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o Giacomo Alberi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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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이 제목은 2코린 1,12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성 바오로SanPaolo」지 1957년 3월호에 실린 내용을 명확히 해준다. 그러나 이 내용은 프리모 마에스트로가 바오로가족에게 선사한 두 권의 모음집인 「바오로가족에게Alle Famiglie Paoline」(1954년)와 「지성의 성화Santificazione della mente」(1956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 양성과 도덕적 양심에 관한 문제를 다시 한 번 논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요점은 첫 주제인 “가장 숭고한 교육의 의무”에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양심 양성>에 대해서는 1960년에 그랬듯이(1960년, 프리모 마에스트로가 성바오로수도회 회원들에게 한 달 간의 영신수련을 지도하는 동안 여러 주제에 관해 계속 질문이 있었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참조: 「완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Ut perfectus sit homo Dei 」, I, 258-259; I, 517-519; IV, 27-38)
연대순으로 보아 편집을 하던 당시는 이미 언급한 1953에서 1954년의 상황과 비슷했다. 그 당시 알베리오네 신부는 자기 나름대로 70세 생일과 설립 40주년 거행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풍요로운 결실을 새롭게 확인하고자 했다. 실제로 1957년 봄에는 바오로가족의 마지막 수도회들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세 수도회, 곧 성바오로수도회, 성바오로딸수도회,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의 지향은 이 수도회들이 “하늘에는 성인을 그리고 교회에는 사도를 배출할 단계에 있는지” 검증해보려는 것이었다.( 「성 바오로」지 1957년 7월호 참조) 검증하고자 하는 한 가지 근본요소는 상황윤리에 관한 첫 이론과 부딪치는 봉헌생활의 중대한 순간에 회원들의 윤리적 일관성과 그들 양심의 성숙도였다.
원본은 에스포시토R. Esposito 신부가 총원의 “문서고 안에 있는 ‘성바오로’라는 이름이 붙은 서랍Fondo San Paolo”에서 발견한 세 개의 단편 자필원고 일부로서, 철해 놓은 메모지에서 빼낸 15cm×18cm 크기의 종이 4장에 작성된 것이다. 그 중 일부는 1957년 2월 18일로 날짜가 적혀 있다. 그러나 알고 있던 바와 같이 알베리오네 신부는 자신이 쓴 글을 방치해둔 적이 없었으니 같은 내용을 여러 차례 검토했고, 직접 초고 수정과 최종 원고를 교정했다.
이 소책자는 창립자가 매우 풍요로운 시대인 1950년대에 로마의 여러 공동체에서 이야기한 것을 발간하도록 계속 당부하여 1953년과 1957년 사이에 발간된 짧은 글을 모아 현재의 모음집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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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증언(2코린 1,12)

1. 가장 숭고한 교육의 의무

가장 숭고한 교육의 의무는 피교육자의 도덕적 양심을 양성하는 것이다. 건전한 교육은 모두 서서히 교육자의 간여干與가 줄어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하여] 적법한 한도 내에서 피교육자가 교육자에게서 독립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 양심 양성에 도움이 된다. 교육의 목적은“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에페 4,13)라고 한 것처럼 책임질 줄 아는 용기를 지닌 성숙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서원誓願을 통해 수도생활을 하게 될 때 그 책임감은 커진다. 그리고 사제직에 오를 때에는 책임감이 무한히 커진다. 책임과 자유를 조화롭게 조정하고, 섬세한 양심과 순명을 일치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요 언제나 청해야 할 은총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많은 젊은이와 많은 어른은 얼마나 큰 진통을 겪고 있는가? 많은 사람은 성숙한 삶에 도달했다는 자부심으로 장상과 교회의 지도 방향이 어른에게 부적절하다고 거부한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후견인과 관리자 밑에 있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단언한다. 이들은 독립적이기를 바라며, 모든 면에서 스스로 처신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대접 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되풀이한다.“ 교회는 자신의 규정을 만들고, 장상들은 그들의 일을 기꺼이해야 한다. … 하지만 막상 실행해야 할 때가 오면 교회와 장상들은 빠져야 한다. … 각자 자기 양심에 따라 처신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어떠한 해석자나 중개자를 두려 하지 않으며, 자기 견해에 따라 일하고‘ 내 양심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감히 말한다.
그러나 어른으로 자처하는 것과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과는 아주 다르다. 젊은이도, 어른도, 노인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회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생각, 자신의 힘과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면서 중대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많은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삶의 여정에서 배워야 한다. 어른들과 이미 장상이 된 이들까지도 회헌을 따라야 하고, 그들보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 종속해야 한다. 순명해야 하고, 경청해야 하고, 봉사해야 하고, 도와주어야 할 장상은 자신의 모든 행동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 많은 조언을 구해야 한다. 걷지 않는 사람만이 길을 물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어린이처럼 처신해야 하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어른의 예지, 용기, 겸손, 관대함에 이르기 위해 어린이의 결백함, 순수함, 온순함을 보존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쿰-쉬레’라는 말에서 유래한 ‘양심coscienza’은 특수한 행동에 윤리원칙을 적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믿음과 바른 양심을 가지고’(1티모 1,19), 곧 특수하고 최고의 윤리원칙에 따른 행동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가) 우리는 ‘과거’(consequens: 결과)에 대해 양심성찰을 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행한 바를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양심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우리와 고해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양심을 더 깨끗하게 할 것이다.”(히브 9,14 참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다음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녕 (그들 양심의) 구더기들은 죽지 아니하리라.”[이사 66,24] “난도질하듯 함부로 지껄이는 자들도 있지만, 지혜로운 이들의 혀는 아픔을 낫게 한다.”(잠언 12,18) 
그러나 [양심이] ‘인정한다면’ 그것은 올바로 처신한 것에 대한 만족이다.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영원한 상을 받을 것이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2티모 4,8] “우리의 양심도 증언하듯이 우리가 자랑하는 바는 이렇습니다.”[2코린 1,12]1라고 성 바오로는 말한다.
나) ‘현재’에 관해, 양심은 무엇인가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미리antecedens’ 판단하고 행동하라고 부추기거나 행동을 중단하라고 한다. [SP, 1957년 3월호, 2쪽]
그야말로 도덕적 양심이다. 성 바오로는 ‘양심 때문에도’(로마 13,5) 권위에 순종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 또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애를 씁니다.”(사도 24,16)
다) 양심은 인간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며, 칭찬받도록 인간행위를 확고하게 지도해야 할 목적이 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마태 25,21.23] 그리하여 모든 것에서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으로”(1티모 1,5) 한 행동은 최후심판에서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다.
라) 양심은 인간행위의 규칙이고,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은 어떤 행위를 명하든, 어떤 행동을 금하든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을 따라야 한다.
예:“ 양심을 거슬러 행하는 모든 것은 지옥을 만든다.” 어떤 것에 대해 그저 허락한 것이라면 그것을 따를 의무는 없다.
조건: ㄱ) ‘객체’ 편에서 보면, 진리(참된 양심conscientia vera)와 올바른 태도(올바른 양심conscientia recta)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나는 회헌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좋은 것임을 알고 있다.
ㄴ) ‘주체’ 편에서 보면, 확실성(확실한 양심conscientia certa)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나는 오늘이 정말 주일임을 알고 있으며, 회헌은 진정 사도직을 지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짓이나 잘못된 것, 모호한 것은 배제한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 
[양심은] ‘자연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학생은 배워서 경력을 쌓을 때까지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또는 ‘초자연적’일 수 있다. 곧 실천적 판단에 따라 해야 하는 것이 초자연적으로 좋고 가치가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또는 오히려 죄가 된다.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양심’이라는 단어 자체는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그러한 판단을 자아내는 ‘습관적 방식’과 판단하는 개인의 주관적인 마음자세를 가리킨다.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곧 섬세한 양심을 지닌 사람, 해이한 양심을 지닌 사람, 올바른 양심을 지닌 사람, 양심이 없는 사람, 사제의 양심, 그리스도인의 양심, 수도자의 양심, 자연적인 양심, 초자연적인 양심.
내적 성향은 어떤 행동의 양상을 판단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양심은 마치 하나의 지성소와 같아, 그 출입구는 부모를 포함하여 모든 이에게 신성불가침한 것이다.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는 고해사제는 예외다. 하지만 성사적 봉인의 구속력은 모든 이에 대한 신성불가침을 보장해 준다.
양심은 “인간 내면에 있는 가장 심오하고 본질적인 것이다.”
“마치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핵심과 같다.” “인간은 양심 안에, 절대 고독 안에, 영적 능력에 의해 양심의 소리를 다시 들려주시는 분인 오직 하느님과 함께 그리고 오직 자기 자신과 함께 숨는다. 거기서 그는 선이나 악을 위해 결단을 내린다.
그곳에서 그는 승리의 길 또는 패배의 길을 택한다. 인간은 자기가 원한다 해도 결코 스스로 양심의 소리를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 양심의 짐을 짊어진 채 삶의 모든 여정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실하고 썩지않을 증거인 그 양심의 짐을 짊어진 채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될 것이다.”
양심을 기른다는 것은 개인에게 올바른 판단과 그 판단에 부합하게 활동하기 위한 개념과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1) 교육하고
2) 일탈에서 구해야 하며
3) 용기를 가지고 자유로이 실천하도록 의지를 다져야 한다.

1

2. 오류

‘새로운 윤리’, ‘정황 윤리’ 또는 ‘상황 윤리’라는 새로운 사상의 조류가 대두되었다. 결국 이러한 윤리는 주관적인 것이다. 정직한 윤리 대신에 이득이 되는 윤리, 편함을 찾는 윤리다.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판단을 하는 윤리이므로 변하기 쉬운 성격을 띤다. 내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윤리다. 교황 비오 12세가 “신앙에서 벗어난 것이고, 가톨릭 원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1952년 3월 23일)라고 말한 윤리다.
모든 윤리질서와 가르침을 수정하고 가르치려 한다. 이런 윤리는 교회를 헐뜯으며 궤변적이고, 억압적이며 인색한 것처럼 묘사하여 윤리적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의 유대를 끊으려 한다. 대략 교의신학 분야에서 말하고 규정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서 지적 윤리적 독립을 바란다.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할 수 있다.“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러워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그들은 정신도 양심도 다 더러워졌습니다.”(티토 1,15)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분은 교회에 당신 계시를 건네주셨다. 교회는 그분의 계시를 보존하고, 해석하고, 수호하는 한편, 모든 사람에게 계시를 설명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시대와 장소의 필요에 따라 계시를 오류 없이 해석하고 적용하게 해주는 하느님의 도움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에 하신 약속이다.
참된 자유는 방종, 방탕, 타락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 대신 자유는 선에 대한 검증된 능력이요, 스스로 해내도록 결심하는 것이다.(갈라 5,13 참조) 참된 자유는 자신의 능력, 본능, 사건을 다스리는 지배력이다.
교회는 항상 인간의 자유를 수호해왔다. 교회는 인간이 그의 부富를 일시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고 통찰하고 수용하도록 초대받았으며, 그런 경향을 느끼도록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신앙과 은총의 무한한 부로 인도하기 바란다.
교황2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말했다. “교회는 신자들이 명확한 윤리적 의무의 | [SP, 1957년 3월호, 3쪽]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이 부富를 획득하고 보존할 수 없다는 충고를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이와 상반된 처신은 교회의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이 늘 강조하시던 원칙을 잊고 말 것입니다. 그분은 실제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주님, 주님’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7,21 참조) 그분은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해 말씀하셨으며(마태 7,13-14 참조)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그분은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랑의 특별한 표지요 시금석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4,15 참조) 이와 같이 예수님은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한 부자 청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러자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닮으려는 사람에게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이셨습니다.(루카 9,23 참조) 그분께서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 곧 아버지, 어머니, 자식과 최상의 부富인 자기 목숨까지 버릴 준비를 하라고 요구하십니다.(마태 10,37-39 참조) 그 다음 그분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4-5)
확실히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아시고,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며 ‘선과 사랑이 충만한bonitate et amore plenum’(예수성심 대축일 전례 기도문) 당신 성심의 무한한 완전함으로 인간의 마음을 당신사랑으로 이끄시는 거룩한 교육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이신 성 바오로께서도 그와 같은 내용으로 설교하지 않으셨습니까? 설득력 있는 주장을 열렬하게 펼치면서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매혹적인 신비를 드러내셨고,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 신앙 안에 내재된 부富, 힘, 축복, 행복을 설명하셨고, 인간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마땅히 바라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며, 순수하게 매진해야 할 사랑을 저항할 수 없는 목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훈화처럼 참된 가르침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필리 2,12) 그리고 당신 펜을 통해 숭고한 윤리규정이 샘솟듯 터져 나와 모든 신자에게 전해졌고, 이들 모두가 지성을 공유하고 숭고한 감성의 영혼을 지니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의 말씀을 강력한 규범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늘의 교회가 엄격함 보다는 상냥함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거슬러 기치를 내건 ‘새로운 윤리’로 말미암은 반대자들의 강력한 비난은 실제로 흠숭을 드려야 할 그리스도의 위격에 제일 먼저 타격을 입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특히 복음에 반대되는 윤리를 지향하는 순결, 정결의 문제에 관한 내용은 심각하다.
이들은 자유를 앗아가는 것은 욕정이라 단언하면서, 동시에 일종의 타락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으며, 교회는 그 계명을 가르친다. 그 계명을 우리는 ‘주관적으로’ 우리 욕정에 맞추어 해석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계명을 ‘객관적인’ 규범이요 구속력을 갖는다고 생각하고 그 계명에 우리 사고방식을 부합시켜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인간의 권리를 부르짖으면서 우리가 속해 있는 하느님의 권리에 손상을 입히기도 한다.
양심의 과제는 보편적인 법(인간의 외적 규율)에서 출발하여 그 법을 특정한 경우에 적용시키면서 절박한 행위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의 도덕성을 판단할 때 우리는 그의 행동거지가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연법에 부합하며 긍정적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윤리’는 일반원칙 (예를 들면 여러 계명)에 토대를 두지 않고, 오히려 행동해야 하는 특별하고 구체적인 조건이나 상황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인간 이성을 통해3 좋아하는 것이나 유익한 것, 또는 널리 확산된 여론이나 환경 또는 주변 정황에 따라 행동한다.
‘새로운 윤리’는 오늘날 아주 폭넓게 퍼지고 있으므로 교육자는 자기 행위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에 전적으로 토대를 두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가장 중대한 잘못에 대해 “나는 그렇게 보았다.” 라고 변명한다. 성 바오로는‘ 마비된’ 양심(1티모 4,2 참조)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다.
‘새로운 윤리’나‘ 상황윤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귀감의 가치를 부정하고 교회의 복음선포를 뿌리째 뽑아버린다.
교육자는 규정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되풀이하는 사람이다.
법률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피교육자는 겸손하게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양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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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육

인간의 삶은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여행이다. 길이신 그리스도는 진리, 귀감, 하늘에서 가져온 은총을 통해 인도하신다.
이러한 여정은 실천적인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계명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거기에 삶을 일치시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택하고 정하는 내적 외적인 개별 행위다. 만일 양심이 아니라면, 특별한 경우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영적인 어떤 능력이 인간의 의지에 지시할 수 있을까? 따라서 양심은 인간행위에 대한 신적 규범을 반영한 충실하고 투명한 울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양심의 판단’이라는 표현이나 ‘그리스도인 양심에 따라 판단한다’는 표현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곧 윤리행위를 위한 개인적이고 최종적인 결정규범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에 따라 선택하게 된다. 그분은 실제로 길 진리 생명이시고, 모든 인간을 위해서뿐 아니라 각 개인을 위해서도 길 진리 생명이 되셨다.(요한 14,6 참조) 성숙한 사람과 어린이와 젊은이를 위해서도 그와 같은 분이시다.
그러한 사실에서 어린이나 젊은이에게 그리스도교적 양심을 양성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뜻과 법과 삶으로 그들의 지성을 비추어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자유롭고 항구하게 실행하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외면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에 있다.
교황은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가장 고귀한 과제입니다.”라고 말한다.[SP, 1957년 3월호, 4쪽]
교육자와 피교육자는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그리스도교 도덕률을 쉽고 확실하게 찾을 수 있는가? 각자의 마음속에 새겨진 창조주의 법에서(로마 2,14-16 참조), 계시에서, 여러 면에서, 곧 천상 스승이 가르쳐주신 진리와 계명을 통해 찾을 수 있다.
마음에 새겨진 법, 다시 말해 자연법이든 구세주 예수님이 회복시키신 진리와 초자연적 계시의 규범이든, 두 가지 모두 인류의 윤리적 보배로 교회에 맡겨졌다. 그리하여 교회는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부패와 오류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를 받고, 손상되지 않게 보존된 이 두 요소를 모든 피조물에게 설교하고 설명하고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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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젊은이와 어른을 탈선에서 구할 것

어린이와 젊은이는 적합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그러나 교육은 목적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한다. 언제나 길 진리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을 양성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 그리스도인, 수도자, 사제라는 다양한 기준에서 그리스도를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양심, 수도자의 양심, 사제의 양심에 부합하게 살아야 한다.
첫째,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고 선택해야 하는 교의, 계명, 은총의 수단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
둘째, 수도자의 양심은 수도자의 고유한 기도정신과 수도생활을 지탱해주는 진리와 규정에 관한 교육을 덧붙이라고 요구한다. 
셋째, 사제는 진리, 삶, 사제의 신심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그의 직무와 의무에 필요한 교육을 풍부하게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진리, 은총, 성성의 보화를 나누어주는 분배자요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고유한 사도직과 성화의 수단에 관한 교육도 많이 받아야 한다.
그 자체로 아주 치명적이고 양심을 파멸시키는 오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제는 남녀 수도자의 양심을 갖추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 또 수도자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나 정직한 사람의 양심을 갖추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원칙, 규정, 책임, 의무가 아주 다르므로 실천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지켜야 할 규율이 있다. 각자의 신분에 따라 사제도 그렇고, 그리스도인도 그렇다. 젊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제6계명을 지킬 의무가 있지 않은가? 수도자에게는 회헌이 정한 보호수단을 실천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수도자에게는 공동생활을 통해 수도서원을 실천해야 할 자기 성화라는 첫째가는 의무가 있지 않은가?
지원자, 특히 젊은 서원자 그리고 종신서원자와 사제들이 귀나 눈을 지나치게 세상에 열어놓고, 세속적인 처세술과 사례에 지나치게 개방되면 결국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형성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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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의지를 강화할 것

교육은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교육자는 피교육자가 하느님의 뜻을 자유롭고 항구하게 선택하고 실행하도록 그의 영혼을 이끌 수 있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여기서 ‘자유롭고 항구한’ 선택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선택은 강요하는 것도 이론적인 권고사항으로 축소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피교육자를 설득하고, 되풀이해서 가르쳐주고, 격려하고, 도와주고 교정矯正하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여기서 교육자에게 주도적 정신, 선하고 확고한 마음, 기도와 이해를 포괄하는 아주 방대한 영역이 펼쳐진다.
주님께 대한 활기찬 사랑, 하느님은 아버지시고 그분의 모든 명령은 지혜와 선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의 현세와 영원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습관은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확고한 방법을 형성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설교를 통해 윤리적 삶에 대한 확인, 곧 영원한 상과 벌에 대해 끊임없이 제시하셨다. 그분은 착하고 충실한 종의 영원한 행복을 묘사하셨다. 그리고 쓸모없고 불충한 종의 영원한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도 설명해 주셨다.
그분은 충실한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미리 선포하셨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마찬가지로 불충한 이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단언하셨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 25,41]
주님은 두 개의 길, 곧 하나는 넓은 길, 다른 하나는 좁은 길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그 두 개의 길은 아주 다른 결말로 이끌어 간다.
그분은 당신 때문에 고통받고 모욕받고 박해받는 이들에게 큰 상을 약속하셨고(마태 5,12 참조), 완고한 위선자들과 박해자들에게는 영원한 징벌을 선고하셨다.
그분은 목마른 사람에게 한 잔의 물을 주는 사람도 당신의 상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고,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분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살아생전 즐겁고 호화롭고 냉혹하게 살았지만 죽은 후에 영원한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부자와, 생전에 굶주리고 병들었지만 잘 견뎌냈고,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라자로를 비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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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리아께 대한 신심]

섬세한 양심, 양심의 목소리에 민감하며, 죄를 뉘우치고 행한 선을 기뻐할 줄 아는 양심을 형성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심이란 비추어주고, 섬세하며, 실천적이고, 기도하게 해주는 신심을 뜻한다. 마리아는 원죄 없이 순결하고 이상적인 분이시기에 죄, 위험한 기회, 가벼운 죄4를 짓게 하는 기회를 매우 두려워하셨다. 마리아는 은총이 충만한 분, 하느님과 가장 친밀한 피조물,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복된 어머니, 우리에게 사랑을 불어넣어주시고, 순결과 희생과 성소에 대한 열망 등을 낳게 하신 분이다. 마리아는 은총의 보편 중개자, 우리를 위한 부지런한 어머니로서, 위험에 처해 있거나 가엾은 자녀들의 모든 애원을 들어주시는 분이다. 그분을 부르기만 해도 우리 영혼은 곧바로 평안해지고, 불순한 악마가 멀리 사라지고, 용기를 되찾게 되며, 마음이 열정으로 불타게 된다.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형성한다는 것은 죄를 멀리하고 예수께 마음을 돌린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섬세한 양심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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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말에 대한 묵상] [SP, 1957년 3월호, 5쪽]

그리스도인의 양심, 특히 수도자의 양심, 사제의 양심을 형성하기 위해 전적으로 필요한 수단은 바로 사말에 대한 묵상이다.
사말은 다음과 같다. 영혼 불멸, 육신과 영혼의 일시적인 분리인 죽음, 사심판, 천국, 지옥, 연옥, 육신의 부활이다.“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차지하여라.” 그리고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라.” 하실 최후심판, 하늘나라로 들어가고 지옥으로 내려가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영원한 벌 등이다. 그러므로 묵상의 주제로 창조의 목적과 우리의 목적에 관한 주제 선택은 우리 의지에 달려있다.
한 해의 묵상은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중요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구원의 수단, 온 힘과 정신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 4개월씩 묵상한다. 그렇게 매년 묵상을 넓혀가고 깊여가며 매년 반복하면서 완덕의 거룩한 산을 향해 더 높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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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는 사말에 대한 묵상을 잘 하는 그만큼 회원들의 활동과 성덕에 있어 진보할 것이다. “너 왜 여기에 왔는가?”5라는 [물음]을 잊는다면 내리막길에 서게 된다.
사말에 관해 많은 것을 묵상할 줄 안다면 풍요로운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시작과 마지막에 사말을 다른 것과 연결시킨다면 영원의 문 앞에 연약한 우리 삶의 작은 배의 닻을 내려 정박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윤리’에 대비하는 교리와 현대적인 설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현대적이어야 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죽음은 언제나 똑같다. 따라서 대비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우리 직무를 망치게 되고, 젊은이들이 사도직을 경시하게 되며, 심리적 예민함의 결핍으로 드러난다.
천상 스승의 생애, 설교,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분의 교리는 모두 근본적이고 영원한 진리에서 나온 구체적인 것이다.
윤리법에 따른 심판과 영원한 벌은 모든 사람에 대한 근본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윤리법에 맞추어 질서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규정이 쓸모없게 되며, 각자 제멋대로 살게 될 것이다.
잘 제시한 사말은 양심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미성숙과 성장단계의 여러 현상인 과잉과 결핍이 번갈아 자주 일어나는 내면적이고 생생한 경험을 하는 관대한 젊은이에게 사말은 촉진하고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적 자연적‘ 규제’라는 동인도 유익하지만, 그 누구도 인간 내면에서 격려하고 억제하는 탁월한 최고의 실재를 의심할 수는 없다. 계시 질서에서 죽음, 심판, 지옥, 천국은 도래할 것에 대한 ‘훈계’ 또는 예고다. 양성의 위대하고 긍정적인 수단이다. 역사적 측면, 섭리, 긍정적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적합한 방식으로 사말을 잘 제시해야 한다.
사말에 관해 인간적인 방법으로만 교육하거나 두려움을 강조하는 그릇된 방법을 도입한다면 우리 시대에는 이해하지 못한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교육수단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수도자의 양심을 형성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심각한 탈선일 것이다.
현 삶에서 인격, 성격, 유리한 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말씀하셨던가? 사도들을 어떻게 양성하셨던가? 혹시 세속 재산을 허용하셨던가?
그 대신 희생, 수고, 박해… 등을 선포하셨다.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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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맺음말]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젊은이는 자기 신앙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하며, 어떠한 대가든 치러야 합니다. 연약한 유년기부터 자기 신앙을 위해 희생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고,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양심으로 걸어가고, 그분께서 명령하시는 바를 존중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교육자는 피교육자에게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에 따라 깊은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명시할 것이다. “하느님은 불가능한 일을 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행하기를 바라며 의무를 지우신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을 때 그분께 도움을 청하자”.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교황 비오 12세는 “청년기의 신앙은 ‘기도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교육을 통해 기도의 정신을 키울 필요가 있으며 고해성사, 영성체, 전례를 활용해야 한다. 교회법에 따르면 이러한 것은 ‘성화와 구원의 기본수단’이다.
고해성사 곁에 또는 고해성사와 더불어 ‘영적 지도’가 필요하다. 영적 지도는 우리 회원의 양성을 위해 1914년 이전과 그 이후, 이 용어를 사용했든 안했든6 항상 길과 수단이 되었다.
개별적 지도든, 일반적 지도든, 지속적이든, 간헐적이든 영적지도를 받아야 한다. 교황 레오 13세는 특히 성소 차원에서 영적지도는 윤리적으로 필요한 수단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멈춰 서서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은 사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사도 22,10] 
교황 비오 12세는 그의 담화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끈기있고 인내심 있게 돌보면서 어린이들의 양심을 키우십시오. 그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이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순수하지 않거나 진실이 아닌 것은 교육에서 제외시켜야 합니다. 자유에 대한 순수한 개념을 젊은이의 양심에 새겨주어야 합니다.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에게 합당하고 고유한 자유의 개념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에서 본성이 줄 수 없는, 넘어지지 않는 힘, 다시 일어서는 | [SP, 1957년 3월호, 6쪽]힘을 길어내고 기도하도록 그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러한 초자연적 힘의 도움 없이 그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그저 정직한 사람도 될 수 없음을 젊어서부터 느끼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7
하느님 은총의 도움과 교육과 훈련을 통해 비추임을 받고, 자유로우며 실천적이고 올바르게 활동하는 양심을 형성해야 한다.
‘새로운 윤리’와 주관적 윤리의 위험에서 구원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고 강하며 굳건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그때 양심의 소리는 성 보나벤투라가 쓴 것처럼 ‘자기 이름으로 명령하지 않고 왕의 이름으로 칙령을 반포하는 사람처럼’ 하느님 음성의 메아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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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생각을 마무리 짓는다. “곧 우리가 이 세상에서, 특히 여러분을 상대로 처신할 때, 하느님께서 주신 순수함과 성실함에 따라, 또 나약한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처신하였다는 것입니다.”

2 당시의 교황은 1939년-1958년까지 교황 직분을 수행하신 비오 12세이다.

3 다시 말해 인간의 권리를 가치 있게 만드는 동기를 통해….

4 곧 소죄.

5 “ad quid venisti?”는 성 베르나르도가 자신에게 던진 유명한 질문이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이 질문을 자주 인용함으로써 바오로 성소의 목적을 상기시켰다.(「당신 은총의 풍성한 부」, 197항 참조)

6 ‘영적 지도’라는 용어는 알베리오네 신부가 초창기 지원자들에게 해준 양성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했다. 권고, 개인 면담, 저녁시간에 공적 사적인 훈화를 통해 교육학적 본질을 실현했다.

7 교황의 말씀은 1952년 3월 23일 그의 담화에서 다시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