월한 가르침, 귀감, 수난, 부활과 영광, 교회의 설립과 성령강림도 똑같이 인도하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 바오로의 열네 편의 서간에서부터 여러 공의회와 최근의 교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가르침을 인도하셨다.
교회가 여러 이단과 맞서야 할 때마다 하느님은 가톨릭 교의를 온전하게 수호하시기 위해 늘 교회를 지켜주셨으며, 문명의 혜택을 받은 이들과 이교인들에게 힙겹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지탱이 되어주셨다. 절대군주, 만연하던 이교사상과 거짓 개혁, 철학주의, 이성주의 그리고 근대주의와 맞선 싸움에서도 그분은 인도자가 되어 주셨다.
교의는 하느님 섭리적 도우심이 가져다준 결실이다.
하느님 섭리의 전지전능하고 보편적 주권의 규칙은 또한 성경적 의미의 정의正義인 윤리, 곧 개인, 가족, 국가 안에서의 윤리, 덕성, 성화다.
마지막으로 경신례도 하느님이 이끄신다. 여러 민족이 세기를 거쳐 오면서 종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경신례의 외적 변화를 검토해 본다. 비록 본질적으로는 항상 변화되지 않고 남아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실질적으로 거행하고 있는 미사, 성사, 준성사와 전례 전체가 긴 세월에 걸쳐 이룩한 진보적 |
여정을 경탄해마지 않는다.
참되고 유일한 종교의 역사와 수많은 거짓 종교에 대한 역사의 비교는 참종교의 무한한 우월성을 분명히 드러내며, 하느님께 드려야 할 참된 흠숭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과정이며 마침이시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13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14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 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15라고 성 바오로는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사실 성부는 성자를 통해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자 하셨고, 그를 온 세상 왕국의 상속자로 세우셨다.
인간은 하느님 찬미를 통해 피조물의 목소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이 없었기에”16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영광을 드리지 않았으므로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 피조물을 수렴하시어 하느님 말씀에 일치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찬미를 능가하는 찬미가를 천상 아버지께 불러드렸다. 이로써 인간이 부른 그 찬미가는 신적 위격의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이 찬미가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시작되었고, 갈바리아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세상 심판 때에 새롭고 일치된 조화를 띄게 되었다. 성자는 성부를 관조하고, 의인들도 성자를 통해 성부를 관상할 것이다. 성자는 한 나라를 차지할 것이며, 그 왕국의 신하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인도될 것이다. 성부의 사랑이요, 성자의 사랑이신 성령은 이 복된 나라의 숨결이 되실 것이다.
하느님의 목표는 창조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뛰어나게 이루어질 것이다. 죄가 넘치는 곳에 은총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에서 당신의 뜻을 행하신다.
결론: 저술가 사도가 자신과 사람들에게 유익한 하느님 영광의 역사를 완수하고자 한다면 종교에 바탕을 둘 뿐 아니라, |
세 가지 원칙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올바른 인격을 갖추어야 하고, 자연 법규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준수하는 사람이라야 하며,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의 눈길 아래에서 일하며, 하느님을 바라고 자기가 기록하는 모든 말을 진지한 양심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의 목표는 그들에게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을 요구한다. 곧 신앙의 진리에 대한 충실, 윤리규정의 실천과 은총의 수단에 참여, 다시 말해 구두설교 및 문서설교의 특수 대상을 형성하는 모든 것에 대한 충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수준과 완성도의 정도가 다른 주체들에게는 같은 내용이라도 각자에게 맞는 적당한 방식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제 이러한 상이점을 생각하며 저술가 사도가 대상으로 삼는 주체, 곧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큰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곧 초보자들과 숙련자들, 그리고 완성자들이다.
‘초보자들’은 출판 사도직의 순위로 보아 |
신앙의 아기들, 곧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첫 걸음을 떼어 놓은 어린이들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백성을 가리키는데, 아우구스티노가 「초보자들을 위한 교리교육에 대하여De catechizandis rudibus」에서 이야기한 이들이다. 이들에 이어 장소와 시간을 통한 여정에서 점차로 교회의 가르침을 받게 되는 비신자들이 있다.
‘숙련자들’은 지식에 있어 청소년들이다. 다시 말해 성직 신분의 길 또는 전문직에 들어선 학생들로서 평균 교육수준의 젊은이들과 사회 고위층 성인들이다.
‘완성자들’은 성직자들 또는 신앙에 대한 심오하고도 완전한 공부를 한 평신도들이다.
세 범주 가운데 사도직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은 당연히 ‘초보자들’이다. 사실상 이들은 교리교육을 통해 진리의 빵과 그리스도인 삶의 빵을 쪼개어 나눌 필요가 있는 큰 대중이다. 근사치로 계산한다면 인구 20억 중 적어도 90퍼센트에 해당하는, 곧 18억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들은 이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기울여야 하는데 마치 천상 스승이 그러셨듯이 |
가난한 이들과 겸손한 이들에게 더 큰 애정을 가지고 돌아보아야 할 사명이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라고 나를 보내셨다.”17
초보자들에 이어 ‘숙련자들’이 따른다. 이들에게 행해야 할 사도직은 그 숫자 때문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류의 20분의 1에 불과한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그 윤리적 영향력, 다시 말해 소득이나 관계에서 오는 힘 때문에 사회의 지도층에 속할 터이기 때문이다.
대중을 지도하는 것은 위대한 사상가들도 아니고 저술가도 아닌 여론 형성가들이다. 따라서 그들을 이끄는 것은 마치 군대의 장교들을 이끄는 것과 같다.
이 범주의 사람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불신과 좌절로 이어지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또한 가장 큰 기쁨과 훌륭한 결과도 체험했다.
적합한 교육과 훌륭한 지도를 받은 숙련자들은 일반적으로 초보자들보다 신앙을 잘 이해하는데, 그만큼 많은 준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성에 입각한 새로운 기초로써 하느님께 더 충실하고 “찬미가를 부르는 것”18이 더 쉬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완성자들’이 있다. 이들을 위해 사도는 진리, 윤리, 은총을 “넘치게 얻도록”19 더 광범위하게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간’을 양성하는 활동을 계속한다. 이것은 곧 그들 안에 신앙의 |
이성적 토대를 강화하고, 생명과 윤리의 참 의미를 발전시키며, 그들 삶의 특별한 상황에서 필요한 은총을 얻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다.
이 선택된 사람들의 무리에 대한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교회가 지닌 가르치는 본분, 곧 질서와 법규의 교계 제도를 지닐 필요성, 믿지 않는 이들, 이단자들, 반대자들에 맞서 가톨릭교를 옹호할 능력을 지닐 필요성, 끝으로 유일하고 위대한 학교, 가톨릭을 형성하기 위해 지성, 의지,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시게 할 이니셔티브를 지닐 필요성이 명백해진다.
완성자들을 양성한다는 것은 다양한 사도직, 사명, 가톨릭 사상의 본질, 모든 학문, 문명, 예술, 관습, 법규, 학교, 출판 등에 새로운 누룩, 그리스도의 완전무결한 생명을 불어넣는 능력을 촉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간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 가지 큰 범주마다 영적 필요성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유일한 |
사도직의 대상, 곧 신앙, 윤리, 가톨릭의 경신례를 구성하는 바를 그들 각자에게 소개하는 방법도 다를 것이다.
실제로 하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곧 순환적 방식인 ‘길 진리 생명’의 방법으로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모든 가르침을 완전하고 적절하게 온전히 주는 것이다. 각 계층과 범주의 사람들은 언제나 교의, 윤리, 경신례에 관해 각자의 능력과 준비에 알맞는 진리를 점진적으로 지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꼭지점을 위로 향하고 있는 원뿔에 비길 수 있는데, 꼭지점 부분은 수많은 초보자들에게 필요한 기본 개념들을 나타내고, 중간 부분은 숙련자들에게 유익한 교육내용, 아랫부분은 완성자들에게 적합한 내용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길 진리 생명’의 순환방법은 생명력이 있고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생명력이 있다는 말은 각 계층에, 더 나아가 개인 모두에게 종교생활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 곧 신앙, 윤리, 경신례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신경神經, 계명과 은총의 수단에 관한 일반 기초지식으로 시작하여 언제나 같은 원칙을 확대시키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이 방법은 인간의 신체적 · 지적 · 윤리적 성장 과정을 따르기에 자연스럽다. 실제로 이미 지성, 의지, 감정을 타고난 한 아이를 떠올려보라. 그 아이가 늘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수 있도록 우리 영역에서 그 아이의 성장과정 |
동안 이끌어 주며 동반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방법이다. 이론에서든 실천에서든 교회에서 계속 해오던 방법이다. 먼저 이론에 대해서는 이 방법의 박사인 성 토마스에게서, 실천에 대해서는 많은 성인 사목자에게서 드러나는데 그중에서 성 대 그레고리오는 쉬운 것에서부터 어려운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아직 모르는 것을 설명했다.
마지막 방법은 사목적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공통의 필요에 더 효과적으로 부응하기 쉬워 다른 모든 것보다 이 방법을 선호한다. 어린이들, 대중, 올곧은 사람들은 비록 교육을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장황하고 세세한 이유를 찾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단순함을 좋아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안에서 드러나는 거룩한 단순함과 선함에 대한 반영이요, 인간 양심의 증거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물론 그리스도교적이다. “영혼의 증거는 당연히 그리 스도교적이다.”20
출판사도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의에 담긴 진리, 윤리적인 선, 형태의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항상 종교에 대해 쓸 필요는 없지만 늘 그리스도교적으로 쓸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저술가에게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그에게는 시간과 공간 안에 성경의 저자이신 하느님의 활동을 확장시켜야 할 특수한 사명이 있다.
그 모델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성경은 인간을 하늘로 초대하기 위해 하느님이 보내신 긴 편지다. 성경에는 고유한 |
특징이 있다. 성경은 실천해야 할 법, 믿어야 할 진리가 담긴 거룩한 책이다. 목표에 도달하도록 하느님의 자녀답게 믿고 행동하기 위한 은총의 수단을 권하고 계시하며 준비시킨다. 달리 말해 성경은 인간의 길 진리 생명이다.
사도가 쓰는 글은 바로 이와 같아야 한다.
자신의 글이 하늘로 이끄는 참된 길이 되도록 사도는 성경을 본보기로 삼거나 성경과 같은 목적, 같은 방식, 같은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
성경의 주제는 하느님과 인간, 곧 영적 성격을 지닌 모든 것에 관한 진리다. 그러므로 성부 하느님의 활동, 성자 하느님의 활동, 성령 하느님의 활동을 계시하고 명백히 설명하는 진리다. 성화의 모든 수단,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가장 숭고한 것, 계명, 복음적 권고, 성성에 포함된 인간에 관한 의무가 부가된다.
이러한 것은 바로 저술가 사도들이 다루어야 하는 주제다. 그러면 이것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성경의 방식 또는 진리요, 거룩함의 인장인 단순함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성경이 사용한 단순한 문체와 |
형태, 곧 세련된 문체, 예술적 형태라야 하지만 대중적인 형태, 분명하고 소박한 형태의 글을 써야 한다. “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왔다.”고 하신 당신 말씀을 일관성 있게 입증하는 천상 스승의 귀감을 따르는 꾸밈없는 단순성은 교단, 학교, 태도 등 외적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을 원하지 않았고, 고상하거나 난해한 말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소박한 장소 · 청중 · 어조 · 문장 · 예화 · 비유 등을 원했다.
성체성사와 같은 단순성. 성체성사는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음식의 형태를 취한다. 출판사도도 그래야 한다. 책이나 종이라는 보잘것없는 형태로 꾸밈없이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갖가지 처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진리가 도달하도록 해야 하며, 빵처럼 모두가 살 수 있을 만큼 소박해야 한다. 이것은 때때로 큰 희생을 요구하겠지만, 하느님께서 친히 바라시는 희생이기에 관대해야 한다.
더 나아가 출판사도는 자신의 글을 통해 하느님이 성경을 쓰게 하셨을 때 지니셨던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같은 목적을 제시해야 한다.
하느님께 영광, 따라서 자신의 만족이나 이득, 자신의 영예가 아니라 인간의 구원,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야 한다. 하느님께서 모두가 구원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
받기를 원하십니다.”21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모든 자녀를 하늘나라로 초대하시는 당신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출판사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학문적인 작품이나 문학작품을 써서는 안 되고, 자신이나 다른 이의 생각을 유포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교회가 제시하고 계시한 진리와 이 진리로 인도하거나 진리를 발산하는 것만 보급할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경의 출판을 늘리거나 성경에 담긴 진리를 주석하고 설명하며 서술함으로써 실행해야 한다.
사도는 자기 작품에 성경의 진리가 스며들도록 하느님의 언어를 알 필요가 있다. 그가 작품에서 자기가 아니라 하느님이 말씀하시도록 한다면 그만큼 효과가 있을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단언한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22
편집실을 꾸미는 가장 훌륭한 장식은 |
복음사가들의 그림이다. 경신례의 가장 훌륭한 표지요, 대상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부분을 펼쳐놓은 복음이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다.”23 가장 귀중한 참고서적은 교회의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의 광범위한 주석이 담긴 성경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성경의 내용을 사람들이 간파하게 하려면 저술가 자신이 성경의 내용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교회의 인도에 따라 성경을 읽고, 매일 묵상을 계속한다면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소일거리나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자녀로서 마음을 다하여 천상 성부를 따르고 느끼기를 바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마치 교회의 교부들, 사막의 교부들, 성인들처럼 무릎을 꿇고 영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께 순종한다는 굳은 의지로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영광과 온 세상을 위해서라는 복된 희망을 안고 행해야 한다.
그러면 그의 영혼은 차츰 하느님 말씀의 놀랍고도 미묘함에 맛들이게 될 것이고,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이 쓴 글로써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사도에게 영적 독서, 성체방문 때 잠심과 고양의 수단, 으뜸가는 묵상서,|
모든 영적 필요와 사도직 그리고 사회의 필요를 위해 조언을 구해야 할 하느님의 신탁처럼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성경을 읽으려는 사람을 위해서는 전례독서와 성무일도서를 따라 1년 중에 성경 전체를 읽으라고 권한다.
성무일도서로 기도하는 이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의 지주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이러한 독서를 통해 교회의 공적 기도와 하나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사람들을 위해 글 쓰는 방법을 하느님에게서 배우게 될 것이다.
교회 교부들과 학자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과 다른 이들의 성화를 위한 빛과 깨달음을 얻었다. 성 안토니오 아빠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베네딕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등은 성경을 읽으면서 삶이 변화되었고 완덕의 산에 올랐다. 성인들과 하느님의 책을 읽은 모든 이가 영적 빛과 힘을 찾았다. 곧 성경에는 주된 저자이신 하느님이 주시는 힘뿐 |
아니라 성경의 내용이 거룩하며 성경이 쓰여진 목적, 성경을 수호하는 교회의 기도에서 오는 신적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출판사도의 저술도 하느님 활동을 넓혀가는 것이기에 인간을 감동시키고 성화시켜야 한다. 출판사도는 다른 방식으로는 자신의 목적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활동으로 어떻게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자. 성사와 준성사와 기도는 갈바리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 신적 원천에서 덕을 길어내는 만큼 효력이 매우 크다.
출판 사도직에서 서적, 정기간행물, 모든 출판물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와 복음서에서 효력을 얻는다. 그리고 이 출판물은 성경, 특히 복음서에서 더 많이 길어내고, 가까이 다가가고, 의지하고, 재생산하고, 열심하며, 적용할수록 더 큰 효력을 낸다. 사도가 성경의 독서와 매일의 묵상 외에 이러한 목적을 이룬다면 하느님 앞에서 성인전기 작가들과 같은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성인전기 작가들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했으며, 부수적인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과 인간의 영적 선을 지향했다.
기도의 정신과 올바른 지향: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요, 사도가 “나는 하느님께 의지한다, 나는 하느님을 바란다.”는 계획을 확립하게 하는 조건이다. 이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또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아 선포하기에 정의, 진리, 질서에 따른 계획이다.
철학과 신학, 수덕신학과 체험, 교회와 여러 공의회는 이러한 원칙을 선포하는 데 동의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도직에 앞서고 사도직을 동반하며 뒤따라야 한다. 사도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24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자기 것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기도가 지니는 구원 효력에 참여할 것이다. 올바른 지향은 저술하도록 결정하고, 출판하고 보급하도록 이끌어주는 동기라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않다. 사도는 거기에 사랑에 넘친 열의를 쏟아부어야 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성경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동기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25의 사랑이었다.
사도들은 “사랑이 나를 부추겨 말하게 했다.”는 그런 사랑으로 저술해야 한다. 하느님 사랑이 그의 존재 중심에, 곧 그분을 자주 생각함으로써 지성의 중심에, 그분의 요구에 순종함으로써 의지의 중심에,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아닌 것은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을 만큼 |
감성의 중심에 그분이 계셔야 한다.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이웃을 향한 사랑은 성 바오로 사도와 함께 그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한다.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것을 더없이 기쁘게 내놓고 나 자신도 남김없이 내놓겠습니다. 여러분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내가 그만큼 덜 사랑받아야 합니까?”26
그러므로 사랑으로 충만하고, 올바른 지향을 지니며, 기도로 굳건해지고 성경에 잠겨 사는 사도는 자신의 저술이 성경처럼 인간에게 빛과 인도와 지탱, 다시 말해 그들을 위한 길 진리 생명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편집인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거룩한 책, 곧 성경, 특히 복음서는 교회가 준 것으로 출판사도가 행하는 활동의 본질을 이룬다. 이것은 실제로 사명 없는 사제직, 십자가 없는 성사, 뿌리 없는 식물을 이해할 수 없듯이 성경 없이는 깨달을 수 없다.
성경의 중요성, 성경에 관한 하느님의 뜻, 역사와 인간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그 동기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책과는 달리 성경은 세상 속에서 떠도는 한가닥의 은실 앞에 놓인 황금 산山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은 저자나 내용, 생명을 주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러하다.
성경의 원저자는 하느님이시다. 성경 저자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쓴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경은 하느님의 책이다. 이것이 성경이 중요한 이유다.
만일 어떤 책이 저자에 대한 관심과 내용에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한다면 세상에서 하느님의 책보다 더 흥미로운 책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의 책은 아름답고 좋은 것을 나열할 수 있지만 그 어떤 책도 하느님, 인간, 만물의 기원과 목적 등, 인류가 지닌 중대한 의문을 결코 풀어줄 수 없다.
이는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수 있는 진리, 그분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진리다.
이와 같이 오로지 하느님만이 미래의 일, 이 세상에 닥쳐올 사건, 영원히 계속될 일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당신 외아드님의 강생과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통해 영원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당신 결정을 드러내실 수 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신적 자녀로 높여주실 수 있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계시해 주실 수 있다. 그분만이 영원한 행복의 길을 걷기 위한 확실한 수단과 방법을 우리에게 마련하고 가르쳐 주실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 이루셨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책보다 더 흥미롭고 더 중요한 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성경은 마음속에 파고들어 생기를 주는 경향 때문에 다른 책과 차별된다. 성경은 하느님 말씀의 위대한 성사다. 성경의 각 페이지에서 타오르는 거룩한 성령의 불꽃은 마치 그리스도의 신적 위격이 성사의 형태로 살아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덕德의 천상 양식을 취하는 사람처럼 성경말씀으로 양분을 섭취하는 사람도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신적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며, 그 불길은 마음속을 파고들어 그를 영적으로 쇄신시킨다.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마땅한 준비를 갖추게 되며, 성경말씀으로 양육되는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 사실 성경을 감도하시는 성령은 유한하고 변화 무쌍한 인간의 저작물에 관련된 정신과는 다르다. 성령은 모든 것을 알고 또 당신의 책을 읽을 사람들을 처음부터 이미 알고 계신 하느님이시다. 성령은 성경 저자들을 통해 무한한 지혜와 영원한 가치를 지닌 말씀, 마치 읽혀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말씀을 쓰신 것처럼 느껴지도록 곧바로 당신 능력으로 고무되고 생기를 주는 말씀을 쓰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또 다른 이름은 책이다. 이 책은 이교 백성과 |
여러 종교가 행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영향력, 인류에게 아주 심오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책은 문화에 깊숙이 침투해 있고, 예술과 문학은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
성경에 대한 지식 없이는 단테, 클롭스토크Klopstock, 밀턴과 다른 수많은 작가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문학작품 중에 성경의 인용과 언급이 많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27
법률, 제도, 윤리, 예식 등 모든 것은 성경에 의존한다.
성경은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주석서와 입문서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이러한 작품은 학자들의 연구를 위한 것이다.
성경은 심오한 연구보다는 견고한 문학에 바탕을 둔 책으로서 모든 시대에 고통을 당하는 많은 이들의 위로가 되었다. 성경은 인류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책이다.
성경에 관한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직접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쓰도록 독려하고 움직이셨다는 사실은 작품에 서려 있는 당신 도움의 |
흔적이 이러한 단언의 논리성을 우리에게 입증한다.
이런 식으로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우리가 성체를 모시기를 열렬히 바라시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것을 읽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표양을 보이시어 하느님의 뜻을 완수 하시며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셨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다고 전해 준다.
천상 스승은 이사야서의 한 부분을 읽으신 후 그 예언이 당신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자주 성경을 언급하시면서 예언된 말씀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분이 성경을 알고 계셨으며, 사람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상기시키셨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후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발현하셔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28에 관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성경봉독에 관한 하느님의 뜻은 권위 있는 해석가인 교회의 가르침과 관습에 의해 더 뚜렷해진다.29
교회는 성경을 쉽고 효과적으로 읽도록, 장과 절로 세분하여 우리에게 제시했다.
공의회의 많은 법규와 교황들의 여러 저서, 그중에서 특히 레오 13세의 회칙 「극진히 섭리하시는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30과 베네딕토 15세의 회칙 「위로자 성령Spiritus Paraclitus」31은 성경봉독에 관한 교회의 열망을 드러내는 빛나는 증거다.
교회는 성경이 가톨릭 전례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게 했다. 예를 들면 시편은 교회의 공식 기도다. 미사에서는 매일 선별된 복음구절을 읽는다. 성 바오로의 서간과 다른 여러 부분에서 발췌한 성경구절은 언제나 이른바 미사의 독서부분을 이룬다.
결국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는 것이다. 하느님이 직접 말씀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를 가르치셨으며, 이어서 교회가 가르치고 있다.
책이었다. 교회 초창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랬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아직 생생하던 때, 초기 신자들은 매일 성경을 읽었다. 그 후 위험이나 박해 중에 늘 성경을 가까이 하기 위해 성경 전체가 아니라 적어도 거룩한 복음서나 복음서의 한 부분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이렇게 성경을 읽음으로써 그들은 신앙에 항구할 수 있었고, 신앙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을 힘을 길어냈던 것이다.
그 후 차츰 초기 그리스도인의 전통을 잃어가면서 성경을 읽지않게 되었고, 성경봉독으로 얻는 결실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 와서는 성경을 소홀히 하기에 이르렀고, 거의 대다수의 신자들에게 외면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해로웠고 또 지금도 그렇다. 페두치Peduzzi는 강조했다. “우리 사회는 문명의 진보를 자랑하지만 종교와 전통에서는 상당히 퇴보했고, 이미 도처에 만연되어 있는 삶의 방종과 너무나 많은 사람을 위협하는 종교적 반감 현상을 통해 고대 이교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 사회가 이렇게 타락한 까닭은 지옥이 사회에서 영적 삶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떼어놓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곧 악습과 이단, 이교가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처음에는 무지로 인해 나중에는 개신교의 자유 사상으로 인해 복음서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를 떼어놓은 것이다.”32
위대한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카셋타Cassetta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이미 경험한 바와 같이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오늘날 사회의 타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상과 업적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이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행동을 더는 보살펴주지 않는 데서 기인합니다.” 오늘날 하느님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사 람에게 종교는 확신과 느낌보다는 습관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온유하고 지극히 경건한 비오 10세는 당신 계획 안에 이미 해결책을 마련해 두었는데, 성 바오로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 사회를 쇄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를 그리스도께 되돌려 드리는 것 외에 다른 행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전체, 곧 성체성사 안에 살아계신 참 그리스도, 성경과 거룩한 복음서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라야 한다. 비오1 0세는 카셋타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재건하려고 결정하는 순간 신자들에게 그저 자주가 아니라 매일 거룩한 복음서를 읽는 습관을 도입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 봉독이야말로 대망의 재건에 도달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는 길을 뚜렷이 |
보여주고 정확하게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간의 긴급한 요청뿐 아니라 거룩한 책의 봉독에 관한 초기 전통으로, 하늘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쓰신 위대한 책으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음을 드러내준다.
여기서 성경봉독에 관한 교회법 관련의 몇 가지 교령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왼편에 있는 천千 단위 숫자는 덴징거의 번호다.
‘클레멘스 11세는 케넬Quesnel33의 오류34를 단죄했다.’
성경이 남용되었고 또 이단이 생겼다.
‘비오 6세는 신앙의 가르침을 이렇게 강조했다.’
‘비오 7세는 이렇게 가르친다.’
1604. -지나치게 |
진보적인 성경번역으로 자국어를 통해 대단히 많은 불규칙성, 변화, 교체 등이 있음이 입증된다. 하느님의 증거에 적합한 그런 불변성이 확실히 전복되는 듯하고, 특히 교의의 진리를 단지 한 음절을 토대로 결정하게 되는 경우에 신앙 자체가 흔들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단자들은 항상 그들의 사악하고도 증오심에 찬 계략을 삽입하는 습관이 있고, (더 나아가 이러한 성경 번역본들의 독특한 상이성과 불일치에 관해서는 그들 스스로 상호 비난하고 신랄하게 독설을 퍼붓는다.) 자국어로 출판된 성경은 하느님 말씀을 가장 거룩한 장식으로 둘러싸 자기네 오류를 감춘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실상 이단자들은 위대한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에만 생겨났고, 성경에서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무분별하고 경솔한 방식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더욱이 신심과 지혜에 있어 가장 명망있는 사람들이 곧잘 성경해석에서 실수한 일로 우리가 가슴 아파한다면, 특히 분별없이 경솔하게 판단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대중에게 어떤 속어로든 번역하여 성경을 자유롭게 읽으라고 내어준다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레고리오 16세도 이렇게 가르친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수호하며 장엄하게 결론을 내린다.’
저술가 사도는 성경에 관한 기획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도록 성경, 특히 복음서를 보급하기로 굳게 다짐한다. 실제적으로 그는 성경 출판, 해설서35출판, 인격형성에 관한 출판으로 자신의 활동을 구체화할 것이다.
“성경은 하느님이 인간을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인도하기 위해 쓰신 편지”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사도는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가닿아 그들이 성경을 알게 하려는 열망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만이 |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된 성경, 그리고 완결본을 이해할 수준이기 때문에 사도는 성경의 출판, 번역본, 요약본, 거룩한 역사서에 관해 일반적이고 특별한 필요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주석이 있는 번역본은 대중 라틴어 성경 본문을 다양한 언어로 충실하게 옮겨야 한다. 모든 번역본은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의 저서에서 발췌한 역사적 · 윤리적 · 사목적 특징이 있는 각주를 실어야 한다.
학교용과 가족용으로 출판된 요약본은 족보나 폐지된 법령, 학자들만이 관심을 갖는 부분을 빼거나 가볍게 언급하는 정도로 해야 한다. 그렇지만 요약본에도 성경의 말씀으로 설명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거룩한 역사 전체가 실려있어야 한다. 사건에는 역사적 배경을, 예언서에는 시대적 상황을, 지혜서에는 그들의 위치를 설명하여 성경의 틀을 충실하고 효과적이며 좋아하도록 제시해야 한다.
어린이를 위한 성경은 매력적인 형태로 그림을 곁들여야 한다. 어린이들과 단순한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수용할 자세를 가장 잘 갖춘 이들이다!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요약본[=부분 출판]은 풍부한 입문과 주석을 곁들여야 한다.
이들 가운데 첫 자리는 책들의 태양, 신앙의 |
가장 아름다운 노래, 전례의 가장 아름다운 부富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필요불가결함과 매일의 독서를 형성하는 복음서가 차지해야 한다.
해설서는 성경이나 성경의 한 부분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분명한 방식으로 시작하고36 주석하고 설명하고 옹호하며 적용하는 등 모든 출판을 뜻한다. 출판물은 그 특별한 목적에 따라 다양해진다.
-입문: 성경 전체 또는 특별히 몇몇 부분에 대하여
-설명: 예를 들어 다윗, 유딧, 막달레나 같은 몇몇 성경 인물에 대하여
-관계[에 관한 연구]: 성경과 세속 학문, 거룩한 학문, 역사와 예술과의 일반적이고 특별한 관계에 대하여
-다양한 저술 또는 해설, 화보집: 성경의 요점이나 진리를 명확히 설명해 주는 책, 신문과 정기간행물의 기사 등
-성경의 인용…: 거룩한 교부들과 교회 저술가들은 그 저술과 설교집에 성경구절이나 인용문을 늘 삽입했으며, 어떤 이들은 독창적으로 편지 전체를 성경 인용의 조합으로 작성하기도 했다. 출판사도는 이러한 좋은 전통을 새롭게 |
도입해야 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경은 성경으로써 설명한다.”고 했다.
반대로 하느님을 인간으로 대체시킨 책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사도는 하느님 신비의 분배자라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더는 사도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것 또한 교회 정신이다.
선택한 구절을 소개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성경의 모든 책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근동의 형식이나 사고방식, 신학, 히브리식 교육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를테면 매우 깊이 있는 사상과 매우 아름다운 시로 엮어진 예언서부터 읽기 시작해서는 안 된다.”
“제일 먼저 읽어야 할 책은 창세기, 그다음은 탈출기 그리고 이어지는 다섯 권의 책에서 선택한 부분들, 열왕기, 역대기,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서 선택한 다른 여러 부분이다.”
“한편 룻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토빗기와 유딧기, 에스테르기도 그러할 것이다. 욥기는 최상의 철학적 노래이지만 아주 난해하다.”
“아가의 독서는 신비적 언어, 특히 근동의 언어를 잘 알아야 한다.”
“가장 숭고한 시인 시편, 잠언, 코헬렛, 지혜서, 집회서의 지혜를 맛들일 것이다.”
“예언서에 대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선별한 구절을 읽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복음서에 대한 권고사항은 오직 하나다. 곧 복음서를 읽고 또 읽어서 친숙해져야 한다. 사도행전은 매우 흥미롭다. 성 바오로의 서간은 아주 차원이 높고 자양분이 풍부하지만 난해한 구절들이 있기에 명쾌한 주석서가 필요하다.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가톨릭 서간이다.”
“요한묵시록도 매우 난해하기 때문에 적합한 주석서를 따라 읽 어야 한다.”
“어떤 구절들은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또는 라틴어(대중라틴어 성경)와 그리스어 (70인역 성경) 연구 측면에서도 매우 유익하다.”
“공관복음서, 곧 합본 복음서의 이용도 권할 만하다.”37
사도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어떤 종류의 성경 해설서를 준비하든 보통은 비판적이지 말아야 하고, 어떤 면에서든 새로운 학설을 소개해서는 안 된다.
대중에게 |
하느님 말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하고, 하느님이 성경을 마련하신 사랑과 정신으로 준비해야 한다.
해설서는 학자들이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 소개해야 하고, 무엇보다 올곧은 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 지혜, 건전한 사회, 영원한 구원을 찾는 이들, 곧 ‘길 진리 생명’을 찾고자 하는 이들을 만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해설서는 사목적 출판물이어야 한다. 사목적이라 함은 사도의 영혼으로 준비하는 것이기에 형태나 각주 선택에 있어 사목적이어야 하며, 가능하다면 염가로 제공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 한 사목적인 것이다.
성 대 그레고리오는 “성경은 우리의 영적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처럼 우리 정신의 눈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 죄의 추함과 선행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완덕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아는 표시가 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강조한다. “성경과 친밀해지지 않고서는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성경을 사랑하면 성경은 그대를 기쁘게 해줄 것입니다. 그대가 성경에 감싸여 있음을 느낄 때 성경은 그대를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38
성 아우구스티노 또한 이렇게 말했다.
| “거룩한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위대하고 신성한 것이라고 한 내 말을 믿으시오. 진리가 그 안에 모두 완전히 들어있고, 거기서 영혼을 기르고 우리의 힘이 될 탁월하고 고유한 가르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필요에 아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참된 종교가 요구하는 신앙과 신심으로 다가간다면 길어내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봉독이 영혼들에게 많은 열매를 맺기 바란다면 하느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활기찬 열망으로 성경을 읽고, 겸손, 신앙, 기도, 삶의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성경을 읽도록 그들을 인도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자주 그리고 가능한 한 온갖 방법으로 성경의 중요성과 필요성, 읽는 방법에 대해 강조해야 한다.
성경은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 쓰신 글이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성경봉독은 중요하며 교회가 권고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곧 가난한 사람은 영원한 부를 약속하는 말씀, 자신의 궁핍을 위로해 주는 말씀을 길어내기 위해,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선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건강한 사람은 삶을 어떻게 거룩하게 다룰 것인지를 터득하기 위해, 병자는 힘과 인내를 길어내기 위해, 무죄한 사람은 선을 확인하기 위해, 죄인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리스도인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학자는 천상 지혜의 제자가 되기 위해, 단순한 백성은 구세주를 더 잘 알고 |
사랑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 결국 모두가 성경 안에서 그들을 향상시키는 좋은 말씀을 발견한다.
사랑과 진지한 신앙과 자신의 삶을 성경에 드러난 가르침에 일치시키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신실하게 읽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하느님의 책에 다가서는 이는 모두 저명한 프랑스 저술가 프란치스코 코뻬Francesco Coppee가 고백했듯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보잘것없고 무지한 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순종을 내게 허락해 주십사 열렬히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복음서를 거듭 읽었다. 우리 주님은 당신께 다가오게 놓아두라고 하신, 그리고 하늘나라가 그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어린이들처럼 나는 작아졌다. 나는 티베리아 호숫가의 어부들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님은 작은 뱃고물에 앉아 그 어부들에게 말씀하셨다. 차츰 거룩한 책에 쓰여 있는 모든 말씀이 나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었고, 성경 말씀이 진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복음서의 모든 말씀 안에서 진리가 별과 같이 빛나는 것을 보았으며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제시하는 독서의 순서 중 특히 세 가지, 곧 신학적 순서, 익숙한 순서, 전례적 순서는 권고할 만하다.
신학적 순서는 |
성경을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정한 성경목록의 순서에 따라 읽는 것이다. 곧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탈출기 등 그리고 요한묵시록으로 끝마친다.
익숙한 순서는 많은 수덕신학 저자들이 권고한 순서다. 무엇보다 신약성경을 모두 읽고, 그 가운데에서도 성경의 사고방식을 준비하는 데 가장 쉽고 가장 적합한 책인 역사서를 읽는다. 그 다음은 교훈서,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책인 예언서를 읽는다. 이어서 구약성경의 역사서, 그다음에 여러 지혜서와 예언서의 순서다. 전례적 순서는 전례를 통해 교회가 제시한 순서로서, 성무일도서와 미사 전례를 따라 성경을 읽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규칙은 거룩한 자모이신 교회가 보호하고 제시한 대로 성경을 읽어야 하며, 교회의 승인을 받은 본문 만을 따르는 것이다.
신적 제정에 기원을 두지만 개인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기도 한 교회 역사는 아주 특별하다. 한 편의 광대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역사를 통해 하느님의 계획과 그 계획의 실현을 지연시키는 인간의 저항이 최상의 목적을 향해 경주한다. 곧 요한묵시록에서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밑그림이 그려진 승리의 교회 구도를 향하고 있다.
이제 일반적 의미에서 역사가 ‘삶의 스승’이라면 교회가 그 창립자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특수 사명 때문에 교회 역사는 그 의미와 방법과 척도에서 특별하다.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준 가르침은 세기를 통해 교회 |
역사의 그 신적 동기와 발전 그리고 그 결과를 염두에 둘 때 명백히 드러난다.
따라서 교회 역사를 작성하는 방법에 관한 실천규범을 설명하기 전에 사도가 깊이 꿰뚫고 있어야 할 개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논점을 제공할 수 있는 개념, 이러한 개념의 발전을 전제해야 한다.
교회 역사의 신적 동기는 창립자요 머리시며 인도자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구원 역사는 잘 알려져 있다. 인류는 원죄의 탓으로 모든 초 자연적 선물과 은총의 상속을 박탈당함으로써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천국에 도달할 희망 없이, 비참하게도 죄악의 가장 짙은 어둠과 절대로 재기 불가능한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하느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그를 복원하기를 원하셨으며, 신적 경륜의 끝없는 풍요로움 안에 구원계획을 실현하셨다. 지상에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가르치심으로써 인간을 다시 비추시고, 표양으로 길을 제시하시고, 십자가의 희생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셨다.
구세주는 당신의 지상 생애를 통해, 당신의 거룩한 사명에 따라 인류의 길 진리 생명이 되어주셨다.
그분은 ‘길’이시다. 그때까지 이방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덕의 모든 본보기를 그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길이 되셨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 곧 사람들에게 설파하신 계명과 복음적 권고를 완전히 준수하셨다.
그분은 ‘진리’이시다. 그분은 공생활 3년 동안 군중과 사도들에게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시면서 진리가 되셨다. 교회는 이 신앙의 진리를 교의신학, 윤리신학, 수덕신학과 사목신학 안에 수렴하고 설명한다.
그분은 ‘생명’이시다. 인류가 잃은 은총을 되찾아 주시고, 성사와 기도를 통해 인간에게 그 은총을 다시 주시기 위해, 그리고 그분 스스로 영원한 행복의 문이 되어주심으로써 생명이 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짧았으며, 팔레스티나라는 제한된 좁은 지역 안에서 활동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설교 초기부터 당신 주변에 사도들과 제자들을 모으셨고, 당신 뜻에 따라 그들을 가르치시고 교육하셨으며, 그들 가운데 베드로라는 인물을 우두머리로 선택하셨다. 가르침, 권한, 질서에 관한 당신의 신적 능력을 그들에게 주셨다. 인간 구원을 완수할 때가 다가오자 그분은 당신 자신을 성체 |
성사로써 그들에게 남겨주셨고, 베드로를 우두머리로 정하셨으며, 사도들에게 세상에서 당신 사명을 계속하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39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창립하셨고, 당신 구원사명의 과제를 교회에 맡기시어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시간적으로 연장케 하셨다.
스승의 짧은 지상 일정이 끝나자 당신 신비체인 교회의 긴 일정이 시작되었다. 창립자요 우주의 으뜸이신 분의 인도와 성령의 도움을 받는 교회는 세기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진리의 진정한 수호자요 스승이 될 것이며, 그분 권능의 상속자요, 그분 몸과 그분 피의 보관소가 될 것이다. 지옥문은 교회를 거슬러 이기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는 그의 후계자들 안에서 항상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교황은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40로서 모든 분쟁에서 최후의 발언을 하고, 진리를 오류 없이 정의定義하는 권한을 갖는다.
교회 안에 교황과 주교들과 함께 구원의 유일한 길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가 아니라 유일한 윤리 지침, 다양한 학교가 아니라 유일한 학교, 곧 당신의 대리자들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학교가 있다.
교회를 통해 갈바리아의 희생이 계속 새롭게 될 것이며, 성사가 집행될 것이다. 세례성사는 사람을 초자연적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고, 견진성사는 사람을 굳건하게 하며, 성체성사는 그를 양육하고, 고해성사는 넘어진 사람을 회복시키며, 병자성사는 중병에 걸린 사람을 위로한다.
교회는 거룩한 성직자를 배출하기 위해 성품성사를 집행하고, 하느님의 자녀를 인류 안에 확산시키기 위해 혼인성사를 거행하고 축복한다. 교회는 하느님을 어떻게 흠숭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투쟁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비슷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창립자요 머리이신 그분에게서 사명에 충실하도록 위탁받은 교회는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스스로 인간의 길 진리 생명이 되어주면서 구원활동을 계속했고, 또 계속하고 있다. 성인들의 영웅적인 |
덕의 실천과 복음적인 삶으로써 교회는 ‘길’이 되었고,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고 전파하고 가르침으로써 ‘진리’가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통해 얻은 은총의 보화를 나누어 줌으로써 ‘생명’이 되었다.
복음적 윤리 실천이라는 교회의 활동은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 경탄할 만한 것이다. 이민족이 들이닥치자 교회는 신속히 그들을 교육하고 진정시키고 중세 도시국가 시대를 준비하여 변화시켰다. 사실 도시국가의 깃발을 가져다준 사람은 교황 알렉산드로 3세였다.
연이어 교회는 황제들의 전제주의와 맞서 싸워야 했다. 이 전쟁의 가장 유명한 희생자인 그레고리오 7세는 유배지에서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음으로써 승리했다.
다른 남용과 다른 스캔들이 교회를 황폐케 했다. 가장 심각한 예는 프랑스 혁명, 사회주의, 자유주의 등 사회적 해악을 들 수 있지만, 교회는 항상 승리자로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인간 사회에 그리스도교적 해결책으로 먼저 참된 자연적 처방을, 나중에는 초자연적 처방을 제시했다. 레오 13세41, 비오 10세42, 비오 11세43는 회칙으로써 이를 마음에 새겨 주었다.
원칙에 많이 부응했다. 이 여러 원칙들은 올바른 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회칙들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은 스스로 단죄하게 된다!
더 나아가 교회는 언제나 가정 성화의 모체였다. 사실 교회는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가르쳤고, 출생을 보호했으며, 순결을 수호하고 학교와 대학을 설립함으로써 젊은이들을 교육했다.
가정을 거부하는 노예제도를 철폐했다. 항상 고되고 느리지만 끊임없는 진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켰다.
아주 중요한 업적은 (당시에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심오하며,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법규라 할 수 있는) 로마법을 변형시킨 것으로서, 그 법조항 중 건전한 윤리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은 제거하고 차츰차츰 그리스도교 법규로 다듬어 간 것이다. 더는 인간적 권위나 인간적 힘과 특권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권위, 종교와 신앙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 법이 고안된 것이다. 성인들의 시성도 빛나는 업적으로서, 시성은 매번 윤리 발전의 위대한 일깨움이 되었다.
결국 교회는 사회, 가정, 개인이 거룩하게 되도록 그리스도교 윤리 원칙으로 인도하고, 언제나 큰 열성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교회는 가톨릭의 가르침에 관해 |
그리스도교 교리의 가르침, 설교, 출판 사도직, 사명 등을 통해 그리스도인 곁에서 세기에 걸쳐 참된 신앙을 보존하고 전파하면서 천상 스승의 계시적 사명을 계속해 왔고 또 계속하고 있다.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한 교회의 활동이 어떠했는지 알기 위해, 교회가 이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주장해야 했던 투쟁에 대한 기억, 3세기부터 4세기까지 이단과의 투쟁 기간 동안 그리고 루터와 트리엔트공의회에서부터 비오 10세에 이어 오늘 우리 시대까지 교회가 이룩한 거대한 업적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신경의 각 조항은 이단과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한 교회의 승리를 대변해 준다. 그동안 열린 20여 차례에 걸친 공의회 중 가장 으뜸가는 것은 트리엔트공의회로서, 프로테스탄트들이 부인한 근본 교의를 정의했고, 성직자를 위한 로마 교리서를 작성했다. 마지막으로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황의 무오성 교의로써 세상을 진정시켰다.
진리의 진정한 수호자요 스승인 교회는 언제나 모든 시대의 모든 오류를 폭로하고 단죄했다. 그리고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세기에 걸쳐 교회 한가운데에서 출몰하는 마른 가지인 무수한 이단과 이교를 |
잘라버릴 필요가 있을 때 결연히 그 일을 감행했다.
신앙을 보존하는 활동에, 신앙을 유포하는 활동 또한 결합시켰다. 사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언제나 끊임없이 일했다.
성 베드로, 성 바오로와 사도들은 지역을 나누어 복음을 전했다. 이들이 첫 선교사들이다.
이들을 계승하여 각 시대마다 선택된 열정적인 사도들과 선교사들의 무리가 줄을 이었고, 이들은 언제나 신앙과 가톨릭 선교의 중심인 로마를 머리로 삼았다.
교회는 말뿐 아니라 문서를 통해서도 선교했다. 이것은 사도들, 교부들, 교회학자들, 교회 저술가들, 교황들, 성인들, 가장 열정적인 사목자들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미녜의 작품만을 살펴보더라도 얼마나 방대한가! 하지만 그는 2천 권에 이르는 작품을 집필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 모든 교의신학, 윤리신학, 수덕신학, 신비신학, 사목신학의 모든 학술서와 거룩한 학문의 모든 책을 추가해야 한다.
끝으로 교회는 구원을 통해 얻은 은총을 인간에게 |
나누어 주면서 성사와 가톨릭 경신례 분야에서 ‘생명’이신 천상 스승의 임무도 계속해 왔고 또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세 가지의 위대한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곧 성사, 주로 거룩한 의식인 준성사와 기도다.
사람들에게 은총의 생명을 전달하는 데 교회가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각 성사와 그리고 준성사와 전례기도의 역사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교회의 목표는 항상 신자에게 정신을 다하고 의지를 다하고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는 신심을 가르치는 것을 지향했다.
순례하는 교회는 승리의 교회를 위한 것이다. 사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며 그 나라는 끝이 없다.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44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널리 전하는 신앙, 복음의 가르침과 기도에 따라 마음에 새겨지는 계명 준수라는 초자연적 수단을 통해 하느님의 복된 기쁨, 소유, 비전, 초자연적 목적으로 인간을 인도한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 모으시는 것!”45이기에 |
한 개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신비체의 지체로서 인도한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 다음에 선택된 이들의 머리이신 구세주가 먼저 하늘에 들어가실 것이고, 또 다른 모든 사람이 그분을 뒤따를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행복한 이들이 무리를 이룰 것이고,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 것이고, 하느님을 볼 것이며, 영원히 그분을 소유할 것이고, 누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르침, 윤리, 성화라는 세 가지 행위로써 세상을 구원하셨다. 교회는 인류를 최종목적으로 인도하기 위해 가르치고, 판단하고, 거룩하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 행위를 계속한다. 따라서 모든 완덕의 귀감, 우리 삶의 보상자, 진리의 스승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저술한 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가르친 교회처럼, 덕으로 인도한 교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커뮤니케이션한 교회처럼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쓴다는 의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 곧 직접 또는 교회를 통해 |
원죄가 파괴한 것을 바로 세우는, 새 인간 그리스도인을 형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누리실 것이고, 착한 사람은 평화를 누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교회의 역사와 성경의 역사는 무엇보다 따라야 할 훌륭한 표양, 믿어야 할 진리, 참여해야 할 은총의 수단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세 가지 역사라기보다는 유일한 역사의 세 부분이라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러한 원칙 위에 견고하게 기초를 둔 저술가 사도는 교회 역사를 논할 때 다음과 같은 실천규범을 따라야 한다.
1. 인간 사회와 그 생활환경을 지휘하고 판단하는 자연 원칙에 따라 교회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을 피할 것.
2. 인간을 영원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듯이 숨겨진 보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유한한 생명을 희생하기까지 늘 모든 요구에 응할 준비된 교회를 드러낼 것.
3.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상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는 은총을 첫째가는 최대의 선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 문명, 과학, 다른 선은 교회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부차적인 것이다. 반면에 으뜸가는 목적은 항상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46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목적이다.
4. 교회 역사의 전 시기를 세 부분으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첫째는 세상에 진리의 전파와 확립에 관련된 모든 것이 포함되고, 둘째는 인간의 윤리적 향상과 성화 활동을 요약하며, 셋째는 전례와 기도를 전개하는 일이다.
나아가 각 부분에서 두 가지 요소, 곧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를 검토해야 한다. 교회의 신적 요소는 인간을 인도하는 가르침, 윤리, 은총이다. 인간적 요소는 따르고 배우는 백성과 이들을 이끄는 교계제도다.
그러므로 한편에는 가르치고 성화하며 구원하는 교회의 노력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응답하려는 인간의 노고가 있다. 다양한 시대, 다양한 시기를 통해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인간이 참된 의미에서 우리의 교회사를 형성하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세기에 걸쳐 이어가는 일이다.
저술가 사도는 어떠한 주제를 다루든 전력을 기울여야 하고, 하느님께 더 큰 영광과 인간에게 더 큰 유익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적 경향에서든 어떤 특별한 지적 경험에서든 특수 사도직에 대해 매력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것은 어린이를 위한 특수 사도직을 하는 사람이 그들에게 헌신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맛보는 것과 같다. 그 대신 내적 삶을 열렬히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관련된 주제를 놀라운 방식으로 활성화하고 다룬다. 어떤 이들은 신학적 · 철학적 ·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
관심을 가져야 하고, 모든 사람이 다뤄야 하는 주제, 곧 인간의 가장 내밀한 열망에 이르게 하는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주제가 있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으뜸가는 주제는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에 대한 신심, 곧 인간이 그분을 찬미하고 본받으며 마땅한 공경을 드리도록 참된 신심을 널리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리아 신학의 대상, 곧 하느님 어머니의 존엄성에 대한 앎과 거기에서 유래하는 결과에 기원과 바탕을 두고 있다.
전체적인 면에서든 부분적인 면에서든 이러한 주제로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적을 집필했고, 아직도 새로운 서적이 나올 여지가 많다. 이미 나온 것을 보존하고 전하며 우리의 감미로운 어머니를 알리기 위해 모든 기회를 활용하는 것은 사도에게 주어진 몫이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아주 방대하므로 더욱 다양한 저술에 이용될 수 있고, 모든 이의 필요와 요구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계시와 전통, 지상 삶, 가르침에서, 공경에서, 전례에서, 신심에서, 성전에서, 발현에서 성모님에 관해 고찰하는 내용 중 못다한 말이 얼마 나 많은가?
그러나 마리아에 관한 진리 가운데 모두가 |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을 매우 감동시키는 것은 하느님, 인간 창조, 특별히 각 개인에 대한 그분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관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와 그분의 친족 관계의 고리, 다시 말해 성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따님은 강생신비의 활동에 협력하셨고, 성자의 어머니는 구원활동의 협조자이셨으며, 살아있는 성전, 특권을 누리는 성전, 성령의 신부시다.
창조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목적인目的因이자 형상인形相因이시다.
구원에 관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므로 인간의 공동 구원자시다. 구세주께서는 신적인 몸을 통해 다시 태어난 인류의 머리시다.47
특별히 모든 사람에 관해: 비록 부차적이지만 그리스도인 삶의 표양과 공로의 원인이시고 은총의 분배자시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의 특권에 대한 특별한 인식의 결과인 그분께 드리는 존경은 최고의 존경이어야 한다. 곧 본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덕에 관한 드높은 신적 개념에 대해 많은 사람이 경탄할 것이다. |
그러나 영원한 말씀의 성성은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성인들 가운데 강생하시어 (인간들이) 당신을 쉽게 분석하고(이해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흡수하도록(본받도록) 하기 위해 거의 분해되셨다.48(스스로 부서지셨다: 역주-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과정을 그렇게 묘사한 것).
이제 성인들 가운데 첫 자리를 차지하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는 예수님 다음가는 가장 아름다운 귀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그분 안에 사셨던 성령께서는 성모님을 성자의 살아계신 복사본으로 만드셨다.
사도는 위대하고 위안을 주는 이러한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인간에게 진리를 전달해야 하며, 천상 어머니의 덕과 모범을 본받기 위해 항상 더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고 노력을 기울이며 진리에 고무되어야 한다. 마리아의 성덕은 엘거베르토 아빠스Elgeberto Abate의 표현대로 은총의 보편성, 특권의 독창성, 탁월한 존엄성 때문에 성인들과 하늘의 천사들보다 무한히 뛰어나시다.
성 토마스는, “다른 성인들은 특별히 몇 가지 덕에 뛰어나다. 그러나 복되신 동정녀는 모든 덕에 뛰어나시며 그 덕 하나 하나 에서 우리의 귀감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모든 시대, 모든 신분, 특히 하느님께 봉헌된 동정녀들의 귀감이시다.”라고 말했다.
복음은 마리아의 놀라운 덕성들을 |
예를 들어 소개한다. 동정녀의 몇몇 측면들에 대한 짧은 언급들이지만 그분의 감추어진 위대한 면모를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번쩍이는 섬광과도 같다.
사도는 때와 장소에 맞게 거룩하신 동정녀의 내적 삶을 바라보도록 우리 눈에 가려져 있는 부분을 걷어 낼 줄 알아야 하고, 그분이 얼마나 단순하고 차분하며, 천사들조차 부러워하는 분이신지 드러내야 한다. 그분의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이상이라 할, 곧 모든 것을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삶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리아께 대한 신심의 본질, 다시 말해 “마리아를 통해 예수께ad Jesum per Mariam”라는 말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마리아께 대한 찬미와 본받음에서 공경을 떼어놓을 수 없다. 공경은 미신이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가 바라는 정당하고 거룩한 것이다. 내적 · 외적 공경, 사적 · 공적 공경은 깊은 존경, 절대적 신뢰와 자녀다운 사랑으로 이끌어 준다. 존경은 하느님 어머니의 존엄성에 바탕을 두고 또 거기서 도출되는 결과에 기초를 둔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느님과 동등하거나 은총의 원천으로서가 아니라 그분을 풍요롭게 한 특은을 통해 그리고 모든 |
은총의 분배자라는 직무를 통해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한다. 강생하신 말씀께서 어머니로서 존경하시고, 성부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딸로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성령께서 사랑의 성전으로 바라보시는 그분께 드리지 못할 공경이 과연 있겠는가!
흔들림 없는 보편적 신뢰는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의 힘과 어지심에 토대를 두고 있다. 마리아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그분의 중개 능력에서 나오는 힘이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그분을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기시고 또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인 우리 위에, 신비체의 머리인 당신의 거룩한 아드님 성자께 주신 애정을 우리에게 쏟아부으시는 어머니의 어지심, 산고로 우리를 낳으신 어머니의 어지심은 그분께 공동 구속자라는 칭호를 드리게 했다.
마리아의 위대함, 덕과 특권을 흡족해하며 거룩한 동정녀의 신심이 모든 이의 마음을 차지하고 불태우기를 열망하는 기도와 자애로운 사랑. 우리에게 유익한 선익을 아낌없이 베푸시는 고마운 사랑.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의 뜻을 마리아의 뜻에 합치시켜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일치의 사랑.
마리아께 대한 공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백과사전과 같은 방대한 자료를 제시한다.
-그 자체로: 그분의 정당성, 본성과 본질적 행위들, 결실과 필요성
-그분께 드리는 전례적 예식을 통해: 마리아께 바치는 거룩한 |
시기, 그분을 공경하며 바치는 기도와 찬미
-세기를 통한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 문학과 예술이 우리에게 증명한 것들
-마리아께 드리는 특별한 신심을 통해: 마리아의 특별한 계시나 특은의 대상이 되는 다채롭고 수많은 신심과 비록 교회가 설정한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이 자유로이 선택하게 놓아둔 신심은 교회가 승인하고 통괄한다. 그 가운데 일부는 마리아의 자비에 토대를 두고 있다(영원한 도움의 성모, 도움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 섭리의 어머니 마리아께 대한 신심, 어진 의견의 성모께 대한 신심, 위로자 마리아께 대한 신심, 사도의 모후께 대한 신심, 세 번의 성모송 봉헌). 다른 신심은 특히 그분과 구세주 예수님과의 관계를 나타낸다(예수 성심을 위한 성모 신심, 거룩한 성체를 위한 성모 신심).
또 다른 신심은 특히 모든 은총의 중개자라는 관점에서 마리아를 칭송한다(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 마음의 여왕이신 마리아, 또는 사랑의 거룩한 종들의 여왕이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
이 모든 신심에 추가해야 할 것은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현대적 신심(기적의 메달, 루르드의 원죄 없으신 성모님 메달)과 마리아의 표시를 몸에 지니는 신심(마리아의 스카풀라에 대한 신심, 마리아를 기리는 순례)이다.
이러한 신심에 마리아를 기리는 신심단체(젊은이를 위한 마리아 수도회, 마리아의 딸들), 마리아의 전국대회와 국제대회가 있다.
이는 물론 모든 사람이 그리고 또 모든 시대가 관심을 갖게 되는 주제라고 할 수는 없다. 사도는 “마리아께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49라고 한 성 베르나르도의 말을 자신의 것으로 하면서 시간과 장소를 선별할 수 있어야 하고, 항상 어디에서든 거룩하신 동정녀에 대한 찬미, 본받음과 공경을 설명할 모든 기회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죄인들을 위해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야 하고, 자비의 여왕께 그들을 의탁해야 한다.
거룩하신 동정녀께 대한 많은 신심행위 가운데 몽포르의 복자 그리뇽Beato Grignion de Montfort이 제시한 ‘마리아께 드리는 완전한 봉헌’이라는 신심, 곧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신심에 마땅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성경과 성전Tradizione 다음으로 신학은 저술가 사도가 마음 써야 하는 학문으로서 성직자를 위한 필요성, 신자들을 위한 유용성을 알아야 하고, 또 사람들에게 이를 설명할 몇 가지 실천규범을 따라야 한다.
사목자 양성에서 거룩한 신학 연구는 본질적인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위해 준비시키신데서 입증된다. 성 바오로는 사목적 소질을 열거하는 가운데 학문을 포함시켜 이를 명시했다.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이 이를 나타내고 |
사목자의 존엄성과 인간의 영성적 필요가 이를 요구한다.
참된 사목자가 모범적인 태도와 지식, 특히 신학적 지식을 일치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조건하에서만 그의 가르치는 직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비로소 그는 계시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라는 사명과 하느님 앞에 있는 양심의 판관이라는 사명에 부합할 것이다. 하느님 백성은 사제에게서 교의적· 윤리적 개념을 길어내며 올바르게 사는 규범을 배운다. “사제의 입술은 지식을 간직하고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법을 찾으니 그가 만군의 주님의 사자이기 때문이다.”50 그러므로 거룩한 신학의 연구는 사목자에게 일용할 양식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교의신학 연구는 사목자가 거룩한 설교를 할 때 교의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총체적인 규범을 통해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과 시대의 필요에 대면하기 위한 것이다. 윤리신학 연구는 사목자로 하여금 사람의 마음을 알게 하고, 상처를 치료할 수단을 습득하게 하며 통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나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통해서 그를 완덕으로 이끌어 준다.
끝으로 신학 연구는 사목자 스스로 그리스도 신앙의 모범이 되도록 인도하는데, 이방인의 |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준 권고를 따른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 일을 지속해 나아가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51
신학은 으뜸가는 학문이요,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학문이다. 사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52
신학은 신앙 정신을 고양시켜주므로 품격을 높여주는 학문이고, 모든 정의의 토대요 뿌리로서, 신학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신자들의 단체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학은 지속적인 힘과 위로의 원천이다. 지복직관의 여명이요, 징조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53 비록 너울에 가려져 있으나 우리로 하여금 지금부터 지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느님의 심오함을 꿰뚫어 알게 하고, 한 분이신 삼위의 하느님을 알게 한다.
더 나아가 신학은 하느님을 따라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렇다면 성 바오로의 말씀이 명확해질 것이다.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나를 본받으십시오.”54 끝으로 신학은 은총에 참여함으로써 |
거룩한 삶을 살도록 가르쳐 주어 이방인의 사도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55
신학에 관한 지식은 신자들에게 유익하고, 더 나아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많은 이를 비추어 주고 강화시키며 구원하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모르는 우리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 특별한 방법으로 복음 말씀을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56
신학을 소개하는 최상의 방법에 관해 모든 사람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두 가지 경향’에 주목하게 되는데 첫째 경향은 통합하고 요약하며, 모든 것을 간략하게 하는 데 비해, 둘째 경향은 구분하고 세분하는 경향을 띤다. 둘 다 좋은 것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는 글쓰는 이의 의도와 목적에 달렸으며, 또 그가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누구인가에게 달렸다.
둘째 경향을 따르는 사람은 신학 전문가들로서, 학자들과 자신의 오류를 발견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 사람에 해당한다.
일반 대중을 지도하는 경우는 —이것이야말로 출판사도의 주요 사명이다— 논쟁과 비판을 피해야 한다. 항상 |
교회가 가르치는 명확한 진리를 제시해야 하며, 그 진리를 모두 주어야 한다. 독자들의 정신을 비추는 것만 찾지 말고, 그들의 의지를 강화시키고 은총의 샘으로 다가가게 하는 것 또한 추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교의신학 측면에서 가르치는 교의를 고수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사와 기도를 통해 얻게 되는 은총의 도움이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윤리신학 측면에서는 악을 피하고 선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자신을 맡겨야 함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신학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이 라틴어를 알고 있다면 라틴어를 써야 하지만, 대중을 위한 것이라면 대중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좋은 해설을 이용하는 것은 유익하다.
나아가 신학은 언제나 가톨릭교회가 전수하는 성경과 성전 Tradizione인 원천을 제시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해설, 논리의 증명과 합당한 증거를 충분히 제시해야 하고, 특히 독자가 이를 요구할 때에는 부족함이 없게 해야 한다.
사도는 특별히 교리서와 더불어 교의신학, 수덕신학, 신비신학과 사목신학, 논문, 교양서적, 상황이 요구하는 다른 수단을 통해 신학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다.
출판사도는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의 이론과 실천에 관해 ‘네 가지 큰 인간 범주’에 직면할 수 있다. 곧 반대자들, 무지한 이들, 무관심한 이들과 내적 삶에 목마른 사람들이다.
반대자들과 맞설 때는 ‘수호활동’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무지한 이들과 무관심한 이들에 대해서는 ‘계발과 격려’의 활동을, 열정적인 사람들을 위해서는 ‘실천적 안내’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어떤 조건에서든 묵상, 기도, 내적 삶을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고 |
그리스도교 수덕신학과 반대되는 사상과 삶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가끔 수덕신학에 관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육체적 활동과 물질적 쾌락이라는 이교적 개념은 정신의 우월한 가치와 가장 고귀한 선을 손상시키고 강렬한 쾌락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특히 이교적 사고방식을 일으키는 개념은 젊은이들 안에 침투하여 삶을 향상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삶을 추하게 만들고 파멸과 죽음을 초래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수덕-신비적 원칙과 대단히 훌륭한 귀감, 곧 성인들을 거슬러 영성은 위선이며 삶을 부정하고 우울하게 만들며 건강을 악화시키고 자연을 해치며 국가에 해악을 끼치고 사회를 파괴한다고 비난한다.
때로는 참된 비난이 되기도 하는 이러한 내용과 이와 유사한 반론에 대해 효과적이고 강력한 논증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비록 상황에 따라 다양하지만 이 주제는 항상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르침과 실천을 설명하고 옹호해야 한다.
철학과 과학에 근거를 둔 경험에 의해, 특히 신앙에서 빛을 받은 논리, 효율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제를 적당한 장소와 적당한 때에 제시할 것이다.
한편 필요에 따라 다음과 같은 가톨릭 원칙을 확산시키고 재강조하면서 비난과 반론에 대부분 답할 |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수덕은 고유한 삶의 조건에 따라 실천하며, 자신을 다스리고 물질적 재화의 올바른 사용을 자유롭게 행사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놀랄 만큼 강하게 하고, 개인을 위해 형언할 수 없는 만족, 가정 복지, 국가를 위한 번영의 원천이다. 수덕은 사람 안에 뿌리내린 종교적 감정의 결실로서 삶의 신성한 의미를 널리 전한다. 그리고 육체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걸작, 영혼의 도구이기에 가장 고귀하게 여기며, 은총으로 의롭고 정직한 사람 안에 거처하시는 하느님의 성전인 육체를 존중하도록 설득한다.”
“이러한 정서에서 품위의 의미가 생겨나는데, 이것은 전혀 위선이나 인위적 또는 상투적인 상부구조가 아니라 악의 유혹에 대항하는 견고한 방어요, 인격의 아름다운 장식이며, 자신 안에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 싸우는, 윤리적으로 건강한 인간의 자발적이며 필수적인 자기 표명과도 같은 것이다.”57
반대자들과 비판자들보다 무지하고 무관심한 이들이 더 많다.
물론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순수 영성적 학문으로는 충분하지않다. 사실 수덕신학에 관한 글을 전혀 읽지 않았음에도 완덕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을 볼 수 있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비록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타락한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구엘 몰리노스58와 귀용 부인59이 그 예다.
이러한 예는 좀 지나치지만 통상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완덕에 대해 모르거나 편견 때문에 완덕의 길로 투신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구원되기 위해 은총의 상태에서 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면서 대죄만 피하면 된다며 달리 걱정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대부분이 그렇지만 완덕을 소수의 특권으로 여기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시도하려 하지도 않는다.
수도자들과 사제들 중에도 어떤 사람은 내적 삶이 고귀하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이를 포용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데, 이는 그러한 삶을 자기들의 자유와 행복을 앗아가는 멍에로 여기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은 영웅적인 열정으로 성덕의 길에 투신했다가도 |
결국 단념하고 마는데, 패배로 낙심하여 이렇게 투덜거린다. 불가능한 일이야! 역류를 헤쳐 가는 꼴이야…. 하느님도 너를 버리고, 사람들도 너를 버렸어. 늘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
이와 비슷한 경우에는, 상황에 따른 풍부한 경험과 능력에서 나온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토론을 통해 사람들을 계발하고 격려해야 한다.
권위와 신앙에서 빛을 받은 논리에 토대를 두면서도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더는 은총 안에 머물 수 없다. 영성생활에서 진보하기 위해, 적어도 복음적 권고 중 몇 가지를 어느 수준까지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항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적 삶의 실천은 주어지는 희생을 점차 기뻐하게 된다. 천상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60 그리고 이 거룩한 멍에는 세상 걱정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많은 경우 삶에서 가장 심각한 고통(의혹의 고뇌, 후회, 비탄…)을 쫓고, 각자의 신앙과 양심에 전혀 관련 없는 고통을 가라앉히고 가치를 부여한다.
대부분 다음과 같이 입증한다. “영성생활은 합당한 모든 기쁨 곧 (자연에 대한 관상, 학문의 기쁨, 예술의 깊고도 황홀한 감미로움, |
아주 다양한 지상의 선물과 열매의 맛, 가족에 대한 기쁨, 건전한 오락에서 오는 즐거움)을 허용할 뿐 아니라 향상시키면서 강화시킨다. 영성생활 자체는 아주 순수하고 표현할 길 없는 기쁨이라는 보화, 하느님을 소유하고 하느님께 봉사하는 결과를 낳는다.”61
마지막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내적 삶을 열망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가끔 실의에 빠져 좌절하고 길을 잃으며, 또는 모호하고 무분별한 감상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하느님께 각별한 선물과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도 하느님과 일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며, 비록 냉담은 하지않더라도 그저 그러한 관계를 형성한다.
사도는 사람들의 권리 회복과 보호를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그들을 완덕으로 인도하도록 노력하면서 영성생활의 이론과 실천의 세 가지 길, 곧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개인과 단체, 일반신자 또는 특정 신자에게뿐 아니라 특히 수도자들과 사제와 같은 |
완덕을 지향해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전념해야 한다.
수도자들은 그들의 신분상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들의 의무는 세 가지 서원과 자기 수도회 회헌에 바탕을 둔다.
사제들 역시 영혼을 성화시키는 책임을 맡은 자기네 직무와 사명을 통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사실 모든 권위 있는 문헌에 비추어볼 때 사제는 수품 전에 일정 단계의 성덕을 갖추어야 하고, 사제가 된 후에는 항상 더 높은 완덕을 향해 계속 진보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사도는 수덕적 또는 신비적 주제를 다루기 전에 지적 윤리적으로 합당한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지적인 면에서는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그 신학의 원천과 토대(교의신학과 윤리신학)에 관한 깊고 진지하고 철저한 연구를 우선해야 한다.
윤리적인 면에서 사도는 보통 이상의 완덕을 갖추어야 한다. 인간 마음에 관한 깊은 체험과 은총의 초자연적 |
영향으로 그 마음에 일어난 다채롭고 놀랄 만한 효과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올바른 마음, 현명과 비추임 받은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분별력 없이는 활동을 완수하는 데 위험이 따를 것이고, 헛될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62 그리고 사도는 자기 자신과 사람을 위해 쓸데 없는 의문과 완덕의 본질에서 빗나가게 하는 위험한 무질서에서 벗어나 흔들리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 항상 교회의 일반 가르침에서 길어내고 확실한 원천, 곧 성경과 성전, 신앙과 체험에서 빛을 받은 논리를 바탕으로 설명해야 한다. 물론 성경에서 영적 가르침의 요점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가르침, 계명, 권고, 기도와 예화의 형태를 취한 풍부한 문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통상적인 장엄한 교도권을 통해 드러나는 성전Tradizione은 출판사도에게 성경을 보충하듯이, 성경을 진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게 하며,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진리를 제시한다.
신앙의 빛으로 인도되고 완벽해진 논리는 성경과 성전의 자료를 정리하는 데 필요하고, 역사적으로 성인들이|
어떻게 영성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원칙과 일반규칙을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데 필요하다. 특히 사람들의 기질, 성격, 나이, 성별, 사회적 지위, 신분상의 의무를 염두에 두고, 또한 영의 식별에 관한 규칙에도 주의하면서 은총의 초자연적 매력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도는 인간의 능력뿐 아니라 인간 전체, 곧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지닌 인간 완성을 목표로 삼아야 하고, 동시에 인간이 믿어야 할 진리, 따라야 할 길, 자기 소명에 따라 믿고 활동할 은총을 하느님에게서 얻는 방법을 설명해야 한다.
영성생활은 방법이 아니므로 성령께 기민하게 순응하도록 가르치고 교육해야 한다. 또한 영성생활은 무질서하지 않으므로 잘 알려진 좋은 방법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 좋은 방법을 제때에 적용하게 되면 성숙함과 완덕,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로 이끌어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완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요, 우리가 그분 안에 한몸이 되는 것은 그분 안에 일치를 이루는 삶, 그분을 향해 영적으로 들어 높여63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그분과 하나 되는 삶의 토대요, 뿌리라는 근본 요점을 항상 강조해야 한다.
전체적인 면에서든 부분적인 면에서든 항상 종교문화의 풍요로운 보화, 윤리적 가르침이라는 건강한 목초, 은총의 부요하고 풍부한 샘을 제시하는 예술과 전례학은 사도에게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성화를 위한 막강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가 거룩한 교회의 가르침과 지침에 따라 전례적인 모든 시도 안에서 전례에 대한 지식, 사랑과 전례적 삶의 실천을 보급하기로 결심한다면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초기에 잔인한 로마 황제들이 |
신생교회를 유혈로 억압하는 동안 다양한 동기에서 비밀규율이 필요했던 반면, 전례 문학은 매우 축소되었다. 당시에는 대중에게 전례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것은 신자들이 자연적인 배경에서 이루어진 전례 언어와 의식을 잘 이해했으며,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친밀한 관계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신자들은 미사 전례의식과 주요 성사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갖고 교육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회에 자유를 선포한 후, 전례는 점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전례의식이 복잡하게 변화되었기 때문에 전례의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특별규칙이 필요했고, 그 결과 첫 전례서가 나오게 되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전반적으로 문학이 쇠퇴했는데, 전례에서 도 이를 느끼게 되었으며, 새로운 세대는 전례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어서 해석, 억압, 단순화와 개혁 등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윽고 18세기의 오류들64이 전례지식을 훼손시키며 신자들을 장엄한 전례거행에서 멀어지게 했다.
그러나 교황들은 거룩한 전례적 토대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세기 중엽 그들의 후원으로 |
특히 경신례의 내적 아름다움을 부각시킬 목적으로 위대한 부흥작업이 전개되었다.
그와 동시에 전례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전례의 역사적 평가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필사본과 단행본 또는 전집으로 출간된 고대 전례서적의 탐구가 급증했다. 이러한 작업에서 단연 우위를 차지 한 것은 성직 수도자들, 학술모임 임원들과 개별 연구가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베네딕도 회원들이 특별히 두각을 나타냈다.
그 후 20세기 초, 전례 사도직 운동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건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교황 비오 10세는 근본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이 가톨릭 경신례의 경건한 의식의 신적 아름다움과 탁월함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도록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례와 연계되는 —전례에 대한 [멜로디와 음악적] 표현—교육을 하면서 성음악에 대한 ‘자의교서Motu proprio’65로 교황의 첫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전례부흥을 향해 방향을 잡은 다른 개혁에 착수했다.
베네딕도 15세와 비오 11세는 이러한 재건운동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교황들의 호소는 주교들, 종교단체, 출판물 등을 통해 큰 지지를 얻었고, 민중의 활발한 참여가 이루어졌다. 출판물, 잡지, |
신문들의 개화기를 맞게 되었다. 전례주간이 확산되어 그리스도교 쇄신의 가장 민감한 요소 중 하나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운동의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큰 진보를 가져왔다. 사목자들을 위해서나 민중을 위해서나 거룩한 경신례의 공적 조직은 계속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열린 분야였다.
사목자들 가운데 많은 이는 아직도 전례연구를 그저 기술적이며 예배의 장식부분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전례의 참된 연구는 학술분야가 실천분야를 선행先行하며 역사-주석방법에 토대를 두어야 했다. 실천은 분명 필요하지만 한 부분일 뿐이다. 학술은 방법론적 연구를 통해 예배행위에 대한 이해, 이성적 인식을 제공할 것이다.
역사-주석방법은 가장 완전한 방법이다.
역사적 방법은 전례개혁을 거듭하면서 진보하는 가운데, 전례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서 하느님께 드린 확고한 경신례, 자기 고유의 목적을 지닌 독립적인 참된 신학학문임을 입증할 것이다.
주석방법은 의식, 예절과 형식의 의미를 제시할 것이다. 그 의미가 고유한 본성에 따른 것인지, 처음부터 기원이 그런 것인지 또는 제정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
주관적이거나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역사적이며 참되고 과학적인 상징주의라는 것이다.
전례학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지식을 심화시킨 성직자는 대중을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쉽게 알아 듣도록 가르칠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전례는 닫힌 책이 되어버렸다! 사회적으로 모든이가 함께 예배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전례를 반대하는 이들 외에 그리스도인조차도 전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 그밖에도 대다수의 사람이 ‘전례’라는 용어를 생소하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 넓고도 심오한 의미를 무시하고 전례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고작 신학생들이나 새 사제들의 관심거리라고 밀어놓는다.
그러므로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은 가톨릭 연맹이나 신심단체로 활동 범위를 제한시키지 말아야 한다.
전례는 복음서처럼 보편적이어야 하고, 그 해설과 적용에도 충실해야 하며, 그 활동을 모든 사람에게 확산시키고 본당, 곧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 나아가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요, 인간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
우선 그들이 직접 참여하는 특정한 분야에서 그리고 경신례의 모든 체계, 일치와 유기적 통일의 개념을 통해 경신례를 알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의지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종교적 진리는 먼저 지성의 동의와 마음의 감동을 얻어내야 한다.
사실 복음의 진리에 대해 확신과 복음이 선포하는 가르침에 대해 매력을 느끼면서도 죄를 지으며 살지는 않지만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례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생생한 사랑이 결합되지 않는다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전례에 대한 사랑은 전례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깊은 통찰에서 솟아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랑은 전례학에 대해 특별히 탐구할 가능성과 의무가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그 대신 일반적으로 대중뿐 아니라 성직자와 학자들도 전례에 대한 본질적인 연구에 앞서 외적인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전례의 각 부분에 대한 설명보다 먼저 전체적인 개념, 이론적 진리와 윤리적 완전함을 결합하는 내밀한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 전례의 목적과 그 효과에 대한 필요성, 위대함, 아름다움, 감미로움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실제적으로 경신례에 대한 설명과 신자들의 전례예식 참여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효력을 제공한다.
경신례에 대한 설명은 전례예식과 규범의 내적 가치에 대한 지식과 이해로 이끌어 준다.
전례 참례에 대한 관심은 사제권에 유보된 행위를 수행하도록 의무지워진 성직자뿐 아니라, 사제가 행하는 최상의 직무인 전례예식을 통해 은총과 일치를 얻는 평신도들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텅 빈 형식주의로 축소되어서는 안 되며, 단순히 외적으로 보여주는 수단, 고풍스러운 관습이나 미적 요소의 추구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생생하며 애정이 담겨야 한다.
이와 같이 전례는 “미처 몰랐던 심오하고, 놀랍고, 조화로운 진리를 밝히 드러낼 것이고, 광대한 지평을 열어줄 것이며, 아름다움과 영적 즐거움을 통해 인간을 고양시킬 것이다. 또 전례 야말로 인간이 가장 절실히 느끼는 필요와 가장 고귀한 열망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전례에서 학문적 만족이나 시적 만족을 찾지 말아야 한다. 물론 |
학문과 예술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또 찬미해야 하지만 그 자체가 전례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전례는 살아있고 또 살게 만드는 것이요, 거룩하고 또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완성 그 자체다. 이 때문에 그분은 스승, 제사장, 번제물, 거룩하게 하시는 분, 곧 인간의 길 진리 생명으로 당신과 교회 안에 계속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전례는 하느님의 말씀, 성덕의 학교, 은총의 샘이다.66
하느님의 말씀: 교회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전례 안에서 틀을 갖추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나누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67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 안에서 모든 전례 모임을 뚜렷하게 이해하게 하는 세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세 명제의 용어 중 하나는 ‘가르침Doctrina’이다. 거룩한 교부들이 신자들을 계속 교육한 것처럼 교회도 전례를 통해 계속 교육을 한다.
그렇다면 전례서에 담긴 하느님 말씀의 원천은 무엇인가! 매일 출판시장을 공략하는 다양한 성격의 서적인 잡다한 많은 오물을 대면하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성무일도서, 미사 전례서, 예식서와 |
다른 모든 전례서에는 하느님 말씀의 찬란한 보물이 담겨있다.
구약성경에 있는 영감 받은 말씀은 그리스도를 여러 모습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소개한다. 성인들과 학자들의 입에서 나온 하느님의 말씀,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 실현된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신비체 안에서 계속 말씀하시는 것과 다름 없다. 그리고 끝으로 말씀은, 아니 교회의 사상 자체는 조용한 설득력을 지닌 언어, 종종 말씀 자체보다 더욱 마음에 닿는 언어, 모든 기도 형태와 의식과 예식 안에서 활짝 꽃을 피운다.
성덕의 배움터: 성덕은 그 개념 안에 성별聖別과 확고한 봉헌, 곧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것, 또는 단순히 이질적인 모든 것에서 하느님께 분리시킨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느님과 하느님에 관계된 일에 자신을 확고하게 봉헌함은 하느님의 영광과 자신의 성화에 계속적 점진적인 활동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장소, 시간, 사람과 상황의 요구에 따라 전례를 통해 영원히 실현된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성별과 봉헌의 탁월한 귀감이다.
이러한 성별과 봉헌의 배움터는 |
전례의 각 부분과 전례 전반에서 드러난다. 전례의 모든 노력은 그리스도의 삶을 인간 안에 확장시키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지상 생애 동안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의 뛰어난 이상을 확산시켰고, 그들을 거룩한 삶으로 이끄신 것처럼 오랜 세기를 거처 전례를 통해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도인을 신비롭게 끌어당기신다.
은총의 원천: 전례는 교의를 표현하고 성성의 길을 가르칠 뿐 아니라 성성의 원천이다.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마땅한 영광을 드릴 뿐 아니라, 인간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자신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의 무한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 한편 전례는 사람에게 신앙정신, 모든 자연계가 일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 찬미와 신뢰로써 하느님께 간청할 필요성을 촉진하며 하느님의 생명, 그 원천인 성성까지도 커뮤니케이션한다.
성성의 원천은 미사요, 이 미사를 통해 예수님은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68라고 되풀이하신다. 성사는 성덕을 거의 가시화하는 도구요 원천이다. 성사는 우리를 영혼의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영혼에 생명을 주며,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효력을 받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
행위다. 준성사도 하느님 어지심의 커뮤니케이션이며, 비록 부차적이지만 참생명의 원천, 성성의 원천이다.
전례기도는 정화하고 비추어주고 견고케 하며 일치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전례기도는 교회의 기도요 모든 이의 기도이기 때문에 기도 중에 가장 강력한 기도다. 출판사도는 전례 활동으로 전례적 삶을 알고 사랑하고 살도록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전례 생활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사도의 노력 또한 각 사도직 활동의 특별 목적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전례생활을 해야 한다.
‘전례를 살게’ 하려면 위에서 말한 원칙에 따라 전례를 다룰 때 마다 세 가지 측면에서 적절하게 제시해야 한다. 정신을 비추는 진리를 설명해야 하고, 의지를 움직이는 실천적 가르침을 찾아내야 하며, 하느님을 칭송하고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는 기도를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전례의 본질이나
실천적인 면을 다루든,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다루든, 사목자, 학생, 신자, 믿지 않는 이를 대상으로 하든, 대중을 향한 |
설명을 자세하게, 또는 간단한 형태로 전개하든, 역사적 · 교의적 · 수덕적 · 문학적 · 상징적 관점에서 생각하든 이 세 가지를 제시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전례를 제시하면 사람들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한 흠숭을 드리게 될 것이다. 정신은 알고 관상하며, 의지는 하느님께 생명과 존재를 봉헌하게 한다. 마음에서는 사랑이 솟아나오는 동시에 이러한 정성과 헌신의 노력이 깊이 스며들고 지탱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모든 사람이 감동하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흠숭하며, 모든 사람 위에 거룩하게 하는 전례의 영향이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교부들’이라는 용어는 교회 초기 모든 주교를 가리켜 교부라고 부르던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고 세월이 흐른다음 모든 신자에게 신학사상을 설명하고 수호하고 명확히 하고 전개하기 위해 영적 의미의 교부들이라고 확대시켜 생각하던 의미도 아니다. 이와는 달리 교회의 교부들이라는 칭호는 정통 사상, 거룩한 생애, 교회의 승인, 고대성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춘 가톨릭 저술가를 가리킨다.
교부들은 그들이 작품에 사용한 언어에 따라 동방교부와 서방교부로 분류된다. 또한 그리스도교 사상의 발전시기에 따라 사도 교부들, 논쟁을 주로 한 교부들, 신학을 체계화한 교부들로 나누기도 한다.
이 교부들과 더불어 교회학자들, 다시 말해 교부, 신학자, 영적 스승의 권위와 탁월한 중요성 때문에 교회가 이들에게 영예로운 이 칭호를 수여한 이들이 필연적으로 합류된다.
사도는 이처럼 뛰어난 저술가들과 교부들, 사상가와 그들의 작품은 이미 죽은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비판자들의 사고에 동조해서는 안 되며, 학자들에게 유보된 것을 다룬다고 단언하는 이들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이와 반대로 그는 교부학의 역사적 · 문학적 시기에 속하는 거룩한 교부들은 거룩한 성전聖傳의 증거자들이요, 개척자들이기에 모든 이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거룩한 교부들을 모든 이의 손에 맡기려는 열망,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의 참된 보물을 학계, 학교,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밖으로 끌어내려는 열망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교부학은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꽃을 피웠지만 그 움직임이 매우 빠르고 강력하여 다양한 기획을 통해 대부분 구체화되었다.
몇 권의 원서 출간으로 시작하여 차츰 귀중한 전집을 편찬하게 되었다.
널리 보급된 원서 전집 가운데 괄목할 만한 것은 후르터Hurter의 「거룩한 교부들의 작품 선집Sanctorum Patrum opuscula selecta」으로, 신학생의 교재처럼 인식되었다. 마찬가지로 본Bonn[= H. Rauschen, Bonn]의 「교부들의 문헌 발췌집Florilegium patristicum」과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비치니G. Vizzini가 편집한 「신학 입문자들과 일반 성직자들에게 적합한 거룩한 교부들의 장서Bibliotheca Ss. Patrum theologiæ tironibus et universo clero accomodata」가 뒤를 이었다.
다른 기획들은 독서를 즐기는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애독되던 것으로, 강의실에서 거룩한 교부들의 작품을 마음에 새겨줄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거룩한 교부들의 작품 전집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처음 나온 작품은 옥스퍼드 운동Tractariani di Oxford에 관한 것으로, 당대에 알려진 교부들의 저서 대부분이 들어있다.
영국에서는 니케아공의회 이전 교부들의 작품이 번역되었고, 뉴욕에서는 니케아공의회 교부들과 니케아공의회 이후 교부들의 작품이 계속 번역되었다.
이와 유사한 계획이 독일에서 「교회 교부들의 장서Biblioteca dei Padri della Chiesa」라는 표제가 붙은 작품으로 구체화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종류가 나왔다. 이탈리아어 판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거룩한 교부들의 목소리La voce dei Santi Padri」로서 설교가들과 강연가들에게 유익한 자료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거룩한 교부들의 선집이다. 번역된 교부들의 원서 전집은 이중의 목적, 곧 |
평신도 계층에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것과 특히 문학적 가치를 부각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출간된 것들 중 큰 성과를 거둔 피오렌티나 출판사의 「신앙서적I libri della fede」과 국제출판협회에서 출간한 「고대와 현대 그리스도교 서적Le pagine cristiane antiche e moderne」, 칸타갈리Cantagalli의 「그리스도교 고전I classici cristiani」 등이 있다.
최근의 것으로는 그리스 교부 원서와 라틴 교부 원서 전집이 이탈리아어 대역으로 출간된 「살레시안 교부 화관Corona Patrum Salesiana」이 있는데 이는 각주와 서론과 색인까지 곁들인 것으로 학술적 작품과 순수 대중을 위한 보급 작품 사이에서 중도를 선택했다.
인용한 기획과 작품은 교부들의 생애와 작품을 보급하는 일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렇지만 가장 이상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사도는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항상 가톨릭 신자들에게 거룩한 교부들을 더 널리 알리는 일에 효과적으로 협력하여, 모든 이가 교부들의 생애와 그들의 작품을 읽을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자기 것으로 하며, 그들 작품에 담긴 풍부한 가르침과 지혜를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더 나아가 모든 이에게 거룩한 교부들의 저서를 읽도록 권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학자들에게는 주석, 신학, 철학, 과학, 역사 등의 연구에 교부들이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사목자들에게는 |
교부들이 교의, 호교론, 설교학, 윤리, 수덕과 전례 분야에서 자기네 양성을 통합하게 해야 한다. 신학과 교회사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개별 과목의 논문 안에 체계적으로 설명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풍부하고 더 순수한 개념을 포함한 원천에서 직접 길어내는 데 익숙해지게 해야 한다. 종교서적 읽기를 즐기는 평신도들에게는 그리스도교 역사를 알게 하는 열쇠요, 영적 삶의 위험에서 멀어지게 하는 안내서인 성경을 이해하고 맛들이기 위한 효과적인 도움을 교부들에게서 얻고 배우게 해야 한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긴 세월 동안 이어온 그리스인, 로마인 그리고 다른 모든 민족의 세속적 작품을 능가하는, 모방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그리스도교 작품을 알리자.
이단자와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그들이 참된 종교를 사랑하도록 거룩한 교부들의 저서를 권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모든 이에게 교부들의 저서를 권해야 하는 근본 동기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사도들과 교회의 가르침을 수집하고 해설하고 주석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전통과 신적 사도적 전통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종교를 구성하는 것, 다시 말해 신앙, 윤리, 경신례의 증인들이다.
교부들은 그리스도교가 모든 시대의 역사-문화와 맺은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교의를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이것은 새로운 진리의 도입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난해하여 교회가 제시하는 의미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설명을, 진리에 대한 구두 설명과 문서설명으로 그리고 성경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구두전승으로 전해 내려온 계시된 진리를 정착시킴으로써 가능했다.
그뿐 아니라 교부들은 사적 견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위탁자인 교회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 가톨릭 교도권의 합법성을 문서화했다.
교부들은 하느님 계시의 본질과 순수한 의미를 지칠 줄 모르는 열망으로 열심히 계속 연구하여 모든 것을 지혜롭게 해냈다. 교부들을 통해 성경의 연구가 용이해졌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황금 웅변, 성 예로니모의 강력하고 확실한 폭넓은 지식, 성 아우구스티노의 탁월한 변증법, 성 바실리오의 고귀하고 진지한 가르침,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의 통찰력 있는 시를 안내서로 삼는다면 성경에 맛들이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교부들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을 |
비춰주는 참 빛이요, 오류의 어둠 사이에서 꺼지지 않는 횃불이요, 우리 안에 진리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거룩한 불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 그리스도교의 발전사와 이교를 압도하는 그리스도교 역사를 알기위한 확실한 안내자다.
교부들의 편지, 그들의 논쟁, 변론은 그리스도의 불변하는 가르침을 비춰주는 가장 빛나는 거울과 같다. 그들의 가르침은 특히 이단의 공격에서 교회를 수호해야 했을 때는 구세주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거룩한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윤리의 증인들이다. 교부들은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로써,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을 가장 다양한 은총으로 조화시킬 줄 아는 완벽한 그리스도인의 이상형을 제시한다. 그중 일부는 활동가고, 일부는 학자다. 전자는 호교론자와 철학자요, 후자는 신학자와 신비가다. 대다수는 설교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강력하고 당당한 인격에 이러한 성향을 종합적으로 두루 갖춘 이들도 있다. 한편 모든 교부는 성인이다.
교부들의 작품에는 훌륭한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교 정신이 충만하다. 그들 작품은 그것을 읽는 사람 안에 놀라운 효력을 낳는데, 그것은 그 작품의 저자들이 |
신앙의 순수한 본질에서 자양분을 취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바로 그 원천에서 직접 그리고 풍부하게 길어낸 초기 정신에 흠뻑 젖어 있었으므로 그들의 풍부함에서 자연적으로 신선함이 발산될 때에는 숙고하고 묵상한 것보다 풍요로운 경우가 자주 있다.
교부들의 생애와 그 작품을 읽는 것이 가톨릭 윤리 연구 대상인 동시에 실천적 지침일 때 그 자체는 생생한 주석이 된다.
그밖에 거룩한 교부들은 내적 · 외적 · 사적 · 공적 경신례를 통해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 참된 신앙 실천을 표양과 말, 작품으로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가톨릭 경신례의 증인들이다. 그들은 어디에서든 그릇된 신과 거짓을 일삼는 신을 없애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열어 가면서 참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를 도입하고 건설하는 것을 지향했다.
특히 교부들은 가톨릭 전례의 발전,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의 실천과 공적 기도의 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참된 정신 안에서 이를 실행하고 또 법규를 제정했다.
사실 구세주는 |
미사와 여러 성사 제정으로 신약성경의 경신례의 기초를 놓으셨으며, 그 이후의 발전은 사도들과 또 그 후계자들에게 남겨주셨다.
교부들은 사도적 전통을 수집하고 보급하여 확장했으며, 또 그들의 저서에 그 전통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례학, 전례의 원천, 전례문학과 그 역사의 기초를 남겨주었다.
교부신학과 교부 문헌학, 교부들의 생애와 작품의 연구는 출판 사도에게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봉사하도록 이끌어 주는 적합한 주제인 무한한 보화를 제공한다.
거룩한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은 신앙의 스승, 교의, 윤리, 경신례의 옹호자요 보급자, 호교론의 본보기, 확실한 주석가, 영성의 스승, 계시의 해설자요 수호자, 교회사의 원천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교회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이다. 그들의 작품이 시대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보편적 문제와 논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며, 특별한 문제점을 다루었다면 논리적 근거를 고양시키고 그들의 시대를 초월하는 원칙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신앙의 순수함, 교회에 대한|
애정, 사상의 명료함 등은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따르게 하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의 작품과 사상을 알리는 것은 지혜롭고 확실한 길로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보람 있는 일이다.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을 통해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부들의 저서와 사상을 알리는 것은 매우 지혜롭고 가치로우며, 인간의 선을 위해 유익한 것이다.
사도는 먼저 자신을 위해 그들 불멸의 작품을 읽어야 하며, 그런 다음 겸손한 자세로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이 소중한 저서를 단순히 정신의 휴양이나 사색적 방편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내용과 모든 가치를 계속적으로 숙독한다면 그 안에 담긴 가르침과 지혜의 풍요로움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복음 정신, 사도적 정신, 교회 정신, 다시 말해 그들의 정신에서 영감을 받는다면 독자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는 주제, 목표, 기획에 따라 신학적 · 철학적 · 전례적 · 논쟁적 또는 역사적 성격의 주석을 갖춘 교부들의 저서를 원서나 번역본으로 보급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중언어로 번역된 완전한 작품 전집을 통해 대중에게 |
교부들과 그들의 저서를 알리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번역은 다양한 방법으로 할 수 있다.70
이를테면 단순히 원문에 대한 독서를 용이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술적 방법이 있다. 이런 방법은 원문의 사상과 문법 구조 를 명확하게 고찰하기 위해서는 최상의 방법이다.
소위 문학적 번역은 번역된 작품의 예술성과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번역본은 사상을 충실히 옮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므로 두 가지 언어가 가능할 경우 원문의 표현양식도 드러나게 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완벽한 번역방법이지만, 특히 개인만의 독특한 문체를 사용하는 작가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사상을 전체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각주와 다양한 구분으로 풍요롭게 하고, 형태보다 사상에 더 초점을 맞추도록 해야 한다. 사도는 이런저런 방법에 얽매이지 말고, 각 사람의 유익을 찾아 모든 이가 풍성하고 순수한 이 원천에서 길어내도록, 모든 신자가 교부들을 알고 사랑하며 따르게 하는 데 가장 유익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교리교육 활동71은 교회의 지혜로운 인도로 대중의 복음화를 목적으로 하는 종합적 활동과 노력 전반을 포함한다.
이는 사도직의 형태를 구성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것에 첫째 가는 것인데, 그 까닭은 첫 교리교사요 가장 위대한 교리교사이셨던 천상 스승의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교리교육이 가장 근본이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궁극 목적인 하느님을 알도록 이끌어 주고, 또 그분께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 주며 모든 사람, 신자들과 믿지 않는 이들을 지도하기 때문이다.
교리교육 활동은 언제나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과 군중에게 주신 가르침에는 |
중심 주제가 있었고 유연함과 생생한 형태로 묘사한 교육학적 · 교훈적 근본규범이 있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뒤를 이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72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한 일은 예수님 삶의 이야기 안에 틀을 갖춘, 스승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세례를 주기 위한 교리교육이었다.
사도들은 부제들과 몇몇 평신도의 협력을 받았다. 사도들 [곁에] 교리교육을 위해 새로이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이들을 모아 그들을 신자답게 살도록 가르치며 세례를 받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입교예식을 가졌다.
그후 중요한 교리학교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로마에 세워져 교회 안에 탁월한 교리교사들을 꽃피웠는데, 그중에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스, 테르툴리아노,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성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등이 유명하다.
중세 때에는 교리교육 계획이 현저하게 빈약해졌는데, 이러한 상황은 가톨릭 개혁과 교회의 규율과 법규를 바탕으로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종교교육에 새로운 자극이 주어지기까지 계속되었다. 그후 교리교육은 유명한 교회학자들과 |
사목자들의 인도로 참되고 고유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성로베르토 벨라르미노, 밀라노의 성 카를로 보로메오, 파도바의 복자 그레고리오 바르바리고 등이다. 첫 교재 중 대단히 실천적인 작품들은 독일에는 성 피에트로 카니시오의 것이, 이탈리아에는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것이었다.
그러나 교리교육이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긴 했어도 비오 10세가 회칙 「너무도 어려운 시대Acerbo nimis」73(1905)를 반포하여 사람들을 다시 일깨우고 체계적인 가르침을 위한 엄격하고 정확한 규범을 제시하기 이전까지는 가톨릭에 대한 참된 인식과 보편적인 방향을 정립하지 못했다.
출판사도는 모든 시도를 통해 교리교육 활동에 기여한다.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의 특수목적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교리교사에게 직접 협력하든, 특히 교리교육, 교리교사 양성, 교리교육기구 등 세 가지 큰 활동으로 협력하든(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 이러한 활동에 직접적인 방법으로 기여할 수 있다.
교리에 관한 가르침은 교리교사들과 피교육자들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리교사 직무는 본래 사제여야 한다. 그러나 좋은 교리교사가 되기 위해
훌륭한 신학자인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러한 점은 교회법(교회법 1564§ 3)이 신학교에서 교리교육 방법에 관한 실습을 하도록 규정하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와 같이 ‘신학교 교육성’Congregazione dei serminari(편집자주: 오늘날의 ‘가톨릭 교육성’의 서한)에서는 성직자의 교리교육에 대한 양성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러므로 훌륭한 교리교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직자를 위해서도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데 무엇보다 사제들에게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복음화 활동에 교계제도와 공동 협력하도록 부르심 받은 평신도들에게는 더욱 필요할 것이다.
교리에 관한 가르침은 교리교사뿐 아니라 교리교육을 받는 피 교육자들에게도 필요하다.
이에 대한 공식 문헌은 비오 10세의 두 가지 문헌, 곧 「그리스도교 사상의 교리Catechismo della dottrina cristiana」와 「그리스도교 사상의 기본 요소I primi elementi della dottrina cristiana」가 있다. 이 두 문헌은 지금까지 참고가 되었으며, 특별한 필요나 목적에 부합하는 다른 문헌들도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취하면서 실제로 설명, 기도, 삽화, 실천적 적용을 확장하거나 부유하게 할 수 있다.
교리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
학교교육을 위한 길잡이로 이용해야 한다.
피교육자를 위한 가르침은 교리교재다.
양쪽 모두 적합하고 완전하며 방법론적이어야 한다.
사람들과 주변 상황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비신자[=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를 대상으로 한 교리의 가르침은 당연히 이단자들과 이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가톨릭 신자를 대상으로 할 때에도 어른을 위한 것과 어린이를 위한 것은 달라야 하고, 문맹인이나 무지한 이를 위한 것과 학생이나 지식인을 위한 것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교리 내용은 ‘완전’해야 한다. 곧 가톨릭 교의의 한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것, 곧 신앙, 윤리, 은총의 세 요소를 모두 포함하여 적합한 방법으 로 다루어야 한다.
교리교육은 ‘교수법’, 다시 말해 방법론을 가지고 설명해야 한다. 저술가 사도는 좋은 모든 방법을 소개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점진적 순환방식을 선호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활동주의를 지적 · 조직적 · 협력적 그리고 생명을 주는 모든 측면과 결부시켜야 할 것이다.
교회가 의도하는 교리교육은 피교육자를 그리스도인 삶으로 양성하는 하나의 학교라야 한다. |
그러한 양성은 다분히 교리교사에게 달려있다. 이것은 오늘날 ‘교리교사’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교리공부가 사제의 통제하에 앵무새처럼 외워야 하던 시대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리교사는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아야 하고, 완전하지 않더라도 교리교육이 부분적으로 학교와 같은 형태로 조직되어 있는 경우라면, 교리교사는 사제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명을 합당하게 완수하기 위해 특별한 소명과 양성을 받아야 한다.
소명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 교회, 자기 장상인 사제에게 온순한 사람, 마음속에 “군중이 너무 가엾구나!”74라는 예수님의 탄성을 듣고 사는 사도적 영혼, 온유한 사랑을 지니면서도 다른 이들을 지휘할 줄 아는 용기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완전한 양성은 교리적 양성, 교육학적 양성과 내적 양성을 포함한다.
교리적 양성이란 가장 어렵고 미묘한 교리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일이기 때문에 항상 필요하고, 시골 학교에서도 필요하다. 삶의 동향과 많은 사람의 구원은 대체로 교리교육에 달려있다.75
위에 언급한 양성에는 이중의 준비, 곧 먼 준비와 가까운 준비가 필요하다.
전자는 방법론적이어야 하며 가톨릭 교리의 세 가지 근본 부분인 신앙 · 윤리 · 은총, 그리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거룩한 역사, 적어도 기본적인 교회 역사, 전례 역사, 교회의 전례적 삶을 포함한 종교교육의 전 과정을 요청한다.
후자는 각 수업의 직접적인 준비다. 교리교사를 위한 안내서, 일지의 활용과 지속적인 공부, 쇄신으로 도움받을 수 있다. 교육학적 양성은 교리교사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필요하다.
심리학과 교육학의 공부를 포함한다.
일반원칙과 특별원칙을 지닌 심리학은 교리교육에 적합하고 도움이 되며 완전하게 하는 방식을 가르칠 것이다. 현명하고 쇄신된 교육학이라면 사람에게 유익한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도록 자연적인 모든 수단을 활용하게 도와줄 것이다. 또한 교리는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교리교사는 아동 심리, 다시 말해 그들의 내면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세세하게 알아야 한다.76 어린이들에게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으므로 그들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그들처럼 어린이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 시기에 자신에게 가장 감명을 준 일과 말을 기억하기 위해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교의적 교육학 양성은 내적 양성과 분리할 수 없는데 그것은 초자연적 효력이 거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리교사들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강력한 기도에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위대한 사랑을 결합시키는 능력을 갖추도록 양성하는 것을 지향한다.
교리교육 활동에 헌신하는 사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 마련된 위의 규범에 따라 적절한 |
교리교육 활동에 헌신하는 사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 마련된 위의 규범에 따라 적절한 | 양성을 받은 다음) 교리교사 양성에 기여할 것이고, 또 필요하고 가능하다면 피교육자의 양성에도 직접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행 교리교육에 관한 기구는 1935년 2월 11일, 공의회(현재 성직자성)에서 반포한 교령 「건전한 권고를 대비함Provido sane consilio」에 의해 마련되었고, 교리교육에 관한 지혜로운 대작이라 할 수 있다.
이 교령으로써 교리교육에 관한 조직과 방법을 더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교회법의 한 부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합법적인 관련기관은 로마에 본부를 둔 ‘교리 교육사무국 Ufficio Catechistico’과 주교 직할인 ‘교구교리교육 사무국’이다.
교령 「건전한 권고를 대비함」은 제1부에서 교리의 근거를 위해 교회가 행한 업적을 제시한 다음, 제2부에서 몇 가지 사항을 명확히 하여 수단을 제시하면서 행해야 할 임무를 정한다.
세 가지 사항이 규정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사상 협회’가 본당에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교회법 1333조 1의 규정에 따라 “본당신부는, 그에게 합당한 사유가 있다면 |
본당구역에 거주하는 신학생들, 필요하면 그리스도교 사상 협회나 본당 안에 설립한 그와 유사한 단체에 가입한 신심 깊은 평신도들의 협력을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한다.”
사제들과 다른 신학생들은 그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학교 교사들이 이러한 가르침에 관대하게 참여하도록 특별히 호소한다.”는 교구 통례법의 제재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도 이 거룩한 활동을 통해 본당신부를 도와야 할 것이다.
‘본당 교리학교’는 참되고 적절한 학교로 생각해야 하며, 다른 학교보다 수준이 낮으면 안 된다. 오히려 단정한 분위기, 수업방법과 인격적인 면에서 경쟁할 만해야 한다.
‘어른을 위한 주일과 축일 교리’는 교회법 1332조에 명시된 것 처럼 모든 주일과 의무 축일에 실시해야 하며, 트리엔트공의회의 모든 교리를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 교령은 지혜롭게 몇 가지 실천적 방법을 고위 성직자들에게 제안한다.
가) 이탈리아의 모든 교구는 1929년 12월 12일자 서한으로 공의회(성직자성)에서 이미 규정하고 [재확인한] 대로 ‘교리교육 사무국’을 개설해야 하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전통 형식에 따라 그리고 적임자에 의해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치도록 마음 쓴다.
2. 교리대회의 거행을 촉진한다.
3. 본당 학교와 공립학교를 위한 교사들을 양성하고 숙련시키기 위한 종교과정을 공시한다.
나) 교리수업을 잘 하도록 주의 깊게 지도해야 한다. 주교는 감독 역할을 하는 사제들을 임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 가톨릭 액션 교리교사를 많이 배출한다. ‘이 분야에서 이미 많은 일을 했다.’
라) 모든 본당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날’(성사, 강연, 출판, 자선 모금 등)을 개최해야 한다.
마) 교구장은 5년마다 교리교육 학습과정에 관한 24개 항목으로 된 설문지에 답하여 성직자성에 보고해야 한다. 언제나 교회의 지침에 충실해야 하는 사도는 교회가 제시하는 실천적 규범을 연구하고 따르며 널리 전해야 한다.
교황들의 생애와 업적을 다루는 것은 풍요로운 원천을 마련하는 것이다.
교황들에 관해 쓴다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길 진리 생명이신 천상 스승의 업적을 해석하고 계승하는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것과 같다.
사실 교황은 박식한 사람, 외교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 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또 그와 같이 드러나야 한다.
그는 사회의 모든 분쟁에 관해 조언하는 세계 교회의 수장이다. 수장으로서 세상과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온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
교회에서 진리의 빛을 받아 하늘로 인도되도록, 그리고 은총의 관리자인 교회를 통해 은총에 참여케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황은 정의의 귀감, 진리의 스승, 은총의 관리자다.
“예수 그리스도는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77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모범을 보이신 다음에 가르치셨고, 당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다.”7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교황은 그분의 대리자로서 인류를 주재하면서 앞서 모범을 보인다.
사실 거룩한 교황이 얼마나 많은가! 교황들보다 더 영광스러운 왕조는 없다. 초기 3세기 동안 그들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79 하는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그리스도인의 인도자가 되어 앞장 섰으며, 거의 모두 순교로써 모범을 보였다.
각 시대의 역사는교황들 가운데 위대한 학자들을 열거하며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교 문화를 혁신하고 계속적으로 백성을 복음정신으로 교화시키며 백성들의 좋은 |
자질과 몇몇 정치적 사회 제도를 발전시켰는지 증명해 준다.
그러나 교황들이 늘 그들의 사명의 최고봉에 있지는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인간적 나약함의 뚜렷한 증거요, 하느님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80라고 하신 약속에 따라 당신 교회를 도우신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교회 또한 자주 모든 인간 제도와 같은 운명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이 제정하신 단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를 주재하는 교황의 무류성은 관습에도 널리 적용된다. 역사는 가톨릭 윤리를 위해 교황들의 부단한 열성이 세기에 걸쳐 얼마나 잘 완수되었는지 증명할 수 있다.
교황들의 이러한 유익한 업적이 항상 인정받은 것은 아닌데, 그것은 사람들의 무지와 특히 국가들이 교황을 깊이 신뢰하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교황들의 성덕을 알릴 필요가 있고, 그들이 사목자들과 신자들에게 충만하고 숭고하며, 직접적이고 통상적인 법적 권한을, 교의적 |
법률적 · 전례적 세 분야에서 사회 전반의 선, 특히 인간의 선을 위해 행사한 예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진리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81
그는 새로운 진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진리를 수호하고 옹호하며 널리 알린다. 이러한 그의 사명을 법률상의 교도권과 사도직의 권한을 사용함으로써 가르친다.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는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가톨릭 가르침을 수용하는 데 반대되는 장애를 제거함으로써 행사한다. 신자들을 위해서는 장엄하고 통상적인 교도권으로 스승들과 사목자들을 도와주며, 연구와 저술 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올바른 가르침을 제시한다.
교황의 이러한 사명 또한 널리 알려지고 진가를 인정받게 되어 모두가 진리의 스승인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 또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게 할 필요가 있다.
각 시대마다 이단과 이단자들이 있었으므로, 교황은 늘 그들에 맞서 이겼으며, |
진리의 수호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생명까지 바쳤으니,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82라고 말씀하신 착한 목자의 귀감을 따랐다.
더 나아가 교황은 각 시대마다 저술과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선교활동을 격려하고 활기를 줌으로써 가톨릭 신앙전파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활동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으며, 한 목자 아래 하나의 양우리가 될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것이다.”83
그러므로 저술가 사도는 역대 교황이 이룩한 진리의 보급과 수호와 설명에 관한 업적을 드러내야 한다.
끝으로 교황은 가톨릭 경신례 분야에서 생명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속사업으로 우리에게 은총을 얻어주셨다. 교회는 이러한 은총을 신적 권리로서 교황에게 속하는 성사의 힘과 전례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교황은 |
이러한 권한을 교회의 몸에 속하는 이들, 곧 신자들뿐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만 교회에 속하는 이들,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가르치는데, 성사의 힘은 은총을 자아내고 증가시키도록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권한은 절대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이다.
이것은 교황의 최대 권한으로서 초자연적인 목적 달성으로 지복직관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미래의 삶을 위한 초자연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이 지상 삶에서 적합한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준비는 하느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 그리고 그 결과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질 뿐 아니라 성령을 받음으로써, 다시 말해 교회의 성사적 권한으로 전하는 초자연적 선물인 성화은총으로도 이루어진다.
전례에 관한 최대의 권한은 교황에게 속한다.
사도는 교황의 이러한 사명이 그의 본질, 그의 역사, 필요성 그리고 실천에 있음을 신자들이 알게 하여 신자들이 몸으로만 아니라 교회의 정신에도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방법과 차원에서 성사의 은총과 준성사의 은총을 누리게 해야 한다.
교황들의 삶과 활동을 조직적으로 쉽게 다루는 방법은 바로 인류에게 남기신 천상 스승의 활동을 계승한 이들의 사명을 조명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원칙 위에 기초를 두고 사도는 교황들에 관해 기술할 때 세 가지 목적을 정해야 한다.
-그들의 모범적인 삶과 업적을 가톨릭 윤리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의 행위를 법적 측면에서 설명한다.
-그들이 가톨릭 진리의 수호자, 해설자, 보급자임을 입증한다.
-전례 분야에서 그들의 업적이 인간의 성화를 위한 것임을 설명한다.
예를 들면 교황의 전기를 집필할 때 곧바로 그의 활동 추이 곧 ‘인생 여정curriculum vitoe’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런 다음 그의 활동 상황의 정치적 사회적 · 지적 · 종교적 원인에 대해 숙고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그 다음 그의 활동을 성공시킨 드러나지 않는 힘이 무엇이었는지 검토하는 단계로 옮겨간다. 따라서 만일 제1부에서 ‘역사적 개관conspectum historicum’을 살펴본다면, 제2부에서는 사상적 · 정치적 · 사회적 체계로서 (오류, 이단, 교의적 투쟁, 교육제도의 |
발전, 진리에 관한 정의…)를 살펴본다. 제3부에서는 내적 정신, 전례(기도), 종교적 · 교육적 · 예술적 행위 등을 다룬다.
또는,
천상 스승을 충실히 본받는 사람으로서 교황의 재능, 그의 덕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법적 활동, 가르침, 지도, 전례법이나 의례법, 그의 신심과 성사적 전례활동을 통해 그의 생애를 소개한다.
부록에는 교황들이 새로 공표한 예식과 새 미사 양식을 첨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기, 특히 성인전은 인간에게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대중의 취향이 일반 역사 연구, 특별히 전기 종류에 대한 관심이 지대할 때 더욱 그러하다.
저술가들과 편집자들은 이러한 본성의 자연적, 문화적, 시대적 요청에 부응코자 온갖 종류의 전기와 성인전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발간하고 있다.
전기와 성인전은 자주 소설화되어 진리와 실재의 줄거리에 제멋대로 다양한 환상을 접목시켜 왜곡된 역사의 이미지를 제시하곤 한다.
저술가 사도는 이러한 문학양식이 매혹적이고 감동적이며 설득력 있음을 확신하면서 인간에게 모범, 권고와 가르침을 제시하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제국의 창시자들, 백성의 통치자들, 군대의 지휘관들, 신대륙과 감탄할 만한 발명들, 천재적인 문학가와 예술가들, 자유와 정의의 수호자들, 과학자들, 탐험가들, 박애주의자들, 발명가들, 식민지 건설가들, 단순한 사람들 등 이들 모두가 자주 인간에게 신앙과 덕을 향해 대적할 수 없는 매력을 행사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건설적인 삶을 이끌어 간 인물들과 특히 가장 순수한 형태, 가장 고귀하고 영웅주의에 무관심함의 화신인 성인들이야말로 위와 같은 기회를 사람들에게 가장 잘 제공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기양식의 첫 자리는 단연 성인전이 차지하는데, 성인전은 아직 ‘여정 중statu viæ’에 있는 이들의 경탄과 모범과 공경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거룩한 인간의 삶을 밝히 보여준다.
때때로 성인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상스럽고도 잘못된 편견으로 혼란과 그릇된 |
모호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학문과 가치에서 남들과 구별되는 사람들을 선망하기 때문에 사도는 덕성에 뛰어난 사람들, 곧 성인들이야말로 가장 잘 알아야 마땅한 인물들임을 시대와 장소에 알맞게 부각시켜야 한다.
세상의 시각에 따라 위인들은 자주 결점, 잘못, 적지 않은 오류로 점철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대신 성인들은 항상 초인간적이고 투명하며 진지한 빛을 발한다. 그들의 기억은 불멸하고 영원하다.
성인들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해 성인 개개인의 역사, 성인의 부류(순교자, 증거자, 동정녀 등)를 알아야 하고, 그들의 특징과 그들의 시대와 영향력을 통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거룩한 역사를 알리는 것이 유익하다.
특히 성덕의 본질에 관한 가톨릭 가르침의 명쾌한 설명을 하는 것이 좋다.
어떤 성인전은 좋은 의도라지만 성인의 겸손, 순종, 특별한 덕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성의 가장 탁월한 덕이라 믿게 하려고 정형화된 말로 우리에게 역설한다.
겸손과 순명 없이 신앙에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
성덕은 겸손과 순명과 고행이다. 이러한 덕성들로 거룩함이 더해간다. 겸손, 순명, 고행 자체는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요 토대며 조건이다. 그러나 성덕의 절정이요 본질은 애덕, 곧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또한 때때로 성인들의 인물됨과 성덕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는 것도 유익하고 필요하다.
성인들은 몇몇 사람이 말하듯이 결코 태만하거나 사회에 무익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윤리적인 면에서 때때로 시민으로서도 사회를 완전하게 하는 데 가장 소중한 봉사를 한다.
그들은 결코 자살주의자들이나 부분적 자해주의자들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그들의 엄격하고 자발적인 금기는 일반적으로 건강에 유익한 것이요, 다소 건강에 해롭다손 치더라도 이는 그 결과가 빚는 큰 영적 선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자연 질서상 열등한 것은 월등한 것에 종속되고, 논리의 질서상 월등한 선을 이루기 위해 선과 물질적 만족을 희생하는 것이요, 신체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존엄성과 육신의 고통은 인간 본성을 유린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결혼은 | 개인을 향한 명령이 아니고, 그리스도교 독신은 윤리적으로 결혼보다 |
고귀하며, 인간 종족의 번영을 질적 양적으로 해치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인 정결을 지키는 이들, 다시 말해 자발적 독신을 서약하는 이들을 해치지도 않는다.
따라서 성인들은 게으른 이들도 아니고, 자기 자신과 사회를 유린하는 이들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류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위대한 후원자들이다. 많은 사람의 식량, 학문, 문화, 은총과 구원이 이들에게 달려있다.
성덕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성인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그들의 위대함을 경탄하게 하고, 그들의 삶을 본받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행복하도록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오직 하느님을 찾고, 그분으로 항상 더 충만해진다면, 한마디로 성인이 된다면 자신의 목표에 이르게 된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84
그러나 강생하신 말씀의 위격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성성은 놀랄 만큼 숭고한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투쟁해야 하고 수고해야 하는 동시에 우리와 가까운 한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성성을 거의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성성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성인은 성덕의 단순함을 보여주며, 성령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에 부합하는, 한정된 관점에서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는 존재다. 성인은 모두 선을 고무하고 형성하는 참되고 실제적인 배움터다.
전례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들을 소개하고, 그들 개개인을 통해 모범으로 제시하여 그 모범에 따라 우리의 태도를 형성할 수 있게 한다. “주님, 당신 성인들의 모범이 저희를 다그치오니, 그들의 축일을 거행함으로써 저희가 그들의 행동 또한 본받을 수 있게 하소서.”85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는 성인들을 본받도록 제시해야 한다. 사도는 성인들이 어려서부터 초월적 존재로 보이거나 성인들의 윤리적 특징을, 예외적인 상황과 고차원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는 성인전을 추천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성인전은 성인을 오직 후광을 두른 모습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존재,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멀리 있는 존재, 우리와는 상관없는 하늘에 떠 있는 존재로 만들뿐이다.
사도는 성인의 활동 연대를 축소시키거나, 더 나쁘게는 영적이고 영원한 요소가 드러나지 않게 세속적이고 우연적이며, |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요소를 극대화해 나열해서도 안 된다.
지나친 숭고함은 실망을 안겨 준다. 지나친 인간성은 결코 성성을 사랑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며, 그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성인의 인간적 노력과 일치하여 작용하며, 그가 기울이는 노력에 따라 활동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려면 성인도 우리의 지상 삶에 밀접히 속해있음을 느끼고, 또 느끼게 해야 한다.
은총은 구별, 선호도 또는 인간적 특권 같은 계산 없이 합당한 사람을 돕는다.86 신앙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면 성성은 화관으로서, 모든 사람은 이를 얻기 위해 경쟁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성인이란 승리한 투사다. 교회는 그들 덕행의 영웅성을 선포했다. 그리고 투쟁, 아주 강력한 투쟁이 없는 곳에는 영웅적 행위도 없다.”
따라서 성인의 영웅적 덕행이나 관상의 높은 경지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를 아담의 후손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모든 활동을 하느님 안에 확립하기 위해 |
성 바오로가 말한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기까지 (때로는 느려서 답답하더라도) 인내롭게 작업해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소개한다면 성인은 덕행, 성성의 실제적인 배움터가 된다. 그리고 개인적인 상황을 매우 자주 반영하는 명백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독자와 동일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독자와 비슷할 때 독자는 결코 성성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낙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위대한 승리자요 투사인 성 아우구스티노가 어느 날 던진 “저들이 해냈다면 왜 나는 안 되는가?”87라는 질문을 자연스레 하게 될 것이다. 이 질문은 자주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해결책의 실마리가 되곤 한다.
사도는 성인들에 대한 경탄과 모방 외에 교회가 가르치고 전례를 통해 실천하고 있듯이 두 가지 행위로써 [성인들]에 대한 공경을 더 이끌어 내야 한다. 그것은 곧 ‘공경과 기도’이다.
공경: “성삼위께서 그들 안에 머무시고, 덕행과 은총으로 영혼을 장식하며, 가치 있는 행위를 하도록 그들의 능력에 따라 역사하시고, 또 인내라는 탁월한 은총을 그들에게 허락하시기에 적합한 성삼위의 살아있는 성전聖殿으로 공경한다.
-성부께 특별히 사랑받고, 그 자상한 부성에 둘러싸여 있으며, 성덕과 완덕에 |
조금씩 다가가면서 응답할 줄 아는 입양된 자녀들로 공경한다.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원이 된 충실한 지체로서, 그분에게서 영적 생명을 받았으며, 사랑과 항구함으로 그 생명을 일구어 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로 공경한다.
-타락한 본성의 경향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그분의 영감에 자신을 내어 맡긴 성령의 성전이요 온순한 도구”88로서 ‘공경’한다.
이러한 근본 진리는 성인들을 공경함으로써 그들 안에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흠숭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각 성인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빛나는 모습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인데 어떤 성인에게서는 더 많이 그리고 어떤 성인에 게서는 덜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기도: 그뿐 아니라 성인의 통공이라는 위대하고도 위안이 되는 교의와 그들의 강력한 전구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더 쉽게 얻기 위해 성인들에게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한다.
유일하게 필요한 중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뿐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인들은 기도로 신비체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기도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비체는 하느님의 마음을 흔들어 재촉한다. 성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인들을 통해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느님의 벗이요 우리의 친구인 성인들은 그들이 처했던 똑같은 어려움을 겪는 형제인 우리에게 지탱이 되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이 드러나도록 기꺼이 우리를 도와준다.
* * *
사도가 집필했거나 출판한 모든 성인전과 성인에 관한 서적은 사람들에게 성인을 알리고 본받고 공경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성인전, 특히 성인의 생애는 성인을 알리는 것이 그 목적이다. 성인들의 덕행과 그들의 저서나 가르침을 소개하는 목적은 그들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성인들의 신앙과 그들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에는, 특히 전례기도나 교회가 승인한 기도가 따르며, 성인들에 대한 공경은 신자들의 마음에 흠숭과 탄원이라는 두 가지 신심을 불어넣는다.
저술가 사도의 과제는 이미 여러 번 되풀이했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가톨릭 신앙, 윤리, 경신례를 순박한 백성과 대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은 특별한 필요성 때문에 가톨릭 진리를 입증하고자 하는 이들도 대상으로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거룩한 호교론은 이같은 특별한 경우에 사도가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
거룩한 호교론의 필요성은 현재 종교적 상황에 의해 현저하게 드러날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명백해지는데, 그리스도교는 실제로 그 초기부터 자신을 수호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당신이 ‘반대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
십자가의 출현으로 모든 인간적 관심, 모든 열정, 곧 히브리인과 이방인, 공권력과 사회적 영향력, 선입견과 비방, 철학과 여론이 그분을 거슬러 들고 일어났다. 그때부터 그리스도께 대한 적대자들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교회에 대한 반대가 많아졌으며,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수호자들 또한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는 호교론자들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 이후에는 순교한 원형극장에서, 학교 강의실과 교회 안에서 각 시대마다 옹호하는 목소리가 강력하여 군주들과 신앙을 반대하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2세기의 크고 작은 호교론자들의 기념비적 학문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이들은 사도 교부들의 뒤를 이었고, 후에는 각 시대의 교부들, 교회학자들, 신학자들이 다양한 오류에 맞서 교회를 수호했다.
호교론자들은 오늘날도 부족하지 않다. 우리에게 남겨준 가치있는 작품들 중 다음의 것들을 기억하자.
헤팅거Hettinger의 「그리스도교 호교론L’Apologia del cristianesimo」, 발메스Balmes의 「가톨릭 교의와 프로테스탄트교의 비교Protestantesimo comparato al Cattolicesimo」, 몬시뇰 부고Bougaud의 「현대 그리스도교Il Cristianesimo ai tempi moderni」, 몽사브르Monsabre의 「교의에 관한 강연Le Conferenze sul dogma」, 몬시뇰 덜스트d’Hulst의 저서, 그라트리P.Gratry의 저서, 알리몬다 추기경G.Card. Alimonda의 저서, |
라코르데르Lacordaire의 저서 그리고 몬시뇰 보노멜리Bonomelli의 저서, 몬시뇰 베송L. Besson의 강연, 바오로 스칸즈Paolo Schanz 박사의 「그리스도교 호교론l’Apologia del Cristianesimo」, 바이스 Weiss(R.P.A.)의 저서와 아우구스티노 제멜리P. Agostino Gemelli의 저서.
호교론 작품은 점점 더 발전하여 가톨릭 대학이나 설교대에서 행한 강연의 주제가 된 것처럼 신문, 잡지, 정기간행물의 기사, 논문의 주제가 되었다.
비록 호교론이 일반적이거나 정기적으로 간행되는 저작류는 아니지만 시대와 필요에 적합한 것임에는 틀림 없었다. 호교론이 오늘날 이전보다 절실히 필요한 이유는 반대자들이 그리스도교를 가정에서뿐 아니라 국가와 국제적 차원에서 제외시키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인문주의와 더불어 발생한 이런 노력은 프로테스탄트 사상으로 강화되어 오늘날 거대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많은 것을 정복했다.
이러한 총체적인 악한 상황에서 진리를 통해 빛을 받고 종교생활 준수로 강화되며 은총의 원천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위해서는 특별한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출판사도는 말씀의 사도 못지않게 이러한 사람들의 필요에 다가서고, 거룩한 호교론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빛과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
출판사도는 특히 말씀의 사도가 다다를 수 없는 곳까지 가 닿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큰 의무가 있다.
성직자성은 가톨릭 사제단에게 회람을 보내 호교론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구두로 행해져야 하고, 또 그와 같은 경우 설교가는 주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은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에서만 허용된 것이었다. 반대로 호교론에 대한 저술에서는 그와 같은 제한을 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했다.
필요한 상황임에도 사도가 이러한 선을 행하는 데 소홀하다면 자신의 사명을 충만히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대중적 작품이 더 많이 보급될 것이고 더 필요해질 것이다. 그 대신 호교론 작품은 대상이 제한되어 있어 재정적으로 부담이 될 것이기에 더 많은 준비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결코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데,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어야 하고 하느님께 사람들을 데려가야 하는 것이 사도직의 목적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목적은 그 누구도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되며, 개개인에게 만족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을 위해 유익한 것, 정화되고 하느님께 고양되는 것을 주도록 재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사도는 자기 사명의 정상에 이르고, 진정 그리스도인다운 생각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리스도인다운 생각이란 저서를 통해 표현하고, 출판을 통해 사람들에게 도달하기 위해 증가시키고자 계속 노력하는 것이다.
가톨릭 호교론이 거룩한 교의에 대한 수호와 예찬인 만큼 저술가 사도는 직접적인 호교론과 간접적인 호교론89 두 가지 형태로 봉사할 수 있다.
첫째는, 신앙의 진리를 알릴 목적으로 반대자들의 공격에서 진리를 수호하고,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인도하며, 의심하는 사람들이나 의혹의 꾐에 빠진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둘째는, 분명한 오류를 직접 공격하는 데 매달릴 것이 아니라 강력한 논쟁으로 진리를 증거하면서 권위 있고 절대적인 주장으로써 근본 진리를 설명하고 반론을 풀어가는 것이다.
직접적인 호교론에서는 문제에 대한 분명한 개념, 신앙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제시한 것에 대한 정확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문제에 대한 지식을 위해서는 |
반론의 원인이 되는 사실에 대한 연구, 철학적, 역사적, 과학적, 원칙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반드시 그러한 사실과 원칙의 참된 가치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반박하는 진리가 입증된 것인지, 학문적으로 정말 그러한지 또 단순한 가설은 아닌지, 개인의 이론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보아야 한다.
신앙에 대한 지식에 관해서는 단순한 의견인지, 교회가 확정한 교의인지 구별하고 진리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다음, 신앙과 앎의 상호관계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신앙과 이성 사이에는 참된 모순이 있을 수 없고, 상호관련이 있다고 명백하게 표명한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신앙은 오류에서 이성을 수호하고, 획득한 진리를 통해 이성을 확증하며, 더욱 높은 개념으로 고양시킨다. 경우에 따라 이성은 신비를 제시할 수 없다 해도 신비는 불합리한 것이 아님을 단언할 수는 있다. 사실처럼 사물의 본질에 바탕을 두고 신비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적합하고 유사한 이유로써 그리고 신학적 이유로써 신비를 인정할 수 있다. 끝으로 유일한 체계 안에서 이를 조정할 수 있다.
직접적인 호교론의 논제나 강연은 반대자를 반박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반대자들의 오류와 |
종류에 따라 그 방법은 다양해진다. 호교론이 통상적인 진리에 관한 것이라면 철학과 자연신학에서 추론한 본질적인 논제, 곧 하느님의 존재, 하느님의 본성 및 속성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철학과 가톨릭 철학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종교에 관한 논제 [또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호교론이 초자연적 진리에 관한 것이라면 초자연적 주제, 곧 교회의 교의, 성경, 성전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역사적 증명과 신학적 이유를 첨가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본질적 완덕, 효력, 기적과 예언의 실현에 의해서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증거로 드러나는 그리스도교의 신적 토대 위에 바탕을 두며 논증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반대자들의 부류에 따라 다양해지는데, 반대자들은 히브리인, 합리주의자, 이단자, 믿지 않는 사람… 일 수 있다.
간접적인 호교론은 이와 다르다. 반대자를 설득하려 하지 않으면서 오직 권위 있는, 절대적인 주장과 강력한 논쟁으로 진리를 설명하고 입증해야 한다. 동시에 철학자, 학자, 논쟁자, 호교론자의 작품은 간접적 호교론이 된다. 모든 교의, 윤리와 경신례의 주제를 포용하며, 한편으로는 끌어당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박하면서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차별 없이 동시에 다가간다.
이러한 형태의 논쟁에도 첫 번째와 비슷한 준비와 동일한 규범이 필요하다.
현대 호교론에서는 주관적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좋아하는 것은 주고, 싫은 것은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상상과 시詩에 기초를 둔, 감정에 호소하는 직접적인 호교론도 있다.
출판사도는 전자를 피해야 하며, 후자의 한계 앞에서 멈추지말아야 한다. 그의 작품은 완전해야 하며, 종교의 일체성과 인간 본성에 상응해야 한다. 호교론에는 교의부분이 지배적이어야 하지만, 변화시키고 고양시키는 실천부분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된다. 특히 지성에 관해 언급해야 하나 의지를 고무하고 마음을 촉진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호교론이 쉽게 결실을 맺지 못하는 말씀과 저술 양식임은 자명하다. 호교론은 사도의 주된 관심사라야 한다. 위대한 호교론자 라코르데는 설교단에 오르기 전에 지적 준비를 한 다음, 이어서 기도와 보속이라는 실제적인 준비를 했다. 저술가 사도는 그보다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그 까닭은 만일 생기 있는 말이 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데 비해 |
글은 항상 그와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적합한 지식과 교양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아 호교론자로서 맡은 일을 완수하도록 준비해야 하고, 그의 활동에 많은 기도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늘 필요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상황이 한 가지 규칙을 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나서 유능하고 확실한 저자들에게 문의한 다음, 진리로 이끄는 설명 방식을 찾으며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방법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의 말은 거룩한 삶으로 가치 있게 되고, 은총으로 강화되어, 호감을 갖도록 숙련된 기술로써 반대자를 설득할 뿐 아니라, 반대자의 마음과 상상을 자극함으로써 의지를 움직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모든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고 적합한 것만을 말하는 데 달려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대자를 공격하거나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얻도록 해야 한다는 황금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좋은 본보기가 된다.
그는 분명하고도 인간적인 경향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8만 명의 이단자를 회개시켰다.
사도는 이렇게 할 때에만 그의 활동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하더라도 호교론자로서 자기 사명을 만족스럽게 완수할 수 있을 것이며,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 시대 저술가 사도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출판분야 중 하나는 ‘일간지’다.90 통계에 따르면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신문임은 자명한 일이다.
사도는 지혜롭고 풍요롭게 이 수단을 활용해야 하며, 확고한 원칙 위에 토대를 두고 일해야 한다. 먼저 일간지 전반에 대해 그리고 특히 가톨릭 일간지의 문제점에 관한 전문 면학을 통해 준비해야 한다.
일간지는 다른 출판물에 관한 문제와는 다르다. 서적, 정기간행물 등은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그 대신 일간지는 모든 사람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일간지는 모든 독자층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주제를 다룬다.
일간지는 정치, 논평, 보도기사를 현상황의 전개나 예상을 망라하여 상세히 알려준다. 문학 평론란에는 최신 사조와 신간을 소개한다. 단편 작가는 최근 유행하는 형태의 가벼운 읽을거리를 쓴다. 영화계 통신원은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소식을 전하고 갈채를 보낸다. 이러한 이유로 일간지는 벌써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알고자 하고, 확인하려 하고, 정보를 얻으려 하고 또 읽고 싶어 한다. 신문을 읽는다.
일간지는 곳곳에 도달한다. 사람이 모이는 집회를 장악하고, 가판대에서 첫자리를 차지하며, 기차역, 도로 그리고 인파가 몰리는 거리를 휩쓰는 수많은 신문 판매원에게 일자리를 준다.
일간지는 수천 장의 종이로 배가되는 목소리요, 이는 수천 명의 입에 오르내리며 뇌리에 각인되어 증가한다.
관념과 사상의 전파, 곧 행동의 싹이다. 관념, 사상, 행동은 건전한 정신에서 발생하는가 부패한 정신에서 발생하는가에 따라 |
선이나 악을 싹트게 한다. 여기에서도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91는 천상 스승의 말씀이 적용된다.
보통 독자 대다수가 신문을 집어 들고는 아무런 분별 없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신문을 읽으면서 약이나 독을 벌컥벌컥 마신다. 누구에게 탓을 돌릴 필요도 없이 스스로 믿어버리게 된 것들이 이미 새롭게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차츰 지성과 양심이 형성된다. 그만큼 신문의 외적 활동은 부지불식간에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우리의 부패된 본성에 가장 잘 부합하는 악은 더욱 쉽게 침투하고, 결국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희생자가 생긴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이러한 점에 대해 어떠한 성찰도 하지않고, 게다가 저널리즘은 너무나 자주 단순한 관념의 수집가일 뿐 아니라 오류와 악의 온상으로 변한다.
신문이 양심이라는 가장 민감하고 논리적이며 감동을 주는 나무를 |
키우는 데 필요한 주요 수단 중 하나라면 | 가볍게 준비해서는 안 된다.
불건전한 신문이 일으킨 악이 매일같이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더욱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불의의 전문가가 되어버린지는 오래다.
얼마나 많은 증오, 얼마나 많은 부도덕함이 그리스도교적 원칙과 기준에 따른 영감을 받지 않은 신문 컬럼에 떠돌고 격찬을 받는지!
신문은 특히 중산층에 침투하며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대중 안에 스며들어 공공연한 오류와 부도덕함은 아니더라도 행동원칙을 교시하여 사고와 결심의 바탕을 이루며, 치명적인 비관주의에 빠져들게 한다.
잉크로 더럽혀진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는, 그 자체를 보면 아무것도 아닌 신문은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복음서가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은 개인과 대중의 양심을 형성할 특수 사명이 있는 저널리즘의 필요성을 이해하게 한다. 가톨릭 일간지는 마치 친구처럼 읽혀지고 찾게 되며,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신문이며, 농락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오히려 사실에 대한 설명과 평가에 있어 낙관주의적 의미로 인간사를 생각하는 정신을 키우며, 우리의 시작이요 마침이며, 선하고 의로우신 하느님을 생각하게 하는 신문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은 오직 가톨릭 신문만이 할 수 있으니, 조잡한 관심사는 멀리하고 |
| ‘길 진리 생명’이라는 세 명제로 요약된 복음적 계획을 좌우명으로 한다. 이러한 신문은 사람들에게 신앙과 복음적 윤리에 따라 지성, 의지, 마음을 형성한다.
가톨릭 일간지가 많은 경우 그렇게 하고 있지만 힘이 너무 분산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가톨릭 저널리즘은 특히 오늘날 더욱더 자기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빛과 사랑에 굶주리고 목말라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 대리자의 말씀을 원하는 대중에게 주어야 한다. 허기진 사람에게 빵을 주지 않는 것은 죄악이요, 충분히 줄 수 있는데도 조금만 주는 것은 사랑 본연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톨릭 신문은 예를 들어 새로운 소식이 부족하다, 시대에 뒤떨어졌다, 기술부분이 부족하다, 해외소식이 부족하다는 등 수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1937년 성령강림절에 열린 제2차 가톨릭 저널리스트 국제회의 개막연설에서, 지금은 교황 비오 12세인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Card.Eugenio Pacelli은 가톨릭 저널리즘의 활동을 전투로 비유했다.
전사, 적과 무기 모두에 대해 명시했다. “여러분은 |
전사입니다. 현대적 삶을 이교화하는 것은 적입니다. 무기는 교황청 문헌의 보급과 설명입니다. 지금은 전투 기간입니다. 전쟁터는 이성과 감성 사이에, 꿈과 같은 환상의 우상과 하느님의 진정한 계시 사이에, 네로와 베드로 사이에, 그리스도와 빌라도 사이에 전개되는 대립입니다. 이러한 전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시간이 새로울 따름입니다.”라고 저널리스트들에게 말했다.
따라서 저널리스트 사도는 전투요원이다. 전쟁에서 자신의 강력한 무기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공평함, 진지함, 일관성, 연구와 학문,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교황에 대한 헌신과 같은 요소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실제로 일간지에 관한 저널리스트 사도의 활동은 소극적인 활동과 적극적인 활동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소극적인 활동은 가톨릭 원칙에 따른 영감을 받지 않은 일간지의 출현이나 보급을 봉쇄하는 것이요, 적극적인 활동은 이미 존재하는 가톨릭 일간지를 촉진하고 보급하며 유지하는 일과 필요하다고 여기며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장소와 시기에 따른 일간지를 창간하는 것이다.
이는 저널리스트에 의해 좌우되고 또 합법적인 것이니만큼, 반대자에 필적할 뿐 아니라 그를 능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좌와 주교단의 지침을 따르면서 독자들 안에 가톨릭의 양심을 |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확고한 생각으로써 윤리의 순수성을 보장해야 하고, 윤리를 훼손하며 가정과 젊은층을 위험에 빠뜨리는 보도기사와 화보 사용을 단호히 멀리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비추어 그날의 사건을 언급해야 하고, 독자들이 그 사건을 각자 그리스도인 양심에 따라 판단하도록 인도하며, 독자들의 신앙을 위해 그리고 성실한 삶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피하게 한다.
그가 종사하는 진리는 모호함이나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석판에 새겨진, 결코 지울 수 없는 윤리규범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땀과 피를 값으로 치뤄야 할 때에도 그러하다.
문학, 연극, 영화의 논평에서 좋고 합당한 것과 해롭고 부당한 것을 제시하여 확실한 안내를 해야 한다.
가톨릭 일간지가 진리에 대한 사랑을 고대하는 모든 이에게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 어디든지 도달하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언제나 출판에 관한 현행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결코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하고, 가능한 수단과 더불어 행할 수 있는 장소에서, 할 수 있는 선을 행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며, 불필요하게 신문의 생명을 가압류와 중지처분의 위험에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92
여기서는 신문과 그에 준하는 형태뿐 아니라 잡지나 평론지에 준하는 출판물, 곧 인쇄된 여러 장의 종이 묶음으로, 그 내용이 무엇이든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보급하는 모든 간행물이나 책을 말한다.
모든 것이 신속하고 규격화되는 우리 시대에 독자들은 많지만 심오한 연구를 위해 시간과 수단을 갖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간단한 정보를 찾으며, 복잡하고 |
다양한 문제는 재빨리 대강 훑어보려 하고, 즉흥적이고 헛되며 현란한 교양을 쌓으려 대가를 치른다.
그러므로 정기간행물과 잡지, 곧 화보를 곁들인 것과 화보가 없는 주간지, 격주간지, 월간지, 계간지의 정기간행물과 잡지가 우세하다. 오히려 화보가 없는 정기간행물과 잡지는 대부분 과학적이며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이 보급된다.
모든 것을 조금씩 다루고 있는 전문잡지와 정기간행물은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면서 가능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주제를 다루어 더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그 수를 늘려간다.
저렴한 가격, 용이한 구입, 작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 다루는 주제의 다양성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책보다 선호한다.
사실 이러한 유형의 문화가 책과 실질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때로는 책이 차지하는 자리를 빼앗는다고 말할 수 있다. 중산층의 개인소장 서가를 장식하는 특징은 다른 어떠한 출판물보다 우리 시대의 성급함, 취향, 알고자 하는 열망과 지식을 얻는 데에는 시간을 거의 들이지 않고 그럴 원의도 별로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마디로 현대적이고 호의적인 독자층의 변신과 증가에 대응한다.
정기간행물의 독자는 일반적으로 그들이 읽은 것을 거의 맹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자신의 생각, 추론, 대화를 위해 힘이 되겠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독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오늘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대중적 여론의 많은 부분이 사람에게 또 그에 못지않게 지식에도 자주 매우 해롭다는 것을 성찰하지 않은 채, 그러한 정기간행물의 음식을 먹고 산다고 말할 수 있다.93
이 모든 것은 단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지식 보급에 기여하기 때문에 자주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저널리스트의 책임이 막중하다면 잡지와 정기 간행물 집필자의 책임은 더 중차대하다. 그들에게는 능력뿐 아니라 그들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 정확하고 확실한 정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정보에 밝지 않은 이들, 교육을 덜 받은 이들, 맡은 일에 맹목적으로 바쁜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보통 정기간행물과 잡지는 책보다 영향력이 크다. 일반적으로 책은 독자가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한다. 그리고 실제로 비록 적절한 선택을 했다 |
하더라도 특별한 주제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효과가 낮다. 또한 책은 쉽게 독자를 지치게 하거나, 적어도 쉽사리 다시 읽게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공통적인 경향 때문이다.
반대로 잡지와 정기간행물은 훨씬 매력이 있으며, 화보는 흥미와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러나 잡지와 정기간행물의 가치를 높여주어야 할 이러한 다양성이 자주 독약의 운반자가 된다. 잡지가 모든 이의 구미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변명은 자주 율리시스의 말馬(역주: 치명적인 취약점이라는 의미)이 되는데, 그것을 통해 오류와 나쁜 징조가 사람들 안에 스며든다.
그러나 잡지와 정기간행물이 진지하게 잘 만들어지고 기초가 단단하면 많은 문제를 대중화하는 위대한 수단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다수의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와 같이 만들어진 매체는 지속되고 널리 보급되며, 일반적으로 잘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결실이 풍성한 사도직 수단이 된다.
사도는 사람들이 종교적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잡지 및 정기 간행물을 읽지 않도록 하는 소극적인 활동 외에도 수행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좋은 매체들을 유지하고 필요에 따라 새로운 매체를 창간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잡지와 정기간행물에 대한 도움은 |
합당한 것이다. 사도는 이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목적으로 한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가 수도자라면 더더욱) 청빈서원의 실천은 그의 상황에 따라 그러한 잡지와 정기간행물을 유지하는 데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요, 비록 수동적이지만 진정한 선을 완수하기 위해 예정된 것이다. 이것은 빵으로 행하는 애덕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실천하는 애덕이다. 이 애덕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인정받지 못하며, 오히려 노출되는 위험 때문에 종종 비난을 받겠지만 늘 영웅적인 애덕, 최상의 애덕이다. 그가 기대하지 않은 놀라운 상급을 마련해 줄 애덕이다.
또한 사도는 방법과 가능한 조건을 갖추어 영적 필요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이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영적 필요에 부합하는 잡지와 정기간행물을 창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출간이 배척받지 않고 오히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술분야, 편집분야, 보급분야 그리고 그 시기와 방법으로도 독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출판물 가운데 잡지와 정기간행물이 아마도 가장 어렵고 가장 까다로울 것이다. 매우 다양한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일종의 집단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자주 미숙함을 보이는 중간 정도의 의식을 지닌 이들에게 응답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일간지와 마찬가지로 정기간행물은 세 단계, 곧 편집, 인쇄, 보급 그리고 관리를 직접 세밀하게 감독할 수 있는 |
유능한 편집장이 필요하다.
특히 편집장은 다양한 ‘편집’으로 목적을 달성하도록 마음써야한다.
사도가 발간하는 잡지 및 정기간행물의 특수 목적은 종교교육이다. 편집장은 종교적 주제를 그 어떠한 다른 주제보다 우월하게 여겨 적절한 방법으로 다루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주제는 다른 해로운 독서보다 더 선호하도록 다루어야 하고, 독자들이 정신, 의지,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향하도록 전념해야 한다는 두 가지 특징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적절한 방법과 시기에 신앙, 윤리, 가톨릭 경신례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독자들이 알아차릴 수 없는 사이에 각자의 신분에 따라 그리스도교 삶에 대한 의식과 실천에 도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특별한 방법으로 종교 원칙에 영감을 불어넣으면서도 역사적 사실이나 당대의 유명한 인물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치를 논하고 또 때때로 다루어야 하며, 가끔씩 운동, 시, 예술, 과학, 다양한 특집 기사 등을 다루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다양성에 대해서도 각별히 마음써야 하기 때문이다. 단조로움은 안타까운 일이다!
호기심에 부응할수록 (독자는 언제나 다소 아이와 같이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질문자다.) 오늘날의 상황에 답변을 제시하는 문제를 더 많이 다루게 될 것이며, 잡지는 더 큰 만족을 안겨 줄 것이다.
따라서 편집장은 단순하게 페이지를 메우려 하지 말고, 다양한 관심거리를 위한 지면을 마련해야 한다. 기본적인 기사와 더불어 독자 통신란을 마련하여 마치 학교에서 교사나 설교대에서 설교가가 하는 것처럼 가능한 한 독자들을 알고자 노력하며, 그들의 능력과 성향에 맞는 자료를 택하여 독자들이 그 출판물을 흥미롭게 읽고 기다릴 뿐 아니라 열망하게 해야 한다. 다양한 주제, 잘 통용되는 표현양식, 논쟁보다는 개략적인 문제를 다루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기술’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비록 부차적인 것이지만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호감이냐 반감이냐의 첫인상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레이아웃, 적절한 서체 선택, 균형잡힌 구성, 눈길을 끄는 표지와 제목, 그밖의 모든 것이 매력을 끌도록, 그리고 외적 느낌이 인상적이도록 특별 규범을 제시해야 한다.
끝으로 원고 교정, 인쇄, 표지, 발송 및 관리를 주의 깊게 감독해야 한다.
편집장의 일은 편집과 기술 단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급’분야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독자들은 편집장의 특별한 제자들이요,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그의 영적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다루어야 한다. 한 사람도 놓쳐서는 안 된다. 사적으로 또는 신문 컬럼을 통해 그들과 잦은 교류가 있어야 한다. 그들의 소망과 필요한 사항을 자기 것으로 해야 한다. 독자들이 그의 부성적 애정, 강력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도움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결코 독자들의 숫자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학교에는 정원이 없다. 고정 [독자들]과 함께 새로운 독자들을 찾는 데 전념해야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정기간행물의 선전문94, 논평 등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독자들에게 홍보용 서신을 보내어 새로운 구독자를 찾는 데 관심을 갖도록 할 것이다. 실제 경험과 열정이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편집장은 독자 개개인의 도우미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것, 모두를 감독해야 한다. 그는 스승이다.
정기간행물의 생명은 대부분 ‘관리’에 달려있다. 이 점에 대해서도 편집장은 직접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정기구독 신청을 관리해야 하고, 정기간행물이나 잡지가 폐간될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부채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가톨릭 정기간행물 가운데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본당의 정기간행물 또는 ‘본당주보’다.
본당주보는 하나의 소식지가 아니다. 일정한 시기에 일어나는 일반적인 사건을 알리는 소식지, 농민 소식지, 경제 소식지, 산업 소식지가 아니다. 또한 문예지, 자화자찬이나 자기방어 수단, 반대자들이나 반대자로 추정되는 이들을 비방하는 유인물도 아니다.
그 보다는 본당신부와 본당활동의 스피커, 자녀들을 본당으로 조용히 불러모으는 종이로 만든 종鐘이며, |
영적 생명으로 태어난 공동의 아버지 집으로서, 가장 장엄한 순간을 사는 곳, 죽은 이들이 가장 먼저 속죄와 명복을 비는 기도를 받기 위해 거쳐가야 할 집이다. 행여 잊을까 저어하여, 자녀들에게 건넬 자기 이야기를 종이 위에 새기고자 하는 사목자의 사랑을 나르는 수단이다. 모든 사람 곧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교회에 자주 나오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도달하도록 성전의 벽을 뛰어넘는 사목적 열성의 장이다.
본당주보는 항상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보가 출간되는 시기, 형태, 내용 등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주보를 발간하는 기간은 주1회, 격주, 월1회, 격월, 연2회, 연1회일 수 있다.
형태는 낱장, 공고지, 본당서신95, 교회의 문이나 벽에 붙이는 대자보, 신문형태, 단순한 또는 화보를 곁들인 4쪽, 8쪽, 16쪽 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대체로 일반적인 내용이며, 대체로 본당 고유의 것이고, 일부분은 일반적인 내용이고, 일부분은 본당 고유의 것일 수 있다.
대체로 일반적이라는 것은 그 내용이 여러 본당과 동일한 경우다. 대체로 고유하다는 것은 본당신부가 다 |
내용이란, 한 교구나 여러 교구를 위한 공동주보에 본당신부가 자기 본당에 관한 내용을 싣기 위해 몇 단이나 몇 페이지를 보유한 경우다.
본당주보의 유용성, 더 나아가 주보의 필요성은 주로 주보의 실천 목표에 따라 나타난다.
주보는 본당신부와 본당신자들 사이에 가장 강한 유대관계의 확립을 목적으로 한다. 교회에서 신부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적당한 시기에 그 말을 기억하고 묵상하도록, 정확하게 인쇄하여 그들과 유대를 맺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교회에서 멀어진 사람들과 맺는 유대로서, 그들이 그리스도인 삶을 충실히 실천하도록 인도하기를 원하고 또 그래야만 하는 사목자의 아버지다운 호소와 추억을 그들에게 전한다.
신앙에 관한 정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 반대자들, 필요하다면 이주자들과 맺는 유대다. 많은 반대자가 그들의 깊은 내면에서 그들과 그들의 선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봉사를 위해 헌신한 본당신부에게 존경과 신뢰와 사랑을 드러낸다는 것을 경험이 보여주었고 또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해도 많은 사람이 그들이 듣지 않으려 했고 그릇된 편견을 가졌던 말씀을 그들 집에서 비밀리에 |
읽으며 즐길 것이다. 다른 이들은 호기심에 이끌리거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또는 비판하기 위해 주보에 눈길을 돌릴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도 본당신부의 가르침이 초자연적 정신으로 인용했거나 주석한 참된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일치의 구실, 하늘을 향한 삶의 씨앗이 될 것이다.
게다가 많은 주보가 이주자들에게 유익하리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조국에 대한 그들의 애착을 생각케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모든 본당신자의 손에 들려있는 주보는 그들 사이의 형제애의 표지요, 참사목자의 양 떼라는 표지일 것이다.
사목자가 손에 들고 있는 주보는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생생한 사랑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생생한 사랑의 증서가 될 것이다. 희생과 대담한 용기에 이르게 하는 그의 열성의 진술서일 것이기에, 본당주보를 시작한다는 것은 때때로 큰 희생과 상당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또한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팽배한 무관심, 종교적 이기주의와 무절제한 독서가 만연한 상황에서 자기 본당에 주보를 도입하는 데 성공한 본당신부는 자기 직무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당주보의 목적은 |
본당의 모든 이니셔티브에 발전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사실 본당계획을 설명하고, 가르치고, 지탱해 주는 인쇄물을 통해 조직적인 활동을 창출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실천적이고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문화활동, 상업, 스포츠, 학문, 예술, 종교활동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선교활동, 자선활동, 교육활동 등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새에게 있어서 날개의 무게처럼 그런 ‘달콤한 무게’96, 곧 새를 날게 해주는 그 날개 자체의 무게 같은 것이다.
주보는 유치원, 병원 등과 같이 본당활동을 지지해 주고, 본당활동 지원을 위한 도움을 요청한다. 예수 성심께 바치는 첫 금요일의 신심, 40시간 기도, 선교활동 등과 같은 종교적 이니셔티브를 촉진하고 지원하며, 교리교육 기구를 발전시키고, 가톨릭 액션, 신심단체, 자선단체, 다양한 계층의 기구를 활성화한다. 간단히 말해 본당주보는 크게 외치는 목소리, 계속적인 목소리, 글로 쓴 목소리, 사려 깊고 적절하게 인간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내는 최상의 조건을 지닌 목소리다.
본당주보가 그 거룩한 목적을 더 쉽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편집, 자료, 외형, 관리와 보급 면에서 적정한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
(적어도 본당에 관한 부분은) 본당신부가 편집해야 하며, 그의 책임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주보는 설교의 형태를 띠므로 하느님 말씀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사제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올라서는 설교대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보는 모든 이를 향해야 하고, 본당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하며, 특히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 이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본당신부는 사적 감정에 좌우됨 없이 말해야 하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요 사목자로 드러나야 한다. 글을 통해 자기 영혼과 마음이 열정을 가지고 거룩한 도유, 초자연적 애정을 뿜어내야 한다.
단순한 형태, 경우에 따라 대화체, 이야기체, 많은 일화를 담은 문체…로 편집해야 한다.
자료는 윤리적 종교적, 곧 사목적이어야 한다. 가능하면 일부분은 고유한 부분, 다른 일부분은 공통된 부분이 포함되어야 한다. 모두를 위한 부분은 가능한 한 본당신부가 쓰지 말고 전문적인 사람이 쓰도록 해야 한다. 고유한 부분은 본당의 특별한 일을 다루어야 하는 본당신부에게 할당된 부분이다.
여백을 채우거나 부록 같은 부분인 아주 짧은 본당 소식란은 본당신자들이 관심 갖는 것, 적어도 간접적으로 신자들의 선, 본당신부와의 일치, 주보에 대한 애정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주요한 부분은 반복되는 본당교육, 전례시간, 출생과 결혼 및 부고란 그리고 특히 교황과 주교의 담화문 등이 차지해야 한다. 아무리 교황이 말하거나 주교가 사목서한을 보낸다 해도 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면 사실 무용지물일 것이다. 그뿐아니라 양심적으로 주보에 명료하게 설명한 신앙 진리에 대한 대중적 호교론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실리기 바란다.
주보는 가톨릭 액션, 신심단체, 종교사업과 자선사업, 도서관, 공연이나 본당 영사실 등 본당 모든 기구의 메아리라야 한다.
항상 온갖 악담, 쓸데없고 비위에 거슬리는 아부는 단호히 피해야 한다. 반대로 유쾌하고 격려하는 방식으로 제시해야 한다.
주보 ‘관리’가 적절한 형태로 운영된다면 채무를 지지 않을 뿐아니라, 본당사업과 다른 모든 활동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며, 부담스런 것이 아니어야 한다. 정기구독을 정착시킬 수 있지만, 특히 금액을 지불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주보를 보낼 필요가 있다. 유지비는 대부분 |
자발적인 희사로 이루어진다. 때때로 모금, 바자회, 자선 공연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주보 ‘전달’도 가능한 한 사목적이어야 한다. 우편을 통한 발송은 권장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열심한 사람들이 가정을 방문하여 가장에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 본당에서 출판 사도직에 협력하는 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면, 배포하는 일은 그 구성원 중 한 사람이나 여러 회원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달방법이 어떠하든, 주보가 모든 가정에 도달하도록 배려해야 하고, 특히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 가정과 반대자들에게 다다르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본당주보에 관한 출판사도의 과제는 위에 나열한 원칙에 따라 충고하고 용기를 주며 필요할 경우 일방적인 부분을 작성하고, 인쇄와 보급을 돌보는 것 등이다. 사도는 모든 본당이 본당주보를 갖기 전까지 결코 편히 쉬어서 는 안 될 것이다.
‘즐거운 독서’라는 이름으로 소설, 단편소설, 수필, 일화, 동화, 우화, 비유, 모험, 여행, 역사 이야기 등과 같이 사람을 끌고 좋아 하는 것을 소개하면서 교육하고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출판 사도직을 위해 흥미로운 문학작품을 이용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둔, 특히 천상 스승의 귀감에 바탕을 둔 지혜로운 방법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던 사람들의 경향에 항상 적합하고 호감을 갖게 하는 일화, 비유, 암시를 사용하면서 당신의 교의를 가르쳐 주셨다.
흥미로운 문학작품은 가장 많이 확산되고 선호하는 출판양식을 이룬다. 한 부류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곧 신분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학생, 전문가, 학식 있는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한다. 젊은이들은 근심걱정이 없으므로 즐거운 문학작품을 즐기고, 어른들은 걱정거리를 누구러뜨리기 위해 흥미로운 문학작품을 찾고, 학생들은 교과서보다 더 좋아하며,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소일거리로 읽는다.
서점, 도서관, 가판대 그리고 가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학양식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문학작품은 가장 막강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출판물이다.
감정에 호소하고 특히 상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사람을 끌어당기고 관심을 갖게 하는 읽을거리다.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좋은 책이라면 덕을 실천하도록 강한 자극을 일으키고, 나쁜 책이라면 가차 없이 악습으로 끌어내리는 깊은 인상을 새겨준다.
사도는 그 어떤 다른 양식보다 즐거운 문학작품을 나쁜 출판물에 대항하여 좋은 출판물을 보급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출판물이 넘처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록 아주 개략적이지만 인상적인 통계가 있다.
소설류의 서적에만 국한시켜 본다면, 이탈리아에서만 연간 1만종의 소설이 출간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 각 신간은 |
1천 부에서 최고 5만 부 (특히 서점에서 소화한 부수를 통한 집계)에 이르는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한다. 이와 같이 이탈리아에서만, 매년 50만 부 이상의 대량 판매 부수를 기록하는 소설이 있다. 이런 책은 거의 모두 한 권당 두 사람 이상이 읽었을 것이다. 게다가 공공 도서관에 비치한다면 날개 돋힌 듯 읽힌다.
그런데 이 소설 중, 5분의 1도 안 될 정도만이 권장할 만한 것이고, 5분의 3은 부정적인 것이며, 5분의 1 정도는 부분적으로나마 평범한 것이다.
이 경우 ‘무기에는 무기로 대응할 것’, 또는 소설에는 소설로, 작품에는 작품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레오 13세의 지침이 되는 말을 적용해야 한다.
그밖에 즐거운 문학작품은 아주 많은 경우, 비록 간접적이지만 선의 계기를 제시한다.
도미니코 쥴리오티Domenico Giuliotti라는 한 가톨릭 작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주제 곧 (논리 안에서 구체화되는 말과 생각)은 그리스도교가 참되며 생명력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느끼게 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작품 중에, 예를 들어 「약혼자들 Promessi Sposi」의 경우는 말씀이 살아날 뿐 아니라 생명이 되고, 예술의 차원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신적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사도는 이러한 읽을거리를 나쁜 출판물의 독성에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영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든 적극적인 의미에서든, 목적 달성을 위해 사도가 준비한 즐거운 문학작품은 적어도 좋은 주제, 인간의 모든 능력을 향한 것, 매력을 느낄 만한 형태라는 세 가지 근본 특성을 갖추어야 한다.
‘주제’는 글의 양식에 따라 또는 그 작품이 겨냥하는 사람의 범주에 따라 다양해질 것이다. 그러나 주제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주제는 작품의 목적을 구체화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원칙,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 관념 등을 제시한다.
전개부분은 줄거리나 구성이 의도한 주제를 잘 증명해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전개해야 한다.
작품이 겨냥할 필요가 있는 인간의 ‘능력’은 지성과 마음, 또는 그보다 더 부수적 능력인 상상이나 감각뿐 아니라 지성, 마음, 의지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든 능력이라야 한다. 특별한 상황에 따라, 그중 하나 또는 다른 부분에 우위를 줄 수 있겠지만, 그 어떤 것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을 악에서 완전히 구하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인도하기 위해,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자기 본성에 따라 그가 아는 것을 사랑하고, 그가 사랑하는 것을 바라게 된다. 그리고 그는 지성, 마음, 의지로 |
각각 알고 사랑하며 바라기 때문에, 그는 이 세 가지 능력을 동시에 그리고 마음을 다해 개발해야 한다.
‘형태’는 이야깃거리를 형성하는 주제, 문체, 서체, 삽화 등, 이 모든 것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범주에 적합하며, 장소와 시대, 상황에 어울리고 특히 인간 본성의 특정한 요구에 부응한다면 호감을 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
주제는 성경과 역사에 바탕을 둔 이야기, 고전 걸작의 개작이나 개정, 독창적인 작품, 교훈적인 작품, 교육적인 작품, 흥미 위주의 이야기 등 아주 다양하다.
지식과 언어가 근본 목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기면서 배워 알게 된 것은 절대 잊지 않는 법이다.”라는 지혜로운 격언을 소홀히 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올바른 강세, 정확한 철자법, 더 엄격한 정통 문법과 문장론, 세련된 어휘, 구두점 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러 부분 사이의 균형, 자연스럽고 규칙적인 전이, 하나의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옮아가는 여러 부분을 구분하는 순서, 가장 중요한 것에서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면서 타당한 이념의 선택이 따라야 한다.
끝으로 이야기가 뚜렷하고 단순하며, 색조 있고 활발해지도록 생각의 명확성, 독착성, 간결성, 적합성 조화 |
그리고 일종의 우아함도 있어야 한다.
실제 사건을 다룰 경우, 그 동기와 효과에 대한 인식을 항상 명확히 하고 구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허구를 다룬다면, 그럴듯한 원칙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고안해야 한다.
역할을 맡은 인물, 사건이 전개하는 장소와 시간의 상황을 부각시키고 모든 불필요한 세부 사항은 생략해야 한다.
많은 모델 중, 세 가지 조건이 분명히 드러나는 「약혼자들I Promessi Sposi」과 「토빗기Libro di Tobia」 두 가지를 제안할 수 있다.
「약혼자들」은 세속 문학분야에서 최고의 걸작이다. 이 종교-윤리적 소설에는 만초니Manzoni가 제시한 주제가 분명히 드러난다. “오만한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무고한 사람이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반면에 권력자와 비겁한 자는 어느 날 된서리를 맞게 된다. 그후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위에 은혜롭고도 우위를 차지하는 종교가 높이 세워지니, 오직 종교만이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진정시키고, 억압하는 이들 또한 회개시키는 참된 권능을 지녔다.”
소설의 전체 구상은 그 단순함이 감탄할 만한 것으로, 모두 목적을 향해 있다. 그렇지만 더욱 생기를 주기 위해 저자는 일부 중요한 장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다. 크리스토포로 신부P. Cristoforo의 “그날이 올 것이다”, 무명인의 회개, 돈 로드리고don Rodrigo의 죽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렌초와 루치아Renzo e Lucia의 새로운 가정 등이다.
저자는 작품에서 모든 사람을 향해 이야기하고, 거의 극적인 증거를 가지고 사실을 이야기하며, 가장 다양하고도 어려운 장면을 묘사하고 또 인간에 대한 심오한 자기 인식을 드러낸다. 충실하고 생생한 방법으로 역사적 배경을 묘사하며, 여러 장소의 그림 같은 풍경 묘사, 아본디오 신부Don Abbondio, 돈 로드리고, 크리스토포로 신부, 페데리고 추기경Cardinal Federigo, 두 주인공 등과 같은 자연스러운 인물과 아주 독특한 성격을 부각시키며, 그에 못지않게 독자의 정신, 의지, 마음에 심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으니, 그 목소리는 부지불식간에 독자로 하여금 저자와 함께 생각하고 느끼며 원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작품의 형태에 관해서는 비평가들의 그 어떤 비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토빗기」는 문학의 보석이다. 거기서 제안하는 ‘주제’는, “하느님의 섭리는 비록 의인을 시험에 들게 하시더라도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이 지상 삶에서도 행복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아주 |
| 단순한 줄거리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가난하고 눈먼) 토빗과 (일곱 남편이 악귀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사라의 불운을 묘사한 다음, 하느님의 섭리가 대천사 라파엘을 보내어 토빗의 아들에게 메디아로 가서 가바엘이라는 사람에게서 10탈렌트를 받아오게 인도한다. 대천사는 토빗의 아들을 물고기에게서 구해주고, 사라를 마귀에게서 구하여 그에게 신부로 주며, 마침내 토빗에게 시력을 되찾아 준다. 이야기 전반에 걸쳐 토빗은 의로운 사람, 하느님의 섭리에 신뢰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그 어떤 인간의 능력도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의 정신은 하느님의 어지심, 천사들의 존재와 보호,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신뢰의 은혜로운 효과 등, 위로를 주는 진리를 향해 드높여진다. 의지는 거룩한 본보기를 숙고하면서 영혼 안에 생성된 느낌에 의해 선을 행하라는 초대를 받고 자극을 받는다.
작품의 형태에 관해서는 걸작이요 섬세함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는다.
저술가 사도는 이러한 본보기를 자기 모델로 삼도록 노력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즐거운 문학작품 분야의 협력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하고 요구해야 한다. 협력자들의 도움은 오히려 유익하고, 특히 소설을 쓰기 위해 그러하다. 그는 일화, 수필, 단편, 역사 이야기 그리고 특히 전기와 성인전을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 안에 간직해야 할 것이다.
어린이를 위해 쓴다는 것은 아주 드물고 힘든 예술 활동으로서, 특별한 소명 외에도 사도에게 적합한 준비와 지혜로운 활동을 요구한다.
적합한 준비란 ‘윤리적’ 준비, 곧 좋고 순수하며 쾌활한 성격을 의미한다. 특히 어린이에 대한 큰 사랑이 필요하다. 어린이를 진지하고 실제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린이를 이해하지 못하며 다룰 줄 모른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얼마나 많은 유능한 작가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감동을 주면서도 어린이를 무관심하게 버려두는가!
‘지적’ 준비는 편집 사도직이 요구하는 종교 및 세속 학문의 자질 외에, 어린이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올바른 평가, 어린이문학의 역사와 어린이 심리학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이 중요성에 대한 평가는 다음 사항을 포함한다.
-교육적 윤리적 관점: 어린이문학은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아직 비판 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 어린이에게 기본적 자양분을 제공한다.
-어른의 책임(부모, 교육자, 어린이에게 책을 선물하는 사람들): 유아기를 위한 작품의 선택과 방향이 어른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 체제: 어느 정도 학교 교육 체제에서는 문학이 교육과 양성의 기초를 이룬다.
문학사는 오래된 것인 동시에 최근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래된 것이라 함은 본성, 심리적 태도, 인식방법을 표현하는 놀이와 행동, 어린이의 판단과 행위에 대한 묘사가 고대문학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우리 시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발견되기 때문이다. 곧 호메로스Homeros에서 조반니 파스콜리Giovanni Pascoli에 이르기까지, 이솝우화에서 오늘의 비행기 묘사에 이르기까지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린이를 위한 |
문학 역시 문학 예술이 장구한 만큼 오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것이라 함은 거의 모든 현대 국가에서 이전에는 그다지 많이 탐구하지 않던 어린이세계에 대한 연구와 관찰 결과 어린이를 위해 쓴 책과 신문으로 형성된 아주 방대한 문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학은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고 서두르듯 어디에서든 신속한 진보를 가져왔기 때문에 도처에 만연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문학은 어디에서든 직접 설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설득을 통해 교육의 동인 역할을 수행하려 했으며, 항상 더욱더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면서 더욱더 예술적이기를 지향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설명하는 일반원칙에 따라 세 가지 기본 시기인 유년기, 유아기, 사춘기의 어린이 심리학 이론과 실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유아기는 어린이의 첫 6년을 포함하며 세 단계로 드러난다. 첫 단계는 출생부터 15개월이다. 무엇보다 언어 습득으로 특징지어 진다. 초기에는 별로 구별되지 않고, 뒤이어 자기네 특성에 따라 획득하게 되는 감정과, 아이가 사는 환경을 형성하는 사람과사물에 대한 인식이 점차 더욱더 명확해진다. 둘째 |
단계는 세 살에서 끝난다. 이 시기에 아이는 큰 모방자의 기질을 드러낸다. 셋째 단계는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 확대되며, 아이는 그를 둘러 싼 사람들과 맺는 다양한 관계를 보여준다.
유아기 세 단계에서 교육의 목적상 그리고 문학의 목적상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왜’라는 형태를 통해 드러나는, 채워지지 않고 고갈되지 않는 듯한 호기심이다. 여기에 어린이가 생각하는 것이나 그에게 이야기한 것과 반대되는 것 같기 때문에, 다른 이의 뜻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 드러나는 변덕스러움이 겹쳐진다. 유아기는 여섯 살부터 거의 열두 살까지 지속되는 유년기에서 꽃봉오리를 맺는다.
유년기는 교육과 지도의 시기인데, 이미 스스로 사회생활에 결부되었다고 느끼는 어린이는 신체적 활동과 윤리적 활동을 실행하는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달과 완성을 위해 쓰여지도록 이러한 에너지를 인식하고 북돋우며 요구할 필요가 있다.
유년기에 이어 사춘기가 뒤따르는데, 이 시기는 열두 살에서 거의 열다섯 살까지다. 매우 결정적인 인간 성장이 형성되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이 시기를 제2의 탄생이라고 정의한다.
지적 분야에서 사춘기는 대부분 주관적이다. 다시 말해 다소 덜 현실적이거나 |
어린이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허구에서 수정되었거나 그의 입장에서 보면 감정으로 채색된 상상의 창조다. 따라서 사춘기에는 상징과 거의 환상, 의식儀式, 외적 표징, 상징 부호를 좋아한다. 감성적인 그의 삶은 아주 풍요롭다. 호감이 에로틱한 감정으로 변하고, 때때로 불건전한 감정으로 바뀐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의지는 자주 변하기 쉽고 불안정하다.
사춘기에는 거의 하나의 상징적 계시라고 생각되는, 본성에 대한 관조에서 나오는 심미적 감정과 예술, 특히 음악과 시에서 나오기도 하는 심미적 감정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하느님에 대한 그의 개념은 심판관이라는 생각, 곧 제재의 개념에서 생겨나지만, 아직은 철학적으로 귀납법과 연역법에 의한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남성의 사춘기는 여성의 사춘기와는 다소 다른데, 여성의 경우에는 거의 지적 졸음이랄 수 있는 공상이 더 빈번하게 나타나고, 때로 울적함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것은 남성 사춘기에서는 드문 현상으로서, 남성은 더 활동적으로 운동경기나 게임에서 배출구를 찾는다.
더는 어린이도 아니요 아직 젊은 청년도 아닌 소년소녀는 사춘기 동안 그의 고유한 인격이 형성된다. 따라서 그의 요구에 상응하는 |
다양한 형태의 자기 표현을 통해 그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한편, 그러한 경향을 억압하지 말고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서 삶에 대한 올바른 개념으로 그를 인도해야 한다.
어린이문학 분야에서 저술가 사도의 활동이 아이의 종교적 윤리 양성을 지향한다면, 곧 지상의 조국을 위한 좋은 시민으로 그리고 천상의 조국을 위한 행복한 시민이 되도록 준비한다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보호하고 제작하는 일이 필요하다.
해로운 출판물에서의 ‘보호’. 이미 존재하는 고대문학과 현대 문학의 여러 가지 연속 기획물의 좋은 점이나 부족한 점에 관해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작품이 그리고 특히 현대문학이 더욱 더 예술적이며 흥미 위주로 나아갈 것을 지향하는 한, 한계를 넘어 천박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고 더 나빠진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좋고 교육적이며 윤리적인 소수의 작품 사이에서 텅 비고 실체도 없는 다른 작품이 급증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다른 이름으로 지칭할 수 없기 때문에 책 또는 신문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실제로 사도는
-소년소녀의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고, 또 학교 교과서와 독서용 책과 만화잡지를 구별하도록 일반 권위직과 종교 권위직에 있는 사람들, 가정 특히 어머니들을 |
설득해야 한다.
-교육자들이 유아기와 유년기를 위해 좋고 아름다운 문학서적이 어떤 것인지 깨우처 주어야 하는 판단기준을 중히 여기도록 납득시켜야 한다.
-설화적이든 상징적이든 고상한 예술형태를 통해 교육하고 양성하는 작품을 제시해야 한다.
-교육의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인, 이러한 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이를 알고 주의를 기울이며 사랑하게 하고, 책이 중요한 선물임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러나 아이의 필요에 부응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사도는 이러한 방침에 자기 ‘제작’이라는 적극적인 작업을 첨가 해야 한다.
제작에 있어서는 늘 자기 사명에 일관성 있게 자기 만족을 추구하지 말고, 특별한 종류의 제작에 국한시키거나 장소, 조건, 특정 나이 등 젊은 계층과 자신을 결부시키지도 말아야 한다. 사도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을 추구해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소년소녀들, 작은이들, 더 큰 이들, 가난한 이들, 부자들, 가톨릭 신자들, 이단자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결같은 열정을 가지고, 항상 자기 목적에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위해 전념해야 한다.
저술의 종류, 방법과 원천97의 선택에 주의를 기울 여야 한다.
유아기와 유년기를 위한 문학을 구성하는 ‘모든 양식’은 목적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윤리적 특성이 있는 작품이나 원칙적인 이론서 그리고 윤리적 삶을 살았거나 구체적인 삶에 관한 저술, 역사적 성격을 띤 작품이나 전기, 사회적 특징과 환경에 관한 출판물, 동화, 전설, 모험소설과 공상소설, 모험과 과학 지식에 대한 공상적인 묘사나 이야기, 대중과학 서적, 유머와 레크리에이션 서적, 시집, 저널리즘 등과 같은 성격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 가운데 사도 자신의 목적에 더 잘 부합하는 것은 그림, 이야기, 비유와 직유다. 이러한 양식은 다른 것보다 어린이들에게 더 활발하게 감정, 공상, 호기심과 유머감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림’[이나 삽화]는 본문을 앞세워야 하고 완성시켜야 한다. 이것은 특히 어린이, 어른 문맹인, 언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유익하다. 화보, 전단지, 신문 등의 형태로 소개할 수 있다. 가능하면 채색된 것이라야 한다.
어린 아이들은 소년이나 |
소녀 모델(그 모델이 성인聖人이라면 더 좋다) 그림을 좋아하는데, 그 그림에서 소년은 자기 나이에 받아들이기 쉬운 행동과 표시에 마음을 빼앗기며, 마음에 들어 한다. 이를테면 아이를 안고 있는 동정 마리아, 어머니 품에서 잠들어있는 예수, 아이들 사이에 있는 예수와 같은 성경 장면, 성인의 삶에 대한 특별한 그림, 곧 예쁜 어린 양과 함께 있는 아녜스, 장미 화관을 쓴 체칠리아, 바퀴 위의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 동정성에 대한 사랑, 예수님이 좋아하실 만한 열망, 죄에 대한 증오, 허무에 대한 경멸, 나쁜 친구를 피하는 모습 등이다.
두번 째로는 신경信經의 열두 조항, 계명, 성사, 준성사, 기도 등 신앙의 진리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쉽게 기억에 남기고 오래도록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어린이의 정신과 마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
아름답게 꾸며지고 잘 전달된 이야기는 거의 즉각적으로 효과를 낳는다. 능력 있는 사도라면 어린이의 정신에 더 고차원적인 진리도 새겨 넣을 줄 알 것이다.
어른들도 진리가 사실과 연결되었을 때 그 진리를 더욱 쉽게 마음에 새기게 된다!
‘비유’는 그 자체로 알아듣기 어려운 진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유를 통해 진리와 만나고 쉽게 친숙해진다.
비유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설명과 종교적 정서를 키우는 데 유익한 것은 ‘직유’와 ‘비교’다.
이야기, 비유, 직유와 어린이를 위한 모든 형태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복음적 방법’을 따라야 한다. 곧 단순하고 적합하며, 통찰력 있고 점진적이며 대화체라야 한다.
아이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는 비록 일화가 많고 묘사가 장황하더라도 다양하고, 늘 새롭고, 짧고, 단순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쉽게 그리고 계속 주의를 기울이며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짧을수록 윤리적 효과는 크다.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분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서 주제를 택하셨다.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나 이상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지 않으셨다. 마치 모든 시대의 우화작가들이 사용한 것처럼, 동물이나 식물이 말하게 하지 않으셨으며, 생명력이 없는 것에 사람의 감정을 불어넣지 않으셨다. 늘 참된 현실에 머무르셨으며, 현실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최상의 가르침과 윤리의 주제를 취하셨다. 예를 들어 되찾은 아들의 비유보다 더 매력적인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직유는 어린이들이 잘 아는 사물, 그들의 환경에서 다룰 수 있는 사물에서 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일반적으로 시골이나 산속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므로 어린이가 이러한 |
기계장치를 알게 할 필요가 있다.
비유 또한 아주 단순하고, 아주 분명하며, 아주 자연스러워야 한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쓰기 위해 저술가 사도가 ‘선호해야 할 원천’은 성경, 교부들, 성인들의 삶, 건설적인 전기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건을 다룰 수 있으며, 어린이의 지성에 적합하고 평이한 말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 특히 아기 예수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만족스러울 것이고 효과적일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 곁에서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고, 작은 일을 거들고자 하는 나자렛 집에 있는 예수, 그들과 함께 성전에 가는 예수를 보여주어야 한다. 율법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의 예수를 소개해야 하고, 그의 양부의 작업장에서 겸손하고 인내로우며, 아주 순종적으로 일하는 예수에 주목하게 해야 한다.
교부들의 저서와 교회 저술가들의 작품도 무궁무진한 원천인데, 그중 아주 많은 부분을 모든 시대와 장소, 모든 나이와 어린이들을 위해 알맞게 수정하고 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원천은 모범적인 어린이의 삶, 젊은 성인이나 성인들의 유아기와 어린 시절의 삶 등이다. 이를테면 성 루이지, 성 타르치시오, 성녀 아녜스, 성녀 아기 예수의 데레사 등의 어린 |
시절은 어린이들에게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린이의 모범이요 놀라운 전형이다.
이러한 세 가지 근본적인 원천에 다음과 같은 다른 부차적인 사항, 곧 역사, 일상생활, 풍습, 유명한 사건 등을 첨가할 수 있다. 역사와 일상생활은 모두 풍요로운 일화와 공적이고 친근한 일화를 담고 있으며, 저술가 사도의 펜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된다. 다만 주의를 기울여서, 적합한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해야 한다.
무의미한 내용도 있다. 이러한 것은 한쪽으로 밀어둘 필요가 있다. 교육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있고, 반면에 정신을 일깨우며 마음을 건드리는 것, 그래서 더욱 향상시키는 것도 있다. 이러한 것만을 모아들일 필요가 있다.
가족생활과 사회생활의 관습(인사, 존경의 표시와 같은 것), 일상의 사건, 자연은 어린이가 이해하도록 직유의 놀라운 요소를 제공한다.
유명한 사건도 그것이 주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영혼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무한한 원천을 소중히 여길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
비록 그 원천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이루지는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자료는 사도를 통해 늘 개정되어야 하고, 연약한 어린이가 소화할 수 있는 음식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어렵고 고된 일이지만 하느님이 약속하신 상급 외에 어린이가 따르고 기억하고 기대에 보답할 것이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도 어느 정도 보람을 얻게 될 것이다.
선교문제는 대부분 저술가 사도가 고심하고 열중하는 문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가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한다면 참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흠숭할 줄 모른 채 수억의 사람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다는 사실 앞에 무관심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과 종족이 아직 그들을 위해 구세주가 태어나셨고 죽으셨으며, 그들이 은총, 행복, 영광의 상속자로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가!
실제로 사도는 지식, 협력, 기도로 독자를 인도하면서 선교사명에 전념한다.
선교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다음 사항을 포함한다.
-교회에서 의도하는 ‘선교’라는 용어의 ‘정확한 개념’,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화로 신앙을 전하기 위한 파견.
-선교활동의 ‘이중 목적’: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을 지향하는 일반목적과 완전하고 영원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직 설립되지 않은 곳에 교회를 세우는 특수목적.
-교의적 서술적 실천적 차원에서의 ‘선교학 연구’: 일반분야에 대한 가르침은 선교적 사고가 근본 바탕이다. 곧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를 연구하는 것이므로 가톨릭교회는 성경적 교부학적 교의적 윤리적 전례적 사도적 토대인 신앙을 선포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표현방법에서 선교활동을 포괄하는 특수분야는 법률(법적 분야)과 교수법이 포함된다. 서술적 연구는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 묘사, 곧 선교기술학宣敎記述學(타종교 연구, 유비, 선교지리학, 선교 통계학 등) 연구를 말한다.
실천선교학은 실용선교학뿐 아니라 협력선교학을 말한다. 전자는 |
선교에 임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교계제도가 이미 잘 갖추어진 나라에 사는 가톨릭 신자들이 선교사들에게 제공하는 도움을 말한다.
이러한 전반적인 지식은 선교에 관한 수단과 방법과 편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통합적으로 완성된다.
선교 ‘수단’은 시기, 장소, 사람, 정치적 사회적 조건이라는 상황에 따라 복잡해지고 다양해진다. 많은 것 중에서 예를 들면 선교지역 연구의 경우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누구에게 갈 것인가? 어떤 곳으로 갈 것인가? 그 지역 사람들은 어떠한가?
선교 ‘노선’은 마음의 노선이다. 선교에 있어서 큰 성공이든 큰 실패든 대부분이 이 노선을 발견하고 따랐는지 또는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에 달려 있다. 사도들과 위대한 선교사들은 이러한 점에서, 예를 들어 사도들을 부르실 때,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실 때, 자캐오와 이야기를 나누실 때 군중을 매료시키는 방법을 통해 보여주신 천상 스승의 통찰력과 섬세함을 본받았다. 이러한 노선은 상황에 따라 다양해지며 연구, 경험, 적응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마싸이아Massaia98는 에디오피아 전 지역을 다니면서 의술을 펼쳤다. 믿지 않는 이들은 천연두를 고치기 위해 그에게 갔고, 그는 이를 그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초창기의 |
예수회 회원들은 천문학을 이용하여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고, 다른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모든 선교사는 아주 다양한 형태로 자선을 베풀었다. 그 증거로서 많은 병원, 요양원, 고아원, 학교, 구호활동 등 거의 모든 선교지역에서 필요한 일을 시작했다.
선교, 선교사, 선교사의 활동에 관한 ‘편견’과 ‘오해’는 대단히 많고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공통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선교사들은 자기 나라의 민족사상과 영향력을 퍼뜨리는 중요한 유포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앙에 반대하는 이들이 선교사를 존중하는 이유는 그들의 복음 활동이 아니라, 이 머나먼 지역에 자기 나라의 정치적 영향과 상업적 교역의 영향을 전달해 줄 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자기 나라에서는 종교인들을 박해하는 한편, 국외에서는 정치적 또는 상업적 성격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돕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 대신 해외로 민족주의만을 가져가는 선교사는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유포 내용을 오염시키고 불모화시켜버린다는 사실을 수세기의 경험이 증명한다. 그럼에도 그가 정치적 선전에 연연해하지 않고 좋은 선교사 역할을 한다면, 비록 직접은 아니더라도 자기 조국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
‘선교에 대한 지식’은 어떤 이에게는 필수적이고 또 다른 이에 게는 유익한 것이다.
선교학은 성직자, 선교사, 호교론자, 학자, 반대자… 들에게는 ‘필수적’이다.
‘성직자들’에게는 사목적 사명과 목적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도록 신학과정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선교사들’에게는 그가 미래에 전개할 활동에 대한 이론을 배우고, 이미 그보다 앞서간 사람들의 경험을 소중히 여겨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학자들’에게는 이론적 학문적 관점에서나 실천적 관점에서 선교학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호교론자들’에게는 교회의 반대자들, 특히 그들의 오류를 퍼뜨려 우리 분야에 침범하고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수확물을 약탈하는 개신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과 맞서 투쟁하는 일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
‘반대자들’에게는 그들이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선교활동을 마비시키려고 노력하기 위해 필요하다.
게다가 선교에 대한 지식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신자와 믿지않는 사람, 지배자와 종속자 등 모두에게 ‘유익’하고 중요한데, 이는 누구도 선교를 막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교회가 제시하는 지침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돕도록 만들기 때문에 필요하다.
선교 개념에 깊이 통달한 저술가 사도는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에 더 유익하다고 판단되는 방법으로 선교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선교에 대한 지식은 협력을 통해 더욱 넓어진다. 여기서 그 어느 때보다도 “모르는 것은 존중할 수 없고 도울 수 없다.”라는 말을 용할 수 있다.
협력수단 중 선교사 성소와 토착인 성직자, 후원금, 교황청 전교기구, 다른 모든 단체와 연합회 등 가장 일반적인 형태를 상기해보자.
성소: 선교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해외선교를 배가시키고 착인 선교활동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성소, 곧 쌍방에 남녀 수도자, 사제, 평신도, 남녀 교리교사가 필요하다.
저술가 사도는 성소를 고무하고 지탱할 뿐 아니라 양성을 지향해야 한다.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거룩한 이유 때문에 자기 자녀를 기꺼이 봉헌하도록 부모를 독려할 것.
-하느님의 섭리는 신자들이 재정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선교 사도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그리 유복하지 않은 조건이나 가난한 조건에 놓인 사람들 사이에 성소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이해시킨다.
-그러므로 선교단체와 선교활동을 위해 장학금, 연금, 갖가지 헌금과 같은 재정적 기부를 통해 |
관대하고 사랑에 넘친 협력에 동참하도록 설득한다.
후원금: 비오 11세는 회칙 레룸 에클레시아Rerum Ecclesioe99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거의 구걸하는 자 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고 후회하지도 말아야 한다.” 람벨리Rambelli는 「작은 선교교리Piccolo Catechismo Missionario」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선교 를 원하시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복음화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뿐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할 자기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도는 선한 사람들에게 열렬히 호소하기 위해 그들의 능력에 따라 가능한 모든 후원금 형태로 선교의 필요에 대비하도록 좋은 기회를 잡아야 한다.
‘협력의 특별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선교를 위해 개최하는 선교나 비선교를 주제로 하는 다과회(슬라이드 영사, 영화상영, 발표회, 연극, 낭송회), 성물과 제의 제작, 선교 전시회, 후원금 접수대, 선교를 위한 저금통, 사용한 우표와 사용한 엽서 수집, 은박지 등, 선교 개념에 대한 구두 및 문서 홍보, 영세자들을 위한 헌금, 선교단체를 보살펴 주는 신자들의 단체, 토착인 신학교를 |
보살펴주는 신학교, 특정선교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본당, 대목구나 지목구를 맡아 돌보는 교구, 협력하는 특정활동을 권하는 어린이 단체를 결성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가 선교를 도와주고, 관대한 사람들에게 갚아주는 방법은 말할 수 없이 많다.
선교단체: 더 나아가 사도는 열성을 다해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교황청 선교기구인 교황청 선교회,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
-다른 성직자 선교단체, 노예제도 폐지론
-모든 일반 단체와 특수 단체, 다시 말해 모든 선교활동을 도와주려는 목적을 가진 단체나 일정한 사명 또는 선교활동의 특정한 측면을 도와주는 단체.
사람들에게 선교에 대한 협력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위에 나열한 방법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심화시키는 것 외에도 이를테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협력의 의무,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의무, 이웃을 향한 사랑의 의무에서 도출되는 설득력 있고 매력 있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주제를 제시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기도’는 모두에게 항상 어떤 장소에서든 가능한, 선교를 위한 수단 중 가장 첫째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선교 협력의 의무를 환기시키는 교황청 문헌에는 선교 사도직 분야에 관해 쓰면서 기도에 중요한 자리를 내어주지 않거나 우선적으로 기도의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복음서, 신학, 역사는 형언할 수 없는 기도의 효력을 증명한다. ‘복음서’는 스승의 요청, 호소, 충고, 보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좋은 것을 청할 때 항상 들어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청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 곧 성부께 “온세상이 아버지의 이름을 기리고,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며, 아버지의 정의와 사랑의 나라가 어디에서든 인정받게 되기를 빕니다.”라고 청할 때에는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신학’은, 선교 사도직의 최종 목적인 ‘초자연적 삶’은 은총 안에서 적절한 방법을 통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이 은총은 구원의 |
길을 아는 하느님의 지혜, 그 구원을 실현할 줄 아는 하느님의 권능,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어지심에 호소하는 우리의 겸손한 기도를 통해 얻게 된다.
마지막으로 ‘역사’는 수도원과 제대 앞에서 행하는 명상을 통해,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바친 희생이 신앙 전파를 위해 기여했는지 뚜렷한 증거를 제시한다.
선교를 위한 기도의 큰 필요성과 중요성을 확신하는 사도는 사람들과 특히 어린이들과 수녀들이 추수의 주인께 당신 추수에 좋은 일꾼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하고,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천상의 빛과 은총으로 도와주시기를 청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모든 이가 주님의 기도에서 청원하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adveniat regnum tuum’라는 의미를 이해하게 해야 하며, 공적 기도와 사적 기도, 기도 사도직의 위대한 활동, 지속적인 기도로 삶을 변화시킬 필요성과 방법을 촉진해야 한다.
기도의 협력에 대한 일치는 ‘고통’의 동참으로 이어진다. 사도는 고통의 본질, 필요성과 효력을 이해하도록 설명해야 한다. 선교를 위해 고통의 나날을 승화시키고, 특히 자발적인 고통의 관대한 봉헌을 독려하며, 생명까지 봉헌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속죄와 사랑의 희생제물이 되도록 예정된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 그들을 비추고 인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사명을 |
완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기도와 활동의 협력을 통한 모든 신자의 일치는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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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에 관한 저서는 아주 다양하다. 그 가운데 지리적 배경, 종교적 배경, 전기적 배경이 담긴 서적은 권할 만하다.
첫 번째의 경우, 기본이 되는 부분은 인종 지리학과 그곳의 지배적인 윤리에 관한 것을 다루어 독자가 그 나라 국민에 대한 연민을 갖도록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두 번째 경우는 선교활동에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오직 수도자들만이 이런 활동에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경우는 위대한 선교사들의 생애와 그들의 삶을 통해 선교사명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이든 선교활동과 선교를 위한 기도로 이끌기위해 선교를 알려야 하는 이 분야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확신에서 오는 관대함이 따르기 때문에 근본목적은 하나라야 할 것이다.
학술서적도 출판 사도직에 포함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종교적 내용을 통해 직접적으로든, 세속적 내용을 통해 간접적으로든 공부는 하느님을 추구하고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가 학술서적에 마음 쓴다는 것은 거의 지도자, 다시 말해 군중을 가르쳐야 할 사람에게 마음 쓴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도자에게 마음 쓴다는 것은 아주 현명한 일이다. 지도자의 양성자이셨던 천상 스승의 귀감이 이를 증명한다.
사도는 모든 연령층과 모든 |
상황의 학생과 교사를 위한 서적, 곧 모든 학술서적, 모든 거룩한 학문과 세속적인 학문을 다룰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목적을 다 겨냥할 수 없다면, 두 가지 중 한 가지라도 늘 목표로 삼아야 한다. 곧 가톨릭 신앙과 건전한 윤리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서적에서 사람들을 보호할 것과 학문을 통해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들어높이는 일이다.
종교적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서적을 추방하는 일은 때때로 필요하다. 사실 몇몇 나라에서는 지식층이 그리스도인다운 교육과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이 학술서적을 통해 윤리적 타락과 지적 부패에 이르게 되었다. 많은 오류와 많은 이단이 사람과 사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어린이들과 젊은이들 심지어 어른들이 겪는 극심한 동요와 혼란은 한권의 교과서나 학교에서 배운 가르침이 간접적인 원인이 되는 때가 자주 있다.
공부를 통해 하느님께 들어높이는 일은 저술가 사도에게 있어 결코 어려운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동기가 명성이나 또는 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충만한 애덕에서 오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가 준비하는 학술서적은 반대자들의 서적, 반가톨릭 서적, 비가톨릭 서적이나 무관심한 서적을 압도할 만큼 우수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
영적 가치, 문학적 품위, 교육적 효과와 같은 특성을 지녀야 한다.
영적 가치: 다시 말해 그러한 서적을 선택하는 사람의 영적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되고, 학문과 종교분야에서 가능한 한 그들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어야 한다.
문학적 품위: 신앙이나 윤리적 이유가 이를 저지하지 않는 한 다양한 시대와 그 지역에서 주류를 이루는 학문과 예술의 가장 뛰어난 모든 규칙에 부응해야 한다.
교육적 효과: 시대, 장소 그리고 특수한 상황이 요구하는 방법을 통해 참된 인간, 시민, 그리스도인으로 양성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위에 나열한 세 가지 특징은 모든 서적을 통해 제시해야 하는 주제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곧 학문과 본성을 통해 하느님께 들어높이는 것이다. 이는 다양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달성해야 할것이다.
‘다양하게’, 곧 여러 학문분야에 적합할 것. 사실 어떤 것은 물리학(일반 물리학과 특수 물리학)에서, 어떤 것은 수학(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에서, 또 다른 것은 철학(논리학, 형이상학, 미학, 윤리학, 역사학)에서 도출한 가르침일 수 있다.
‘훌륭하게’, 곧 상처를 주지 않고, 지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아니 유쾌하고 흥미롭고 설득력 있으며 매력적인 방법으로 관심을 끌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학문과 예술 가운데는 의심할 여지 없이 지리학이 포함된다.
사도가 지리학을 개인과 사도직에 도움이 되게 할 줄 안다면 완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지리학을 다루게 될 것이다.
창조, 땅과 인간의 관계는 매우 다양하고 빈번하며 특히 땅과의 관계가 그러하므로 그 누구도 지리학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 없다.
지리학에 대해서는 다소 폭넓은 이론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
실천적 지식에 국한된 사람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다.) 그러나 지리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도는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주께 들어높이기 위해 이러한 보편적 사실을 가치 있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일반 지리학과 지리학의 여러 분야 (천문 지리학, 물리 지리학, 정치 지리학, 상업 지리학, 인문 지리학, 민족 지리학, 윤리 지리학, 종교 지리학)에 관한 연구 서적과 논문을 통해 독자에게 이러저러한 하느님의 진리를 상기시키면서 알맞는 방법으로 이용하도록 늘 제시해야 한다.
가끔은 하느님의 창조에 관한 가톨릭 교의를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100 곧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고, 모든 것은 하느님이 다스리시며,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다른 존재와 공존하도록, 다른 생명체와 함께 살게 하시고자, 당신의 생각을 생각하는 다른 이에게 전달하며,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시기 위해서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 목적대로 만드셨다.”101
그리고 가끔은 피조물의 선에 대해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무익하지 않으며, 근원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땅에 그리고 땅의 일부에 국한시켜서 사도는 하느님이 당신을 위해 땅을 사용하도록 인간에게 |
선사하셨다는 것을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연구와 관상, 자연과 자연의 각 부분에 대한 단순한 관찰을 통해 사람을 하느님께로 들어높일 수 있는 기회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쾌청한 하늘, 꽃들의 아름다운 환호, 새들의 지저귐, 태양에 누렇게 익어가는 곡식, 푸른 바다의 광활함 등이 우리를 데려가지 못할 만큼 드높은 곳이 있겠는가?
자연이라는 책은 모든 범주의 사람, 모든 연령층, 모든 삶의 조건을 위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특히 순수하고 단순한 영혼의 소유자는 자연이라는 책을 읽고 또 이해한다.
예를 들어 산山은 피에르 조르조 프라싸티P. G. Frassati의 영혼에 강렬함을 불어넣었다. 그는 산에서 창조주의 위대함을 관상했다. 하늘을 배경으로 뾰족하게 우뚝 솟은 그 바위에서 세상을 벗어나 하느님을 만나는 쉬운 방법을 찾았다. 그곳에서의 기도는 더욱 감미로웠으니, 자신의 목소리가 자연의 목소리와 하나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창조된 세상은 하느님 안에서 정신과 마음이 황홀해지는 하나의 조화로운 노래였다.
그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을 말해준다.
오, 사도는 창조주께 창조의 [찬미가]를 읊어드릴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하늘의 노래, 별과 땅, 자연의 모든 노래에 자기 마음의 노래를 |
합치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사도에게 있어서 지리학은 하나의 특별한 과제를 지닌다. 곧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을 알게 하시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되게 하소서.”102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기여하기 위해 자기 존재를 알도록 분발시키고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목적 방법으로 지리학을 소개하고 그것을 사랑하게 할 필요가 있다.
지리학의 개요와 논문이 일반과학 소식과 함께 사람의 학문적 윤리적 종교적 상황에 관한 발전을 가져다준다면 사목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학문적 상황에 대해서는 단순한 교육차원의 소식으로는 불충분하다.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개념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생각, 현재의 철학사상, 결과적으로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또는 중성인지 저널리즘과 출판 전반의 상황을 제시해야 한다. 학교, 교사 (가톨릭 신자들,
특히 |
수도자들이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지), 영화, 라디오 등에 관한 정확하고 특별한 정보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그 글의 성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학문적 상황처럼 윤리적 상황도 나라마다 다양하다. 모든 민족은 모든 개인이 그러하듯 저마다 고유한 특성, 고유한 전통, 고유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어려움, 그리스도인의 삶과 가톨릭에 대한 희망, 이를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한 방법을 밝히 드러내야 한다.
실제로 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질문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일부에 대해서라면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정당정치를 하는가? 윤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정치체제는 그리스도교적인가? 통치자들은 어떤 종교를 믿는가? 정치풍토는 건전한가? 사법부는 올바른가? 법률이 공중도덕을 보호하는가? 상거래와 계약체결에 도덕이 지배하는가? 계층과 신분 간에 협력하고 투쟁하는가? 교황청과 의 관계는 어떠한가? 가정에서 정직하고 평화로우며 서로 존중하는가? 개인이 방종과 위험, 쾌락을 피하는가? 다른 사람의 명예와 인격과 재산을 존중하는가?
마지막으로 ‘종교’에 관해 특별히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믿는 다양한 종교, 가톨릭 신자, 성직자, 수도자의 숫자 , 조직 , |
진보, 어려움과 수월함, 선교사들의 숫자, 그들의 활동과 단체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특별히 선교지역에 대해 다루면서, 교회의 교화 사명에 대해, 선교활동이 인류 발전에 미친 학문적 지리학적인 지대한 공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선교사는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에 신앙과 사랑의 불꽃을 피우는 사도일 뿐 아니라, 인류 발전의 지대한 공로자인 동시에 탐험가, 과학자, 개혁자, 문명의 교화자라는 것을 상기함은 이로운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호감이 가는 방법으로 소개하여 사람들이 분발케하고 거룩한 이상에 젖게 해야 한다.
출판 사도직이나 선교 사도직을 준비하는 학생을 위한 책을 준비하는 일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대부분 젊은 학생들의 정신이 원대한 이상과 그들의 눈이 광활한 활동 지평을 향해 열리도록 기여하는 바를 다룰 것이다.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기도와 희생과 자선활동이라는 |
애덕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 사제의 사명, 수도자의 사명 그리고 관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얼마나 숭고하고 광범위한지를 알게 해야 한다.
종교와 무관한 한 예가 도움이 될 것이다. 프랑스 역사학자인 테느Taine는 자신이 그동안 몰두하여 지리학에서 얻은 연구 결과의 많은 부분을 위대한 정복자인 나폴레옹에게 제공하여 그로 하여금 세 개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상상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첫 번째 지도는 참모본부의 지도처럼 자세한 지형도를 방대하게 수집하여 만든 군사지도로서 요새의 세밀한 평면도와 육군과 해군등 모든 군대, 모든 군수품, 연대, 포병대, 병기고, 군수품 창고, 현재와 미래의 보유 인원, 말, 마차, 무기, 탄약, 식량과 이와 유사한 사항에 대한 상세한 배치도다.
두 번째 지도는 국가 대차대조표를 포함한 두꺼운 책과 같은 문화 지도로서, 일반 및 특별 수입과 지출, 세금, 국유재산, 연금, 공공사업에 관한 모든 것이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민사권한의 계보, 교회의 교계제도, 사법, 각료, 각 기관장, 교수들의 모든 계보 및 각자의 직위, 거주지, 권한, 급여 등이 나와 있다.
세 번째 지도는 거대한 인명사전 및 윤리 사전으로서, 마치 경찰서의 기록보관소처럼 모든 저명인사, 모든 지역의 단체, 모든 직업 |
또는 사회계층 그리고 각 사람의 현재 조건, 필요한 사항, 이미 행한 활동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그의 특징, 미래에 취할 수 있는 태도와 예상되는 행동 등을 요약하여 명시해 놓은 각 사람의 작은 서류함이 들어있다.
정복이 끝날 무렵에는 이 세 개의 지도가 더 확장되었음에도 그 전체가 여전히 위대한 나폴레옹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그는 전체적인 개요와 특별한 요점까지 알았을 뿐 아니라, 모든 세부사항까지 숙지하고 있었다. 그는 늘, 매시간 그것을 읽었다. 자신이 직접 다스리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다스리는 다양한 나라, 그가 정복했거나 거쳐 간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부분과 종합적인면을 보았다. 처음에 프랑스는 벨기에와 피에몬테로 확장했고, 그 다음은 그가 머물렀고 귀환했으며 자신의 형제 조제프Joseph에게 맡긴 스페인으로 확장해 갔다. 남부 이탈리아에는 조제프 대신 뭐라Murat를 임명했고, 로마가 위치한 중부 이탈리아와 북부 이탈리아에는 그의 부책임자인 에우제니오Eugenio를 앉혔다. 그의 제국에 합병시킨 달마티아Dalmatia와 이스트리아Istria, 두 번에 걸쳐 침략한 오스트리아, 그가 조직해서 이끌었던 라인 연방Confederazione del Reno, 그의 형제인 루이Louis와 제롬Gérom을 총독으로 임명한 웨스트팔리아Westfalia와 네덜란드, 승리한 후에도 손에 넣지 못한 프러시아Prussia는 |
요충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것이 위대한 정복자의 비결이다.
성 바오로와 그리 다르지 [않다.] 성 바오로를 다음과 같이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 이방 세계의 지리학적 파노라마에 눈길을 두고, 밤낮으로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소진하고 변화시키는 거룩한 향기를 모두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 애쓴 사람이 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03 하신 명령을 수행하는 모든 사도의 영혼은 이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개인과 사도에게 도움을 주는 지리학은 만물의 첫 근원이요 궁극 목적이신 하느님께 정신, 의지, 마음을 인도하는 데 걸맞는 수단이기에 하느님의 더 큰 영광과 사람들의 더 큰 선을 위해 기여한다.
출판 사도직은 그 특수목적에 따른 작품을 제작하는 데 국한되지않고, 다른 것 중에서도 국제 출판물과 국내 출판물, 특수 출판물 제작에 관해 사람들의 정신과 양심을 이끌어 주는 과제도 떠맡는다. 이 점에 있어 나쁜 출판물을 단죄하고 좋은 출판물을 지지한다는 이중의 목표를 제시한다.
5대륙에서 매일 수백 권 그리고 수천 권의 책과 잡지가 출간된다는 사실이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목표가 필요하다. 좋은 교사 나쁜 교사, 거짓 교사 참된 교사냐에 따라 선이나 악, 진리나 거짓을 가르친다.
가르치는 교회는 이처럼 방대한 모든 출판물을 즉각 통제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그럴 수도 없고 또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 대신 사도는 교회의 지지, 교회와의 의존관계를 통해 그 일을 할 수 있다.
목적에 더 적합한 활동은 물론 국제 출판물과 국내 출판물을 위한 서지학 잡지와 특수 출판물을 위한 서평이다.
서평에 대한 주제는 다음 장으로 미루고, 지금은 두 가지로 제시하는 서지학 잡지에 관한 주제를 다루기로 한다. 하나는 국제 출판물을 위한 일반 잡지고, 다른 하나는 국내의 지역출판이나 특별한 양식과 저자의 출판물을 위한 잡지다.
전 세계 출판물 (적어도 영향력 있는 출판물) 제작은 사람들의 정신과 양심을 이끄는 것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출판물에 대해 그리스도교적 원칙에 토대를 둔 권위 있는 의견을 표명하고, 그런 다음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특히 교회와 사회에서 대중과 독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잡지는 대단히 광범위하고 매우 섬세한 성격을 띠고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다음 사항을 제시한다.
1. 가톨릭 · 복음적 · 그리스도교적 원칙에 따라 출판분야에서 전개하는 모든 활동을 검토한다.
2. 필요한 신학적 지식을 제공하고, 확실한 길을 제시하며, 거짓 학문에서 참된 학문을 구별하고, 자연과학에 계시의 빛과 희망을 비추어 주며, 새로운 필요에 가톨릭의 가르침을 적용한다.
3. 현대사상의 분위기를 알기 위해 어떠한 작품과 정기간행물이 적합한지 지시하고, 아직 논의하고 있는 주제와 이제 결론에 이른 주제 및 이론異論이 없는 주제를 언급한다.
4. 배제해야 할 주제와 작품, 다루어야 하고 보급해야 할 기품있고 중요한 주제와 작품에 관하여 저술가, 편집자, 서적 판매원, 보급자를 비추고 인도한다.
5. 사람들을 오염시키는 원천에서, 부도덕한 그릇된 선생에게서 보호한다.
6. 독자들에게 그리스도교적 사상과 거룩한 삶의 원천에 대해 명시한다.
7. 결국 자신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비추고 돕고구원하기 위해 출판을 이용하도록 초대한다.
이렇게 고안한 하나의 잡지를 집필하기 위해서는 한 개인이나 독립된 개체로는 부족하다. 권위 있게, 정확하게, 명료하게, 시의적절하게, 공평하게 검토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 있는 편집자들의 단체가 필요하다. 매일 수없이 발행되는 모든 학문, 모든 형태, 모든 문학 장르의 출판물을 검토하고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수 잡지란 잡지형태나 평론잡지 형태일 수 있다. 이것은 저술가, 출판업자, 서적상, 보급자 그리고 특히 책임을 맡은 부모, 교육자, 사서, 사목자를 인도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면에서 실천적 목표를 지니고 있어 때때로 필요하며 실제로 매우 유익하다.
이러한 종류의 잡지로 이탈리아에는 카사티Casati104의 「독서잡지Rivista di Letture」가 있다. 특히 윤리적 종교적 측면에서 대중 서적의 내용을 평가한다는 목적을 갖는다. 따라서 대중의 독서를 안내해야 하는 사람을 위한 실천적 규칙을 제공하고, 주의 깊게 읽어야 할 책, 곧 어른을 위해 유보된 책이나 특별한 독자층을 위한 책 그리고 가톨릭 도서관에 넣어야 할 책을 분류해야 한다.
언급한 잡지는 길고 고달픈 작업 결과로서, 해로운 독서의 심각한 위 험 에 서 비 전문가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이 있다. 건전한 원칙에서 영감 받은 작품을 읽도록 제시하고, 부모, 사서, 교육자와 영혼의 지도자에게 실천적이고 확실한 안내가 된다.
종교적 대중적 분야에서 열성적인 이탈리아 사제가 제시하는 본보기는 지적 목적이든, 윤리적 경제적 또는 여가 선용의 목적이든 모든 종류의 제작물을 위해 아마도 모든 나라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특수 잡지는 일반 잡지의 목적과 동일해야 하고, 동일한 특징을 지녀야 한다. 곧
권위: 이 때문에 작가, 편집자, 서적상과 독자는 아무런 동요 없이 확신과 비추임을 얻게 된다.
정확도: 주의 깊은 검토와 객관성에 상응하는 판단.
명료함: 사상적 윤리적 그리고 예술적 가치에 관한 균형있고 확실하며 판단이 정확하다. 실제로 이러한 점은 가장 중요한 특징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곧 ‘사목적’, ‘객관적’ 특징으로 (난해한 표현으로 과시하거나 쓸데없는 과찬, 굴욕적인 지나친 비난이나 단순한 문학비평도 아닌, 그야말로 균형 잡힌 객관적 판단이어야 한다.)
시의 적절함: 이를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출판물에 대해] 제때에 현재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고, 그들에게 도달하는 신간 앞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공평함: 잡지의 명성과 그에 따른 보급을 보장해 준다. 잡지는 이를테면 어떤 저자나 편집자에게, 어떤 단체나 정당에 ‘매수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시대와 상황이 잡지의 표제, 발행 간격, 특성을 시사할 것이다.
여기에서 ‘서평’이라는 용어는 작품의 장점과 가치에 대한 판단과 더불어, 새로운 작품에 대한 ‘논평’이라는 과학적 의미와 ‘비평 심사’라는 실천적 의미를 지향한다.
출판 사도직에서 서평은 독자와 보급자를 위한 실제적인 도움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전자가 책의 선택을 통해 비추어 준다면 후자는 보급을 지혜롭게 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완전한 서평’, ‘양심적인 서평’, ‘전문성을 갖춘 서평’105이라야 한다.
서평이 저자, 작품의 제목, 출판사, 판형, 인쇄 디자인, 페이지 수, 내용 요약 및 사상적 윤리적 예술적 가치에 대한 판단을 제시한다면 완전하다.
새로운 작품의 ‘저자’는 알려진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때때로 이름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대신 다른 많은 경우에는 저자의 양력을 상기시키는 것과 이미 대중이 알고 있는 작품을 나열하는 것이 유익하다.
어떤 특정한 작품으로 유명한 저자일 경우, 예를 들며 「고백성사와 영적 지도의 점진적 실천Pratica progressiva della Confessione e della Direzione spirituale」106의 이탈리아 저자에 대한 것처럼 그 작품을 언급하면서 저자를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저자, 비록 학식이 깊은 저자도 당대에 존경받지 못하거나 그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거나, 반대에 휘둘려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 알폰소에 관한 예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작품은 비난받았고 동시대인들이 공개적으로 불살라 버렸다.
저자에 대해, 곧 그가 생존자인지 또는 이미 사망한 사람인지, 국적, 신분(평신도, 성직자, 수도자인지), 그의 삶에 대한 몇 가지 특기사항과 공적에 대해 그리고 그의 작품의 가치 등 세부사항을 제공하는 것은 아주 유익하다.
‘출판사’는 일반적으로 인쇄소다. 이러한 사실에서 |
흔히 기술적인 면과 같이 내용에 관해 그 책의 특징을 추정할 수 있다. 잘 조직된 모든 출판사의 출판물은 다른 출판사와 구별되는 고유한 자신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판형’, ‘페이지 수’, ‘가격’도 서평에 명시되어야 하는데, 독자들은 자주 이러한 정보를 얻기 원하기 때문이다.
‘내용’은 독자가 서평에서 주제의 완전한 개념과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대한 생각을 얻을 수 있도록 충실히 그리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야 한다. 따라서 흥미로운 문학작품을 다룰 때에는 요약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내용을 요약 · 제시하기 어려운 작품을 다룰 때에는 차례나 전체적인 도식을 소개해야 한다.
‘판단’은 작품의 내적 가치와 외적 가치에 관한 것이다. 내적 가치는 적합성과 종교적 과학적 의미에서 내용을 다루며, 작품의 특징을 부각시켜야 한다. 외적 가치는 미적 관점에서 다룬다.
사도가 내려야 할 판단은 반드시 사목적인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직접적인 대상이나 권할 만한 사람의 특정 범주를 실제적으로 언급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보급의 실용적 수단을 제시해야 한다.
서평은 사람들에게 정의正義와 관련된 일련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서평가는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곧 ‘양심적으로’ 읽을 것. 특히 소설, 설화의 부적합하거나 모호하거나 미흡한 표현이나 단어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 다른 작품을 다룰 때에는 작품 전체를 ‘철저하게’ 읽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 논평해야 할 작품의 저자, 출판사 또는 양식에 대해 가질 법한 호감이나 반감에 따라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 사도는 자신의 흥미나 다른 사람의 기호를 찾지 말고, 오히려 작품의 참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작품에 결함이 있는데도 과도한 두려움으로 인해 지적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 작품이 모든 측면에서 좋은 것인지 구별할 때 ‘명료해야’ 한다. 그리고 특별히 어떤 부분이 권할 만한지 아니면 결함이 있는지, 연구하는 사람이나 성숙한 사람들과 같은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을 위해 적합한 것인지, ‘전부 허사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수정이 필요한지, 겨우 봐줄 만한지, 또는 절대로 배제해야 하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 작품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범주의 사람들을 명시함에 있어 ‘정확해야’ 한다.
출판되었다는 |
이유만으로 출판된 작품을 너무 신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많은 사람이 판단하고 선택할 줄 모르는 채 무슨 작품이든 경솔하게 다 읽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가톨릭 관점에 ‘기초’ 하고 뛰어나게 집필한 것이라 해도 모든 책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성숙한 사람에게는 아주 유익하겠지만, 젊은이에게 권하기에는 부적절한 작품일 수 있다. 오해하지 않고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교육수준, 일정한 준비와 경험이 필요한 책도 있다!
그리고 ‘소년소녀를 위한’ 책을 서평하는 데에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것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잘 모르는’ 책이 그들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하고, 그들이 동료에게 정보를 얻도록 부추기는 일이 허다하다.
그들을 혼란시킬 만한 것은 아예 없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이야기 자체는 전혀 나쁘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공상으로 이끄는 모험담은 권할 만한 것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 반대할 여지가 없지만 때로는 그림이 전혀 맞지 않을 때가 있다. 어른에게 적합한 주제를 다루면서 형태나 그림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하느님과 자기 자신과 사람들 앞에서 |
자기 책임을 이해하고 서평하는 사도는 논평해야 할 작품의 모든 요소를 항상 신중하게 숙고해야 하고, 득실을 평가해야 하며, 최소한의 단어로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방법으로 표현하도록 주의하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판단을 종합해야 한다.
위에 나열한 내용으로 보아, 서평은 무능한 사람이 실행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오직 한 사람이 모든 분야의 서평을 독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자는 해당분야에 관한 부분만 담당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서평가는 저자를 판단할 수준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학술서적 저자의 서평을 한다면, 그가 다루는 주제를 폭넓게 알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 분야의 교육 경험이 있어야 한다. 학술서적 저자의 작품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서평이니만큼 이러한 특성이 더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의 작품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상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분명한 사상이 필요하고 자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도는 세상에 범람하는 수많은 출판물에서 선이나 악을 분별할 줄 알고, 사도직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비추어 줄 수 있는 판단 |
기준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판단기준은 한시적이거나 개인적이어서는 안 된다. 확실해야 하며, 특히 종교분야에서는 절대규범을 확립시키는 기준이어야 한다.
신앙에 대한 주제에 있어 절대적 기준은 교의다. 계시된 진리에 대해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토론만 벌이거나 조롱을 허용하는 출판물은 말할 것도 없이 거부해야 한다.
관습에 대한 주제의 절대기준은 윤리법(자연법, 십계명, 복음, 교회법)이다. 이러한 법에 반대되고, 관습에 반기를 드는 출판물은 금해야 한다.
실제적으로 이와 같은 출판물은 가능하면 교회법과 금서목록에 명시된 대로 그리고 교회 검열기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교회의 판단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특별한 경우 다음과 같은 다른 실천적 판단기준이 유익할 것이다.
- 저자
- 출판사
- 상식
- 출판물의 간행 시기. 다른 시대와 관련된 판단을 자기 시대의 |
사람들과 사물에 적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 출판물이 간행된 배경
- 출판물이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의 특정 계층
- 출판물을 넘겨 받아야 할 사람들의 연령, 성별, 교육 수준 그리고 특히 종교적 도덕적 양성.
정치학과 사회과학(사회학, 법학, 경제학), 철학은 신앙, 자연 윤리, 그리스도교 윤리의 수호와 전파가 필요할 때 저술가 사도가 다룰 수 있는 주제다.
다음 규범은 필요할 경우 일반적 방법이 될 수 있다.
복음은 이에 관해 명확한 규정을 지니고 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107 |
이는 비둘기의 단순함을 겸한 뱀의 술기로움으로 사도가 따라야 하는 규정이다.
특별히
1. 사도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두 개의 완전하고 독립된 사회요, 각기 영역이 있으며, 공통의 주체가 있다. 이 두 사회 사이에는 반대나 평행선상에 있기보다는 조화가 있어야 한다. 종교에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가 교회에 종속되어야 하고, 간접적 소극적 적극적 의존관계를 갖는다.
2. 사도의 정치학은 교황의 정치학과 같은 노선을 취해야 한다. 신앙과 윤리를 다룰 때에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행해야 한다. 가) 부당하지 않은 법에 순종해야 하고, 복종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나) 부당한 법일 경우, 충실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법에서 면제된다. 그리고 표현과 출판의 자유가 주어진 경우라면 하느님, 교회,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활발하게 주장해야 한다. 직접 방어활동을 할 수 없을 때는 기도와 희생에 의지해야 한다.
여기서는 사회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특히 사회학, 법학, 정치 경제학 세 가지가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과학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방법과 우연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사회과학은 사회 구성원인 인간의 행동을 절대적 윤리적으로 다룬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윤리부분에 속하며, 따라서 사도직의 고유하고 직접적이며 당면한 주제다. 가톨릭 저술가는 마치 성 토마스와 성 알폰소가 이 주제를 다룬 것처럼, 자기 주제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상황에서 그리고 기술적으로 다음 사항을 다룬다. 사회 사건을 일반법으로 풀어내는 방법(사회학) -법률과 그에 대한 연구의 모든 것(법학) - 부富, 정치, 정의에 따른 사회운동을 운영하는 예술(경제학).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과학은 사도직의 간접 대상으로서, 사도직은 신앙과 종교를 거스르는 그 어떠한 것도 행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칠 필요가 있을 때 이를 다루게 된다.
사회과학은 물질적이고 유한한 것이 영적이고 영원한 것을 지지해야 하듯이, 교회와 종교에 그런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사도는 어떤 경우에든 교황의 가르침에 포함된 복음의 사회적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사도는 세상 안에서 교회의 가르침과 사회활동에 관한 교황청 문헌을 규범과 길잡이로 이용해야 한다.
이 문헌 가운데 가장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교황 비오 9세에서 |
비오 12세 사이에 반포된 교황문헌을 꼽을 수 있다. 77년이라는 그 기간은 지금까지 가장 큰 정치적 사회적 격변의 시기였으며, 그 시기의 교황문헌들은 주로 사회를 재건하려는 교회의 열망과 인간의 인격, 가족, 가르침, 일, 자본, 소유권, 사회관계, 국가, 교회에 관해 다룬다.108
철학 특히 윤리학은 사회과학 분야에 속한다.
사도는 철학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룰 수 있다.
첫 번째 경우는 교회에서 |
받아들이고, 가톨릭 신학 토대와 골격을 구성하는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철학을 따라야 한다. 사도는 물론 두드러진 반대 철학 체계를 설명할 수 있고, 사상의 분기점을 강조할 수 있으며, 그 철학의 슬픈 결과뿐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부분을 지적할 수도 있다.
그 대신 간접적으로 다룰 경우에는 자기 주장을 유지하면서도 건전한 철학을 따라야 하며,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도움과 증거109에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철학이야말로 참된 철학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것은 사도의 의무다.
사실 참된 철학이라는 이름은 우주, 자연과 인간생명의 문제에 관해 오류가 없는 걸맞는 이름이다.110
그리고 그리스도교 철학만이 이러한 모든 오류에서 자유롭게 하는 계시의 빛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특권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리스도교 이후에만 철학이 삶에 관한 근본문제에 대한 오류를 피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빛을 통해서만 성 토마스 데 아퀴노와 영원한 철학의 추종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놀라운 진보가 가능했다.
정치학과 사회과학, 철학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모든 인간의 두 가지 위대한 의무로 대중을 |
이끄는 수단이 될 수 있기에 이 학문들을 그 의미대로 다루어야 한다.
여기에 나열한 특별 규범은 다른 학문, 특히 전문적인 학문을 다루기 위한 안내로도 이용할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다시 말해 생각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거나 표현하는 그림, 도형은 그것의 심리적 잠재력을 고려할 때 그리고 알맞게 사용했을 때 사도직에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미美적인 의도 외에 그 어떠한 양식이든, 그리고 소개하는 형태가 어떻든 일러스트레이션은 생각을 분명히 밝히는 것, 의지를 움직이는 것, 감정에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라는 세 가지 목표 중 적어도 |
한 가지를 제시한다.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인간은 언제나 이해뿐 아니라, 쉽게 동화107되도록 비록 거친 목판화나 동판화일지라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사건을 이론과 문학적 과학적 대중적 작품을 설명하고 동반할 필요를 느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모든 분야에 열려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초자연적 자연적 세상을 향해 개방된 문과 같다.
사실 삶과 세상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움, 힘, 지혜와 업적을 표현하고 설명하고 보여주듯이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가장 높은 진리인신앙, 윤리, 은총을 표현하고 설명해 준다.
인간의 크나 큰 열망 중 하나에 상응하는 초자연적 영적 자연적 세계를 감지할 수 있게 해주고, 비록 상상의 형태지만 경이롭고 도달할 수 없는 하늘의 숭고함과 바다의 심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그 밖에 있는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했던 모든 것, 아주 먼 미래에 존재할 것까지도 제외시키지 않고 관상할 수 있게 한다.
그뿐 아니라 교훈, 교육, 양성 분야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의 가치를 고려한다면, 글이나 인쇄된 것보다 훨씬 뛰어나고 위대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책 한 페이지가 비록 잘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일러스트레이션이 파놓을 수 있는 고랑보다 더 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독서는 상상을 감동시키지만, 일러스트레이션은 눈을 감동시킨다. 그래서 솔로몬이 쓴 바와 같이 “반짝이는 눈은 마음을 즐겁게 한다.”113
그러므로 일러스트레이션은 상상, 욕구, 지성과 의지에 말하기보다 먼저 호감이 가는 방법으로 감각에 말을 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좋은 철학이 가르쳐 주는 것과 같이 지성은 “우리에게 현실을 형성시켜주는 이미지의 변화를 통해”114 이해하기 때문에 인쇄물 자체가 갖지 못하는 더 매력적인 암시의 힘을 갖는다. 관념은 감각을 통해 그리고 바로 그 감각이 제시하는 이미지가 인상적이고 더 생생한 만큼 더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마음[속에] 스며든다.
인간의 모든 천재적 발견처럼 일러스트레이션 자체는 진리와 거짓, 악습과 덕성, 하느님과 사탄에 이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힘이다 .
사도의 손을 통해 초자연적 수단, 은총에 협력하면서 지성을 |
신앙으로, 의지를 삶의 성화로, 마음을 하느님과의 일치로 자극시키는 아주 강력한 자연적 수단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에서 항상 [성화]에 대한 공경을 선언했고 옹호했으며, 옳음을 증명했다. 이러한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성 요한 다마스쿠스의 작품과 제4차와 제8차 세계공의회 교령을 읽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한편 매일의 경험뿐 아니라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역사와 관습이 이를 입증한다.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비주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영적 요람기와 다른 고결한 가르침 등을 가장 단순한 사람들에게도 접근하기 쉽게 해주었다.
단순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강생의 신비와 같은 가장 높은 신앙의 신비를 어린이들도 납득하도록 도와준다.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그림 앞에 서면 하느님의 섭리와 정의의 참된 의미를 수락하도록 이끄는 초자연적 힘을 느끼게 된다.
계명들에 대한 묘사, 성인들의 생애와 덕행에 대한 그림은 선에 대한 의지의 확고한 제안을 쉽게 깨닫게 한다.
신실한 영혼에게 유보된 상급과 불충한 이에게 주어질 징벌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순교자들과 증거자들과 같이 |
하느님을 위해 일하고 고통받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은 계명 준수, 그리스도교적 덕의 실천, 수도서원 실천에 합당한 하느님 뜻을 관대하게 끌어안도록 자극한다.
십자가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도 위대한 책이다. 계명들에 대한 그림은 사람이 계명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마음을 갖게 한다. 미사나 묵주기도의 신비에 대한 그림은 신심, 명상, 신앙, 애덕을 불러일으킨다. 십자가의 길에 대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사랑, 고통, 겸손, 기도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성모 마리아, 성 요셉, 천사, 성인들의 성화는 모든 사람을 초대하며, 교양 있는 사람들까지도 매우 우아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복자 안젤리코의 성모 마리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레포의 예수 성심 성화 앞에서 그 누가 감동하지 않겠는가?
교의, 윤리, 성사, 준성사, 기도는 예술을 통해 굳게 결합되어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을 많이 사용하라.’ 하나의 그림은 하나의 논문, 한 권의 책에 비길 만한 가치를 지닌다.
예를 들어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 미개인,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위해 창조,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 |
죽음, 부활, 성령강림, 십계명, 칠성사, 사말 등 52개의 성화만으로도 신앙의 핵심을 모두 줄 수 있다.
자연적 초자연적 질서에 대한 모든 주제는 화가를 설교가, 선교사, 스승의 품격으로 고양시킬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선용하라.’ 일러스트레이션을 기록된 본문에이 용 할 때 에 는 저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약혼자들I promessi Sposi」을 일러스트레이션화해야 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저자가 제시한 주제와 일치되게 해야 할 것이다. 오만한 권력자들에게 핍박당하는 무고한 이가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반면, 오만한 권세가는 어느 날 하느님께 벌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토포로 신부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면서 “그 날이 올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장면, 페스트에 걸린 돈 로드리고가 렌초에게 용서를 받고 죽는 장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첫 요람에서 기뻐하는 아녜스와 함께하는 렌초와 루치아의 새 가정 등, 중요한 장면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책이든 단순한 기사든 하나의 본문을 설명하는 그림은 그 본문의 근본 목적을 설명해 주어야 하고, 확인시켜 주어야 하며, 가르쳐 주어야 한다.
사도가 직접 제작했거나 감수한 모든 일러스트레이션은 교의적 윤리적 전례적 목적을 제시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세 가지 모두를 함축해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예술적으로 사용하라.’ 일러스트레이션은 |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위험한 원칙에 반대하여, 진정한 의미에 서 아름다워야 한다. 또한 대상자의 수준에 맞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대중적일 수도 있지만 항상 품위 있게 표현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화가를 성스럽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유념하면서 목적에 맞게 그리고 아주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여기서 ‘출판기술La tecnica nella stampa’이라는 표현은 문학형태 외에, 원고가 확장하도록 필요한 조판, 인쇄, 포장, 발송 등 종합적인 활동과 알맞는 방법으로 독자에게 도달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출판사도직의 둘째부분이다. 품격으로 치자면 편집부분과 보급부분에 비해 낮다. 그러나 말씀을 배가하고, 고정시키고, 가시적으로 만들고 아름답게, 갖고 싶게, 매력 있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좋은 문학형태와 호감이 가는 인쇄 디자인은 사도직의 귀중한 공통요소다.
실제적인 기술의 중요성을 확신한 다음, 사도는 사도직을 위해 우수한 작가를 찾고, 시대의 요구에 따라 출판을 위해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일에 마음을 쓰며, 건전한 독서의 진가를 알고 사랑하며 흡수하도록 독자의 취향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도직에는 우수한 작가가 필요하다. 사도가 목표로 하는 하느님의 영광이 이를 요구하고, 사도가 대상으로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이를 요구한다. 사도가 다루는 대부분의 주제가 이를 요구한다. 끝으로 스승이요, 아버지요, 사도인 저술가 자신의 품위가 이를 요구한다.
우수한 작가는 예수 성심 안에 깊이 젖어 있어야 하며, 최상의 문장 규칙에 따라서 종이 위에 옮겨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사야 하는 우수한 작가는 사람의 지성을 만족시켜야 하고, 의지를 잡아당겨야 한다. 작가는 그가 대상으로 하는 사람의 시대, 환경, 주제, 계층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한다.
작품이 얼마나 많으며, 또 오늘날 얼마나 많은 작품이 독자들의 경탄을 자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불쾌감, 따분함, 무관심, 때로는 분노케 하는지!
마치 인내를 가지고 읽도록 요구하는 듯한 가톨릭의 어떤 좋은 출판물은 더 뛰어난 한 출판물이 힘겹게 쌓아올린 명성을 감소시키기도 한다.
저술가 사도가 사용하는 예술형태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우아한 것이어야 한다.
인간, 기계, 경제적 수단을 이용하여 학문과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과 복음을 위해 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최고의 출판인들을 선택해야 하고, 그들 가운데 출판 사도직을 위한 출판작업의 목적을 그들 신분이 요구하는 자기 성화의 주된 목적에 일치시키는 남녀 수도자를 선호해야 한다.
한때 수사들은 옛 양피지 사본을 베끼는 일로 그들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성 바오로의 제자들은 그의 편지가 모든 사람에게 도달하도록 배가시켰다. 수도자들,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하느님 말씀을 증가시켜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그 말씀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다.
사도직을 위해 그들의 재산을 내어놓는 부유한 평신도의 활동이 이러한 활동과 결합된다. 많은 가톨릭 활동이 지원을 받지 못하고, 다른 활동은 재정적으로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거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일은 특히 출판분야에서 증명되는데, 이 분야에서는 도움이 부족하고 아직 그 필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계라는 수단은 시대와 문명이 제공하는 가장 뛰어나고 가장 신속하며,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적합한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뉴스와 그림을 수집하기 위해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과 인쇄와 포장을 위해 가장 발달된 기계, 선교를 위해 가장 신속하고 가장 광범위한 수단이라야 한다.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사도는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께 찬미가를 드리도록, 하느님의 섭리가 그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그 목적에 맞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쓰레기에서 장미와 백합을 자라게 할 줄도 알고, 못 쓰는 휴지를 복음을 위한 종이로 변화시킬 줄 알 만큼 독창적이어야 한다.
비록 기술분야에 모든 중요성을 부여한다 하더라도, 독자에게 기술부분이 독서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자신의 미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형적인 가톨릭 신자가 아닌 저자와 출판물을 선호하는 사람은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음을 납득할 필요가 있다.
독을 금 접시에 담는다 해도 독은 항상 독이요, 좋은 빵을 대단한우아함이나 세련됨 없이 평범하게 내어놓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영양가가 없어지지 않고 유익함과 필요하다는 사실이 변하지않는다.
한 권의 책이 종교적 윤리적 |
관점에서 나쁘다면 기술형태에 결함이 있는 다른 책보다 더 많은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의 취향은 일반적으로 그리 많이 개발되지 않았다는 점과 또 자주 전문가들이 높이 평가하는 출판물이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과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반감을 일으키거나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지적 활동이 몸에 배어 있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소유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쾌감을 주는 형태와 취향, 인쇄, 포장에 결점이 있는 출판물을 오히려 그 반대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독자들의 취향을 조금씩 키우기로 결심해야 한다.
- 좋은 출판물은 비록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여전히 유익하다는 점을 이해시키면서
- 독자의 공통된 사고방식에 다가가기 쉬우면서도 흠잡을 만한 결점이 없는 출판물을 제공하면서
- 한 작품에 대해 완전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영감 받은 아이디어, 채택한 문학형태, 독서가 자아내는 감동, 책의 장정 등을 제대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사도와 독자가 기술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지닐 때 사도직 안에서 기술은 성사와 준성사를 통해 감각적 요소를 지닌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선교La propaganda는 출판 사도직의 셋째 부분으로 앞의 두 부분, 곧 편집부분과 기술부분은 이 부분을 향해있다. 사도는 목적을 변질시키는 위험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도직을 위해 일반적으로 이미 설명한 선교의 본질과 중요성과 수단에 관한 몇 가지 원칙을 전제로 한다.
사도에게 있어 선교는 천상 스승의 사도적 활동에 대한 공간적 확장이며 시간적 연장이다.
성부의 사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길 잃은 |
자녀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기 위해 하늘에서 오셨다. 당신의 신적 사명을 완수하신 다음, 당신의 활동을 계속할 과제를 사도들을 통해 교회에 맡기신 후 성부께로 귀의하셨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현존하시고, 성무를 통해 당신의 신비로운 권위를 지속하는 것처럼, 좋은 출판물 보급을 통해 당신의 거룩한 사명을 지속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근본적으로 상거래나 구걸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상품과 돈의 교환이 아니기 때문에 상업이 아니며, 수익, 다시 말해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사도는 사람과 국가의 가장 큰 영적 윤리적 필요를 연구하며, 교회의 설교대에서 설교가가 하듯이 출판의 설교대에서 글을 쓰고 보급한다.
선교는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걸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사도는 하느님에게서 거저받은 것을 거저 내어놓는다.
그가 청하는 헌금은 거의 언제나 고정된 것이요, 하느님의 말씀에 비하면 아주 적은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공동으로 협력하는 것으로 미사예물과 비슷하다. 미사예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협력하려는 봉헌자의 의지를 의미하는 한편, 사목자의 생활비에 기여한다는 목적도 있다.
그러므로 선교를 통해 받는 헌금-정가는 구매자의 좋은 의지의 표현으로 사도의 생활비에 도움을 주고, 사도직의 경비를 충당하며, 신앙에 무지한 사람에게 진리의 자선을 베풀고, 특히 하느님과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빈곤한 사람에게 영적 빵을 제공한다는 실천적 목적이 있다.
따라서 선교는 모든 사람, 특히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가 닿아야한다. 그러므로 선교하는 사도는 충실한 양 떼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며,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착한 목자처럼 되어야 한다.
사도는 버림받은 사람들과 반대받는 사람들, 설교대에서 많은 신자에게 주는 쪼개어진 빵을 받아 먹을 용기가 부족한 가난한 사람들, 한 분이시고 삼위이신 참하느님 -구원사업- 복음을 모르는 믿지 않는 사람들, 출판물계, 지극히 세속적인 것을 통하여 세상과 마귀와 육신의 정탐꾼들의 해로운 활동을 통해 신앙이 훼손된 사람들, 통치 · 직무 · 일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들, 회의론자들을 우선해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운명과 구원의 길을 상기시키는 은혜의 천사, 오로지 지상의 것에 마음 쓰는 하느님의 자녀에게 하느님과 천상 것에 대해 말하는 천사가 되어야 한다.
선교는 출판 사도직의 큰 과제다. 편집과 기술이 선교를 향해있듯이, 선교에서 편집과 기술이 방향을 잡는다. 선교는 사도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진리, 더 나은 표현을 빌리자면 천상 스승의 마음에서 샘솟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 닿게 하는 수로라고 말할 수 있다.
선교사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 맡기신 보화를 교회에서 받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분배자115다.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116
분배자는 자신의 활동을 소수의 빈곤한 사람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확장시키는데, 교회가 소유하는 보화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배의 필요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일별一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날 지상에는 20억(말씀하실 당시) 이상의 사람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6분의 1정도만 가톨릭 신앙을 지니고 있으며, 민족들의태양인 로마에서 빛을 받고 자양분을 취하고 자극을 받는다.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117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확고하고도 틀림없다. 로마의 윤리가 부패해서도 아니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모든 시대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마르지 않는 보화를 분배하는 보고寶庫요 또 여전히 보고로 남아 있으며, 거룩하고 또 여전히 거룩하게 남아있다.
참된 이유는 분배자가 부족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부르고 구세주의 예언, 곧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양 떼가 될 것이다.”118라는 예언의 성취를 앞당기는 하느님의 목소리 역할을 하는 사도들이 부족한 것이다.
이 양들에게 선교를 통해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사도는 단호하게 이들을 겨냥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위해 분배자들을 찾고 양성해야 한다.
책과 출판물은 쉽게 마련할 수 있다. 나머지의 교리교육은 가장 기초적인 교재로도 인류의 90퍼센트에게 충분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를 가져가고 알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보급과 선교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보급 없는 출판 사도직은 됫박으로 덮어 놓은 등불, 자식 없는 가정에 비길 수 있다. 등불이 감추어져 있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것처럼 좋은 출판물이 창고에 쌓여 있다면 사람들을 비출 수 없다. 그리고 마치 많은 자녀는 부모의 활력 지수요 |
광활하고 풍요로운 미래의 보장이듯, 폭넓은 선교는 사도직을 완수하는 참된 사도적영혼의 지표요, 풍성한 결실을 보장한다.
일단 참된 사도직 정신을 갖추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에 충분하고 적절한 출판물이라고 확신한다면 보급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의 중대한 잘못은 바로 진리의 큰 탈렌트119, 신앙, 교부들, 교회의 부유함이 묻혀있는 데 반해, 하느님과 사람의 적대자들은 칭찬받고 보상받으며 가라지를 마구 뿌리는 것이다.
사도에게 있어 선교의 중요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가르쳐 주었고 또 필요에 따라 요청되는 방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다가가라고 가르치셨다. 사도는 스승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도시, 지방, 가장 멀리 있는 외딴 집에까지 전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구원의 길을 알도록 초대받았으므로 산을 넘어야 하고, 바다를 건너 모든 사람에게 가야 한다. 각 사람, 각 가정, 각 본당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서점을 열고, 열성적인 사람을 훈련하고, 모든 단체에 들고, 공장장, 학교장, 권한이 있는 사람 등을 |
설득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당연히 어려움, 희생, 위험뿐 아니라, 뱀 같은 슬기, 비둘기 같은 단순함, 순교자의 충절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도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잊을 줄 알아야 한다.
순교자 성 타르치시오를 귀감, 수호자로 모실 수 있다.
더 나아가 교회는 선교를 행할 실천적 방법을 가르친다. 출판 사도직은 거룩한 사목자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보충하고 연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를 최대한 확장하는 것은 사목자의 의무요 권리다.
이 때문에 교회는 출판 사도직, 곧 선교가 제일 먼저 교회의 권위 기관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평신도들이 하는 선교는 반드시 교회 권위 기간에 의존해야 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마치 본당의 남녀 교리교사가 본당신부의 지도하에 가르쳐야 하는 것과 같이 그에게 순종하고, 그를 존경하며 존중하고 신뢰해야 하는 것과 같다.
시대 상황, 반대자들의 조직과 투쟁할 시급성은 오늘날 가톨릭 출판물의 보급을 위해 전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자신을 봉헌하는 열성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
모든 것을 구비한 무리가 필요함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수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무리는 시간의 연속성을 지녀야 하고, 공간이라는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활동해야 한다. 이 무리는 교회, 교구, 본당, 선교단체를 도와야 하고, 아직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 곳에 진리의 빛을 전하여 정착시키기 위해 결연히 움직여야 한다.
결국 출판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한 사람으로서 평신도 협력자들과 결속하는 수도자들의 무리가 필요하다. 이 수도자들은 교회에 봉사하도록 하느님이 일으키셨으며, 교회가 그들을 신비의 포도밭에 받아들여 그들의 활동을 축복하고 인도한다.
‘선교사Propagandisata’가 단순한 ‘분배자’를 의미한다면, 선교는 비교적 단순하고 쉬운 일이 된다.
그러나 선교사 사도는 단순한 분배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선교는 각 사람의 특별한 필요에 알맞는 진리와 구원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실천적 수단이다.
그러므로 이에 적응하기 위해 어찌 어려움이 없겠는가! 어린이, 사춘기, 어른의 필요에 적응하기 위한 어려움이 있다. 지식층이 요구하는 필요성은 일반인의 필요성과는 다르다. 전문가는 노동자나 농부가 만족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언제나 똑같은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하나뿐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 본성도 하나뿐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얼마나 다양한가! 두 사람이 완벽하게 똑같을 수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모두가 같은 시작과 끝, 동일한 구원의 수단을 가졌지만, 각자 나이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특수한 필요성과 경향이 있다.
선교는 이러한 필요성을 통찰해야 하고 적합한 책과 리플릿을 통해 만나야 한다. 이는 그에게 특별한 준비, 올바른 지향, 재치와 사람에 대한 통찰력을 요구한다.
이것은 선교의 실행 면에서 볼 때 가까운 준비인 이론적 부분과 실천적 부분이 있다. 비록 이러한 준비는 사람과 환경이 다양해짐에 따라 변하지만, 몇 가지 본질적인 부분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선교사의 가장 필수적이고 으뜸가는 자질은 하느님께 대한 위대한 사랑과 교회 장상에 대한 겸손한 순종이다.
그러므로 다음 사항이 따라야 한다.
적어도 이 책에서 기본적으로 제시한 ‘선교방법에 대한 지식’.
스스로 연구를 해서든 그러한 목적으로 쓴 서평을 통해서든 ‘선교할 출판물에 대한 지식’.
선교하는 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되는 ‘민법과 교회법에 대한 지식’.
스스로 활동을 전개해야 하고 경험에서 얻은 실천적 수단을 펼쳐야 하는 특별한 ‘상황에 대한 지식’.
이미 숙련된 선교사의 인도하에 행하는 ‘실천적 훈련’.
기쁘고 즐겁게, 사심 없는 마음으로 전적인 헌신을 하는 자연스러운 또는 노력하여 몸에 익힌 ‘태도’.
합법적인 장상에게 대한 자녀다운 신뢰와 그의 지침에 최대의 충실을 드러내는 ‘온순함’.
이렇게 이해하여 특별한 준비를 잘 하면 선교사의 자연적 재능이 완성될 것이다. 이 재능은 창조주께 이르기 위한 사다리요, 사도직의 풍요로운 수단이기에 선교사에게 초자연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때때로 준비가 불가능하거나 사도직 실천에서 예기치 못한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권능으로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없는 것을 선택하실 수 있는(1코린 1,27 참조; 역주: 우리말 성경에는 28절에 해당함) 주님께 우선 그 일을 의탁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숭고한 사명에 항구하고 충실한 사도는 선교를 창고의 재고 처분을 위한 수단,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 자기 또는 다른 사람의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 또는 고상한 목적, 예를 들어 사도직을 위해 새로운 수단을 마련한다는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으뜸가는 유일한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머지 다른 모든 활동과 사업은 이러한 최상으로 방향지어진 것이다.
선교해야 할 출판물은 성경, 교부들의 작품, 교회학자들과 교회 저술가들의 작품, 신학, 전례, 성인들의 생애, 종교교육에 관한 서적과 사람들에게 직접 그들의 첫째가는 기원이요, 영원한 관리자, 궁극 목적이신 하느님에 대해 언급하는 모든 출판물, 곧 거룩한 학문을 우선해야 한다. 세속 출판물은 사도직의 특수 목적에 이용할 수 있을 때에만 취급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자주 의뢰하더라도, 예를 들어 재미있는 문학작품 분야에서 발생하는 경우처럼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독자들 가운데 선택해야 할 대상은 길 잃은 양에서부터 산길을 헤매는 양, 우리에 갇힌 아흔아홉 마리의 충실한 양에 이르기까지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사목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서 신앙생활을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믿지 않는 사람에서 신자들까지다.
어려움, 실패, 노고는 사도적 정신으로 직면하고 극복해야 하며, 이방인의 사도의 말씀으로 단언하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120
결국 사도직을 장사로 바꿔놓지 않고 애덕과 기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으로 성화하는 올바른 지향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준비를 갖춘 사람이야말로 대단히 폭넓은, 그리고 깊이 감추어져 있으며, 만족할 줄 모르는 사도직을 다른 많은 사도직보다 선호하고 사랑한다!
그는 독자가 적절한 시기에 책, 잡지, 신문을 선택하도록 인도하며, 마치 전적으로 이러한 선택에 효과가 달려있는 것처럼 면밀하고 주의 깊게 보살피는 한편, 사람을 위해 말씀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통해 [그들을] 고양시킬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써 굳건해진 올바른 지향은 나누어준 리플릿이 버려지고, 기쁘게 받아든 책은 아마도 처음 몇 쪽을 넘기지 못하고 방치되며, 대부분의 경우 그의 노력이 쓸모없이 되리라 생각될 때도 그를 지탱해 준다. 어쨌든 그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주목하시며 갚아주신다 생각하고, 아무런 장애가 없을 때는 다만 몇 줄이라도 |
그 사람이 스스로 마음을 열어 보게 해주시며, 자신의 구원과 성화의 기원이시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리플릿, 책이 참으로 생명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을 제공하려는 대상의 특수한 필요에 부응해야 한다.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선교사는 그 대상의 필요, 고통, 열망을 알아야 한다.
결국 사람은 참으로 깊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말할 때나 그들 생각을 우리에게 나타낼 때도 우리는 그들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물며 우리가 그들에게 행하는 간접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목소리 없는 출판물만 그들의 손에 쥐어줄 때는 더더욱 그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거룩한 사람은 이런 초자연적 지식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친구이신 주님과 친근한 대화를 통해 이 지식을 배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선교사는 사람들의 유일한 주인이신 하느님께 그들을 위한 빛과 은총, 의견과 지혜의 은사를 청해야 한다. 이렇게 그는 긴 세월과 고통을 통해 제대 발치에서 배우는 초자연적 섬세함과 재능으로 사람에게 다가갈 줄 알게 될 것이다.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 결코 자기 자신에게 몰입해 보지 않은 사람, |
묵상과 성찰을 통해 자기 감정을 검토하고 숙고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러한 선물을 쉽게 얻지 못할 것이다. 사물을 피상적으로 판단하는 데 익숙해 있는 가볍고 생각 없는 사람은 결코 영혼의 성전에 깊숙이 들어가기에는 합당치 않을 것이다.”121
사랑은 창의력을 풍부하게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선교 형태는 각 선교사의 개별적인 창의력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해진다. 그러나 적어도 일반적인 차원에서 조직적인 선교, 양성하는 선교, 활동적인 선교의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지휘 센터에 의해 이루어진다. 두 가지 주요한 측면, 곧 사도직 영역을 형성하는 환경에 대한 연구와 조직의 이니셔티브로 요약할 수 있다.
‘환경에 대한 연구’는 사도직을 촉진하거나 |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시간, 장소, 사람 그리고 주변상황에 대한 일반적이고 특수한 모든 정보를 포함하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활동의 출발점을 취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사람들의 필요와 그들을 만나는 교육학적 방법과 심리학적인 적절한 시기에 대한 연구다.
‘조직적인 이니셔티브’는 사도직의 다양한 활동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위해 길을 열어준다. 일반적으로 흔히 ‘광고’라는 것을 구성한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확장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다양해지는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닐 수 있다.
많은 것 가운데 서지학 잡지 — 일반 도서목록과 특수한 독서목록 — 가톨릭 일간지, 신문 그리고 더 중요하고 널리 읽히는 여러잡지에 대한 서평 — 책에 대한 서평 — 서점, 본당, 단체와 개인을 위한 전단지, 포스터와 일러스트레이션, 친척과 친구와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 무료 견본 등을 기억해보자.
이는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어려운 선교방법이기도 하다. 그 목적은 사도직을 위해 협력자들을 찾고 양성하고 조직하며 지도하는 일로 구성되어 있다.
기도, 희생, 활동과 기부 등의 협력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도와 |
희생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렇지만 특히 내적 삶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것이다. 그들의 활동은 저술을 통한 편집분야에 제조기술, 기계조작, 다양한 장비, 노하우, 인쇄작업 등의 사도직에서 요청되는 기술분야, 사도직 출판물 보급을 위해 선교분야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보급분야는 많은 인력이 요청되는데 (크고 작은) 모든 중심적인 곳과 온갖 사회적 신분을 망라하여 선택해야 한다.
협력자 양성은 사도의 양성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다시 말해 지적 윤리적 기술적이어야 한다.
지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사도직에 필요하거나 적어도 사도직에 유익하며, 종교와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 외에도 출판 사도직에 대한 지식, 목적, 범위, 확장에 관한 것도 포함한다.
윤리적 양성은 협력자를 그리스도인 사도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그는 진정한 신자, 신앙생활의 실천자라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과 자신의 활동으로 증거할 줄 알아야 한다. 기술적 양성은 더 광범위하게 그리고 가능하면 가장 설득력 있게 사도직 훈련을 통해서 하게 된다.
성공의 비결은 협력자에 대한 조직과 지도에 |
달려 있다. 이것은 유일한 지도부의 지도하에 결속력 있고 강한 무리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 무리는 적(나쁜 출판물)을 무너뜨리고, 보화(출판물을 통해 하느님께 도달하는 영혼들)를 얻는다는 하나의 유일한 목적을 위해 헌신한다.
그러므로 협력자들은 비록 전 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사도직의 지도체계를 따라야 한다. 그들 모두를 위해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분명하고 정확한 규칙서가 있어야 한다. 사도는 그들 모두를 깨어있는 눈으로 항상 보살펴야 한다. 그들 모두에게 안내자요 지지자의 활동이 미치도록 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그들과 함께할 수도 있어야 한다.
조직의 다양한 방법 중 이상적인 형태는 모든 본당에는 5명(젊은 남성 1명, 젊은 여성 1명, 성인 남성 1명, 성인 여성 1명, 남성 지도자 1명)으로 구성된 ‘좋은 출판물’ 그룹이 있어야 하며, 이들은 자기네 본당 출판물에 전념한다. 본당 그룹은 교구 그룹이 지도하고, 교구 그룹은 전국 그룹이 지도하며, 전국 그룹은 총 지휘의 지시만을 따른다. 본당 그룹과 교구 그룹은 그들에게 속한 협력자를 둘 수 있다.
이것은 사도가 직접 행하는 선교형태다. 직접 주문에 따라 행하는 활동과 파고드는 활동이라는 이중의 행동지침이 있다.
주문에 따라 직접 행하는 발송, 통신, 회계업무를 포함한다.
발송은 개별발송과 정기발송(책, 잡지 그리고 정기간행물의 정기 구독자들을 위한 경우처럼)일 수 있고, 특급열차 배송과 완행열차를 통한 배송, 수하물, 소포, 우편, 택배 등 아주 다양한 형태로 세분된다.
통신은 주문자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모든 것, 이를테면 품절, 불가피한 지연의 이유, 새로운 변화에 대한 것과 같은 정보를 주어야 한다.
회계는 수입과 지출에 대한 관리와 기록, 목록 작성과 대차대조표 작성 그리고 통상적으로 경영관리라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업무다.
발송, 통신, 회계는 신속 · 정확해야 하고 규칙적이어야 한다. 실수, 불상사, 불편사항 등은 사랑과 정의를 손상시키지 않을 때에도 사람들과 충돌하고 멀어지게 한다.
여기에서 파고드는 활동은 조직적인 선교와 양성의 선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사람들과 |
맺는 직접적인 관계다. 따라서 방문선교, 협력자 방문, 전화, 라디오와 영화의 활용, 보급 센터의 설립과 조직, 도서관 설치와 지도, 사도가 직접 행하는 모든 선교를 포함한다.
다양한 상황의 필요성뿐 아니라, 자유로운 이니셔티브와 특별한 열의에 [여지를] 남겨두면서, 다음에 이어지는 장章에서는 이러한 선교방법의 근본형태인 ‘보급 센터’, ‘도서관’, ‘방문 선교’, ‘천상 스승의 축제’에 관해 짧게 언급할 것이다.
‘보급 센터’는 사도직 수단으로서, 대중에게 개방된 참되고 고유한 서점을 의미한다. 이 보급 센터는 사람을 비추고 뜨겁게 데워줄 빛과 은총을 발산하는 사도직의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의미의 보급 센터는 교구와 본당에 봉사해야 한다. 따라서 각 본당마다 적어도 한 곳 또는 각 교구마다 적어도 한 곳에는 있어야 할 것이다.
보급 센터 설립을 위해서는 교회 권위 기간 또는 민간당국의 활동 승인이 있어야 한다.
센터 조직은 관리와 정돈에 관한 것이다. 관리는 센터 전반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센터는 사도나 그의 협력자들에 의해 운영될수 있다.
정돈은 보급을 위한 물품공급, 구별되는 특징, 센터의 유지 및 장식에 관한 사항이다.
보급 센터를 위한 물품은 사도직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모든 작품과 모든 이니셔티브와 가톨릭계 모든 출판사의 출판물이다.
물품공급은 도착 방법, 소포의 개봉과 확인, 서적과 헌금-정가를 기록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도서 분류의 가장 탁월한 방법은 주제별 분류다. 이 경우에 같은 내용이나 유사한 내용의 출판물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서로 가까운 위치에 배치해야 한다. 대형 센터에서는 많은 분야로 나누고, 각 분야는 세분된 그룹이나 분야로 구분할 수 있다. 반면에 소형 센터에서는 성경, 신학, 교부학, 설교, 교리, 수덕신학, 신심, 성인전과 전기, 교육, 문화, 청소년을 위한 서적, 성인 남녀, 젊은이, 어린이를 위한 재미있는 문학작품, 정기간행물과 기타 다양한 출판물과 같은 분류로 충분할 것이다.
센터의 유지와 장식은 매우 중요하다. 보급 센터는 교회, 학교와 같이 거룩한 |
장소요, 그렇기 때문에 정리정돈, 청결과 미적 감각이 필요하다.
센터 내부, 서가, 책의 정리정돈과 청결. 자주 서가, 진열창/진열장, 의자, 서적의 먼지를 털고 소독해야 한다.
특히 진열창/진열장, 대중에게 진열된 출판물에 대한 미적 감각이 필요하다. 이것은 보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도록 전시해야 한다. 센터에 들어오는 사람이 한 눈에 서적의 다양한 주제별 분류를 알아보고 더 관심 있는 분야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진열창/진열장에 진열된 서적은 시기와 축일에 알맞게 자주 바꾸어야 하며, 종교적 주제에 관한 서적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
보급 센터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그들이 관리하는 하느님 말씀과 사도의 존엄성,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애덕이 요구하는 정리정돈과 청결과 장식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
보급 센터가 제 기능을 다하려면 주변 상황과 출판물에 대한 지식, 신자들을 이끄는 방법과 관리가 필요하다.
주변 상황에 대한 지식은 적합한 출판물 공급을 위해 필요하다. 교회 권귀 기관과의 관계나 협력자를 통해 |
얻을 수 있다. 출판물에 대한 지식은 서적을 제 위치에 배치할 줄 알고, 신자들에게 알맞는 서적을 권하기 위해 필요하다. 독서를 통한 직접적인 방법이나 서평, 서지학 잡지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을 이용할 수 있다.
신자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센터가 두루 갖춰져 있어야 하고,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신자들에게 책을 권하고 잘 선택하도록 이끌어 주는 능력, 좋은 전략, 출판물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량, 선교의 기회를 모두 활용할 줄 아는 다음과 같은 능력이 필요하다. 진열창/진열장에 대한 교육, 전시대, 시사용 작품 발송, 방문선교, 선교용 출판물 발송, 전화 활용, 직접 배달….
진열창은 행인에게 효과를 주어, 그들이 멈추어 서서 들어올 수 있게 전시해야 한다.
전시대 위에는 약간의 책을 진열해야 하며, 신자들이 그 책을 살펴볼 수 있게 배치해야 한다.
시사용 작품 발송은 신자, 수도자, 성직자 들이 관심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받아 보게 하려면 사람들, 특히 신간을 원하는 모든 사람의 주소를 기록해 두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다. 그런 다음 모든 신간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신문, 잡지, 도서목록, 출 판물, 광고 등을 참조해야 한다.
방문선교는 아주 유익하며 때때로 필수적이다. 친구들, 지인들, 협력자들, 나아가 본당신부들과 영적 지도자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학교, 병영, 단체, 조합, 병원, 교도소, 사무실, 직장 클럽, 공장 같은 곳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정 지역에서는 신혼부부, 신생아 부모를 방문하는 것도 유익하다. 이것은 미래에 유리한 선교의 길을 열기 위한 최상의 기회다.
필요한 경우에는 전화, 언론 보도, 영화나 라디오를 이용한다.
선교를 위한 자료 발송은 우편을 통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의 명단, 회원, 협회, 단체의 목록에서 주소를 얻을 수 있다.
선교를 위한 편지는 대량으로 복사할 수 있다. 그 편지에 개인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유익하고, 손으로 서명하여 상업형태를 피하고 사적 편지의 성격을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센터에서 매체를 권하는 경우, 고객이 계산대에 있는 이가 사도적 정신을 지닌 숙력된 사람임을 알아보게 하는 재치와 주의가 필요하다.
신자들을 대하는 솜씨는 예의 바른 품위 있는 태도로서,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며, 보급을 위해 몇 가지 특별한 규칙이 필요하다.
우선 사도 자신에게 주의가 집중되는데 몸가짐, 예의, 개인의 위생과 단정한 복장 등에서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함, 특히 사도다운 섬세한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이해는 기민함을 요구한다. 누군가가 들어올 때 그 사람에 대해 겸허하고 신속하게 분석하는 것은 아주 유익하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어떤 판단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는 사람을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도울 수 있도록 그 사람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데 도움이 되게 인상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보급을 위한 근본 규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누군가가 들어왔을 때 “무엇을 원하세요? 무엇을 찾으세요?” 라는 피상적인 질문은 하지 말 것. “예수 그리스도는 찬미 받으소서”(역주: 한국의 경우, “찬미 예수님!”)라고 그리스도인의 인사로 시작하면서 각 사람에게 적합하고 특수한 대화를 선택해야 한다.
-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을 표현했을 때 신속하게 그리고 그가 만족할 만큼 도와주도록 할 것. 그가 요구하는 것이 없는 경우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구해주겠다고 약속할 것.
- 언제나 모든 사람, 어린이에게도 정중하게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 언제나 헌금-정가를 유지해야 하고, 쉽게 예외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 편파성은 사람을 멀어지게 한다.
경영관리를 위해서는 수입과 지출의 정확한 기록, 재고 목록과 409대차대조표가 필요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현명함과 역량이 있어야 한다. 결코 기억에만 의존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며 방법론적으로 정확하게 표기해야 한다. 종교기관과 민사당국이 요구하는 모든 규범과 총지도자의 지시를 준수해야 한다.
실천과 상황은 특별한 규범과 실천 지침을 제시할 것이다.
도서관 업무는 사도에게 있어 아주 놀랍고 좋은 이니셔티브다.
그러므로 사도는 항상 더 큰 필요와 더 큰 효과가 있는 모든 분야에서 활동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고, 이러한 일에 마땅한 가치를 부여하며, 그 중요성과 형태에 대해 연구하고, 설립과 조직에 대한 현명한 판단으로 이 업무에 열의를 다해야 한다.
양성과 보편적 교육을 과제로 삼는 책의 영향은 항상 주목할 만하다. 때때로 결정적인 것으로 도서관의 중요성, 더 나아가 수많은 출판물이 계속 범람하고, 갈수록 |
읽으려는 욕구가 커져가는 것이 확인되는 시대에서 미룰 수 없는 필요성을 충분히 말해준다. 오늘날 최신 도서관을 찾는 것은 더 이상 사치가 아니다! 한때 지식층과 부유층의 소수 사람에게 유보되었던 독서가 이제는 보편적인 것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좋은 서적의 폭넓은 보급이 필요하다. 이로써 나쁜 서적이나 다소 쓸모없는 서적을 미리 방지해야 한다.
보급수단 가운데 도서관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실 도서관은 책을 어떠한 범주의 사람과도 만나게 해주고, 책을 구입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읽을 수 있도록 허용하며, 모든 새로운 독자에게 책의 중요한 의미를 제공하면서 가장 신속하고 가장 많은 유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상의 의미를 책에 부여한다.
그뿐 아니라 도서관은 철저하게 종교교육을 하고 발전시키며, 개인의 양성과 사회문화를 촉진하고 교육의 책임과 노력을 통합하며, 독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음직한 독서용 서적과 연구 서적을 다른 곳에서 찾지 않도록 막아준다. 그러므로 예방의 역할뿐 아니라 건설적인 역할과 사도직도 행하는 것이다.
도서관은 비록 본질적으로 독서용 책과 잡지의 수집처이지만 |
| 직접 대상으로 하는 사람의 범주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정 도서실, 학교 도서관, 전문 도서관, 순회 도서관, 본당 도서관, 공공 도서관, 시립 도서관, 국립 도서관이 있다.
출판 사도직은 가능한 한 이러한 모든 종류의 도서관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한다. 이들 각 도서관은 보존하고 건설한다는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직 활동은 진리와 그리스도교적 삶을 보호하고 비추는 중심지로서 가장 적합한 도서관인 가정 도서실, 순회 도서관과 본당 도서관을 특히 염두에 두고 수행해야 할 것이다.
‘가정 도서실’은 교양 있는 가정들에서뿐 아니라, 대중의 일반가정들에서도 늘고 있는데,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그들을 더 향상된 지적 수준으로 이끌려는 경향을 지닌 가정이 이미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이 없는 곳에서도, 특히 복음서와 성경 봉독을 촉진하기 위해 가정에서 좋은 독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유익하다.
출판 사도직을 통해 가정이라는 성전에 제때에 들어가야 한다. 내일은 너무 늦을 수 있다.
‘순회 도서관’은 교도소, 기관, 병원, 요양원, 기숙사, 노인 휴양시설 |
자선단체, 종교단체, 가톨릭 액션 단체 등을 방문한다.
도서관은 자주 공동체 회합, 곧 건전한 레크리에이션, 문화의 중심, 영성생활 모임, 사도직의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수단이다.
‘학교 도서관’은 모든 학교(보육원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의 학생과 교사를 위한 것으로, 교육을 완전하게 하고 삶과 덕을 양성한다.
‘본당 도서관’ 또는 사목 도서관은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당신부의 활동을 도와주고 보완한다.
가장 작은 본당이나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본당이라 하더라도 본당마다 도서관을 설립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도서관을 설립하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가장 어려운 활동 중 하나, 아니면 불가능한 활동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뜻, 용기 그리고 때로는 대담함이 필요하다.
‘가정 도서실’을 차리기 위해서는 가정 내부에 들어가고, 각 구성원의 정신적 필요와 요구를 알고, 반대를 |
극복하고, 책을 선택하도록 권하고, 때로는 밀고 나갈 수 있는 은총과 전략이 필요하다.
‘순회 도서관’ 설립을 위해서도 그에 비례하여 같은 사항을 언급한다. 단체는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보면 때로는 이질적인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더 큰 가정이다. 여기서도 침투하고, 알고, 조언하고, 설득하고, 이끌어야 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학교 도서관’ 설립을 위해서는 아주 특별한 실력과 역량이 필요하다.
학생들을 위한 도서관은 그들의 교육과 양성을 통합하려는 목적이 있다. 교사들을 위한 도서관은 교육을 위한 교양을 보충해야 하고, 가르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관과의 충분한 동의와 계획을 토대로 한 책의 선택과 적합성 때문에 실력과 역량이 필요하다.
‘본당 도서관’ 설립은 늘 더 중요하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특별규범은 이들 도서관의 설립을 위한 안내로 이용할 수 있는 한편, 다른 형태의 도서관 설립 방법에도 빛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본당 도서관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당신부의 동의가 필요하고, 그런 다음 책을 선별하고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항을 진행해야 한다.
성직자, 특히 본당신부는 아직 도서관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
없었을 것이므로, 도서관의 목적과 필요성을 사랑과 현명함으로 납득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무관심과 게으름 앞에 반대자들은 폭넓은 활동영역을 확보할 것이다!
물론 새로운 난관, 새로운 일, 새로운 걱정 그리고 본당신부가 이미 안고 있는 많은 문제 등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소홀히 한다면 더 어지러운 많은 염려와 완수하기가 더 힘든 어려운 일들이 따를 것이다.
본당 도서관은 잘 납득해야 하고, 본당신부의 사업계획 목록에 들어있어야 한다.
책의 ‘선택’은 늘 쉽지 않은 문제이며, 일반적으로 사도 자신에게 속하는 의무다.
다음과 같은 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는 원칙이다. 곧 좋은 책을 선택하여 읽게 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지 못하면 목적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독자들의 취향에 맞는 책이란, 건전하고 도덕적인 취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책장에 방치하거나 장서 목록의 숫자를 채우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의미다.
책의 ‘선택’은 교육수준, 본당의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조건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 다음과 같을 수 있다.
주로 수덕에 관한 도서 : 예를 들어 고해신부의 활동을 보조하는 데 우선 목표를 둘 경우 |
신자들의 영적 필요에 적합한 독서용 서적.
주로 재미있는 교육적인 도서 : 나쁜 독서를 저지하고, 좋은 독서를 하도록 마음을 끄는 것을 특별히 목적으로 할 경우.
주로 교양 도서 : 중산층이나 학생층을 대상으로 할 때와 문학적 학문적 전문적 문화환경을 확산시키기를 원할 경우.
주로 종교 또는 사목을 위한 도서 : 종교교육과 종교문화에 관한 책을 통해 본당신부의 활동을 통합할 목적이 있을 경우.
마지막 경우가 일반적으로 선택해야 할 이상적인 형태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거룩한 책을 첫 자리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곧 성경, 교부들, 교회학자들과 저술가들의 작품, 평신도들을 위한 신학, 교리, 수덕신학, 전례, 성인들의 생애, 교훈적 전기, 선교사들의 작품, 그림이 있는 종교적 정기간행물의 연감 및 전집….
사람들이 영적 작품을 반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들은 이러한 작품을 즐기고, 원하며 이해한다. 한편 메르치에르 추기경Card. Mercier이 말한 바가 항상 옳다. “사람들을 높이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향상될 필요가 있다.”
독자의 취향은 사서의 취향을 따르게 마련이고, 또 사서가 책을 권할 줄 알 때는 취향에 맞고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사실을 자주 확인하게 된다. 처음에 느끼는 어려움 앞에 무기를 내려놓을 필요는 없다. 수덕과 교양에 관한 수많은 책은 |
열정을 갖고 읽는 만큼 영혼에 스며든다. 그렇다면 소설의 매력적인 흥미를 능가할 정도로 재미있는 성인들의 생애와 전기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주로 종교서적 외에도 재미있는 문학작품, 곧 소설, 단편집, 여행이야기 등이 필요하다. 알기 쉽고 재미있는 책이지만, 항상 건전하고 도덕적인 책을 의미한다.
자주 덜 건설적이고 사목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책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도, 말하자면 해독제를 대신할 것이고 차츰더 본질적이고 더 교육적인 다른 책을 향한 길을 열어줄 것이다. 오히려 재미있는 문학작품에 정신을 향상시키고 선을 이루게 하는 다른 책을 신속하게 연결할 필요가 있다.
소설을 선택함에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악은 자주 겨우 몇 줄밖에 안 되는 문장 속에 숨겨져 있지만, 한 영혼의 평화를 빼앗는 데는 부족하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악과 파괴로 몰고 가는 온갖 종류의 책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제외시켜야 한다. 가능하면 인간의 마음 속에 공허와 불만을 남기고, 쾌락과 일탈로 삶을 주도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부채질하는 지나치게 공상적인 소설은 배제해야 한다. 이런 부류의 책은 하느님을 운수와 숙명으로 바꾸어놓고, 오로지 지상 행복이라는 이상으로 몰고 가며, 모든 종교개념을 도외시하게 만든다.
젊은이들이 아직 모르는 악습을 규탄하는 책은 어른을 위한 책으로 유보해야 한다. 도서 선별을 위한 |
모든 실천적 판단기준을 준수해야 하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다. 곧 금서목록, 교회 인가, 가톨릭 잡지와 서평 안내, 상식, 시대와 장소의 상황, 독자의 범주.
‘자금 조달’은 자주 피할 수 없는 암초로서, 이 앞에서는 멈추어 서게 되고 때때로 가장 멋진 이니셔티브조차 중단시켜버린다.
비록 소규모의 도서관이라 할지라도 자금은 도서관 설립과 설치를 위해 필요하며 필수적이다. 이는 기부금, 복권, 자선복권, 학회, 작은 바자회, 기부금, 그밖에 다른 이니셔티브로 마련할 수 있다.
도서 보급을 통한 이익금에서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비록 어떤 상황에서든 최소한의 금액은 있어야 한다. 우리의 경험이 가르쳐 주는 바로는, 어떤 희생도 요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무상으로 행하면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가능한 곳에서는 해마다 부담금을 불입해주는 후원자들의 위원회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야 할 오류는 도서 선별을 잘 하여 일단 설립된 도서관은 자력으로 운영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도서관은 하나의 씨앗과도 같으며,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은 것이다. 그 씨앗을 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싹이 트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 생명체의 발달과정을 한 걸음 한 걸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정상적인 조건에서 발전하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죽게 될 것이다!
하나의 좋은 조직은 전문적인 적합한 설비, 운영방법을 촉진하기 위한 방향, 일하는 방법, 사서의 교육을 포함한다.
도서관을 위한 ‘장소’는 반드시 필요하다. 때로는 적어도 초기에는, 가능하면 문이 달린 하나의 책장이나 진열대를 마련할 것이다.
운영방법을 위한 준비는 언뜻 보기에 어려운 일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당신자, 전문가들, 교사들, 부모들, 젊은이들, 가톨릭 단체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그렇게 힘든 일은아닐 것이다.
일치와 전반적인 관심이 온갖 난관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개별적 또는 그룹으로 신간 서적을 기부하게 하고, 강연회, 선교의 날 그리고 기초 자금을 위해 제안한 모든 수단을 행하도록 초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도서관이 활발하게 발전되기 위해서는 다른 활동과 분리된 독자적인 활동으로 여기지 않고, 합법적으로 회원을 모집하며 독자를 위해서나 도서관 경비를 위한 자원을 얻어내는 본당의 모든 활동으로 여겨야 한다.
활발하며 발전적인 활동은 본당의 모든 활동처럼, 본당신부의 |
감독하에 이루어져야 하며, 책임과 지도는 “정당하게 그에게ex iustitia” 속한다.
수많은 도서관이 처음에는 번성했지만, 본당의 다른 활동에서 밀려나게 되고 본당신부와 무관하기 때문에 그들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도서관의 생명은 대부분 도서관의 ‘기능’에 달려 있다. 사실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도서관은 실패한 기업과도 비슷하다.
기능의 조직은 도서관의 종류, 장소, 투입된 사람, 독자와 다른 많은 특별한 요인에 달려있다.
그럼에도 확장할 수 있고, 변경할 수 있으며, 향상될 수 있고 또는 다양한 필요성과 상황에 따라 바꿀 수 있는 단순하고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사항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 도서 대장 : 헌금-정가와 함께 입수된 서적을 표시하기 위한 작업으로 도서관의 발전을 확인하는 데 이용한다.
- 알파벳순 색인 : 저자별, 주제별 색인작업으로, 이 안에 책과 정기간행물의 모든 내용을 표기한다.
- 인명록 : 독자에게 제시할 관련 ‘통신문’과 함께 대여 상태를 표시한다.
- 대출 카드 : 서가 번호, 이름, 저자, 작품 |
제목과 대출자의 주소를 기록하여 대출한 책의 서가 위치에 놓아둔다.
- 겉표지 : 책 위에 커버를 입혀 항상 정돈되며 청결을 유지하도록 한다.
- 수첩 : 원하는 책을 표시해 두고, 새로운 책 구입을 위한 안내에 이용한다.
- 의무 규정 : 책의 대출과 반납을 위한 규정.
이밖에도 원활한 기능을 위해 ‘자격을 갖춘 고정적인 사서’가 있어야 한다. 본당 도서관의 경우에는 본당신부가 그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또는 그에게 직접 속해 있는 신뢰할 만한 사람일 수도 있다.
가정 도서실의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순회 도서관의 경우는 총책임자를 대리하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야 하며, 학교 도서관의 경우에는 교사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사서는 책의 ‘분배’라는 중요하고도 섬세한 또 다른 직무를 맡게 된다. 그는 도서관에 있는 모든 작품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게 잘 알뿐 아니라, 독자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연령, 교육상태와 교양수준, 기질과 성격에 따라 적합한 독서를 위해 지혜롭게 분배할 수 있다.
책이 각 개인의 필요에 부합할수록 독서는 효과적일 것이다.
[도서관] 설립이 이루어지고 원활한 기능을 위한 안내가 주어지면 빠르게 진보하겠지만, [사도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될 때마다 도서관을 방문해야 하고, 도서관과 직접 교류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전해주고 도와주며, 새롭고 더 광범위한 선교를 위해 교육할 것이다.122
방문선교La propaganda a domicilio는 사도직의 출간물을 소개하기 위해 직접 각 개인과 각 가정과 단체를 방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선교는 실제로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분야도 선교분야와 마찬가지다.’ 선교사가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가 직접 사람들을 찾아 가지 않는다면 대체로 사람들은 그를 찾지 않는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그를 찾지 않기 때문에 사도가 좋은 서적, 좋은 신문을 직접 들고 다니지 않으면 아주 많은 사람이 받아보지 못할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과 직접 만나는 사도는 그들의 특별한 필요에 적합한 작품을 권할 수 있을 것이고, 필요할 경우에 충고와 |
안내의 말 그리고 부드러우나 긴장감을 주는 말로 그들을 동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많다.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들이 행한 선교 중에 있었던 많은 사건 가운데 선별한 실례를 들어보자.
수녀 두 명이 말씀이 실린 전단지를 나누어 주기 위해 개신교 신자가 경영하는 약국을 매달 방문했다. 그 주인은 아무말 없이 전단지를 받은 다음, 공처럼 구깃구깃 뭉쳐 그것을 준 수녀의 등 뒤로 던져버렸다. 두 수녀는 말없이 그것을 집어 들고 그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면서 나왔다.
여러 번에 걸쳐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는데 개신교 신자는 결국 머리를 숙인 후 전단지를 읽은 다음 두 명의 수녀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의사를 밝히게 되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한 대도시 빈민가의 어느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재정난과 외아들의 병 때문에 절망한 어느 가난한 노동자는 자기 가족과 함께 죽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매 속에 비수를 감추고는 아들의 병상에서 아내가 물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아이를 죽이고, 그 다음 아내를 죽인 후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이 죽을 생각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남편의 결심을 알리없는 아내가 달려 갔다. 잠시 후 아내는 전단지를 들고 와 이렇게 말했다.
-두 명의 선교사 수녀가 가져왔어요.무슨 내용인지 읽어보셔요.
그는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기분전환이라도 하려는 듯 읽었고, 조금 후에 변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의 육신을 구원하여 영혼을 다시 선사한 것이다.
시력을 잃은 한 젊은이가 하느님의 은총과 마음의 평화까지 잃어버리게 되었다.
한 선교사 수녀가 젊은이의 누이에게 몇 권의 책을 구입하게 하여 그가 실의에 빠진 순간에 읽어주라고 권했다.
그러한 독서가 젊은이의 영혼에 은혜로운 이슬처럼 내렸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교회로 돌아와 성사생활을 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으며, 결국 고통의 영웅적 행위에 자신을 바칠 수 있었다.
어느 기차에서 몇 명의 젊은이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한 선교사 수녀가 읽어보라고 하며 말씀이 실린 전단지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부는 거기에 응했다. 20세가량의 한 젊은이는 주의 깊게 읽고 전단지를 내려놓더니 잠시 생각한 다음 동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사였는데 지금은 짐승으로 변하고 말았어. 나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러고는 자기 결심에 충실했다.
산악지대의 한 젊은 여성은 높은 곳을 향해 고귀하고 위대한, 정의定義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해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그 젊은 여성을 이해하고 이끌어줄 사람이 없어 불안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
출판물을 가지고 온 선교사 수녀가 전한 예기치 않은 한 권의 책이 새로운 지평을 열도록 그 젊은 여성을 비추었고, 영적으로 높은 경지로 이끌어주었다.
유사한 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아마도 하느님 말씀을 한번도 찾지 않고 간청하지도 않았으며, 그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재촉을 받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을 통해 그들의 윤리적 도움과 자주 물질적 도움도 받게 되었다. 개인, 가족 전체가 하느님께 돌아왔다. 감옥에 갇힌 이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으며, 병자들이 위안을 받았고, 많은 영혼이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빛을 찾았다.
방문선교는 가리지 않고 아무런 구별없이 저택과 오두막, 도시와 시골, 평야와 산악지대를 가로질러 한 집 한 집 가 닿는 것을 말한다. 곧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얼마나 큰 포기의 삶인가! 여행과 궂은 날씨의 불편함,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출판물, 도움과 의지가 절실한 상황, 세상과 세상의 모든 윤리적 영적 불행에 직면함, 문 앞에서, 공공장소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거부감, 비난, 거절에 대한 굴욕,
사람들의 필요에 적합한 책을 제시해야 하는 책임감, 좋은 표양을 보여야 한다는 의무감, 불만 등.
그렇다. 특히 불만도 감수해야 한다. 글 쓰는 사람, 출간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병자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거의 항상 자기 노고의 결과를 증명하는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누가 선교사에게 그 노력의 열매를 돌려주는가? 때로는 위에서 인용한 경우처럼 밖으로 드러나면 힘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경우는 드물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는 땀 흘려 씨를 뿌리고 난 다음 수확의 위안은다른 사람에게 남겨둔다. 그는 오직 모든 것을 보시고 자기의 사도적 여행의 격랑 속에서 남몰래 흘리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느님께만 의탁한다.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준 물 한 잔을 보상 없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겪은 희생에 후히 갚아 주실 것이기에, 그 많은 희생에 합당한 공로는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방문선교는 희생과 보속과 함께 사랑의 위대한 실천이라 생각할 수 있다. 잘 한다면 영원한 상급의 날을 위해 놀라운 많은 일이 확실하게 보장될 것이다. 그때 선교사를 위해 시편 저자의 말씀이 실현될 것이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123
그러므로 복음을 선포하고 평화를 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행복하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방법 중에 가장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복음의 날’이며 ‘천상 스승의 날’이고 ‘좋은 출판물의 날’이다.
최근에 도입된 것으로, 이미 여러 교구와 여러 본당에서 반기고 있다.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기쁜소식에 대한 열렬한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신앙에 다시 눈뜨게 했으며, 그리스도인 삶의 가장 큰 위안이 되는 결실을 가져왔다.
천상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날이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124 이 날을 통해 사람들이 경청해야 하는‘성부의 말씀’, ‘영원한 지혜’, ‘사랑받는 성자’를 흠숭한다.
여기에 진리이신 곧 예수 그리스도와 |
거짓인 악마 사이에 투쟁이 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학교와 악마의 학교 두 가지 학교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사도들을 파견하시지만 악마는 수많은 정탐꾼을 거느리고 있다.
이제, ‘천상 스승의 축일’로, 천상 스승 주변에 회중을 모아 장엄한 전례를 거행하고, 그분이 그리고 그분만이 생명의 말씀을 가지셨기에 그분을 경청하도록 결의할 것을 단언한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125
스승 예수의 가르침은 말씀과 출판을 통해 전파할 수 있다. 두 가지 모두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양편 모두 인간의 악의로 타락했고, 그들의 조물주이신 하느님을 거슬러 등을 돌렸다.
출판 사도직을 말씀의 사도직처럼 제대와 감실 주변으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미사와 영성체에 다시 결부시킬 필요가 있다. 미사에서 사제는 복음서를 읽고 입을 맞춘 다음 영성체 예식을 거행한다. 또 교회는 미사 중에 사제가 설교를 하고 성체를 분배하기 바란다. 원천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할 때에만 완전한 그리스도인, 정신과 의지와 마음을 통해 양육된 인간으로서 완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오직 이런 방법으로만 온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하고, 온 정신을 다해 주님을 실제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하는 천상 스승의 축일이 얼마나 유익한가!
위에서 말한 이 축일은 천상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루나 며칠 간의 기도 그리고 복음서의 연구와 보급으로 이루어진다. 이 축일을 통해 복음서가 모든 가정에 들어가게 하여 가정에서 복음서를 읽으며 살기를 바란다.
실제적으로 지역교회 교구가 정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그렇지만 실천적 조직을 위해, 상세한 안내를 원하는 사람을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안한다.
먼 준비 : 공지를 통한 준비, 인쇄물을 통한 준비, 영적 준비, 조직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공지를 통한 준비-사람들에게 몇 주 전부터 반복적으로 알려야 한다.
인쇄물을 통한 준비-목적에 알맞는 책, 팸플릿, 포스터와 전단지를 배포해야 한다.
영적 준비-축일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특별한 기도에 초대해야 한다. 신심 깊은 사람들, 병자들, 고통 받는 이들,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협력을 구해야 한다. 거룩한 성사생활에 자주 참례하도록 조언해야 한다.
조직적인 준비-축일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일할 수 있는, 교회에 속한 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다. 특히 이 위원회는 모든 가정에 복음서가 |
들어가도록 제안해야 할 것이다. 진리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나쁜 서적, 나쁜 정기간행물, 나쁜 신문과 온갖 나쁜 출판물을 모아 없애도록 제안해야 할 것이다. 작은 도시에서는 본당 신부 자신이 이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가까운 준비 : 설교를 곁들인 다음과 같은 방법의 3일 간의 기도로 이루어진다.
- 오전에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 복음서(복음서를 제대 위에 펴놓음)의 장엄한 현시, 영원한 진리에 관한 묵상.
- 오후에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에 대한 교육과 성체 강복. 성체조배는 계속적으로 남성, 여성, 젊은이, 어린이가 이어간다.
묵상 주제는 성체, 노자성체, 심판, 영원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개한다. 곧 천국을 위해 창조된 인간, 길을 잃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 이르는 길을 다시 알려주시면서 영원한 영광에 도달할 능력을 주는 은총을 베푸시며, 어떻게 그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면서 인간을 위해 길, 진리, 생명이 되어주셨다.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착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심판하러 돌아오실 것이고, 착한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악한 이들은 영원한 불로 멸망시키실 것이다.
또한 오후 교육시간에는 다음 주제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그분의 삶을 살고, 그분의 표양을 따라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
위에 언급한 내용 대신,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룰 수도 있다.
1. 유일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부의 뜻에 따라 당신의 지상 삶을 통해 참 모습을 보여주셨기에 본성상 스승이시다. 영원한 교회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넓혀간다.
그러나 교회는 출판물, 담화, 복음과 반대되는 학파와 동향을 통해 교회 가르침의 효과는 세상(회개와 문명), 인간(구원과 성덕), 영원(듣는 이에게는 천국, 듣지않는 이에게는 지옥)을 통해 가라지를 뿌리는 ‘원수’126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확인된다.
2. 두 개의 깃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앞에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사탄의 제자들이라는 두 개의 큰 무리로 나뉜다. 과연 우리는 어느 깃발을 따르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사랑, 교회와 함께 느끼는 것, 종교교육, 좋은 강의를 토대로 실제적인 검토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학교에 굳건히 속하기 위해 사탄의 학교를 증오할 필요성.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127
3.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학교에 속하는가: ‘악을 피함으로써.’128사탄의 정탐꾼들을 어떻게 알아보고,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을 어떻게 바로 잡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그들을 몰아낼 것인가? ‘선을 행함으로써.’129 복음을 알고 사랑하며 살 것. 인내, 곧 경계와 기도(미사, 고해성사, 영성체)의 수단과 결심을 |
선택할 것.
그리고 하느님 말씀은 특별한 부류의 사람에게 유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이다. 그렇지만 가톨릭 액션 회원, 신심단체 또는 특별한 범주의 사람들인 남성, 여성, 젊은이, 어린이를 위해 별도의 모임을 주최할 수 있다. 오히려 이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아주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사제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준비된 평신도의 강연을 결부시킬 수 있다. 이들은 선생의 모습이 아니라 유일하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품위를 지녀야 한다.
성체조배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대리자인 교황의 가르침을 들어 알고, 말씀의 사도직과 출판 사도직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절은 감동을 주어야 한다. 교회와 제대는 축일에 맞게 장식하고, 무엇보다 신자들이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쉽게 하도록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3일 기도로써 사람들을 준비시켰다면, 축일을 더 쉽게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오전에는 모든 신자가 영성체하기 |
전에 입문을 곁들인 미사, 상황에 맞는 설교를 갖춘 장엄 미사, 성체현시와 복음서 현시.
오후에는 장엄한 성체조배 시간은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어가려는 진지한 결심, 그분의 아주 부지런한 제자들과의 일치, 복음서에 대한 경배, 봉독과 보급, 미사와 영성체에 자주 참례함으로써 천상 스승께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진지한 결심으로 마칠 것이다.
본당의 가정 숫자만큼 많은 복음서를 축복하고, 그 복음서를 가장에게 분배한다. 3일기도 동안 그리고 축일에 현시한 복음서에 입맞추고, 다음과 같은 장엄 서약으로써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교회를 알고 사랑하며 따르고자 한다는 서약
- 복음서와 반대되는 모든 가르침을 거부한다는 서약
- 복음서를 읽고 복음서를 경건한 자리에 모시겠다는 서약
- 본당의 종교교육에 동참하겠다는 서약
- 자녀와 가족의 종교교육을 돕겠다는 서약
- 가톨릭 출판물을 모든 방법을 다해 보급하겠다는 서약
- 비윤리적인 영화 관람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
모든 예식을 성체강복과 함께 마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 외에 다음의 이니셔티브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에서 복음서를 받지 못한 가정에 복음서 분배
- 참여자들이 ‘복음서를 매일 봉독하는 협회’130에 등록하도록
- 출판 사도직 그룹이나 협력자 부서 구성, 다시 말해 좋은 출판물 보급에 본당신부와 협력하는 평신도의 그룹 형성
-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서를 선물하고, 출판 사도직을 돕기 위한 모금.
출판 사도직과 출판사도에 관한 이론적 설명에, 성바오로수도회와 성바오로딸수도회가 행하는 실천규범을 덧붙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131
성바오로수도회는 회원에게 종교-윤리적 지적 · 기술적 양성을 한다.
‘종교-윤리적’ 양성은 회원의 그리스도인 삶, 수도생활, 수도회의 특수 사도직 순으로 규정한다. 청원기와 수련기, 그리고 수도생활의 처음 몇 년을 통해 완성된다. 회원들이 사랑에 기초를 둔 견고한 내적 삶을 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기”132까지 몸에 배인 하느님과 친숙한 일치로 이끌어 준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천상 스승의 귀감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도록 이끌어 준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33
‘지적 · 기술적’ 양성은 사도직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종교과목과 일반과목에 대한 정규과정으로 완성된다. 사도직에 도움이 되는 양성을 위해 아주 근본적인 과목으로는, 특히 종교에 대한 면학을 폭넓고 깊게 배려해야 한다.
면학 시간은 사도직 시간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한다. 사도직 시간에는 주로 인쇄기술과 제본기술134의 이론과 실습을 습득한다.
성바오로수도회 회원은 사도직의 모든 분야, 곧 편집, 기술, 보급에서 출판 사도직을 실습한다.
편집: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고 정해진 시험에 곧바로 좋은 결과로 통과한 회원은 양성에 필요한 일정 기간을 보낸 다음 편집실로 파견된다. 무엇보다도 지식에 겸손, 신앙, 온순한 정신을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바오로인 저술가 수도자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보급, 곧 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신앙과 윤리와 그리스도교 경신례에 관한 진리의 보급을 지향해야 한다. 정보, 이야기, 예화 … 그밖의 다른 모든 주변 사항은 사람들이 읽을거리에 마음을 더 잘 열 것을 지향하고, 그들을 위해 사다리나 조명이 되어주어야 한다.
일반규칙으로 그들은 무익한 질문, 고차원적 주제와 세속적인 주제를 피해야 한다. 그 대신 기초적이고 공통적인 진리를 따르며 성경에서 드러나는 거룩한 모범을 본받으면서 그 진리를 명확하고 단순한 형태로 설명해야 한다. 그들의 출판 범위는 대중, 어린이 |
그리고 문화인들 가운데서 선교지역이나 “진리에 대한 사랑”135이 가장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가장 유익한 책, 신문, 팸플릿, 전단지, 일러스트레이션 …, 출판 등 다양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보급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교황청 문서와 교리, 전례서와 기도서, 종교 관련 저술 등에서 제시한 교회의 가르침
- 성경, 특히 복음서
- 교부들, 교회학자들, 교회 저술가들의 작품, 성인들의 삶과 성전聖傳.
언제나 사도직에 산업적 상업적인 온갖 부류와 무관한 영적 특징을 보장하기 위해, 성바오로수도회는 회원이 장상에게 완전한 순명을 하고, 수도회 회원과 협력자가 쓴 작품이나 교회 권위 기관이 원하는 작품만 출간하고 보급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원고든 두 가지 검열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면 결코 출간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곧 수도회 자체의 검열과 교회 권위 기관의 검열로서, 반드시 ‘교회인가Imprimatur’라는 표시를 해야 한다.
수도회에서 출간해야 할 작품에 대한 검열은 자격을 갖춘 적임자에게 유보되며, 수도회의 정신, 시간, |
장소, 사람의 상황에 비추어 교의적 윤리적 가르침과 출판의 실제적 가치를 검토한다. 그뿐 아니라 그 작품이 단순하게 인간적 예술적 산업적 상업적 온갖 목적을 배제하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과 사람들의 선을 지향하는지 판단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항상 교회법136을 따라야 하고, 헌장 「업무와 직무Officiorum ac munerum」137의 규범에 부합해야 하며, 신앙 교리성의 최근 훈령과 일치해야 한다.
수도회에서 행한 검열의 판단은 간략하고 명확해야 하며, 원장이나 그 대리자에게 서면 제출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제외시켜야 할지 수정해야 할지, 또는 교회 검열기관에 제출해야 할지 결정하도록 한다. 이러한 일은 출판 허가를 위해 결정적인138 경우에만 해당된다.
저자가 서명한 모든 원고는 인수한 날짜를 기입하여 수도회 문서고에 보관하고, 원본은 돌려주지 않으며 복사본으로 대체한다.
기술 : 성바오로수도회에서 출판의 조직과 수단은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하고 가장 신속한 것이어야 하는데 사람과 출판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다.
인쇄와 제본 작업은 |
허황되어 화려하게 꾸밀 것이 아니라, 적당하게 마음에 들 만한 형태로서, 신앙의 진리를 소개하도록 적절한 규정을 따라야 한다.
(일반적으로 정가라고 하는) 헌금-정가는 모든 출판물에 명시해야 하는데 편집, 인쇄, 포장과 보급의 경비가 포함되어야 한다. 수도생활비와 사도직 발전을 위한 경비도 생각해야 한다.
선교 : 성바오로수도회는 선교를 통해 출판된 하느님의 말씀이 어디든 가장 먼 곳까지 특히 사제의 가르침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스며들도록 지향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은 선교의 가장 다채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 이를 위해 도서목록, 광고용 정기간행물, 서평, 보급 센터, 도서관, 방문선교를 우선해야 한다.
도서목록, 광고용 정기간행물, 신간 서평은 구원 대상인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다루고 있는 출판물을 어떻게 지원하고 있는 지, 실제적으로 어떻게 보급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사람들에게 도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보급 센터는 수도회 회원이 운영하며, 성직자와 신자들을 위해 대중에게 개방된 서원이다. 교구와 본당에 있는 작은 센터는 수도회의 중앙 관리부에 |
소속되어 거기서 활동과 조언을 받아 소극적이며 적극적인 출판 사도직을 실천한다.
보급 센터의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갖추어야 한다.
- 수도회 모든 출판물의 완전한 구비
- 도서관과 본당주보 및 전단지를 위한 활동 센터
- 더 나은 가톨릭 신문과 정기간행물뿐 아니라 수도회의 신문과 정기간행물의 구독 접수 센터
- 가톨릭계 여러 출판사의 유익하고 확실한 출판물 정보와 보급에 대한 봉사
- 나쁜 출판물을 알려주어 신자들이 피하도록 권고하기 위한 활동과 충고
- 성화, 성상과 성물 구비.
보급 센터는 신자들에게 편리하게 봉사하고, 그들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며 결정한다. 센터를 운영하는 수도자들은 수도회의 사랑에 찬 주의 깊은 보살핌과 보호는 물론, 그곳을 방문하는 외부 사람들의 계속되는 호소에 깨어 있어야 한다.
외부인을 위한 표시, 가구와 성물의 내부 전시, 성화와 복음서의 특별한 전시로 이곳이 상점이 아니라 출판물을 통한 하느님 말씀의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
거룩한 장소임을 드러내야 한다.
수도자들의 언어습관은 소박하고 진지하며, 그들의 태도는 (교리 수업때 요구하듯이) 하는 일에 열중하며 헌금-정가는 고정적이고 명확해야 한다.
성바오로수도회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문선교는 대중이 종교의 근본 진리에 이르게 하는 것을 지향한다.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나 가정에는 종교적 윤리적 성격을 띤 인쇄물을 적어도 한 장은 무상으로 제공해야 함을 하나의 규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수도회의 수도자들이나 협력자들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수도자들이 수행할 경우는 다음과 같은 규칙을 지켜야 한다.
1. 이러한 직무는 진지하고 원숙한 서원자에게 맡겨야 한다.
2. 성좌가 부여한 경우 어떤 면에서, 예를 들어 탁발과 유사한 지시를 내릴 경우 이를 준수하는 것은 의무다.
3. 보급자는 개인의 역할과 통상적 직무를 인정받은 권위 있는 신분증을 지녀야 한다. 신분증을 요구할 때는 이를 흔쾌히 제시해야 한다.
4. 결코 헤어지는 일 없이 항상 두 사람씩 함께 있어야 한다.
5. 자기 수도원에서 멀리 떨어져 지낼 경우 |
호텔에 묵어서는 안되며, 다른 수도회 수도원에 손님으로 묵게 해주기를 청하든가, 예외의 경우, 신심과 덕망이 높은 잘 알려진 그리스도인 가정에 머물러야 한다.
6. 두 달 이상 수도원 밖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돌아 와서는 부재 기간만큼 공동체에 머물러야 한다.
7. 가까운 지역이나 왕래가 가능한 지역일 때는 매일 저녁 또는 적어도 매주 수도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8.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든 겸손과 소박함, 청결이 드러나야 한다.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장소에 드나드는 것은 옳지 않으며, 비록 공동체 밖에 머문다 하더라도 수도자의 규칙과 실천사항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9. 집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되며,139 마음으로 건네는 음료수나 필요할 경우 물을 제외하고 수락해서는 안 된다.
10. 경우에 따라서는 언제나 그들에게 적절한 주의를 주는 장상의 감독하에 있어야 한다.
요약 : 편집, 기술, 선교는 성바오로수도회가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선을 위해 행해야 하는 유일한 사도직의 세 부분을 이룬다.
수도회의 |
목적에 따라 사도직은 완전해야 한다. 곧 시기와 사람들의 상황에 부합하는, 소극적이고 적극적이며 보편적인 사도직이어야 한다.
사도직은 ‘길 진리 생명’이라는 복음의 세 명제에 대한 깊은 이해, 동화同化, 설명이라는 고유한 표징을 지닌다.
출판물이 악용되어 영혼을 파멸시키는 그런 해로운 출판물을 확 산시키는 점에 대한 염려는 성바오로수도회 사도의 마음속에 강한 열정의 불꽃을 지피는 강력한 동기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수도회는 회원에게 그러한 죄의 본질, 죄의 심각성에 대해 자주 성찰하도록 촉구하며, 죄를 피하고 기워 갚을 실천적 방안을 제시한다.
이 장章에서는 바오로인 사도에게 주어진 지시와 지침을 간략하게 언급한다.
나쁜 출판물은 진리의 왕좌에 맞서 거짓 권좌를 일으켜 세운다.
다시 말해 |
|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140 성부를 거역한다. 당신의 지상 생애 대부분에 걸쳐 진리를 증거하고,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신 성자를 거역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거역한다.
나쁜 출판물은 인간의 생각에 독을 주입하기 때문에 인간의 영적 파멸을 그 뿌리에서부터 시도한다.
그리고 나쁜 출판물에 의해 생긴 죄는 아주 심각한 악의를 품고 있으므로 하느님의 진리 자체를 침해하고, 그로 인해 인간의 생각에 독을 주입하여 영적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매우 심각하다.
또한 중대한 스캔들을 일으키는 계획적인 죄가 쉽게 급증하므로 교회에서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계획적인 죄 : 일반적으로 글은 정열적인 충동의 결실이 아니라 고요하고 냉정한 정신으로 행하는 긴 준비가 필요하다.
사실 이득이나 야심, 또는 증오 그리고 끔찍한 타락에 의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독으로 종이를 더럽히려고 |
밤낮 없이 몇달 몇년을 보내는 저술가 집단이 있다. 그들 작품의 배후에는 나쁜 길로 이끄는 큰 출판협회가 있어 그들의 작품은 막강해졌다. 이러한 저널리즘의 조직이나 기업, 서점의 조직 등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러한 일에 다른 모든 사적이며 개별적인 사업이 합류한다.
공적인 중대한 스캔들을 일으킨다 : 윤리신학141은 더 자주 일어나고, 더 해로운 스캔들 중 해로운 글을 쓰고, 출판하고, 판매하고, 대여하고, 퍼뜨리는 사람들을 열거한다. 여기에 부도덕한 그림을 개인의 집이나 더 나쁘게는 공공장소에 전시하는 화가, 조각, 사진작가, 판화가 들이 합류하는 것이다.
쉽게 널리 퍼지고 있다 : 스캔들이라는 죄가 거기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의 숫자에 따라 증가하는 것이라면, 나쁜 출판물의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소수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설이 문제가 아니요, 제한된 숫자의 학생에게 강의하는 학교의 문제도, 자제할 수 있는 청중에게 행하는 강연회의 문제도 아니다.
여기서는 책의 부수에 따라 증가하는 죄, 또는 더 좋게 말해 스캔들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의 헤아릴 수 없는 숫자에 따라 증가하는 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행위, 하나의 연설로 인해 비롯되는 스캔들보다 훨씬 심각한 죄다. 신앙이나 도덕과 사랑을 침해하기 때문에 곱절의 악을 품고 있는 죄다.
교회에서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 출판물이 일으키는 죄의 스캔들과 더 심각한 몇 가지 형태는 교회법 자체가 설명해 준다. 정확하게 말하면 배교, 이단, 분열을 옹호하는 배교자들, 이단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의 작품을 발행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그 작품이 유통되는 순간부터 성좌에 유보된 ‘특별한 방식’으로 파문된다. 위에 언급한 책이나 성좌에서 명시적으로 금지한 책을 퍼뜨리는 자나, 고의로 합당한 허가 없이 읽고 소유하는 자는 파문의 대상이다.
합당한 허가 없이 성경, 성경 주해 또는 성경 주석서를 출판하는 저자와 출판사는 ‘유보 없이nemini reservata’ 파문 대상이다.142
출판물이 일으킨 죄를 보속하고 피할 가장 탁월한 방법은 출판 사도직을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면으로 행하는 것이다.
소극적인 면 : 저술가, 출판사, 서점, 보급자, 독자인 대중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해당기관의 확신에 찬 행위로써 그와 같은 죄를 미리 방지하는 것이다.
저술가에게 그리고 가까운(직접적인) 협력자들(주주, 책임자, 식자공,인쇄공,원고교정자)이나 먼(간적접인) 협력자들(잉크공급사, 지업사, 트랙터와 다양한 재료 제공자, 포장 담당자, 발송 담당자, 보급자)로 구성되는 모든 사람의 책임이 얼마나 중대하고 두려운 것인지를 납득시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이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 나쁜 서적, 해로운 의약품, 위험한 연예 프로그램, 가톨릭이 아닌 단체 등의 광고에 협력함은 심각한 죄라는 것.
- 악과 오류의 유포를 유일한 근본 목적으로 삼는 인쇄업에 협력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부당하다는 것과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일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는 것.
-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간접적인 협력자들은 용서를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비록 드물게 그리고 우연히 일어나지만, 어떤 오류나 해로운 내용을 출판하는 직접적인 협력자인 인쇄업자에게는 똑같이 말할 수 없다는 것.
- 나쁜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은 |
자기 돈으로 그 신문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으로 협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죄를 짓고 있다는 것.
- 교리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서적이나 외설적인 출판물을 판매하기 위해 전시하고, 팔고, 주고, 인쇄하고, 운영하는 것은 악에 대한 직접적인 협력이므로,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 합당한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금지된 도서를 마련해 주는 것은 죄라는 것.
- 정당한 허가 없이, 온갖 종류의 출판물을 어떤 고객에게나 구별 없이 판매하는 일반 판매점에 종사할 수 없다는 것, 등등.
적극적인 면 : 활동, 기도와 희생을 통해 출판 사도직에 직접 종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활동의 적극적인 면은 책 전체를 다룰 만큼 광범위하기 때문에 생략하고, 지금은 ‘기도’와 ‘희생’에 국한시키기로 한다.
주님은 기도와 희생의 삶으로 나쁜 출판물의 죄를 보속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사람에게 그리고 출판물을 통해 상처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할 필요를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보속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실천사항을 제시해야 한다.
1. 매일의 미사참례와 영성체
2. 사적이고 공적인 성체 흠숭시간
3. 월피정, 고해성사, 죄를 보속하기 위한 영성체와 하느님 말씀의 묵상으로 이루어진 천상 스승께 바치는 매달 첫 주간 신심 실천
4. 매일 복음의 한 부분을 봉독함
5. 작은 희생과 자발적인 고행
6.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중에 그리고 미사 후에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기도서124-125쪽)를 바침
7.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목말라하는 이들을 위해” 바치는 다음의 기도를 매일 바칠 것.
“주님, 오늘 미사성제를 드리는 모든 사제들과 하나되어 거룩한 제물이요 성체이신 예수님과 저 자신을
1. 부패한 급류처럼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종이라는 강물이 흘러들 듯 매일 많은 인쇄기를 통해 출판해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성모독과 오류와 외설을 보속하기 위해
2. 영혼을 목말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출판물이 타락하거나 무고한 많은 독자에게 당신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청하며
3. 모든 가르침, 인간적인 생각과 인간 활동의 원천을 독으로 오염시키면서, 천상 |
스승을 거슬러 권좌를 일으킨 많은 저술가와 출판인, 사탄의 눈먼 사목자, 거짓 스승의 회개를 위하여
4. 천상 성부께서 흘러 넘치는 당신 사랑으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고 선포하시며 세상에 주신 그분만을 흠숭하고 사랑하며 경청하도록
5. 예수님만이 완전한 스승이시라는 것, 환히 비추시는 진리요, 길이며, 온갖 성덕의 귀감이시며, 영혼의 참생명, 곧 성화의 은총이심을 알도록
6. 이 세상에 출판매체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급하기 위해 봉헌된 사제, 남녀 수도자가 많아지도록
7. 이러한 출판물의 저술가와 종사자가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을 위하여 거룩하게 되고, 지혜와 열정으로 충만하도록
8. 가톨릭 출판물이 나쁜 출판물의 중독성 있고 설득력 있는 소음을 뒤덮을 정도로 그 목소리를 높이면서 발전하고, 보급되고, 도움을 받고 많아지록 당신께 청하며
9. 저희 모두가 저희의 무지와 가난, 탄원의 눈길로 고개 숙여 늘 당신의 거룩한 감실 앞에 머물 필요를 알기에, 오! 주님, 빛과 신앙과 자비를 청하며 봉헌합니다.”
이 영역의 확장은 사람들이 영화관을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 이미 나타났다. 처음에는 평범한 사진 형태로 종이에 고정된 이미지를 보는 데 길들여졌던 흑백 화면 위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려는 호기심 때문에 자극을 받았다.
실험단계에서 벗어나 영화가 ‘오락’의 관점에서 눈길을 끄는 흥미로운 것으로 대중이 받아들였을 때 참된 각본으로 영화제작을 시작하게 되었고 성장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예술의 단계로 올라섰을 때 영화제작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사운드 트랙 필름 도입으로 더욱 고차원적 목적들 가운데 하나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실제적인 삶을 충실하게 재정립하는 것으로서 사도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개입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은 영화의 힘이 학교, 설교대, 출판의 힘을 능가하여 언제나 더 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오늘날 특히 강조되고 있다.
사실 인간 재능의 이러한 발명의 범위와 효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 범위는 개인, 가족, 사회, 지성, 도덕과 종교, 문학과 예술, 경제와 정치, 곧 삶 전체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젊은이와 대중에게 사상과 교육을 유포하는 온갖 |
수단을 능가하는 효력을 발휘한다.
사실 영화는 인간을 온통 사로잡고 감각적 정신적인 힘 전부를 감동시키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는 심리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가장 단순한 소설에서도 요구할 법한 장면의 재구성, 생각, 상상같은 것마저 영화는 관객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가 미치는 범위와 결합해서 그 효력은 좋은 영화냐 나쁜 영화냐에 따라 인간 사회의 네 가지 기둥, 곧 젊은이와 가족, 사회질서와 종교질서를 강화하거나 심각하게 흔들어놓을 수 있다.
위에 언급한 특성은 불행하게도 ‘어둠의 자식들’에 의해 돈벌이와 욕망을 자극하는 일을 부추기고, 말로 표현되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악용될 수 있음을 말한다.
비오 11세는 「주의 깊은 관심Vigilanti cura」에서 강조한 “모든 사람은 나쁜 영화가 영혼에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치는지 알고 있다. 이 나쁜 영화는 욕망을 찬미함으로써 젊은이들을 악의 길로 이끌고, 그릇된 삶을 보여주며, 이상을 모호하게 만들고, 순수한 사랑, 결혼에 대한 존중, 가족에 대한 애정을 파괴하기 때문에 죄의 기회가 되고 말았다. 더 나아가 사람들 사이에 편견과 |
국가, 사회계층, 인종 간에 쉽게 분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사건들이 이를 입증한다.
한 통계144는 비록 냉혹하지만 매일 받아들여야 하는 많은 영화의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지 헤아릴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진보를 가속화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할 의무가 얼마나 시급한지 보여준다. 사탄에게 부당하게 정복당한 광활한 땅을 되찾고, 하느님께 당신 권능의 위대한 선물을 되돌려드려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의 파괴에 폭넓게 이용된 도구를 영혼의 선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비오 11세는 이에 대해 「주의 깊은 관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좋은 영화 상영은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도덕을 가르치는 사람의 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여가선용의 기회를 주는 것 외에 삶에 대한 고상한 이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소중한 가치를 퍼뜨리며, 매력적인 형태로 진리와 덕을 소개하고, 국가와 사회계층 간에 이해를 도모하거나 다소 장려하며, 정의로운 국가를 촉진하고, 덕에 대한 요구를 다시 일깨우며, 세상의 더 나은 윤리와 사회의 향상을 위해 적극적인 도움을 주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사도는 합법적인 교회 권위 기관의 지시에 따라 가능한 한 이미 존재하는 대중영화의 그리스도화와 가톨릭 영화 제작에 협력하도록 결의하면서 자신의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여기서는 주로 영화 제작자, 민사당국, 부모, 교육자, 대중을 향한 설득력 있는 활동을 하면서 반그리스도교 영화를 제작하는 악을 저지하는, 대부분 소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다룬다.
영화 제작자(기획자, 배급업자, 대여자, 감독, 극장 지배인, 보급자)에 대해 직접 또는 간접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직접적인 활동은 자신과 사람들 그리고 |
|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책임에 호소하는 것이다. 간접적인 활동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윤리에 일치하지 않는 영화 상영에서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관할 민사당국에 대해서는 지도 및 검열 위원회를 설립하기 위해 협력하고 설득하는 사도직을 할 수 있다.
검열은 학문과 예술에 관해서뿐 아니라, 특히 윤리와 종교145에 관해서도 통제해야 하며, 그밖에도 제작물을 예술적 측면에서만 아니라 윤리적 종교적 측면에서도 더 나은 길로 이끌어 주는 것이라야 한다.
젊은이들이 세상의 모든 추한 면을 알게 하는 아주 타락한 영화를 보게 허용하는 것과 그들이 어떠한 영화도 보지 못하도록 금하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면서 아이들에 관련하여 올바른 수단을 택하도록 교육자와 부모를 교육해야 한다.
이 경우 “덕은 중용에 있다.”146는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신앙과 도덕이라는 명목으로 단죄할 수 없는, 현세적 삶의 표현에 물드는 것을 항상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의식 있는 부모와 교육자는 선별하여 알맞게 배분하고, 동반하고, 교정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선별할 것 : 자기 자녀를 위해 좋은 영화나 다소 무해한 영화를 선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정보를 얻어야 한다.
알맞게 배분할 것 : 비록 극장이 적절하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너무 자주 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도덕적인 이유와 위생상의 이유 때문이다. 도덕적인 이유란 빈번한 극장 출입은 영화에 쉽게 빠져들어 해로운 열정에 빠져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위생상의 이유란 영화의 자극적인 힘은 자주 아이들의 신경조직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영화는 포상이나 예외처럼 허용되어야 한다.
동반할 것 : 비록 영화 장면이 해롭지 않다 하더라도 주변 분위기가 항상 해롭지 않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을 동반해야 한다.
교정할 것 :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그릇된 인상을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관객에게 행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행해야 하는 활동은 광범위하며 |
대부분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더욱 의무를 다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줄 목적으로 문서와 입광고를 통해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이로운 발명을 억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선과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영화를 활용할 수 있다.
어떤 장소에서든 대중을 다음과 같이 이끌어야 한다.
- 좋은 생활습관, 가톨릭의 가르침과 사회질서에 반대되는 불경하고 외설적인 영화를 멀리하도록 할 것.
- 그러한 종류의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에 가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도 가지 않도록 할 것.
- 각자 가능한 한 이러한 영화 상영이 표출하는 위험에 대한 공중의식이 생기도록 힘을 모을 것.
이러한 결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영상물에 관한 영화 의식의 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대해 몬시뇰 치바르디Mons. Civardi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오늘날 확인된 사실은 아주 슬픈 일이다. 가톨릭 신자들, 종교 예찬론자들까지도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 극장이든 들나들며, 윤리에 대한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마치 목을 축이거나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호텔에 가는 사람처럼 무심한 자세로 영화관을 드나든다. 여기에는 무분별한 관객에 대한 윤리적 피해와 |
포르노 영화에 대한 간접적 협조라는 두 가지 위험 요소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사목자의 목소리에 순명하는 신자들에게 임의대로가 아니라, 종교적이며 교육 목적에 어울리는 판단에 따라 영화를 선별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의무를 이끌어 내는 영화 의식을 함양할 필요가 있다.”147
올바른 영화 의식을 양성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실천 수단 가운데 여기에서 제시하는 바는 영화 상영에 관한 ‘서약’이다.
비오 11세도 「주의 깊은 관심」에서 정확한 표현으로 직접 권고했다. “모든 영혼의 목자들은 그들의 미국 동료들처럼 매년 그리스도교 진리와 윤리에 어긋나는 영화 관람을 자제한다는 서약을 하여 신자들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148
“이러한 의무나 서약은 자기들의 막중한 책임을 자각한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려 깊은 협력을 통해 본당이나 학교를 매개체로 효과적인 방법으로 지킬 수 있다. 그밖에 주교들은 |
여기서 말하는 서약의 아름다움과 효력을 설명할 가톨릭 출판물을 이러한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거룩히 기억될149 교황이, 이미 여러 나라에서 용기150를 얻은바 있고, 미래를 위한 최상의 희망을 안겨줄 모든 의식 있는 가톨릭 신자에게 요청한 서약이다.
「가톨릭 문화La Civiltà Cattolica」는 이렇게 공고한다. “영화 서약이 더 많은 대중에게 퍼져나가고 지속된다면, 분명 다른 어떤 윤리적 개척 사업을 능가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종교적 윤리적 질서를 |
타도할 의도를 지닌 반대 세력이 없는 나라에서는 이 서약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부도덕한 볼거리를 심의하고 파기하는 사람들의 개별적 단체적 개입이 없다면, 다른 모든 기획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부언하는 바이다.”151
그러나 서약이 참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양심을 가지고 임해야 하며, 확고한 결심이 따라야 한다.
고매한 몬시뇰 에바시오 콜리Mons. Evasio Colli는 이렇게 썼다. “경험은 이러한 서약이 영화 상영에 관해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형성하기 위해 이루어지고, 잘 알려 준비를 갖춘다면 눈부신 효과를가져 온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152
그러므로 영화의 본질, 그리고 영화 자체와 그 윤리적 영향에 대해 숙고하고, 영화 서약의 핵심과 수반되는 의무, 악마의 활동과 허영을 끊어버린다는 세례성사 약속의 논리적 결과를 이해시킬 준비가 필요하다.153
이러한 준비는 영화대회, 설교, 강연을 통해 시행할 수 있고, 이탈리아의 여러 교구에서 조직하여 서약하는 것처럼, 영화 윤리의 날을 거행함으로써 가능하다.
가톨릭 영화란, 거룩함과 세속적인 주제, 교육적, 또는 여가선용 등 그 어떤 주제를 다루든 가톨릭 가르침의 원칙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기획에 있어 유익하고 가능한 활동은 기도와 실천이라는 두 가지 본질적인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의 선물을 인류에게 선사하신 은덕에 대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다.
영화는 인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관대한 선물이며, 교육과 |
사도직의 귀중한 수단이다. “한 편의 좋은 영화가 설교보다 더 심오한 효력을 지닐 수 있다.”
인간 영혼 안에 파멸을 가져온 것을 보속하기 위해 바치는 ‘속죄’의 기도다.
많은 영화가 감각을 자극하고 욕망을 부추기거나 생활과 가족, 결혼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암시하는 장면과 일화를 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년소녀들과 젊은이들에게 부도덕하고 반교육적인 영화는 불길한 영향을 행사한다!
교황 비오 11세는 이러한 윤리적 파멸의 가능성을 보고 거의 전율하면서 선포했다. “젊은이들과 어린이들 영혼의 대학살 앞에서, 영화관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 앞에서 보잘것없는 작은이들의 파괴자를 거슬러 우리 주님이 내리신 무시무시한 단죄가 뇌리를 스친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15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를 통해 구원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영화를 남용하는 사람들, 곧 제작자, 배우, 기업주, 의식 없는 관객, 무심한 부모를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한다.
결국은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주신 그분의 참된 선물을 인정하는 |
| 예술과 학문의 진보를 간청하는 ‘탄원’의 기도요, 부모, 교육자, 모든 관객 그리고 영화를 윤리적 교훈적 교육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 위에 하느님의 빛을 간청하는 기도다.
희생과 결부된 기도다. 그러므로 비오 11세는 그의 칙서 「그늘진 곳에서Umbratilem」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계속 기도와 보속의 활동을 봉헌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밭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고 경작하는 사람들보다 교회의 발전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더 많이 일하는 것이다.”155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특히 성공의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가톨릭 영화관 개관과 조직을 들 수 있다. 선교용 영화작품, 그리고 영화 관련자들의 종교교육과 지원, 가톨릭적으로 영감받아 제작하도록 지지함을 종교교육에 활용할 수 있다.
가톨릭 영화관의 개관과 조직은 특히 본당의 경우에 나쁜 영화의 해악과 위험에서 신자들을 보호하는 소극적인 목적뿐 아니라, 좋은 영화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적으로 그들을 교육하고 |
지도하는 적극적인 목적을 가진 이니셔티브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낼 것이다. 그뿐 아니라 직무 수행을 위해 성직자의 손으로 효과적인 도구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영화필름 대여처럼 물질적 이윤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 영화제작의 윤리적 향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신앙과 윤리 원칙에서 영감받은 영화제작을 위한 직접적인 활동은 아주 어렵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리스도교적 영감을 받아 기술적으로 완벽한 예술, 문학, 가톨릭 출판물과 더불어, 그 어떤 성스러운 또는 세속적인 주제, 교육적이거나 여가선용의 주제를 가톨릭적 관점에서 다루는 가톨릭 영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큰 제작사가 납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거의 언제나 재정적 성격의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를 개인 또는 단체로 고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설득력 있는 주제는 경험에 의해 제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곧 윤리적으로 건전하고,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영화는 오로지 전염성이 있는, 관능을 부추기는 것을 지향하는 영화보다 대중의 호감을 더 많이 사게 되는데, 가장 타락한 사람일지라도 인간 마음의 그 바탕에는 언제나 선을 향한 비밀스러운 동경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하고 자질을 갖춘 기관의 감독하에 가톨릭 원리에서 영감받은 영화를 세상의 모든 지역에서 상영하도록 허락받기 위해서는 국제적 상호협력을 |
촉진하고 유지하는 것이 매우 이로울 것이다.
영화 제작자, 감독, 배우에게 종교-윤리적 양성과 지원이 필요하다. 그들이 그것을 모르고, 그래서 살지 못한다면 순수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종교-윤리적인 생각을 구상하고 해석하며 지지할수 없기 때문이다.
선교영화는 가장 위안이 되는 것 중 하나인 동시에 가장 염려되는 것이다.
비교적 계속 증가추세에 있는 그리스도교 사도직의 전위병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기 위해 영화를 이용할 줄 알았고, 여전히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욕망과 돈벌이의 자극은 권해서는 안 될, 스캔들이 될 영화를 미개척지까지 도달하게 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탄식과 비탄에 잠겼고, 정부 관계자들도 덜 문명화된 사람들 사이에 부패한 영화가 저지르는 풍기 문란한 활동을 반대하고 있다. 이런 영화는 관객의 정신에 백인종은 모두 악인과 윤리적으로 타락한 여인으로 이루어졌다는 확신을 불러일으킨다.
가톨릭 신자들, 선교사들이 |
그 분야를 제일 먼저 확보하며 그 선교지역에 무한한 영적 이익을 산출해야 한다. 시대와 상황, 좋은 의지가 다른 활동수단을 이용하게 해줄 것이다.
출판은 영화에 관해 책임이 있으며, 가장 중요한 협력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비오 11세는 1936년 4월 21일, 국제영화출판대회 참석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출판의 책임을 밝혔다.
“영화는 출판이 처음부터 항상 신중하고 엄중한 방식으로 따라 주었다면 지금과 같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출판이 언제나 덕, 진리, 정의에 따라 찬사와 비난을 예상하고 배포하면서 자기 역할을 완수했더라면 현재의 영화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그와 같은 책임은 줄어들지 않으며, 미래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더 커진다. 사람들은 내일의 영화는 당연히 오늘의 출판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대중영화의 그리스도교화 작업과 가톨릭 영화의 육성은 대부분 출판의 힘에 달려있다. 사실 출판과 더불어 활동과 수호의 이니셔티브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이니셔티브 가운데, 특별히 출판에 유보된 이니셔티브가 있다. 어떤 영화가 볼 만하고 어떤 것을 제외시켜야 할지를 미리 알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영화 추천에 관한 것이다.
추천작업에는 유통되기 시작한 영화에 대한 검열과 윤리적 가치에 따른 등급의 분류가 우선한다. 검열과 분류는 일반규정에 따라 교회 권위 기관에 의해 직접 임무를 맡은 기관이 하기 때문에156 사적인 작업이 아니다.
한편 추천작업은 출판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특히 출판 사도직에 속해 있다. 이미 인용한 교황청 국무원장 |
추기경 에우제니오 파첼리Card. Segretario di Stato Eugenio Pacelli가 브룩셀의 주교 브로케 추기경Card. Brochée[= Can. Brohée]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가톨릭 신문이 좋은 [영화]는 칭찬하고 나쁜 것은 비난하기 위해 영화에 관한 컬럼난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판 사도직은 먼저 합법적인 검열기관에 맡겨, 위 기관의 판단을 되풀이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고 확인해야 한다. 결코 그 기관에 반대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 바로 우리의 직무를 수행하듯 임해 야 한다. 사람들과 결부되지 않고, 틀림 없이 정말 나쁜 작품은 나쁜 영화로 분류해야 한다. 윤리적 원칙과 미적 견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은 볼 수 있도록 분명하게 추천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중은 영화를 보러 가는 두려움을 더 이상 갖지 않게 될 것이고, 좋은 작품을 선호할 것이며 제작자, 배급소 그리고 극장 소유주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부도덕한 작품에 대항하여 떠들썩한 반응을 보이거나 관람을 조직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일은 바라던 바와 반대되는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 사도직에 봉사하고 협력하는 출판은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 작품을 더 강력하게 만들 것이다.
비록 최근에 탄생했지만 오늘날 우리의 생활 영역에서 출판과 영화처럼, 아니 라디오는 그보다 더 이미 탁월하고 대체할 수 없는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문화와 사상의 ‘보편적 전달수단’이라는 논의할여지가 없는 자신의 특성을 통하여 ‘세상에 자신의 낱알이 움트도록 선과 악의 씨앗을 뿌리는 파종기’라고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
라디오가 세상에 뿌려 놓은 그리고 뿌리는 좋은 씨앗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많은 경우 그 씨앗은 교육, 교양, 문명, 세계적 형제애, 사도직의 놀랍고도 풍부한 도구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주 나쁜 씨앗을 뿌렸고 또 뿌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출판과 영화의 경우처럼 사탄의 왕국을 위해 희생자를 속출시키는 치명적인 무기인 셈이다. 사실 얼마나 많은 윤리적 |
재난의 원인을 제공했는가! 얼마나 많은 경우에 그리고 얼마나 많은 나라에서 종교심과 매우 파렴치한 윤리 주제의 충돌을 입증했는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수많은 아마추어 무선사에게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파괴의 이 산山 앞에 세상 각 분야의 많은 사람이 거의 공식적으로, 거의 설득력 있게 항의하지만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몇몇 사람들은 고귀한 이상을 품고 나서기도 했지만, 정작 당면한 어려움 앞에서는 해결해 나아갈 용기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낙심하거나 체념하며, 그저 하느님 섭리에만 의지한 채 문제가 흘러가는대로 그냥 방치한 이들도 있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가 하면, 대다수의 청취자는 논의의 주제, 음악과 코미디가 그들의 종교적 정서를 해칠 때에도 이를 포기할 힘이 없다.
소수의 사람만이 분명하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관심을 가졌을 뿐이고, 이러한 일에 열의를 가졌던 일꾼이 언제나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 곧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니며 자주 거대한 세상을 이용하거나 남용하기 위해서였다.
위에 설명한 내용에서 가톨릭 신자의 개입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의무라고 생각한다. 결론이 나지 않은 비판이나 단순히 소극적인 저항이 아니라 협력적 지적 조직적 실천적으로 이루어진 기도, 희생, 활동으로써 가능한데, 이미 세워진 건물의 일부를 허물어 고상하고 세련된 자료로 대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는 우리의 종교, 곧 가톨릭의 교의, 윤리, 경신례가 제공한다.
결국 수호 활동, 도움을 주는 활동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활동이다.
수호활동 : 라디오로 인해 야기되는 스캔들과 죄를 최대한 감소시키기 위해 해당기관, 국내외 라디오 방송국의 책임자들, 대중을 향한 설득력 있는 활동을 지혜롭고 사랑에 넘친 방법으로 행하는 것. 라디오 방송은 단순히 듣는다는 성격 때문에 영화보다 덜 위험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볼 수 없거나 읽을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도움을 주는 활동 : 가톨릭 방송, 특히 바티칸 라디오 방송을 알리고 보급하는 것.목적 달성을 위한 활동 :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하느님의 이 |
강력한 선물을 봉헌하기 위해, 결국 사도직의 강력한 수단이 되도록 모든 초자연적 자연적 수단을 활용하는 것. “예술, 학문, 완전한 기술 진보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하느님을 향해 질서지어져야 한다.”157
가톨릭 방송국을 설립하고, 종교방송을 배가하며, 세상에 라디오 방송을 점차 침투시켜 일반 프로그램이 가톨릭의 취향, 정서와 생각을 드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양성된 경영자, 기술자와 구성작가가 필요하다.
이러한 목적을 제시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조직 앞에서 반대자들은, 라디오는 다른 모든 발견과 발명처럼 전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이 사용하고 수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각자가 고백하는 신앙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과 모든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행하는 작업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라디오 청취자들 대다수가 그들과는 정반대의 취향을 드러내면 자신들은 가톨릭 조직의 도입을 고려할 이유가 없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무익한 논쟁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가톨릭 신앙이 자연 윤리와 진리에 가장 부합하기에 |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전력한다 해도 틀림없이 우리를 압도할 것이다.
가장 탁월한 해결책은 하느님만을 신뢰하면서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한 예로 북미에서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들 수 있다. 거의가 개신교 신자인 상황에서, 선별된 가톨릭 신자 그룹이 라디오의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여 해결하라는 제안을 받아 방송에 무상으로 간여했다. 문제는, 처음에는 실현불가능해 보였지만, 매일 미국 청취자들의 주목을 끌었고, 참으로 예기치 않은 윤리적 물질적 이익을 이끌어 냈다.
왜 다른 모든 국가에서는 이러한 실례를 모방할 수 없을까?
특히 라디오 방송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가톨릭 사도직 활동이 이탈리아에서는 라디오의 첫 사도, 곧 지금은 트리폴리의 주교인 빅토리오 파키네티 신부P. Vittorio Facchinetti에 의해서 훌륭하게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잡지 「프란치스코 수사Frate Francesco」에 하느님의 이 경탄할 만한 선물을 사도직에 바칠 필요성을 발표했다.
게재된 기사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
그 자신이 「라디오와 수도자의 사도직La radio e l’apostolato religioso」이라는 책에서 말한다.
그의 정확한 표현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몬시뇰 케틀러Mons. Ketteler가 준 주석[문장]을 해설하면서, ‘성바오로께서 이 세상에 돌아오신다면 저널리스트가 되실 것이다.’ 우리 성인들 중 가장 위대한 분들은 열정적인 정신과 기쁜 마음으로 선과 평화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오늘 마이크를 설치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라디오가 생각과 말의 놀라운 전달 수단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리고 있는지에 대해 계속 주목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족들의 복음화라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거룩한 목적을 위해 이 놀라운 도구를 활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데 사용하고자 시도함은 적절하고 정당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158 하고 명하신 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스승의 명령을 거의 글자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에 유보되었음을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내 말을 듣게 될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예언을 살아 있고 실천적인 것이 되게 해야 한다.
또한 실제로 조용하고 작은 방에서 시작하여 음향기기에 모인 설교가의 목소리는 전광의 속도를 타고 소리 파장의 능력이 도달하는 어디에나 널리 퍼져나가고,
우리 집 지붕 위로 올라가 수신 안테나를 두드리며, 우리가 사는 집의 벽을 통해 거의 조화롭고 선명한 목소리로 우리 귀와 우리 마음에 도달한다. 이 목소리가 어떻게 하늘의 어두운 심연에까지 오르고, 무한한 공간을 뛰어넘고, 폭풍우와 태풍의 요란한 소리를 이겨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 목소리는 비록 우리의 집이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우리가 병으로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하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교회에 가기를 원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 주변에서 다시 울려 퍼진다. 특히 몇 년째 교회를 멀리하고, 오늘도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라디오는 그들을 냉담함에서 흔들어 깨워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성찰을 통해 삶의 변화를 생각하여 결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파키네티 신부는 자신의 고귀한 생각을 굳힌 다음 용기 있게 교회 권위 기간을 직접 찾아가 하느님 말씀을 마이크로 선포하는 허가를 얻어냈다. 처음에는 제한된 허가였지만, 그 후 협력자들의 협회로 인가를 받았으며, 차츰 확장을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열정이 어떻게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사도직을 일으켰고, 어떻게 열매를 맺었으며, 미래를 향한 희망이 되었는지는 이미 인용한 |
빅토리오 파키네티 신부의 「라디오와 수도자의 사도직」이라는 책에서 설명하고 수집한 건설적이고 감동적인 편지를 통해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열성적인 프란치스코 회원에 의해 시작된 활동은 사도직과 사제직에서 그의 많은 동료에 의해 계속되었고, 가장 큰 갈채를 받을 만했으며, 이탈리아에서 큰 발전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전 세계에서 본받을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디에서든 라디오를 보급하여 교육과 문명의 풍요로운 도구로 사용할 뿐 아니라, 특히 지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도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라디오는 가톨릭 사도직에 약속된 충만한 미래를 제시한다.
1 이사 8,1: ⁎“Sume tibi librum grandem, et scribe in eo stylo hominis.”
2 탈출 17,14: ⁎“Scribe hoc ob monimentum in libro.”
3 2베드 1,21: ⁎“Non enim voluntate humana allata est aliquando prophetia: sed Spiritu Sancto inspirati, locuti sunt sancti Dei homines.”
4 ⁎여기서 언급하는 교회법은 분명 당시에 사용한 1917년의 교회법전Codice di Diritto Canonico(C.J.C.)을 가리킨다.
5 ⁎유명한 「교부학Patrologia」은 두 계열로 구별된다. 「그리스 교부학Patrologia Greca(PG)」과 「라틴 교부학Patrologia Latina (PL)」
6 ⁎이러한 표현은 이어지는 표현처럼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있기 몇십 년 전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반영한다는 것을 새삼 기억할 필요는 없다. 실상 이 표현은 이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빛으로 해석하고 통합 · 수정된다
7 이 장章의 자료는 호교론적 작품이랄 수 있는 B. Re S.J. 「왜 나는 모든 것을 읽을 수 없는가Perché non posso leggere tutto」(초판)에서 대부분 발췌했다.
8 1코린 3,6: ⁎“Ego plantavi, Apollo rigavit; sed Deus incrementum dedit.”
9 로마 1,20:⁎“invisibilia enim ipsius, a creatura mundi, per ea quæ facta sunt, intellecta, conspiciuntur.”
10 지혜 8,1: ⁎“Attingit ergo a fine usque ad finem fortiter, et disponit omnia suaviter.”
11 이사 66,22.
12 ⁎ 로마 13,1: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13 묵시 1,8: ⁎“Ego sum alpha, et omega.”
14 묵시 21,5: ⁎“Ecce ego nova facio omnia.”
15 로마 8,19.23-24.
16 시편 48[49],21: ⁎“cum in honore esset, non intellexit.”
17 루카 4,18: “evangelizare pauperibus misit me.”;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라고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18 시편 47[46],8: “[psallite sapienter.”; 콜로 3,16 참조:⁎“하느님께서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 미가를 불러라.”
19 요한 10,10: “ut abundantius habeant.” 참조:⁎“나는 내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20 테르툴리아노, ⁎「호교론」 17권 “testimonium animoe naturaliter christianoe.”
21 1티모 2,4: “Deus vult omnes homines salvos fieri.”;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22 히브 4,12 이하.
23 루카 8,11:⁎“Semen est verbum Dei.”
24 요한 17,3:⁎“ut cognoscant te et quem misisti Jesum Christum.” 참조.
25 지혜 11,26: “Deus qui amas animas.”;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26 2코린 12,15.
27 「대백과사전Grande Dizionario Enciclopedico」, a cura del Prof. Giovanni Trucco(Vol. II).
28 ⁎ 루카 24,27 참조.
29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가 단순한 신자들에게 성경독서를 금지했다고 비난한다. 이 관점은 사실과 다르다. 성경은 아주 어려운 책이고, 잘못 해석하기 쉽기 때문에, 각주를 갖춘 승인된 번역본을 읽어야 한다고 교회가 요구했을 따름이다. 틀림없이 모든 이가 성경을 갖게 했던 종교개혁 시대에는, 아마도—그 반작용으로—더 엄격한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항상 성경의 연구와 독서를 깨우쳐 주며 촉진해왔다.
30 ⁎1893년, 성경연구에 대한 회칙.
31 ⁎1920년, 성 예로니모 1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회칙.
32 Peduzzi, 「삶의 원천으로Alle fonti della vita」.
33 ⁎인용한 교회법과 교령의 이탈리아어 번역을 제시한다. 왼편의 숫자는 휘너만P. Hünermann이 엮은 2개국어로 된 출판본(EDB 1995)인 이탈리아어 Denzinger의 번호임(역주: 한국어판에는 라틴어만 기재함).
34 ⁎제2차 바티칸공의회 「계시헌장Dei Verbum」의 빛에 따라 단죄받았던 다음의 선언들을, 더 이상 늘 ‘오류’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비오 6세는 신앙의 가르침을 이렇게 강조했다.
비오 7세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레고리오 16세도 이렇게 가르친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방어하며 장엄하게 결론을 내린다.
35 * 해석서.
36 ⁎소개하고.
37 「대백과사전Grande Dizionario Enciclopedico」, a cura del Prof. Giovanni Trucco, vol. II.
38 ⁎“Nemo potest sensum Scripturoe sacroe cognoscere, nisi legendi familiaritate, sicut scriptum est: Ama illam et exaltabit te: glorificaberis ab ea, cum fueris amplexatus.”
39 마태 28,18-20.
40 1티모 3,15: “Columna, firmamentum veritatis.”;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41 ⁎레오 13세(1878-1903)는 60여 개의 회칙을 반포함.
42 ⁎레오 10세(1903-1914)는 16개의 회칙을 반포함
43 ⁎비오 11세(1922-1939)는 28개의 회칙을 반포함. 1944년까지, 비오 12세(1939-1958)는 이미 6개의 회칙을 반포했는데, 그가 반포한 회칙은 모두 41개에 이른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여기서 13개의 회칙을 반포한 베네딕토 15세(1914-1922)를 언급하지 않았다.
44 ⁎루카 1,33: “Et regni eius non erit finis.” 참조.
45 에페 1,10: ⁎“instaurare omnia in Christo, quoe in coelis et quoe in terra sunt.”
46 요한 10,10: “ut vitam habeant et abundantius habeant.”
47 ⁎ 이 구절은, 첫 출판본에서 한 구절을 건너 뛰었다고 보기 때문에 문맥상 의미를 바탕으로 재구성했고, 1950년 출판본에 첨부했다.
48 ⁎‘해체되었다scomposta’를 ‘분해되었다Decomposta’로 대체함.
49 “De Maria nunquam satis.”
50 말라 2,7: ⁎“Labia enim sacerdotis custodient scientiam, et legem requirent ex ore eius.”
51 1티모 4,16:⁎“Attende tibi et doctrinoe: insta in illis. Hoc enim faciens, et teipsum salvum facies, et eos qui te audiunt.”
52 마태 4,4.
53 요한 17,3.
54 1코린 4,16: ⁎“Imitatores mei estote, sicut et ego Christi.” 더 정확한 것은 1코린 11,1을 보라.
55 갈라 2,20: ⁎“Vivo autem, iam non ego: vivit vero in me Christus.”
56 마태 16,26.
57 Cavassa, 「그리스도교 수덕과 현대생활Ascetismo cristiano e vita moderna」.
58 ⁎Miguel de Molinos(1628-1696), 스페인 신학자로서 정적주의로 기소당한 그의 「영성 안내Guida Spirituale」를 통해 단죄됨.
59 ⁎J. M. Bouvier de Guyon(1648-1717), 프랑스 신비가. 그 또한 정적주의로 기소됨.
60 마태 11,30.
61 Cavassa, 「그리스도교 수덕과 현대생활Ascetismo cristiano e vita moderna」.
62 정적주의자들과 거짓 신비주의자들의 역사가 이를 충분히 입증한다.
63 ⁎ascesi(그리스어 áskesis = 윤리적 투쟁에서 유래함)는 분명히 여기에서 ascensioni(고양)를 의미한다.
64 ⁎세속문화 부분에서는 무신론적이고 혁명적인 계몽주의, 가톨릭 분야에 서는 얀세니즘.
65 ⁎「사목 직무에 대한 염려Inter pastoralis officii sollicitudines」(1903).
66 Finalpia, 「전례 잡지Rivista Liturgica」, 1935년, 1938-1939년 참조.
67 사도 2,42:⁎“Erant autem perseverantes in doctrina Apostolorum et communicatione fractionis panis et orationibus.”
68 요한 17,23: “pro eis sanctifico meipsum ut sint et ipsi sanctificati in veritate… ut sint consummati in unum.”; ⁎ 요한 17,19-23 참조.
69 참조.: 「가톨릭 문화La Civiltá Cattolica」, 1938년 10월호; ⁎A. Ferrua S.J., 「모든 이를 위한 지극히 거룩한 교부들I Ss. Padri per tutti」 - 「가톨릭 문화」 89 (1938), vol. IV, quad. 2119, 46-57에 발표.
70 「가톨릭 문화」, 1938년 10월호 참조.
71 본 장章은 Tonolo의 「교리교사의 지침서Il manuale della Catechista」에서 부분적으로 발췌함.
72 마태 28,18-20.
73 ⁎이 회칙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가르침에 대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반포되었다.
74 ⁎“Misereor super turbam.”: 마르 8,2 참조 .
75 비오 10세는 교리에 관한 훌륭한 회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와 같은 종류의 설교는 노고와 묵상을 요구합니다. 오히려 그 어떠한 다른 종류의 설교보다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기릴 만한 교육을 하는 교리교사를 찾는 것보다 유창하게 연설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설교자를 찾기가 훨씬 쉽습니다. 본성적으로 쉽게 이해하고 말하는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많은 성찰을 통한 준비 없이 아이들과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교리교육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무지와 무례를 담보로 삼아 이러한 일을 태만하게 진행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반대로 청중이 무식할수록 더 많이 연구해야 할 의무가 크고, 일반 서민의 지성에서 그렇게 숭고하고 그렇게 멀기만 한 진리를 각자의 능력에 맞게 제시하기 위해 더욱 근면해야 할 의무가 커집니다. 지식인들과 무지한 이들, 모든 사람이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알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76 페네롱Fénelon은 어린이의 두뇌는 바람에 노출된 장소에 켜놓은 촛불과도 같아 그 불꽃은 항상 깜빡이며 흔들린다고 한다.
77 사도 1,1: “Jesus coepit facere et docere.” 참조.
78 요한 14,6: ⁎“Ego sum Via.”
79 마태 10,28.
80 마태 28,20.
81 요한 20,21.
82 요한 10,11.
83 요한 10,16: “et fiet unum ovile et unus pastor.”
84 ⁎ 1테살 4,3: “Hoec est voluntas Dei, sanctificatio vestra.”
85 ⁎“Sanctorum tuorum, Domine, exempla nos provocent, quatenus quorum solemnia agimus etiam actus imitemur.”
86 “은사는 여러 가지이다divisiones gratiarum sunt.”(1코린 12,4)라는 말은 사실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Deus vult omnes homines salvos fieri.”(1티모 2,4)는 말도 그에 못지 않게 사실이다. 모든 사람은 성덕에 부르심 받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위에 부응해야 한다. 성인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87 ⁎“Si isti et illoe, cur non ego?”
88 A. Tanquerey, 「수덕 신비 신학 개론Compendio di teologia ascetica e mistica」 [n. 178].
89 「대백과사전Grande Dizionario Enciclopedico」, Giovanni Trucco 교수 편찬 참조.
90 이 장章과 그다음에 이어지는 장에서 제시하는 자료의 대부분은 소책자 「흑과 백Nero e bianco」, Sales, Roma에 게재된 논고의 개정이다. ⁎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해 이 책의 부록에 첨부된, 1921년의 「좋은출판물 협력자Unione Cooperatori Buona Stampa」 회지에 실린 논고도 읽기 바란다.
91 마태 7,17.
92 ⁎이러한 마지막 권고는 1942년에 알베리오네 신부가 한 체험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그해 신부는 주간지 La Domenica Illustrata -당시 진행중이던 전쟁 동안, 평화의 성탄을 위한 “신의 휴전tregua di Dio”을 제안했다- 에 실린 당신의 인터뷰 기사 때문에, 파시즘 홍보 장관Ministro della Propaganda fascista에게 체포 위협을 받았고, 정기간행물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경고 조치를 받고 정간되었다.
93 물론 거의 항상 아주 막강한 유용성을 이루어내는 과학 잡지를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94 ⁎ 여기서 광고문 대신에 선전문으로 대체했다.
95 이러한 형태하에서는 본당주보를 타자기로 쳐서 만든 것일 수도 있다.
96 dulce pondus.
97 Borla, 「어린이의 종교교육La formazione religiosa del fanciullo」 참조.
98 ⁎Guglielmo Massaia(1809-1886), 피에몬테 출신의 카푸친 수도회 선교사로서,1884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는데, 알베리오네 신부는 그를 대단히 칭찬했고, 영화 <Abuna Messias>(1938)를 그에게 헌정하려 했다.
99 ⁎1926년에 발간된 회칙으로서, ‘믿지 않는 이들’ 사이에서의 선교 전개에 관한 내용.
100 창세 1,1: ⁎“Deus creavit coelum et terram.”
101 잠언 16,4: ⁎“Universa propter semetipsum operatus est Dominus.”
102 요한 10,10. * 더 정확하게는 요한 17,3과 10,16 참조.
103 * 마르 16,15.
104 ⁎Giovanni Casati(1881-1957)는 밀라노의 신부요 저널리스트, 사회 지도자로서, 1904년에 이탈리아 연합 가톨릭 순회 도서관 기관지인 ‛가톨릭 도서관 회보’로 창간된 「독서 잡지Rivista di Letture」를 1912년에 인수했다.(이 이니셔티브는 1921년에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도서관 총 연합”을 창설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 잡지는 1946년에 추기경 슈스터Card. Schuster에 의해 산 페델레San Fedele의 예수회에 양도했고 「독서Letture」라는 새로운 표제로 창간되었다. 1994년 6월부터 성바오로 잡지사에서 출판하고 있다.
105 「빵과 독Pane e tossico」, la stampa U.D., di A.C.I., Roma 참조.
106 ⁎A.M.D.G. - 레오폴도 보드농 추기경Leopoldo Beaudenom,「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방법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정신에 따른 고백성사와 영적 지도Pratica progressiva… secondo il metodo di Sant’Ignazio di Loyola e lo spirito di San Francesco di Sales」 vol. II, 3a ed., Marietti, Torino-Roma 1931.
107 마태 22,21.
108 문헌은 다음과 같다:
비오 9세: Quanta cura(1864), Sillabo.
레오 13세: Inscrutabili Dei consilio(1878), Quod Apostolici muneris(1878), Arcanum divinoe Sapientioe(1880), Diuturnum(1881), Immortale Dei(1885), Libertas(1888), Sapientioe Christianoe(1890), Rerum novarum(1891), Inimica vis(1892), Graves de communi(1901).
비오 10세: Il fermo proposito(1905).
베네딕토 15세: Pacem, Dei munus pulcherrimum(1920).
비오 11세: Ubi arcano(1922), Divini illius Magistri(1929), Casti connubii(1930), Quadragesimo anno(1931), Nova impendet(1931), Caritate Christi compulsi(1932), Vigilanti cura(1936), Divini Redemptoris promissio(1937).
비오 12세: Summi Pontificatus(1939), Radiomessaggio per il cinquantenario della Rerum novarum(1941), Radiomessaggio di Natale(1941).
Giordani, 「사회 대백과사전Le Encicliche sociali」, Studium, Roma 참조.
109 * 원문의 단어는 ‘probatico’.
110 「가톨릭 문화」, 1월 1935, 2029호(quaderno) 참조.
111 「그림의 심리학Psicologia dell’illustrato」 di S.T. Serini, in 「흑과 백Bianco e nero」, Sales, Roma 참조.
112 * Apprendimento(습득), assimilazione(동화).
113 잠언 15,30.
114 * “per conversionem ad phantasmata.”
115 * dispensatore(관리자, 분배자).
116 1 코린 4,1.
117 루카 22,32: “Rogavi pro te (Petre), ut non deficiat fides tua.”
118 요한 10,16.
119 * 잇따르는 개정판에서는 ‘재능talento’을 ‘보화tesoro’로 대체함.
120 로마 8,35 참조.
121 「그리스도의 나라를 전하는 목소리Voce che diffonde il regno di Cristo」, G.C.I.G.F., Milano.
122 성바오로수도회는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도서관 총연맹un’Associazione Generale Biblioteche(A.G.B.)을 설립했다.
“‘가정 도서실’, ‘학교 도서관’ 그리고 특히 ‘본당 도서관’을 설립함으로써, 독자들의 다양한 필요성에 따른 그리고 다양한 수준에 맞는 가장 좋은 서적의 보급과 유통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종교적 교육적 윤리적 학문적 교육에 더 광범위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 독립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미 설립된 도서관에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그들이 원하는 모든 출판물의 최근 신간을 공급해야 한다.
도서관의 설립, 발전, 기능을 위한 실천적 규범과 충고를 제시해야 한다. 그 규범은 비록 일반적인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각 도서관의 종류와 필요성에 따라 다양해진다. 성바오로수도회 출판사와 다른 출판사의 사상적 윤리적 예술적 가치에 관한 확실한 판단을 명확히 표현해야한다.
성바오로수도회의 서적과 잡지 그리고 다른 출판사의 서적 및 잡지를 구입할 때 할인과 특별구매기간을 일치시켜야 한다.”
123 시편 125,6 *[126,66]: “Euntes autem ibant et flebant… venientes autem venient cum exultatione portantes manipulos suos.”
124 요한13,13.
125 요한6,68.
126 *마태13,28 참조:“inimicus homo:원수가그렇게하였구나.”
127 마태6,24.
128 시편 37[36],27: “Declina a malo” 참조 .
129 상동 : “Fac bonum” 참조 .
130 필요한 정보를 문의할 곳: 성바오로수도회, 로마.
131 언급한 수도회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서는 쪽번호56 이하를 보라.
132 ⁎“vivere summe Deo in Christo Jesu.”
133 1요한3,16.
134 * ‘제본’과 제본소에서 말하는 제본기술은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더 우아하고 오래 가는 겉표지를 입히기 위해 한 작품의 여러 접지를 한데 모으는 기술과 예술이다.
135 “Caritas veritatis”;참조:1코린8,1;1요한2,5.
136 교회법을 보라:1345 (n.1,2,3),1386,1389,1390,1391,1392,1393,1394.⁎ 개정된 현행 교회법 이전의 교회법 조항들이다.
137 *1897년1월25일자 레오13세의 헌장.
138 *원본의 단어는 ‘불명확한indefinitiva’임.
139 *이러한 규정은 ‘방문선교’ 개념과 모순되는, 원천이 이상한 규정이다.
140 히브1,1.
141 Mark, 「알폰소 윤리학 법령Institutiones morales alphonsianœ」, t. I, par. 37 참조.
142 * 그와 같은 제재는 1917년판 교회법이 분명하게 경고하였고, 앞에서 상기한 모든 유사한 훈령처럼, 새 교회법에서는 폭넓게 수정되었다.(교회법 1311-1322 참조)
143 본 장章과 다음에 이어지는 장들 참조: <로마 본당사제들에게 한 교황 연설
Discorso pontificio ai Parroci di Roma>(1931년 2월 16일); <교육영화 소비조합 대표자들에게 한 연설Discorso ai rappresentanti del Consorzio Utenti Cinematografo Educativo>(1933년 3월 18일); <교황청 국무원장 추기경 파첼리가 브룩셀의 주교 브로케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Lettera di Sua Em. il Card. Pacelli,Segretario di Stato di S.S.al Can.Brochée [=Brohée]di Bruxelles>(1934 년 4월 24일); <국제출판영화연합회 대표자들에게 한 교황 연설Discorso pontificio ai rappresentanti della Federazione Internazionale della Stampa Cinematografica>(1934년 8월 2일); <국제출판영화회의 참석자들에게 한 교황 연설Discorso pontificio ai Delegati del Congresso Internazionale della Stampa Cinematografica>(1936년 4월 21일); 회칙 「주의 깊은 관심Vigilanti cura」(Pio XI, 1936년 6월 29일); Civardi, 「가톨릭 신자들과 영화I cattolici e il cinematografo」; Civardi, 「윤리 앞에서의 영화 Il cinema di fronte alla morale」; 「영화 지식Coscienza cinematografica」(영화 윤리를 위한 날. 광고를 위한 규범과 지침 La giornata per il cinema morale. Norme e sussidi per la propaganda); 「영화 잡지Rivista del Cinematografo」(1938-43년); 「영화 추천Segnalazioni cinematografiche」; 「영화 목록Indice cinematografico」; 「가톨릭 문화La Civiltà Cattolica」(1943); 「선한 목자Pastor Bonus」, Pia Società San Paolo(1942년 11월); <L’Osservatore Romano>(1938-43년).
144 <이탈리아 문화, 문학, 예술 활동에 대한 보고Il Ragguaglio dell’attività culturale, letteraria ed artistica dei cattolici in Italia>, Istituto di Propaganda Libraria 참조.
145 종교분야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처럼 그 주제에 정통한 사람, 곧 가톨릭 사제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 하다.
146 *“In medio stat virtus.”
147 Civardi, “영화 예술에 대한 비평 문제Questione critica dell’arte cinematografica”in 「선한목자Pastor Bonus」, società San Paolo,novembre 1942.
148 1934년에 미국 주교들은 영화 상영의 남용에 대항하여, 소위 ‘품위 있는 무리 Legione della decenza’라고 명명하는 하나의 개혁운동을 공표했다. 수백만의 가톨릭 신자들이 가톨릭 윤리와 올바른 삶의 규정을 저해하는 그 어떤 영화 상영관에도 입장하지 않겠다고 의무화하면서 서명했다.(회칙 「주의 깊은 관심Vigilanti cura」)
149 s.m.
150 교황비오11세는 회칙 「주의깊은 관심」에서, 미국에서 ‘품위있는무리’에 의해 좋은 결실을 맺은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영화가 윤리적인 측면에서 향상을 가져왔기 때문에 개혁운동의 현저한 성공을 부각시키는 것은 최대의 위안이 됩니다. 범죄와 악습이 줄어들었고, 죄가 더는 공개적으로 허용되거나 환영받지 않게 되었으며, 삶의 그릇된 이상이 젊은이의 불꽃같은 영혼에 그렇게도 오만한 방식으로 더이상 소개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입에 오르내리는 일부 소문은 영화계의 저명한 예술가들이 ‘품위 있는 무리’의 주장에 의해 심각하게 해를 입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 반대로 ‘품위 있는 무리’가 영화를 예술적으로 더 고상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고, 고전적인 작품 제작과 평범하지 않은 가치의 창조적 독창성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화사업의 재정적 투자도 근거 없이 예견된 것처럼, 손해를 입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덕에 어긋나기 때문에 영화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온 많은 사람이 올바른 생활습관을 해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협하지 않는 고결한 영상물을 보았을 때, 다시 영화관을 찾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51 「가톨릭 문화」(febbraio 1943) “영화 서약과 영에 관한 윤리의식La promessa cinematografica e la coscienza morale sugli spettacoli”,F.Pellegrino s.j.,p.151.
152 1942년 7월에 이탈리아 주교들에게 보낸, “가톨릭 액션” 운영에 관련된 추기경위원회의편지.
153 교회권위기관이승인한서약양식은다음과같다.
“성부와성자와성령의이름으로.아멘.
나의 존엄성과 그리스도교 신자의 의무를 의식하면서, 나는 복음의 가장 순수한 윤리에 반대되는 원칙을 주장하거나 상영하여, 그리스도인의 덕성과 삶에 위험을 형성하는 영화를 지탄합니다.
그와 같은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에 출입하지 않을 것과,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고, 특히 내 가족도 출입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과 버라이어티쇼를 제공하는 영화관에도 드나들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그뿐 아니라 기도와 활동을 통해 위에 언급한 것들이 대변하는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위험에 대한 의식을 대중에게 형성하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그 목적은 그러한 것들이 발전하지 못하도록 또는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요, 이는 하느님께 대한 경의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된 영혼의 보호를 위해 그리고 이탈리아 국민의 육체적 영적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과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이러한 나의 서약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바랍니다.”
154 회칙 「주의깊은관심」.
155 * 원서의 각주는 회칙 「주의 깊은 관심」에서 인용한 것으로 잘못 표기했다.
사실 본문의 인용은 1924년 7월 8일, 교황 11세가 반포한 「그늘진 곳에서 Umbratilem」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AAS 16 (1924)385-389 참조
156 이탈리아에서는 가톨릭영화센터Centro Cattolico Cinematografico(CCC)에 위임했고, 센터는 현재 로마에 있으며, 주소는 다음과 같다. Corso Vittorio Emanuele, 337.
157 비오11세의 회칙 「주의깊은 관심」.
158 *마태10,2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