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문
1944년에 “경건한 성바오로수도회 선교 단체Istituto Missionario Pia Società San Paolo”가 엮은 「출판 사도직L’Apostolato dell’Edizione」의 중요성은 ‘양성과 사도직 지침서Manuale direttivo di formazione e di apostolato’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이 작품은 모든 바오로인이 대를 이어 사용해야 하는 것이며, 또 실상 그렇게 사용해 왔다. 표지나 표제 또 는 짤막한 서론에서조차 알베리오네 신부를 언급하지 않았다 해도 그 가치가 결코 감소되지는 않는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편집상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 작품의 내용이 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바오로인이 여럿 관여하기는 했지만 알베리오네 신부의 감독에 의해 제한되거나 명확하게 요청되곤 했기 때문이다.
「출판 사도직」은 1950년에 재판되었으며, 3판은 1954년 11월 26일에 성바오로수도회 총통솔이 감수visto하고 승인하여1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 교회의 검열imprimatur을 받아 성바오로딸수도회에서 출판했다. 이는 바오로인들에게 사도직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는 바오로가족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제1편은 일반적이며 이론적인 특징을 띠고 있고, 제2편은 실천적 특징을 띠고 있다.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는 모든 바오로인을 일컫는 사도2란 과연 어떤 사람이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는 남녀 모든 바오로인을 가리킨다. 내용은 짧은 여러 개의 장으로 세분되어 있는데 특히 젊은 독자를 위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1. 사도직: ‘출판’(출판의 내용, 순서, 특징, 요구 사항과 방법)에 대한 기술이며 설명이다.
2. 사도: 제1편 사도에 관한 부분은 사제 그리고 사제와 함께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고자 하는 통장적 직무자-사제, 그리고 ‘남녀 수도자’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성바오로 수도회는 성바오로딸수도회라는 여성 줄기와 연대하여 ‘출판’ 사도직을 수행하는데 이는 ‘평신도’도 할 수 있는 사도직이다. 이들 남성과 여성은 더 이상 사제의 감독을 받지 않고 ‘교리교사’가 될 수 있으며(251항 참조),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양성’, 무엇보다 영적 양성이 필요하다. 이는 미사, 영성체, 묵상, 성체방문, 양심성찰 등을 포함한 매일의 ‘강력한 신심’에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낳음으로써 말씀을 출간edidit하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에게서 영감을 받아야 한다.(역주: 성모님이 성자를 낳으신 것을 ‘말씀의 출간edidit Verbum’으로 표현하는 것에 유의하라) 바오로인 사도들에게 중요한 특징은 성경을 공경하는 것이다.
제2편은 출판을 세 가지 ‘사도직’의 특수 명칭으로 세분하는데 곧 인쇄, 영화, 라디오로 나눈다. (1955년에 출간된) 이 책 3판에는 텔레비전도 추가되었다.
초판에는 인쇄에 할애된 내용이 서른여덟 개의 장章(재판과 3판에서는 서른아홉 개의 장으로 늘어남)이었다. 영화에 관해 초판에서는 네 개의 장이 할애되었는데 재판과 3판에는 다섯 개의 장으로 늘어났다. 라디오에 관해서는 초판에서 3판까지 오직 한 개의 장이 할애되었다. ‘텔레비전’은 드러내어 표현되지 않았지만 이미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선교를 위해 더욱 신속하고 더 광범위한’ 수단에 사도가 채택해야 하는 수단 중 하나다. 1955년3에 출간된 3판에는 텔레비전에 대해 한 개의 장이 할애되었다.
그러나 인쇄에 관해서는 현대적 수단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많이 할애한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알베리오네 신부는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도록 재촉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시대와 함께 걸으려는 염원이 있었다. 기술은 출판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
사도직을 위한 새롭고 더 나은 방향에 관해서는 「출판 사도직」의 역사가 증명해 준다. 이 ‘지침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3판을 거듭하면서 첨가 · 개정되었다. 초기 작업에 대한 계속적인 보완작업은 사도직이라는 개념 자체의 발전을 가리킨다. 「출판 사도직」의 수정작업은 성장 과정을 드러내며, 과거의 다른 책, 곧 「출판 사도직」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인쇄 사도직l’Apostolato Stampa: AS」과의 연속성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지금 제시하는 문헌 곧 알베리오네 신부 S.S.P., 「인쇄 사도직Apostolato Stampa」(알바, 성바오로수도회 [1933]; 170 [2] p., 19 c. m)의 머리말 격인 1933년의 도서목록 카드를 읽어보는 것이 유익하다.
비교해 보면 곧 알 수 있는 것은 「출판 사도직」에 저자의 이름이 누락된 것과 「인쇄 사도직」의 마지막에 수록된 승인의 말이다. “승인할 뿐 아니라 인쇄를 열렬히 권고하는 바이다. 알바, 1933년 6월 10일. 몬시뇰 F. 키에사, 사도직 관리자. 「인쇄 사도직」이 나오기까지 바오로가족을 깨어 지켜주던 박학다식한 대부요 교구 참사위원 키에사Chiesa 신부4의 신학적 권위가 뒷받침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쇄 사도직」의 표지에는 성바오로수도회의 옛 문장이 실려있다. 펼쳐진 책에 요한 14,6에서 인용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Ego sum via veritas et vita”라는 말씀과 칼이 장식되어 있고, 윗부분에는 인간의 구원자 예수Jesus Hominum Salvator의 머리 글자 JHS가 광채를 발하고 있다.
이미 「인쇄 사도직」의 많은 부분이 성소자들과 일반 대중에 관련하여 「가제타 알바Gazzetta d’Alba」(1932)와 「사목생활Vita Pastorale」(1931년 이하)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출판 사도직」에서도 그렇지만 이미 「인쇄 사도직」에서 알베리오네 신부는 인쇄 사도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것은 새겨진 하느님 말씀의 설교요 인쇄된 설교다.) 사도직의 고유한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성경의 저자이신 하느님에게서 온다.) 사도직의 특징(사목적이다), 준비, 요구 사항이나 전제조건(예수님과 함께, 교회와 함께, 성 바오로와 함께 느낄 것), 가톨릭 신자들의 의무, 내용에 대한 작업, 역사의 여왕이신 마리아, 인쇄 사도직을 위해 필요한 미사, 성체방문과 영성체, 순서(인쇄의 우선순위는 교회의 가르침, 다음은 성경과 성전), 화보집, 본당주보, 도서관, 초보자들, 중급자들, 숙련자들, 완전한 (또는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가르침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모든 것이 여러분의 몫이다l’omnia vestra sunt. 편집과 보급, 본질적 특징인 성경에 대한 공경, 인쇄 사도직을 하는 수도자들, 인쇄의 악영향, 성경과 인쇄 사도직, 프로파간다la propaganda 선교, 광고는 결론적으로 편집, 인쇄 그리고 보급을 위해 지키고 있으며 또 지켜야 할 실천 규범이 이어진다.
「인쇄 사도직」은 전체가 29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몇 장에서는 이론적인 면을 다루고, 나머지는 모두 실무에 대해 다루고 있다.5 다미노A. Damino6 신부는 이 책을 “독창적이고 주목할 만한 책이며, 바오로회를 위한 프로그램이다.”라고 했다. 사실 「인쇄 사도직」에는 독특한 힘과 독보적인 매력이 있는데, 이는 특별히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긴 몇몇 페이지가 「출판 사도직」에는 실리지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소개하는 이 책의 색인(우리말 번역본에는 생략함)을 살펴보면 출판 사도직이 책 제목뿐 아니라 영화,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 사도직을 ‘출판’에 포함시킴으로써 ‘인쇄 사도직’이란 이름뿐 아니라 동일한 개념 자체를 어떻게 흡수하고 확장시켰는지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도 ‘여러 사도직’은 ‘출판’7에 포함되어 있다.
비록 「출판 사도직」의 소개말에 그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 [인쇄, 영화, 라디오…]의 통합을 성바오로수도회는 일반 표현인 ‘출판 사도직’으로 명명한다. 이 책은 이러한 사도직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데, 주로 인쇄 사도직에 대해서 말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알베리오네 신부가] 강연에서 전개한 사상과 주로 「인쇄 사도직」 안에 있는 중요한 내용을 충실히 따르고자 한다.”
1933년판 「인쇄 사도직」과 1944년의 「출판 사도직」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보이는데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많은 이의 도움이 있었다.
성바오로딸수도회의 루이지나 보라노Luigina Borrano 수녀가 바오로 영성 센터의 안토니오 다 실바Antonio da Silva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책으로 출판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프리모 마에스트로께서 몇 년 동안 20명 남짓한 성바오로딸들에게 정기적으로 해주신 강의를 적은 노트에 불과했으니까요 […]. 그 후에 출판하도록 저에게 맡기신 정확한 의미의 지침서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창립자께서 당신의 학생들인 저희에게 전달하신 당신의 진솔한 생각을 미래의 남녀 바오로인들에게도 전하기 위한 「양성과 사도직 지침Manuale direttivo di Formazione e di Apostolato」으로 완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분은 「출판 사도직」에 「인쇄 사도직」의 모든 내용이 단순하고 교육적인 형태로 옮겨지기를 원하셨고,
당신 강의의 요점을 완전히 따르기를 바라셨습니다 […] 강의 노트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그분이 말씀하시고 명하시는 내용을 제가 할 수 있는 한 충실하게, 전부 받아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께 보여 드리면 그분은 오랫 동안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셨습니다. 제가 자필 원고를 드렸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가끔 당신 생각을 수정하시거나 몇몇 문장을 받아 적게 하셨습니다.”
보라노 수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길 진리 생명 방법’에 관한 제6장은 조반니 펠리챠G. Pelliccia 신부에게 맡겼으므로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문서로 기록해 두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자신이 쓴 부분과 전혀 다른 형태의 글이 있음을 까다롭게 지적하셨지만 이에 동의하셨다. 이러한 문제가 「출판 사도직」 초판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다음 판에서는 상당 부분이 간략하게 축소되었다.”8
이 책의 재교는 아틸리오 템프라A. Tempra 신부에게 맡겼는데, 「어느 가까운 협력자가 바라보고 소개한 알베리오네 신부Don Giacomo Alberione visto e presentato da un suo vicino collaboratore」라는 표제의 타자기로 작업된 소책자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젠차노의 선한목자예수수녀회 지도신부로 있을 때, 어느 날 프리모 마에스트로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원고를 건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애정이 가득 담긴 책입니다. 이것을 읽고 출판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그 노트는] 대충 쓴 복 잡한 것이었다….
문체도 논리적이지 않았고 순서도 서로 달랐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한번 읽고 난 후 출판할 수준이 못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프리모 마에스트로께서는 내게 좀 더 주의 깊게 읽어보라고 부탁하면서 ‘아주 좋은 내용’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문장 몇 군데를 바꾸고, 표현을 좀 고친 후 프리모 마에스트로에게 돌려 드렸더니, 그분은 그 원고를 알바의 마에스트로 자카르도에게 보내어 읽어보게 하셨는데, 자카르도 신부는 그 책의 출판을 매우 흡족해 했다.” (p.34 이하)9
오늘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템프라 신부의 의견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 템프라 신부는 「여정l’iter」에서 거의 정확한 정보를 우리에게 주었는데, 아마 이 책도 알베리오네 신부가 매우 신뢰했던 마에스트로 자카르도가 손질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출판 지침서10에도 알베리오네 신부의 이름을 저자로 표기하지 않은 이유요, 또한 이 책은 독자인 남녀 바오로인 역사의 결실이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된 작품인 까닭이다."
「출판 사도직」의 확립시기는 「인쇄 사도직」과 마찬가지로 1931년 초로 소급하여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단계의 날짜는 좀 더 정확하다. 대리자인 템프라 신부가 1943년 12월 10일자로 로마에서 이 책의 원고를 감수했고, 신학자 G.자카르도 신부는 1944년 1월 2일자로 알바에서 출판하도록 승인했다. 교구장 대리요, 참사위원 P. 쟈놀리오Gianolio 신부의 인가는 1944년 1월 5일자로 알바에서 받았으며, 1944년 1월 15일, 성바오로딸수도회에서 발간했다.
출판 사도인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1931년부터 1944년까지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931년 12월 25일에 「파밀리아 크리스티아나Famiglia Cristiana」를 창간했고, 같은 해에 알베리오네 신부의 윤리 교육서인 「주요 결점La passione predominante」이 출간되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1932년 사제수품 25주년을 맞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Donec formetur Christus in vobis」(바오로인의 영성 지침서)11를, 11월에는 「사랑하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Per i nostri cari defunti」라는 묵상집을 발간했다.
1933년에는 「인쇄 사도직」과 함께 알베리오네 신부의 강론집 「고해성사에 관한 수덕적 고찰Considerazioni ascetiche sulla Confessione」(사제들의 월피정), 「완전한 존재이기를 원한다면Si vis perfectus esse」(신학생들에게 한 묵상), 「거룩한 성경을 읽으십시오Leggete le Ss. Scritture」(성경에 대한 10시간의 흠숭)를 출간했다.
일반적으로 성바오로수도회에서 출판한 것은 신심서적과 대중서적이었다. 이 시기의 가톨릭 연감(1934)에는 성바오로수도회가 알바에서 출판한 책이 게재되었다. 「라 도메니카 일루스트라타La Domenica Illustrata」(주일 전례 해설)와 「가제타 알바La Gazzetta d’Alba」(알바교구의 주간 신문) 그 밖에 「그리스도인 가정의 천상 스승Il Divino Maestro della Famiglia Cristiana」, 「하느님의 어머니La Madre di Dio」, 「사목생활La Vita Pastorale」, 「좋은 말씀Una buona parola」, 「주보La Domenica」(역주: 성바오로수도회가 이탈리아에서 발간하고 있는 주보), 지역적이고 보급이 제한된 정기간행물12이 있었다.
그러므로 구두설교와 문서설교의 동일함이 이론뿐 아니라 실제로도 하나임이 확인되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프리모 마에스트로로서 모범을 보이면서 인쇄 사도직을 최초로 실천했다. 종이에 담긴 그의 말은 바오로가 족 전체를 양육하고 가르치고, 가능하다면 대중 가운데 있는 ‘성소자’까지 얻기를 바랐다.
남녀 바오로인에게 저술은 가장 우선되는 사도직 활동이다. 「출판 사도직」의 지침은 기술과 보급에 종사하는 사람들 외에 ‘남녀 저술가 사도들’ 의 양성을 지향한다.
바오로인 사제는 마땅히 저술가 사제라야 한다.
실제로 1935년에 출판된 알베리오네 신부의 책은 「영신수련과 피정Esercizi e ritiri」 제1권 한 권 뿐이다. 그는 이 책의 긴 ‘머리말’의 첫부분을 자신의 신학생들이 쓴 책과 소책자 목록으로 가득 채웠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1월 25일)을 맞아 1933-1934년의 바오로회 수련자들이 준비한 「교회 안의 수도자들I religiosi nella Chiesa」이 나왔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다음 작품에 대해서도 격려의 말을 아끼지않았다. 바르베로G. Barbero 신부의 「지질학Geologia」, 카사리지R. Casaliggi 신부의 「식물학 개념Nozioni di biologia vegetale」, 드라고네C.T. Dragone 신부의 「중근대L’età contemporanea」(고등학생을 위한 역사 교재), 포르나리L. Fornari 신부의 「영웅적 혈통Progenie eroica」(선교회 사제들에 관한 내용), 포르나사리E.G. Fornasari 신부의 「대서양 저편에Oltre l’Oceano」(마리아의 종 선교회에 관한 이야기), 라메라S. Lamera 신부의 「중세기Il Medioevo」(고등학생을 위한 역사 교재), 무차렐리F. Muzzarelli 신부의 「일반 지리학Geografia generale」, 파차리니I. Pazzaglini 신부의 「에네이데L’Eneide」(역주: Virgil의 서사시 일부에 해설을 곁들인 이야기 일부), 로아타B. Roatta 신부의 「일리아데L’Iliade」(각주와 함께 몇 편의 숨은 이야기), 톤니I. Tonni 신부의 「광란의 오를란도L’ Orlando furioso」(해설을 곁들인 몇 편의 숨은 이야기) 등이다.
이것을 읽는 독자라면 상상할 수 있겠지만 이 목록이 전부가 아니다. 사실 알베리오네 신부는 매년 당신의 젊은이들에게 책을 쓰라고 격려했다. (아니 “의무를 지워주었다.”)13
1936년 알베리오네 신부는 당신의 거처를 알바에서 로마로 옮겼다. 같은 해에 바오로가족의 또 다른 수도회를 설립하여 그의 비전은 구체화되었다. 곧 선한목자예수수녀회Suore di Gesù Buon Pastore로 보통 Pastorelle(목자수녀들)라고 불렀다.
같은 해 4월 12일, 성바오로수도회의 회헌이 빛을 보았다. 1937년에는 그가 쓴 다른 책이 출간되었는데, 「거룩한 영신수련Ss. Spirituali Esercizi」(선생 수녀들을 위한 지침서), 「기도해야 한다Oportet orare」, 「사말I Novissimi」 등이다. 4월 18일부터 로마의 바오로회 인쇄소에서 정기적인 회보 「성 바오로San Paolo」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8월 1일자 「성 바오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품을 앞둔 시험 전에 모든 지원자는 각자 자신의 책을 발간해야 합니다.”
1938년에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신앙의 원칙Sectamini fidem」(바오로회 사제들을 위한 것으로 후에 「그리스도 내 안에 사신다Mihi vivere Christus est」로 바뀜)과 「우리의 희망이신 마리아Maria nostra speranza」(5월)가 출간되었다.
한편 영화 사도직14을 시작했다. 성바오로영화사Sampaolo Film(S.P.F.)의 <아부나 메시아Abuna Messias>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무솔리니 컵 대상 수상). 아마도 그 줄거리가 강한 식민지 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1939년에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책이 네 권 출간되었고, 5월 13일자로 로마 영화출판주식회사Società Anonima Romana Editrice Film (R.E.F.)가 설립되었다.
1940년에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이름으로 여섯 권의 책이 출간 되었고, 4월 23일자로 바오로회의 엔초 만프레디Enzo Manfredi 신부가 시간 분배 전화 체계 특허il brevetto del sistema telefnico divisione tempo(일련번호 38.30.65)를 등록했다.
1941년에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책이 세 권 출간되었고, 5월 10일자로 교황 비오 12세가 「회헌」을 승인하면서 성바오로수도회에 칭찬 교령Decretum laudis을 수여했다.
이탈리아가 전쟁 중이었지만(1939-1945), 「출판 사도직」에서 알베리오네 신부는 이와 상관 없이 오직 윤리적인 면만을 언급 하면서 이냐시오의 대표적인 주요 결점에 대항하는 자신과의 ‘투쟁’을 이야기할 뿐이었다.15
1931년부터 1944년 사이에 쓴 것으로 보이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작품은 종말론적 열쇠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책에 나오는 주요 단어는 죄, 죽음, 심판, 지옥, 연옥, 천국 등이다.
1942년에 「선생 수녀들을 위한 피정Esercizi alle Maestre」, 「영신수련 Esercizi Spirituali」 제2권, 연속 기획물인 「이것을 묵상하라II Hoec meditare」2권의 시리즈 몇몇 권이 출간되었다.
1943년에는 「이것을 묵상하라II Hoec meditare」 2권의 다른 몇몇 권, 「영신수련Esercizi Spirituali」 제3권과 함께 「파티마의 성모La Madonna di Fatima」(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성심께 기도하라는 초대)가 빛을 보았다.16
1944년 초까지 알베리오네 신부의 면모는 좋은 출판사도로 부각되었다. 라디오 방송 활동에 관한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라디오는 바티칸 라디오가 이미 시작17되었지만 그 당시 남녀 바오로인에게는 실천보다 이론적인 사도직 차원이었다. 그럼에도 「출판 사도직」 안에서 그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18 그러나 몇 년 후, 알베리오네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라디오 방송을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19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알베리오네 신부는 불가피하게 교회와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1915-1918)이 끝난 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도 개입하려는 상황이었다.
1922년부터 1939년까지는 비오 11세가 교황으로 재임在任했으며, 그 뒤에 비오 12세(1939-1958)가 교황으로 재임했다. 1931년에서 1944년까지 알베리 오네 신부는 그 두 분 교황에게 순종했다.
1931년, 비오 11세는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반포 40주년을 맞이하여 그리스도교 사회 질서의 확립을 위한 회칙 「사십 주년Quadragesimo Anno」을 반포했다. 같은 해에 파시즘의 반대를 받는 가톨릭 액션Azione Cattolica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Non abbiamo bisogno」를 반포했다. 심각한 재정위기,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실업과 급격한 군비 확장에 대한 답변이기도 한 「새로운 위협Nova impendent」을, 같은 해에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 기념으로 「진리의 빛Lux veritatis」을 반포했다.
교황도 인쇄 사도직을 실행하시며 그 본보기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 1931년 2월 12일, 16시 30분에 교황청 국무원장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 추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이크를 통해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의 소개를 받은 교황 비오 11세는 라디오 바티칸 방송국을 개국하면서 라디오 메시지를 세상에 전한 역사상 첫 교황이 되었다.
1932년, 이탈리아는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파시스트 정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비오 11세는 ‘인류가 당면한 재난에서’ 지극히 거룩한 예수 성심께 바치는 기도와 속죄에 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Charitate Christi compulsi」를 반포하게 된다. 이는 교회에 적대적인 출판물과 영화제작 및 음반제작을 단죄하기 위해서였다.
1933년 4월 2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인류의 구원 19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 성년 또는 구원의 희년을 반포했다. 공화주의 정부 치하에서 살아가는 가톨릭 신자들의 어려운 상황에 관하여 스페인에서 회칙 「우리가 지극히 아끼는Dilectissima nobis」이 출간되었다. 한편 히틀러는 독일 제3제국의 장관직에 올랐고, 다카우Dachau에 첫 ‘수용소’가 생겼다.
1933년 2월 11일, 라디오 바티칸은 단파 방송을 시작했다. 6월 6일, 교황은 알현실에서 언론인 순례단을 맞아 가톨릭 출판 협회unione della stampa cattolica에 관해 이야기했다. 9월 18일 광고인들의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윤리, 모든 광고의 주된 요소’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1934년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긴 행군’의 해였다. 토리노의 「라 스탐파La Stampa」는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스포츠 전송사진을 실었다(이탈리아-영국 축구 경기). 6월 10일, 비오 11세는 로마의 언론인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출판 사도직’에 대하여 명확하게 언급했다. 8월 10일 알현에는 ‘윤리적인 영화를 위한 염려’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영화출판협회Federazione Internazionale della Stampa Cinematografica 회원들이 참석했다.
1935년 비오 11세는 가톨릭 사제에 관한 회칙 「가톨릭 사제들에게Ad catholici sacerdotii」를 반포했다. 1935년은 커뮤니케이션 세계에서도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다. 텔레타이프라이터로 일간지에 뉴스를 전송하는 실험이 성공을 거두었고, 일본에서는 무선전화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 라디오 방송에서는 ‘흑인이나 히브리계’의 재즈는 금지되었다. 3월 22일부터 8월까지 베를린의 한 방송국에서는 선명도가 낮은(180선)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식민주의가 득세하여 이탈리아도 1936년에 제국으로 공포했고, 빅토리오 엠마누엘 3세가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되었다. 같은 해, 러시아에서는 ‘출판의 자유’를 보장한 새 헌법을 반포했지만, 역설적으로 완전한 사회주의 저널리즘을 공표했다. 11월 2일, BBC(영국 방송 협회)는 해상도(405선)가 선명한 첫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1936년은 교황과 매스 미디어 종사자들의 만남이 잦았다. 4월 8일, 비오 11세는 「라 크루와La Croix」(역주: 프랑스 잡지)의 제36차 대회 참석자들과 「본 프레스Bonne Presse」(역주: 프랑스 신문) 일반 참석자들에게 연설했다. 며칠 후인 4월 21일, 국제영화출판 회의에 영화의 윤리적 고양에 관한 교황청 메시지를 보냈다. 5월 12일, 교황은 바티칸 가톨릭 출판국제전시회를 개최했다.20 5월 16일에는 ‘이상의 대변자’라는 주제로 외국 출판사 대표들을 만났다. 교황의 이러한 여러 담화는 6월 29일에 반포한 영화 상영에 관한 회칙 「주의 깊은 관심Vigilanti cura」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0월 31일, 교황은 가톨릭 광고 대회 참가자들에게 ‘윤리적 의무’에 관해 연설했다. 11월 10일에는 ‘라디오 사도직’에 대해 국제 가톨릭 라디오 방송 사무국 대표들에게 연설했다. 비오 11세는 비록 연로하고 병약했지만 12월 초, 한 번 더 라디오 바티칸 방송국을 통해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가 이 모든 자료를 모은 이유는, 1931-1944년대의 새로운 요청에 응하면서, 조금씩 직접 또는 간접적 매체를 활용하면서 이미 자리잡은 출판 사도직 외에 라디오 사도직과 영화 사도직을 교회가 어떻게 전개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다.
1937년은 독일 제국내 가톨릭교회의 염려스러운 상황에 관한 회칙 「깊은 근심을 안고Mit Brennender Sorge」(3월 14일)가 반포된 해다. 교황은 나치즘을 고발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3월 19일, 무신론인 공산주의에 맞서 회칙 「하느님이신 구세주Divini Redemptoris Promissio」를 반포했다. 두 회칙에는 출판 (특히 보급)과 사회 홍보 전반에 관해 언급했다.
1937년, 로마에 영화 도시Cinecittà(역주: 로마 근교에 있는 영화 촬영소)가 생겼는데, 여기서 이탈리아 영화 대부분을 제작했다. 이탈리아 신문은 라디오로 전해진 최신 뉴스를 수집하기 위해 속기사를 고용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에서는 이미 텔레비전 정규방송이 시작되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출판 사도직」에서 ‘일간지’21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사도적 꿈으로 남아있다.
1937년, 비오 11세는 기도의 사도직을 할 때 바치도록 우리의 선교 사명에 관한 지향을 담은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승인했다. “출판, 라디오, 연극, 영화를 통하여 선교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촉진될 것이다.”
1938년은 성바오로수도회가 제작한 영화 <아부나 메시아>의 해였다. 또한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된 해로, 그 지역에서 ‘인종 선언manifesto della razza’을 한 후에 반유다인 조치가 공표되었다.
스페인에서는 1938년 4월 22일자로 출판에 반대하는 독재법이 제정되었다.
1939년, 비오 12세는 회칙 「교황직의 지상권Summi Pontificatus」에 표현된 사목 계획을 내세워 직무를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점령했고,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촉발시켰다.
파리의 대주교 베르디Verdier 추기경은 1939년 1월 1일 서한에서 영화와 라디오에 관한 가톨릭 신자들의 의무를 호소했다. 같은 해, 이탈리아에서 베네토 주교단은 종교적 윤리적 측면에서 권장할 만한 영화가 아니면 보지 말자는 ‘영화서약’ 운동을 시작했다. 1942년에는 이 서약이 이탈리아 가톨릭 액션 모든 회원에게 확산되었다.
비오 12세는 1940년 7월 31일, 건전한 독서의 힘, 효과, 필요성에 관한 강연을, 8월 7일에는 나쁜 독서의 심각한 해악에 관한 강연을 했다.
1941년 미국에서는 이미 텔레비전 상업방송이 시작되었다.
1942년에는 마그네틱 녹음 테이프를 발명했고, 에이컨H.H. Aike을 중심으로 과학자 그룹이 하버드 대학에서 발전시킨 애니악ENIAC(역주: 미국에서 만든 최초의 컴퓨터)은 아마도 최초의 전기 계산기 또는 자동 계산기일 것이다.
12월 2일은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가 제작한 ‘원자로’가 시카고에서 가동되기 시작했다. 코닥Kodak 회사는 최초로 적외선 사진 촬영을 위한 필름제작에 성공했다.
비오 12세는 1942년 10월 27일, 전쟁 시기에 출판의 교육적 영향력에 관하여 루마니아 언론인들과 담화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것이 「인쇄 사도직」과 「출판 사도직」의 역사적 · 교회적 배경이다.
먼저 역사적인 면에서 두 가지 질문을 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이고, 그 반대로 사도 저술가 알베리오네 신부가 당대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1931년부터 1943년 말까지 바오로인의 중요한 자료를 앞에 놓고 「출판 사도직」 지침서를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교회 역사 그리고 종교적 사회-경제적 역사 앞에서 간단하게 종합한 홍보수단의 발전사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함께 이 책에 대한 역사적 언급을 대조해 보자.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보는 것은, ‘교황님의 본당’이라고 일컬어지는 세계화된 세상에 걸맞는 현대 세계의 사도직 형태에 더 초점을 맞추면서, 알베리오네 신부가 당대의 교회와 어떻게 보조를 맞추고자 했는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교회를 앞서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총명하고 유능한 제자로서 스승인 교회를 따르려 한 것 같다.
지침서를 단순하게 읽지 않고 숨은 뜻을 읽으려 할 때, 전문적인 매체에 대한 쇄신된 이론을 실천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저자의 분명한 의향과 일치하는 작품의 의도를 잊어서는 안 된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수도회 회원에게 ‘출판 사도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참된 ‘사도’는 누구인지를 가르치고 양성하기를 원했다.
출판 사도직의 가장 중요한 용어 저변에는 우리에게 유익한 신학적 비전이 밝히 드러난다.
출판 사도직의 출발점은 삼위일체가 그 귀감22이요, 알베리오네 신부의 백과사전적 계획에서는 ‘진리-길-생명’이라는 그리스도론적 세 가지 명제하에 ‘학문-예술-덕성’으로 전환된다. 그 예로서 ‘사도직’ 또는 ‘출판’ 그리고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처럼 ‘편집-기술-보급으로 변화된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둘 때 독자들은 알베리오네 신부의 사도직에 대한 비전을 (비록 세 부분의 통합과 완성의 시급성을 존중하면서도) 신학적 차원에서 기술적 조직 차원으로 축소시키지 않게 된다. 사도직은 사도의 중심meta으로서 오늘의 사람들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모든 사목(예언적, 왕적, 사제적) 활동으로 전교회(교의, 윤리, 경신례)를 통해서 인간 전체(지성, 의지, 마음)와 삼위의 하느님(성부, 성자, 성령)께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전진하라고 우리를 가르친다. 그는 우리가 이미 도달한 곳 너머로 전진하는 것만이 실제로 충만한 상태를 향해 극복하고, 계획하고, 진보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완덕의 법에 따라 쇄신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
사도적 측면에서 볼 때 카리스마가 자리를 잡아 굳건해짐과 동시에 제도화될 때 창의성과 예언보다는 현명함이나 합법성을 필수적으로 더 확보하게 된다. 본 지침서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갈망을 느낀다면 이는 많은 것을 잘 하고, 선을 잘 실천하게 하는 활력소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마치 거울을 보듯 알베리오네 신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알베리오네 신부에 의하면 「출판 사도직」의 독자는 ‘사도직’과 ‘사도’, 말하자면 자신의 고유한 카리스마적 정체성의 의미를 재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이다. 만일 알베리오네 신부가 컴퓨터, 정보과학, 정보 서비스 시스템, 위성, 광케이블, 멀티미디어 언어, CD-ROM, 휴대 전화, 위성 전화, 고선명도 텔레비전’이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진보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매체나 용어를 몰랐다는 것은 그가 우리이전 세대를 살았기 때문이다.23 그러나 그는 커뮤니케이션의 윤리 또는 진리에 대한 사랑의 윤리를 따르면서 사도직을 위해 전진하라는 의무를 우리에게 맡겼다.
비록 옛 용어가 되었지만, 그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독자를 격려하며, 남녀 바오로인이라면 누구나가 지닐 권리가 있는 ‘출판 사도’라는 명칭을 책임과 품위를 가지고 자기 것으로 하라고 초대한다. 오늘날 남녀 사도가 우리 시대 사람들의 언어와 수단으로 내일의 주님 추수밭에서 풍성한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갈수록 일꾼이 부족하다.
알베리오네 신부에게 사도적 양성에 힘을 기울이는 미래는 영원이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영원)이라는 말에서 시작하여 이 지침서의 다른 중요한 표현 하나하나를 올바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1998년 4월 4일
안젤로 콜라크라이Angelo Colacrai
1 1. 1950년 11월 2일, 알바의 참사위원 쟈놀리오Gianolio 신부 검열
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란 바오로가 서간 서두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한 칭호다.
3 (비록 1952년, RAI [Radio Audizioni Italia: 이탈리아 라디오 방송국]에 방송 허가가 승인되어, 한때 선명도 625선이 표준으로 확정되었지만) 이탈리아의 텔레비전 정규방송 서비스는 1954년 1월 3일에야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탈리아어 텔레비전 두 번째 프로그램 방영은 1961년 11월 4일에 이루어졌다.
4 1930-1933년 사이 참사위원 프란치스코 키에사Can. Francesco Chiesa는 독창적인 신학 종합서를 완성해 가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나중에 네 권으로 출간된 「최근의 지성과 요청에 부응한 수정판 교의신학 사전LectionesTheologioe Dogmaticoe recentiori mentalitati et necessitati accomodatoe」에 합쳐졌다. 위의 사전에서 영감을 받은 알베리오네 신부는 구원의 세 가지 역할에 빛을 받은 요한 14,6에 대해 심화했다. 곧 진리(스승/예언자), 길(왕/목자), 생명(사제요 희생제물)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이해를 깊였다. 이 해독에 관한 열쇠를 자신의 교회론적 전망뿐 아니라 사목 방향 설정과 수도회 창립을 위한 이해의 중심 기반으로 삼았다.
5 만일 바오로인의 활동이 알베리오네 신부의 사도직 이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이는 지침서에 결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실천의 어려움, 어쩌면 굳어진 (출판=AE보다 인쇄=AS에 더 많이 내재된) 구텐베르크식 사고방식에 그 원인을 돌려야 한다. 쿠텐베르크식이란 사도직을 인쇄와 동일시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좋은 인쇄물은 늘 ‘성서’ 또는 ‘성경’과 동일시 할 수 있는 것으로, 달리 표현하면 우선 개인 소장용 서적을 말하고 그다음으로는 교부들과 성인들 그리고 신학자들의 작품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6 A. Damino,「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의 문헌 목록Bibliografia di Don Giacomo Alberione」, 로마 1994, p.36 참조.
7 좀 더 후에 ‘사회홍보 사도직’ 또는 ‘커뮤니케이션 세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여성 사도들’에 대해 언급하게 될 것이고, 정보과학, 정보 서비스 시스템, 멀티미디어(다중매체), 쌍방향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현대적 분야까지 이해할 수 있는 해설을 언급할 것이다. 「인쇄 사도직」과 「출판 사도직」을 비교했을 때 전체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도직을 위해 이러한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야 할 시급성 곧 ‘복음화’의 긴급성이다. 계속적인 ‘쇄신’ 또는 ‘양성’은 창립자의 사고방식이다.
8 A. 다미노, 같은 책.
9 A. 다미노, 같은 책, 50 참조.
10 포르투갈어로 된 최신판이 이미 있다. 상파울로(브라질).
11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Donec formetur…」(152-159)에서 「인쇄 사도직」의 개요를 찾아 볼 수 있다.
12 L. Giovannini, 「교회사와 문화사 안에서 알베리오네 신부와 바오로인들의 연대기적 비교Don Alberione e i Paolini nella storia della Chiesa e della cultura. Cronologia comparata」, 로마 1982, 145 참조.
13 창립자는 “성바오로수도회의 ‘회헌’ 규정에 따라 1921년부터 알바에 바오로회의 편집부가 자리 잡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성 바오로 홀Sala San Paolo’이 생겼고, 전문 편집인과 최고의 장비가 마련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회헌’의 최종 승인을 위한 조건으로 바오로인 저술가를 위한 집을 세우기를 원했다. 이 집은 전쟁 동안 로마 성 카타리나 로타 성당 옆에 있다가 보르가타 라우렌티나, 몬타뇰라에 있는 선한목자예수 본당 옆으로 이전했다. 편집 공동체는 세 번째로 총원 가까이 이전했고, 1948년에는 알바노에 정착하게 되었다. 성바오로딸수도회는 1953년 3월 15일에 얻은 회헌의 최종 승인을 위해 독립적인 편집 공동체, 저술가의 집을 그로타페라타에 마련해야 했다.”(G. 바르베로, 「사제 야고보 알베리오네: 한 인간-하나의 이상Il Sacerdote Giacomo Alberione: un uomo-un’idea」, 로마 1991, 741)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지만 훌륭한 저술가는 긴 습작 기간과 고된 탐구와 시행착오를 거쳐 값진 체험 끝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저술가 양성을 위해 온갖 노고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인쇄 분야에서도 학생들을 위해 본인이 직접 수작업을 하는 등, 그런 노력들이 사제직의 초기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덕분에 알바의 그 유명한 ‘성 바오로 강당’은 오랫동안 편집의 진정한 실습장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사도직 학교Scuola di Apostolato와 그로부터 몇 년 뒤에는 갈망하던 저술가들의 집Casa degli Scrittori까지 마련하게 되었다.”(같은 책, 456)
14 바르베로 신부는 이렇게 증언한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교리교육을 위해 영화가 좋다고 생각한 최초의 인물이 알베리오네 신부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공헌은 이 새로운 발명을, 그리스도인을 위해 최선의 방법으로 적용했다는 점이다. 영화 사도직은 수도회 회원이 수행 하기에는 적합치 않은,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 많은 사업이었다. 영화는 좋은 전통을 붕괴시키려는 반대자들이 사용하는 무기로 간주되었던 시기였기에, 대중을 저질 영화에서 떼어놓으려는 목적으로 1934년에 미국 가톨릭 신자들이 결성한 영화 심의단Legione della Decenza이 그랬던 것처럼 무엇보다도 대중을 보호하는 일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비록 이 영화 심의단의 활동이 다소 부정적인 쪽으로만 편중되었다 해도, 교황 비오 11세는 1936년 6월 29일의 회칙 「주의 깊은 관심Vigilanti cura」에서 이 운동을 축복하고 격려하면서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영화는 하나의 현실이고, 선을 자극하듯이 악을 자극할 수도 있다. 징계는 그저 거부의 몸짓일 뿐이다. 교육적인 영화들이 보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당시 취미활동 정도로 간주되던 영화가 종교교육과 진리의 설교수단으로 드높여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이 알베리오네 신부를 박차고 일어서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영화 사도직을 시작해야 합니다. 성 바오로의 무덤에 한 시간 동안 경배하러 갑시다.’라며 어느 날 자기 동료 몇 명과 함께 로마의 성 바오로 대성당으로 향한 신부는 영화 사도직을 시작하기 위해 젊은 바오로인 사제 포르투나토 그레고리오 델포제토Fortunato Gregorio Delpogetto를 뽑아, 전문 지식을 갖춘 선교사 몇 명과 함께 에티오피아의 사도 굴리엘모 마싸이아Guglielmo Massaia 추기경의 생애를 영화화할 기획을 세웠다. 그 결과 고프레도 알렉산드리니Goffredo Alessandrini(1905-1978) 감독의 <아부나 메시아Abuna Messias>가 완성되었다. ‘제7차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영화 <아부나 메시아>는 대상인 ‘베니토 무솔리니 컵Coppa Benito Mussolini’을 수상하게 된다. 비록 결말부분에 정치적 비판이 있었지만 굴리엘모 마싸이아 선교단체는 이 영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성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알베리오네 신부를 격려했다. “신부님,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 항상 더 축복하실 것입니다. 교회 권위기간은 출판 사도직에서처럼 이 분야에서도 성바오로수도회의 업적을 승인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중에 더 많은 사람이 이 분야에 전념하도록 하십시오.”<아부나 메시아>의 제작에서 얻은 경험은 영화분야에서 성바오로수도회의 조직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40-1945년 사이 전쟁으로 영화 사도직이 잠시 중단되었으나1 946년에 활동을 재개하여 다른 작품도 뒤따랐다. 일반 영화 필름에서 축소 필름(역주: 16밀리 필름)으로 넘어갔고, 성 바오로 영화사가 직접 구입하는 방식으로 변했다. 축소된 영화 필름이 더 용이했는데 영화 상영 지역과 나라가 한정되어 있어서 그러했다. 영화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특히 재정분야에서 R.E.F.라는 약어로 표기되는 로마 영화출판사Romana Editrice Film라는 주식회사를 세웠다가(1939-1951) 파르바 영화사Parva Film(1947)로, 1952년에는 다시 파르바-성 바오로 영화사Parva-Sampaolo Film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회사는 1955년까지 지속되다가 성 바오로 영화사San Paolo Film라는 법인체가 세워졌는데, 1956년 5월 22일에 알바(쿠네오)의 주교인 카를로 스토파Carlo Stoppa 몬시뇰이 승인했고, 1957년 2월 5일에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 조반니 그론키Giovanni Gronchi가 합법적인 법인으로 인가했다.(G. 바르베로, 「사제 야고보 알베리오네: 한 인간-하나의 이상Il Sacerdote Giacomo Alberione: un uomo-un’idea」, 로마 1991, 527 참조)
15 67항 105항 참조. 실상 전쟁은 저자의 의식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창립자라는 직분에서, 위험에 처한 수백 명에 대한 책임감에서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저술가라는 면에서도 그러했다. 1942년 성탄에 그의 글로 인한 사건은 주목할 만하다. 주간지 「주일 전례 해설La Domenica Illustrata」에 실린 논설에서, 옛 관습인 ‘하느님의 휴전tregua di Dio’(역주: 중세 교회에서 사순절과 대림절 사이에 실시한 정전停戰)에 따라 적어도 성탄시기에는 정전을 하자고 주장했다. 저자는 패전주의자로 기소당했고, 투옥의 위협을 받았다. 좀 더 앞으로 가서 보라.( 290항, 각주 3)
16 1944년에는 「출판 사도직」과 더불어 「이것을 묵상하라Hoec meditare」 몇몇 권과 「영신수련Esercizi Spirituali」 제4권이 빛을 보게 될 것이다.
17 교황은 라디오를 이용했다. 비오 12세는 1939년 8월 24일, 라디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기의 힘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정의가 인도하게 하십시오…. 평화로는 아무것도 잃지 않겠지만,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18 알베리오네 신부는 열정에 넘쳐 이렇게 말했다. “가톨릭 사도직에 속한 활동, 특히 라디오 방송분야에 있어서는 이탈리아 라디오의 첫 사도인 현재 트리폴리의 주교 빅토리오 파키네티Vittorio Facchinetti에 의해 잘 알려졌다.
초기에 그는 잡지 「프란치스코 수사Frate Francesco」에 경이로운 하느님의 선물인 이 사도직을 축성할 필요성이 있음을 발표했다.”p(. 480항)
19 라디오 첫 시험방송은 1948년 성탄절에 이루어졌다. 8시 정각에 ‘성 바오로 라디오Radio San Paolo’(I 1 RSP)는 미리 통보한 청취자들을 불러 모았다. 8시 10분, 알베리오네 신부는 감격에 차 마이크 앞에 앉아 말하기 시작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 평화.’이 천사들의 인사는 저의 축하 인사이기도 합니다. 성부와 사람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이 빛나는 오늘, 아들들과 딸들 모두에게 마음 깊이 인사드립니다. 천사들의 축하를 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까이 그리고 멀리 있는 모든 이를 위해, 특히 고통받는 이를 기억하면서 오늘 밤 미사를 거행한 후 축하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쓸모없고 무능한 종임을 통감하면서 저는 예수께 당신께서 모든 것을 홀로, 항상 해주십사 청했습니다. 그분이 성부를 전하기 위해 하늘에서 오셨듯이 모두가 하느님을 알고 섬기며 사랑하도록! 모든 이는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러 지상에 오시어 당신 아버지께 소개하실 그 왕국에 속하게 되기를, 먼저 우리에게 사랑받으시기를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알고 사랑하게 되기를.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평화!’…저물어가는 이 해는 영화를 통해 사도직에 발전을 안겨주었습니다. 더 나아지려는 의지가 많습니다…. 비록 아름다운 활동 자체가 가져다주는 어려움은 많지만 로마의 중앙 보급소, 서지학 회보, 새로운 국제서원을 통한 사도직의 국제조직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멀든 가깝든 어디에서든, 아는 데서 큰 신뢰가 생기니 미사성제 안에서 예수님의 지향에 따라, 프리모 마에스트로의 지향에 따라 기도, 활동, 고통의 봉헌을 되풀이 하십시오. 이것은 본질적으로 회헌의 첫 두 조항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이 순간 저는 이탈리아와 해외의 모든 아들 딸을 기억하고 있으며, 미사성제의 마지막 강복을 다시 보냅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여러분에게 강복하소서Benedicat vos omnipotens Deus, Pater et Filius et Spiritus Sanctus.’ 방송은 6분간 계속되었으며 끝나자마자 가까운 공동체에서 전화가 걸려와 청취 상태가 최상이었다고 전했다.(G. 바르베로, 「사제 야고보 알베리오네: 한 인간-하나의 이상Il Sacerdote Giacomo Alberione: un uomo-un’idea」, 로마 1991, 743-745.
20 1936년 6월 22일, 며칠 전 로마에 도착한 알베리오네 신부는 바티칸 가톨릭 출판 전시회장에 있는 경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21 제2편 1부 18장 284항 이하 참조.
22 이 주제에 관해, G. 알베리오네, 「완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Ut perfectus sit…」 I, 368 이하; II, 149 이하를 보라; 참조: A.F. 다 실바, 「알베리오네 신부 사상 안에서의 영신수련 여정Il cammino degli Esercizi spirituali nel pensiero di Don Alberione」, 바오로 영성 센터, 아리차1 981, 79 이하.
23 1942년에 출판된, 성바오로수도회 「회헌」 2항. (수도회의 특수 목적)에 이미 명기된 것처럼 “무엇보다도 ‘출판 사도직’을 통하여 더욱 풍성하고 신속하며 ‘시대의 필요와 조건에 더욱 적합한’ 매체를 사용하면서” 일하도록 회원에게 의무를 부여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