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o Giacomo Alberione

Opera Om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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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in 14.22.195.197] 정화의 길

[DFin 31.47.79.217] 성부께 영광

“Domine, noverim me, noverim Te,

Nec aliquid cupiam nisi Te.”1

“Hæc est vita æterna, ut cognoscant

te et quem misisti.”2

[DFin 20.22]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필연적 존재이시다. “나는 있는 나다.”(Ego sum qui sum)3 “홀로 주님이시다.”(Tu solus Dominus)4 순수한 영이시고 위대한 분이시다. 지식, 힘, 영원, 전능, 영광, 지극히 완전하신, 가장 위대한 분이시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스스로 지극히 행복한 분이시다. …“저의 하느님, 저의 전부이십니다.”5

결과: 가) 경탄: 숙고 - 성체조배의 첫째 부분. 나) 모든 피조물(ab omni creatura)의 영원하고 온전한 찬미. 다) “모든 것 위에 무한히 선하신” ‘완전한’ 사랑이시다.6 성삼위와 천사들과 일치하여 “거룩하시다…,7찬양하여라…,8 찬미하여라…9.”

17

나는 누구인가? 지극히 우연적 존재다. “너는 존재하지 않는 자다.”10 너는 영혼과 육체에 관해 아무것도 아니다. 존재와 활동에서도 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너 스스로는 지극히 불완전하다.

결과: 참된 겸손: 지식, 힘, 생명, 존재에 있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무無이다.

올바로 방향지어진 삶: 시작(원칙)과 마지막(목적)에서-존중과 명예.

마음의 겸손: 전반적 결실이다.

[DFin 20.54] 창조주 하느님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다: 지존하심과 신적 권능.

: 아름답고 무수히 많은 영들이 숭고한 목적을 향해 있다.

물질적인 것들: 다수多數, 다양성, 질서.

온갖 존재, 존재 가능한 것들, 더 완전한 것들,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 사이에서 나는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다: 인간은 가시적 존재들 가운데 최고의 존재이다. 영혼은 하느님의 모상이요, 육신은 “흙으로 빚은 것”(lutum)[1]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을 수도 있고, 동물처럼 될 수도 있으며, 악마와 비슷하게 될 수도 있다.

선물들: 온전함, 은총, 지식, 불사불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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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인간 안에 있는 지극히 나약한, 영적 파괴의 원인을 가리킨다. 곧 무지, 유혹과 욕망에 굴복함, 고통과 죽음.

죄: 세상의 악과 불의에 대한 설명이 된다.

마음의 겸손: 전반적 결실이다.

[DFin 20.55.69.73.77.78.81.82.91] 주재자 하느님12

“Universa quae condidit Deus,
providentia sua tuetur et gubernat
attingens a fine usque ad finem fortier
et disponens omnia suaviter.”13

당신 법을 통하여

가) 영원법: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고, 모든 행위와 동작에는 질서와 방향이 지어져 있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ab aeterno ordinata sum)14 그분이 펼치신 온갖 것들은 대단히 현명하다.

하느님의 뜻을 ‘숭고한 법이며 가장 큰 사랑의 행위’로 받아들이면서 나를 거기에 일치시켜야 한다.(Dresselio “Eliotropo” [Eliotropio] 참조)15

나) 자연법: “영원법은 모든 사람의 양심과 지성에 새겨져 있으므로 자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용이하고, 변함없으며,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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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계명 (안식일 규정을 제외한 자연법)에 대한 긴 성찰.

영신수련 첫째 부분의 특수 목적은 ‘정직한 사람으로 살기 위한 것이다.’

[DFin 43] 양심 성찰 - 교육

‘하느님의 뜻’은 영혼이 해바라기처럼 늘 향해 있어야 하는 큰 태양과 같다.

하느님의 뜻: 장상 안에, 사건 안에, 자기 내면에 있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의 뜻 따르도록 저를 가르치소서.”(Donec me facere voluntatem tuam, quia Deus meus es tu)16

계명: 계명을 어떻게 지켰는지 보기 위해 여기서 모든 계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 수도자,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연적인 덕: 정의, 현명, 절제, 용기.

20

[DFin 29.43] 우리의 목적

Momentum a quo pendet æternitas.17

1. 어제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분께서 우리를 내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Ipse nos fecit et non ipsi nos)18

우리가 지상에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다.

그분께 영광을 드리며, 하늘에서 그분의 행복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2. 오늘 우리는 존재한다! 그러나 두 개의 영원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가 원하는 쪽을 선택하자.

우리의 영원은 우리가 건설하는 것이다.

천국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파멸을 의미한다. “나는 영원을 향해 존재하는 인간이다.”(Homo æternitatis sum)19

3. 이 때문에 우리에게 두 가지 수단을 주셨다. 하나는 ‘자연적’ 수단으로 지성, 의지, 기억, 외적 감각들, 그리고 생명과 함께 물질적·사회적·가정적 재화이고,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 수단으로 신앙과 은총인데 초자연적 목적에 합당하게 믿고 활동하도록 부여된 수단이다.

21

[DFin 29.30.36.43.52] 피조물의 목적

1.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는 가운데 |하느 님 께 봉 사 하 기 위하여 지상에서 인간에게 봉사한다. 피조물의 세계에는 세 부류가 있다. 물질적 발전을 가져다주는 (땅, 나무, 육체, 동물, 원소 등)과 윤리적인 (지성, 마음, 가정, 사회적 공생, 사회의 여러 직무), 영적인 (성사, 사제직, 수도생활 등)이다.

2 피조물의 선용은 선한 삶을 살게 해주고 행복한 영원을 마련해 준다. 그러나 남용은 영원한 파멸이다. 시간·집·옷·음식 등의 활용, 가정·지성·마음·열정·성사·영적 독서와 성경의 선용, 마에스트로와 고해신부·사회관계의 선용이 있다. 돈·쾌락·명예욕의 남용이 있고, 지혜·열정·자유·가정·사회적 지위의 남용이 있고, 성체적 실존·공덕을 쌓을 기회·종교교육·은총 등의 남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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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피조물이 원죄 이후에 남용의 ‘계기’가 되었다. 원죄로 말미암아 사물이 서로 대립하고, 감각이 이성을 거스르고, 이성이 하느님을 거스르며, 시간이 영원을 거스르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피조물을 가장 올바르게 ‘사용’ 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은총’을 얻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본받아야 한다.

✽✽✽

[DFin 23.73.81.137-143]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성과 신앙, 은총을 통하여 피조물의 노예가 아니라 ‘초월적superiori 존재’20가 되어야 한다.

명예·건강·재능·삶·직업 등, 그 자체로 ‘초연indifferenti’해야 할 것들에 대해 ‘초연indifferenti’ 해야 한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비천하게도 풍족하게도, 배부르게도 배고프게도 넉넉하게도 모자라게도 살 줄 압니다.(scio et humiliari, scio et abundare; et satiar et esurire; et abundare et penuriam pati)21

2.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절제해야 한다. ‘절제abstine’, 곧 위험 요소가 있을 때 극기해야 한다. 우리 편에서는 항상 가난, 멸시, 비천한 자리를 더 좋아하도록 하자. 지성, 의지, 기억, 외적 감각을 다스리자.

3.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취한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가능한 한 잘 활용하고 보존해야 한다. 곧

가) 덕과 성령의 선물.

나) 성화의 수단인 성사, 미사, 양심성찰, 성체조배, 묵상, 기도.

다) 일과표, 신분상의 의무, 공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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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in 23.73.81.137-143] 인간의 참된 자산

1. 천국은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고 모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주시기 위해 창조하셨고, 우리가 잃어버린 천국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열어주셨기에 천국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부, 명예, 쾌락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본성상 ‘수단’의 성격을 지니며, 우리가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빼앗길 때가 올 것인데, 여전히 그것을 추구하는 자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허무로다, 허무.”(Vanitas vanitatum…)22 “찹찹하지 못하다.”(Inquietum…)23 그 대신에 천국은…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Simile est regnum caelorum… inventa una pretiosa… dedit ‘omnia’ et comparavit ‘eam’)24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Simile est thesauro in agro… vendidit ‘omnia’ et ‘emit’ eum)25

2. 천국은 모든 것을 만족시킨다. 지복직관, 사랑, 기쁨이다. 그렇게 지성, 의지, 마음은 만족스러움을 느끼고, 감각기관, 악에서 벗어난 완전무결한 영광스러운 ‘육신’도 부수적으로 즐거움을 누린다. 이는 공로, 곧 하느님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에 비례할 터인데, 이야말로 참으로 ‘우리의’ 것으로 유일하고 영원한 것이다.

24

3. 천국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지상에서 이탈시키고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사용하게 한다. “각자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unusquisque mercedem accipiet secundum…)26이기에 우리를 열정적으로 만들어 준다. ‘열망을 채워주는’(cupio dissolvi)27 곧 천국에 대한 열망을 지니도록 준비시켜 주고, 이러한 열망이 공로, 완덕, 영혼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하며, 으뜸가는 열망이 되게 한다.

[DFin 43.81] 하느님의 목적

1. 최종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이다. 하느님은 본래 당신 안에 있는 완전함을 사랑하시면서 본질적으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신다. 모든 것을 당신을 위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 목적대로 만드셨다.”(universa propter semetipsum operatus est Deus)28 지상에서 인간에 의해, 인간을 통하여 지성과 마음의 온순함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하느님의 영광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인식·찬미·사랑을 통하여, 곧 인간의 행복을 통하여 영원토록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 최상의 목적과 부차적인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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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지상에서 하느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이 완전할수록 이 목적에 도달한다. 하느님께 대한 인식은 무지와 오류에서 벗어나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처럼 생각하기에 이른다. 언제나 하느님과 일치하고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보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영혼의 상태이다. 종교교육, 좋은 독서, 더 나아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지혜, 지식은 이러한 상태를 이루는 데 더 큰 힘으로 작용한다.

하느님께 대한 인식을 완성시키기 위해 죄를 피해야 하며, ‘노예와 같은 종serviliter servilis’29의 두려움을 자녀로서 느끼는 경외심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여러 단계를 향해 올라가야 한다. 곧 죄를 아파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고, 하느님의 영광과 완전함을 기뻐하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살아가는 단계까지 올라가야 한다.

3. 무지, 인간적 지식, 대죄와 소죄, 자애심에 대한 미움에서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에 이르도록 매일 조금씩 올라가야 한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 가야 한다. “무엇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습니까?”(quis vos separabit a charitate Christi?)30아무것도 없다! 마리아는 하느님에게서 은총을 얻어 주시어 우리의 자애심을 없애고, 그 자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주는 계단이 되어주신다.

[DFin 43] 행 복

1. 마음과 영혼은 인간을 온전하게 만족시켜주는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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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것은 부와 명예, 쾌락, 정신적, 지적 부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31|사실 그런 것들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것이다.

3. 일시적인 재화를 무질서하게 좇는 이는 어리석은 자다. 그런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만족하지 못하고 죽을 때도 비탄에 빠져 영원을 두려워할 것이다.

일시적인 재화를 오직 천국을 위한 수단으로 원해야 하나 그럴때에도 우리에게 파멸의 올가미를 씌울 수 있는 재화를 두려워하며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DFin 20.82.123.137-143] 진리, 기초, 질서, 정의, 곧 겸손의 단계

1.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행복에 참여시키고, 우리의 찬미를 받고자 하시는 당신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셨을까? 무無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내신 창조를 통해서다. ‘우리는 무無,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서 받았다.

‘우리는 죄인이다.’ 그렇다. 하느님 계획의 파괴, 인간의 시험과 타락, 원죄 외에 본죄가 있기에 우리는 무無보다 못하다.

‘우리는 극도로 빈곤하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항상 빛과 성령의 은 총 이 필 요 하 다.

27

하느님의 은총과 빛 안에서만 공로, 힘, 교회, 사제직, 수도자 신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헛된 자아만족과 헛된 야심을 모두 버려야 한다.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을 드릴 뿐이다.”(soli Deo honor et gloria)[1] 올바르게 믿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죄를 기워 갚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낮추어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또한 성령에게서 은총과 빛과 자비를 얻기 위하여 ‘지속적인’ 간구와 기도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DFin 31.47.79.217]

3. 따라서 겸손의 세 단계를 생각하게 된다. 가) 첫째 단계는 자연 질서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서 받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성부의 신학) 나) 둘째 단계는 우리가 죄인일 뿐 아니라 우리의 그 어떤 보속도 가장 작은 죄를 기워 갚기에도 불충분하므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 필요했다.(성자의 신학) 다) 셋째 단계는 새로운 삶, 사제, 수도자, 그리스도인의 삶을 창출해야 하기에 계속 성령이 필요하다.(성령의 신학)

예 견

“주님, 제 끝을 알려주소서.”

(Notum fac mihi, Domine, finem meum)33

1. 내가 구원될 것인지 알 수 있을까?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알수 없지만, 상대적으로는 알 수 있다.

28

아직 죄인이 회개할 수 있고 의인이 타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착한 강도와 유다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한 사람은 절망하지 않았고, 한 사람은 기대를 하지않았다.”(Unus ne desperas, unus ne presumas)34 공로를 쌓지 않았다면 구원받을 길이 없을 것이다. 행한 선이나 악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선을 행한 사람에게 충실하시고, 죄인에게 자비로우시다.

2.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가? 우리 자신을 과신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성인이었다 해도 구원을 잃고 멸망한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기도는 어떤 큰 죄인도 구원한다.

3. 진정한 적은 자신을 믿는 교만이요, 참된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vita et resurrectio)35 이에 반해 “오만의 시작은 죄악이다.”(initium omnis peccati est superbia)36 그러기에 교만과 믿음에 관해서는 긴 성찰이 필요하다.

시 험

1. 삶은 하나의 ‘시험’이다. 이는 기준이 되는 기본개념이다. 초자 연 상 태 인 천 국 은 하느님의 자비인 동시에 우리를 위한 상급 (또는 갚음)이다. 천사에게도 사람에게도 그러하다. “나는 생명과 죽음을 너희 앞에 내놓았다.” “생명을 택하라.”(elige vitam)37

29

2. ‘지극히 짧은’ 시험. 영원에 비하면 삶은 찰라에 지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겪는 가벼운 환난과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momentaneum et laeve æternum gloriae pondus…)38 유다와 다른 사도들, 카인과 아벨처럼.

3. ‘유일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시험. 사람은 오직 한 번 살고 한번 죽을 뿐이다.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은 “그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몇 안 되는”(pauci intrant per eam viam) 것처럼 적고,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길이 넓은”(multi intrant per viam, quae ducit ad perditionem)39 것처럼 많다. 생명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져야 한다. 젊은 시절의 공상이나 속기 쉬운 세상, 감각적으로 호소하는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이성과 신앙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생명의 화관을 약속받은 시련을 견뎌낸 이들은 행복합니다.”(beatus vir qui cum probatus fuerit accipiet coronam vitæ)40

[DFin 81] 죽음

“오, 죽음이여. 너의 충고는 유익하다.”

(O mors, bonum est consilium tuum)41

1. 죽음은 시험과 충실의 종착점이다. “잘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euge serve bone et fidelis)42 “시련을 견뎌내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행복합니다.”(Beatus vir qui suffert tentationem, quoniam cum probatus fuerit…)43 좋은 밀… 가라지…44

30

2. 죽음은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마치 밤도둑처럼.”(sicut fur in nocte)45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estote parati)46 죽음의 분명한 의미는 주님을 위한 사랑을 살고, 천국 본향,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대한 직관, 상급을 열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3. 죽음은 인생의 논리적 귀결이다. 결론은 전제에 달려 있으나, 전제는 결론을 자유에 맡기지 않는다. 잘 산 사람은 잘 죽을 것이고, 뿌린 사람은 거둘 것이다. 하느님은 성실하시다! 그러므로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한다! 행하지 않은 선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Tempus non erit amplius)47

세상에는 하느님에 대한 명제가 있다. “나는 선하다.”(Ego bonus)48 여기에 죄인을 맞아들이기 위해 늘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있다. 우리의 공로 없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셨듯이 매순간, 또 마지막 순간에도 회개하는 우리를 맞아주신다.

두 가지 죽음

1. 죄인의 죽음과 의인의 죽음. “당신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의 눈에는 소중하네.”(Pretiosa in conspectu Domini mors Sanctorum ejus)49 “악인은 불행으로 죽는다.”(Mors peccatorum pessima)50

31

2. 이것은 각자에 대한 하느님 뜻에 “적어도 본질적으로”(substantialiter, saltem)51 상응했느냐에 달려 있고, |자연적 선물과 특별한 은총을 성실하게 사용했는가에 달렸다. 또한 하느님 뜻과 근본적으로 반역 상태에 있는가에 달려 있고, 은총을 무질서하게 낭비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사용했는가에 달려 있다.

3. 긴 성찰을 해야 한다. 곧 세 가지 신분 가운데 하나인 수도성소 전반에 대해 검토하고,52 세 가지 신분 하나하나가 지닌 특수 성소와 내적 삶에 관련한 특별한 선물과 은총에 관하여 성찰하며, 갖가지 덕을 얼마나 성실히 실천하는가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

시간

1. 영원이라는 불변의 상태와는 반대로 시간은 연속적인 시험 기간이다. 시간은 자연적, 초자연적 모든 은총을 포괄하는 하나의 요 약 이 며 , 오 직 이 지상에만 존재하는 참된 보물이다.

2. 장수와 단명은 인간 편에서 이를 선용하느냐 또는 남용하느냐에 따라 은총이 될 수도 있고 위험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은 우리를 들어 높이든가 단죄하든가 할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흘러간 시간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32

시간은 영원에 비해 너무 짧아|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시간은 영원을 결정하고 지배한다.

3. 악한 일, 무익한 일, 공로가 되지 않는 일, 또는 걱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질서 있게 올바른 지향으로 선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심판

시험을 치른 후에야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다.

1. 심판은 살아 계신 하느님 손 안에서 행해진다.53 악을 행한 이에게는 무시무시한 일이고, 의로운 이에게는 큰 위로의 때이다. 사는 동안 우리에게는 행동할 자유가 있으므로 물리적인 악을 행할 수도 있다. 우리는 겸손하게 순명하든가 아니면 교만하게 반항하든가 한 다음에 하느님 수중으로 다시 돌아간다.

2. 삶에 대한 ‘성찰.’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Ut reddet unusquisque prout gessit sive bonum sive malum)54 책에는 했어야 한다고 말하고, 양심은 이미 해버렸다고 한다. 하느님을 지성, 마음, 행동으로 섬겼는지 성찰해야 한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펼쳐졌다.”(Iudicium sedit et libri aperti sunt)55다음과 같이 하는 사람은 복을 누릴 것이다. 가) 성찰을 부지런히 하는 사람. 나) 삶에 성실하고 외면보다는 내면에 마음을 쓰는 사람. 이와 반대로 하는 사람은 곤경에 처할 것이다.

33

3. 심판은 우리의 영원을 돌이킬 수 없도록 올바르고 정확하게 ‘결정’한다. 즉각적으로 선고하고 집행하는 셈이다. ‘착한 종Serve bone’56 ‘악한 종serve nequam’57 ‘영원한 불ignem æternum’58 ‘영원한 생명vitam æternam’59 가라지와 좋은 밀,60 “좋은 것들은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elegerunt bonos, malos autem foras miserunt)61

탈렌트를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내려지는 선고.62 영원의 선택은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첫 번째, 두번 째 , 세 번 째 위 기 중에 선택이 이루어진다.63

고해성사64

1. 고해성사는 첫 회개 행위로서 성사로 승화된다. 이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과거에 대한 치유와 죄의 용서, 그리고 미래를 위한 회개의 주요 수단이며 약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다.

2.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사명이다. “잃은 이들을 구원하러 왔다.”(veni salvum facere quod perierat)65 고해성사는 이러한 보편적 직무를 우리 개개인을 위하여 실행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고, 예수님은 화해자시다. 고해성사는 구원의 두 번째 식탁이다. 모든 공로를 되찾아주며, 숙고할 힘을 다시 주고, 지옥을 닫고 천국을 열어주며, 연옥벌을 거의 혹은 전부 없애준다.

34

3. 두 가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곧 과거에 대한 통회와 앞으로 변화되기 위한 기도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조건은 양심성찰, 죄의 고백, 결심과 보속이다.

[DFin 79.123]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 손에서 떠난 인간은 하느님께 영원히 영광을 드리기 위해 삶이라는 시험의 여행을 해야 한다. 성부는 당신 아드님을 스승으로 보내시어 인간이 가야 할 길과 방향을 알려주고 그 길로 가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지막 날 지성, 의지, 삶이 성자와 일치했는지, 그 일치에 사랑이 있었는지에 대해 심판받을 것이다. 사랑한 사람은 영원에 대한 보상으로 그 사랑을 지속할 것이나,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타락한 인간과 가라지 때문에 불완전한 하느님의 왕국이고, 영원은 인간 편에서 볼 때 완전한 하느님의 왕국이요,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Faciamus hominem ad imaginem et similitudinem nostram)66

35

그리하여 인간의 훼손된 모습은 하느님의 아드님 안에서 회복되며, 성령과 풍성한 은총을 통하여 최초의 아름다움을 넘어설 것이다.

[DFin 81.149.150.216] 결 론

첫째 단계 곧

하늘에 계신 성부의 신학에 대한 묵상 결론

가 ) 우리는 하늘에서 왔다가 하늘로 돌아간다. 유일하고 확실한 길로 나아가자. 만일 길을 잃었다면 고해성사를 보고,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면 걸음을 재촉하자.

나) 연 피정에서 1년 계획을 세우고, 월 피정에서 하나씩 전개시켜 나가며, 매주 고해성사를 통해 바로잡아 빛과 힘을 얻으며, 매일 성찰로 자신을 다스려 간다.

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강생하셔야 한다. 우리 편에서는 ‘하느님과 함께’ 머물 필요가 있다. 곧 우리의 노력이 더욱 효과적이기 위하여 연중·월중·매주·매일의 양심 성찰을 하고, 매일 묵상과 영적 지도, 고해성사가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Donec formetur Christus in vobis)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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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 예수님, 제가 저 자신을 알고 당신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 다른 것은 그 무엇도 원하지 않게 하소서.”(DFst 7 참조)

2 요한 17,3. 성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Hæc est autem vita æterna: ut cognoscant te solum Deum verum et quem misisti Iesum Christum)

3 탈출 3,14. 첨부 n. 1, 이 책 352쪽에 나오는 DFms 참조.

4 ‘대영광송’에 나오는 문장.

5 성 토마스 사도의 말씀을 암시하는 문장.(요한 20,28)

6 애덕송 참조.

7 이사 6,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Et clamabant alter ad alterum et dicebant sanctus sanctus sanctus Dominus exercituum; plena est omnis terra gloria eius)

8 시편 150,1: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성소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웅대한 창공에서.”(Laudate Dominum in sanctis eius, laudate eum in firmamento virtutis eius)

9 시편 103[102],20: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의 천사들아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힘센 용사들아.”(Benedicite Domino angeli eius, potentes virtute, facientes verbum illius ad audiendam vocem sermonum eius)

10 B. Raimondo da Capua의 「성녀 시에나의 가타리나의 생애S. Caterina da Siena 」 제1권 10장에서 주님께서 성녀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적고 있다. “딸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너는 존재하지 않는 자다.’ 그 대신에 나는 ‘존재하는 자다’.”

11 욥 10,9: “당신께서 저를 진흙처럼 빚어 만드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이제 저를 먼지로 되돌리려 하십니다.”(Memento quaeso quod sicut lutum feceris me et in pulverum reduces me)

12   첨부 n.2, 이 책 353쪽에 나오는 DFms 참조.

13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온 문장(Denzinger-Schönmetzer, Enchiridion Symbolorum, ed. XXXIV, 1967, n. 3003 참조)의 약간 변형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Universa vero, quæ condidit, Deus providentia sua tuetur atque gubernat, attingens a fine usque ad finem fortier et disponens omnia suaviter.”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팔을 펼치시어 만물을 선의로 정비하시며’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당신 섭리로 돌보시고 다스리신다.” 작은 따옴표 안의 문장은 지혜 8,1 에서 따온 내용이다.

14 잠언 8,23.

15 P. Geremia Dresselio, S.I., La conformità alla volonta di Dio(Heliotropium), Alba, Pia Societa San Paolo, in 32°, 432 p. 라틴어 ‘heliotropium’은 ‘해바라기’라는 뜻이다. 독일 수덕학자 드레쎌리오는 1627년 그의 저서에서 성성을 위해 가장 널리 알려진 길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항상 영원한 태양(하느님)에 눈길을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16 시편 143[142],10

17 “순간(찰라)에 영원이 달려 있다.” 성 예로니모는 「서간집Epistolario」에 이와 유사한 문장을 사용했다. “흘러가는 한 순간은 영원의 가치가 있다.”

18 시편 100[99], 3 참조. 알베리오네 신부는 “그분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의 힘만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19 “나는 영원을 향해 존재하는 인간이다.” 이 문장이 누구의 글인지 확인할 수 없다. 카파쏘(Cafasso)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첫째는 내가 영원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인은 영원을 위한 초보자, 또는 후보자’(Tirones æternitatis christiani, æternitatis candidati)라고 했다. 테르툴리아노 교부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세기를 위하여 창조된 인간’(Christianus est homo non huius sed futuri saeculi이라고 정의했다.”(G. Cafaqsso,「성직자 대상 영신수련을 위한 묵상Meditazioni per Esercizi Spirituali al Clero 」, a cura di G. Allamano, Tipografia Fratelli Canonica, Torino, 1892, p. 164)

20 피조물의 활용에 관한 개념은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유래된다. “원리와 기초: 사람은 우리 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에게 봉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그 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사람을 위하여, 즉 사람이 조성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그 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 배척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에 대해서, 만일 그것이 우리 자유에 맡겨졌고 금지되지 않았으면, 중용을 지녀야 할 것이니 즉, 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업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모든 다른 것에서도,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최고 목적으로 더욱 더 인도하는 사물만을 원하고 선택해야 한다.”

21 성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Scio et humiliari, scio et abundare ubique et in omnibus institutus sum: et satiari, et esurire, et abundare, et penuriam pati: 필리 4,12)

22 코헬 1,2.

23 완전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Quia 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S. Agostino, 「고백록」, I, 1)

24 마태 13,45 이하.

25 마태 13,44.

26 1 코린 3,8. 성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Unusquisque autem propriam mercedem accipiet secundum suum laborem.”

27 필리 1,23 참조. 성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Desiderium habens dissolvi et esse cum Christo)

28 잠언 16,4.

29 말그대로 노예.

30 로마 8,35 참조. 정확한 성경본문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31 오늘날에는 “ista”를 ‘이다’, ‘이루어지다.’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32 1티모 1,17: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33 시편 39[38],5.

34 “한 사람은 절망하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Unus ne desperas, alter ne presumas)

35 요한 11,25 참조: “Ego sum resurrectio et vita.”

36 집회 10,13.

37 신명 30,19. 성경 전문에는 두 가지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38 2 코린 4,17 참조. 성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Id enim quod in praesenti est momentaneum et laeve tribulationis nostrae, supra modum in sublimitate, æternum gloriæ pondus operatur in nobis: 새 대중 라틴어성경 <Nuova Vulgata>에서 라틴어 본문은 조금 다르다.

39 마태 7,13-14. 라틴어로 된 두 문장은 글자 그대로 인용되지 않았는데 의미는 다음과 같다. “생명으로 이끄는 길을 찾는 이들은 적고, 멸망으로 이끄는 길을 찾는 이들은 많다.” 성경 전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40 야고 1,12. 성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Beatus vir qui suffert tentationem, quoniam cum probatus fuerit, accipiet coronam vitæ)

41 집회 41,3의 말씀을 암시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약간 다르고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아 죽음아, 너의 판결이 궁핍한 인간에게 얼마나 좋은가!”(O mors, bonum est judicium tuum homini indigenti: 우리말 성경은 집회 41,2로 성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아 죽음아, 너의 판결이 궁핍하고 기력이 쇠잔하며 나이를 많이 먹고 만사에 걱정이 많은 인간에게, 반항적이고 참을성을 잃은 자에게 얼마나 좋은가!”-역주)

42 마태 25,23.

43 야고 1,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 인용 부분에서는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accipiet coronam vitæ)라는 문장의 마지막 부분이 빠져 있다.

44 마태 13,24-30.36-43 참조.

45 1테살 5,2.

46 마태 24,44.

47 묵시 10,6: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의미는 문장에서 의미하는 뜻 그대로이나 번역에 따라서 의미가 조금 다를 수 있다. 곧 “더는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CEI: 이탈리아 주교회의 성경) “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다.”(이탈리아 성 바오로 출판사의 최신 번역본)

48 마태 20,15 참조: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An oculus tuus nequam est quia ego bonus sem?)

49 시편 116[115],15.

50 시편 34[33],22: “악인은 불행으로 죽는다.” 이 문장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뜻 외에 다른 뜻도 있다. “악행이 불경한 자를 죽인다.”(CEI: 이탈리아 주교회의 성경) “불경한 자는 자신의 악행으로 죽는다.”(이탈리아 성 바오로 출판사의 최신 번역본) “악행이 죄인을 멸망시킨다.”(Ineterficiet peccatorem malitia: 새 대중 라틴어성경<Nuova Vulgata>, 본문의 라틴어를 직역하면“ 죄인들의 죽음은 최악이다/가장 불행하다.”-역주)

51 “적어도 본질적으로.”

 52 DFst 83-85 참조.

53 히브 10,31 참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54 2코린 5,10. 정확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Ut referat unusquisque propria corporis, prout gessit sive bonum sive malum.”

55 다니 7,10.

56 마태 25,23 참조.

57 마태 18,32.

58 마태 18,8과 25,41 참조.

59 마태 25,46 참조.

60 마태 13,4-30.36-43 참조.

61 마태 13,48. 완전한 성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Elegerunt bonos in vasa, malos autem foras miserunt)

62 마태 25,14-30 참조.

63 나중에 DFst 44에서도 반복되는 이러한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베리오네 신부가 1936년에 행한 강론이 도움이 된다. “훌륭한 수녀입니까? 그것을 알려면 종신서원 후 10년을 기다리십시오. 그 기간 중에 세 번의 위기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위기는 15세에 주어집니다. (여러분들은 수녀회에 입회하면서 이 위기는 극복했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수련기 동안에 주어집니다. (여러분 중 대다수가 이 위기 또한 넘겼습니다.) 세 번째 위기는 종신서원한 지 4년 또는 5년 후에 다가옵니다.”(「영신수련, 마에스트라들 교육Santi Spirituali Esercizi, Istruzioni alle Maestre 」, 1936년 10월, Pia Società Figlie di San Paolo, Roma-Alba, p. 6)

64 필사본(ms) 공책에는 이 제목 이전에 11개의 장(章)이 있었으나 출판본에는 없다. 이 책 뒷부분의 ‘부록’ 339-350쪽에서 볼 수 있다.

65 루카 19,10. 완전한 성경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Venit enim Filius hominis quaerere et salvum facere quod perierat)

66 창세 1,26.

67 갈라 4,19.